
언제 읽을지 모르는 책을 사러 청계천 헌책방을 들락거렸고, 따뜻한 봄볕을 등지고 독서삼매경에 빠져들기도 했다. 가끔 아이가 “아빠는 왜 눈이 나빠졌느냐”고 물어올 때면 햇볕 아래서 책을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는 허풍을 떨긴 하지만. 나는 지금도 밥을 먹으며 책을 보는 큰아이를 야단치지 못한다. 책 읽는 버릇마저 나를 닮은 아이를 볼 때마다 어머니가 나의 버릇없는 행동에 얼마나 속을 끓이셨을까 하는 생각이 나서다.
책은 읽는 대상 그 이상의 것
대학시절을 거쳐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시기가 되면서 악착같이 책을 사모으고 읽는 작업을 계속했다. 몇 년 전 정보통신 열풍이 강하게 몰아치던 당시 종이책의 종말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부정했다. ‘책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다. 장서로서의 가치도 있고, 한 권 한 권 쌓여가는 책을 보는 즐거움도 크다’는 논리를 가졌다.
글읽기에 관한 한 나는 지독한 편식을 하는 편이다. 몇 년 동안 한 분야의 책만 읽는 버릇이다. 대학시절엔 그 대상이 사회과학서적이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것을 원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사회과학의 치밀함이 좋았다. 어찌보면 필요 이상으로 논리적이고자 하는 지금의 글 쓰는 버릇도 그때 생겨났는지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구애의 대상이 역사로 바뀌었다. 역사에 대한 나의 탐닉은 오래된 것이었다. 대학에 진학할 때 역사학을 전공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가졌던 적이 있다. 겉으로는 ‘민족사관 정립’이란 거창한 이유를 내세웠지만, 내심 유학을 가지 않아도 교수가 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학문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역사를 공부해서 먹고 살 수 있겠느냐는 주위의 은근한 협박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원하는 대학의 사학과에 들어갈 성적이 안 된다는 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역사책이라면 지역을 불문하고 읽는 버릇으로 표출됐다. 일본과 인도, 베트남 역사가 그 대상이었고, 중남미 역사, 유목민,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사 역시 무척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 중 가장 매혹적인 대상이 중국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어릴 때 ‘삼국지’ ‘초한지’ 등의 호쾌한 전쟁 장면을 접한 경험 때문이다.
내게 중국사의 체계를 잡아준 책은 존 K. 페어뱅크 교수의 ‘동양문화사’였다.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조금의 흥밋거리도 제시하지 않은 채, 오직 개설서의 역할만을 묵묵히 수행한 책이었다.
중국인들은 거대한 땅과 많은 인구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체제를 필요로 했고, 그 필요는 한 인간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형태로 열매를 맺었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도 왕국은 존재했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왕국을 만들고, 그 왕국을 핏줄에게 넘겨주려는 이기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의 그 누구도 중국 황제와 같은 권위를 갖지는 못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중국왕조는 퍽 특이한 존재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중국만큼 적은 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을 지배해온 경우가 없었다. 황제의 의례적(儀禮的)인 지도력, 엘리트들의 도덕적 원리에 대한 자발적 수양, 백성을 자동적으로 조정하는 현명한 관료주의…. 이 모든 것들이 자급자족적이고 자기영속적인 문명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권력의 중심에 선 자나 권력과 상관없이 살아온 자 모두 그들 나름의 생활을 이어왔다. 그리고 후대 학자들은 이런 삶의 모습을 문화라고 명명했다. 문화의 정점은 역시 황제와 그가 살고 있는 궁전이다. 황제는 화려한 생활과 어마어마한 권위를 유지하려 3중으로 둘러싸인 땅에 궁궐을 지었다. 유교라는 정치 이데올로기도 채택했고, 그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체제도 만들어냈다. 상류문화가 꽃피었던 자금성(紫禁城)은 몰락의 현장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