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재에서 내려다본 지리산 전경.
중·고등학교 시절 지리 수업을 열심히 들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체계에 어리둥절할 것이다. 태백산맥과 낭림산맥이 우리 국토의 등줄기라고 외웠던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백두대간이 아닌 소백산맥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준봉일 뿐이기 때문이다(일제시대 일본의 지리학자와 지질학자들이 한국의 산맥을 거론하면서 한 목소리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강조한 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아무튼 산맥을 중심으로 한반도의 지형을 파악하는 이론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학계의 주류로 등장했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의 논리로서 ‘산경표’의 백두대간 체계는 태생적으로 민족적 자존심을 내포하게 됐다. 1980년대 민족사학의 르네상스와 더불어 백두대간이 새롭게 주목받은 것이나, 역사의 자주성을 중시하는 재야 사학자들이 백두대간의 복원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백두대간의 세부 구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짧게는 30여 개 구간에서부터 길게는 50여 개 구간으로 나뉘기도 한다. 필자는 이 가운데 강승기 선생이 구분한 44구간을 중심으로 종주기를 쓰고자 한다. 강승기 선생은 1995년부터 2001년 사이에 남한 땅에 있는 대간과 정간 그리고 정맥을 모두 종주한 산악인으로, 특히 산경표를 신봉한다. 필자가 이번 호에 소개할 구간은 1~2구간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지리산 종주 능선이다.
개천절 오후, 지리산으로 떠나다
필자는 2003년 10월3일 개천절,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다. 왜 하필 개천절인가? 특별한 이유는 없다. 필자가 현재 몸담고 있는 국가기관의 국정감사가 전날(2일) 끝나 마음이 홀가분해졌고, 조금 더 늦추면 가을철 국립공원 입산통제기간에 발목이 잡힐 것 같아 부득이 휴일 오후에 짐을 꾸린 것이다.
확실히 요즘은 지리산으로 가는 길이 편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지리산을 가려는 사람들이 전라선 막차에 몸을 실었지만, 요즘은 백무동이나 중산리로 직접 들어가는 버스를 타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대전에서 진주까지 새롭게 뚫린 고속도로는 지리산을 한결 가깝게 끌어들였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무르면 지혜를 얻어 달라지는 산’이라는 뜻을 가진 지리산(智異山)은 예로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백두산이 반도를 타고 이곳까지 이어졌다는 두류산(頭流山), 한라산 금강산과 함께 신선이 사는 세 개의 산이라는 의미의 삼신산(三神山), 큰 스님의 처소라는 뜻을 가진 방장산(方丈山) 등이 그것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민족은 지리산에 산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왔다.
지리산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드넓게 펼쳐진 산이다. 넓이로는 1억3000만평이나 되고 둘레로는 무려 800여 리에 달한다. 지리산의 정상인 천왕봉은 한라산을 제외하면 남한에서 가장 높을 뿐 아니라, 지리산 자락에는 1000m가 넘는 봉우리만도 20여 개에 이른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묘한 매력으로 마니아들을 유혹하는 산, 남한 최대의 산이면서도 늘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게 품어주는 산. 한국인은 그런 이유로 이 지리산을 그토록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오후 7시30분 중산리에 도착했다. 중산리는 지리산을 가장 빨리 오를 수 있는 곳이자 백두대간의 출발점이다. 이곳에서 20여 년째 지리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는 주성근 계장을 만났다. 주계장과는 벌써 수 년째 지리산을 드나들며 인연을 맺어온 사이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겠지만 뭔가에 20년 이상 몰두하면 도가 트이고 마음으로 사랑하기 마련인가보다. 주계장은 소주잔을 비우자마자 국립공원에 대한 걱정부터 털어놓는다.
“국립공원을 관리하는 데 있어 선진국과 한국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외국은 있는 그대로 놔두는데, 한국은 길을 막고 파헤치고 난리 법석을 떨거든요. 홍수가 나서 둑이 무너진다고 시멘트로 다 발라버리면 그건 이미 자연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주변의 땅을 사들여서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그래야 미생물이 자라고 다람쥐나 노루가 내려오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