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리봉에서 바라본 일출
어떤 사람은 백두대간을 능선의 연속으로만 파악한다. 그래서 백두대간의 주능선 코스만을 보존하는 것으로 우리 국토의 건강성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반도의 지리체계를 자세히 뜯어보면 백두대간이 일련의 산줄기를 넘어 한반도 전체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실제로 백두대간은 지역을 구분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창출하며 역사의 물줄기를 수없이 바꿔왔다. 그런 측면에서 백두대간을 보호한다는 것은 곧 한국인이 자연의 면전에서 겸손함을 되찾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성삼재에 서다
11월이다. 전라선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은 필자는 취기를 빌려 잠을 청하려 식당칸으로 갔다. 지리산 늦가을로 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1주일간 지리산에 묻히기 위해 휴가를 냈다는 한 중년 여성이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배낭에 기댄 채 열심히 지도에 줄을 긋고 있었다. 아마도 1주일 동안 돌아다닐 코스를 정하는 모양이다. 그에게 “왜 지리산인가?” 물었더니, 미술사학자 유홍준 선생이 지리산 답사를 마치고 내린 결론이 날아왔다. “산은 지리산이다.” 모르긴 해도 이 정도의 내공이라면 죽을 때까지 ‘지리산 중독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팔자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자료에 따르면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찾는 산은 설악산이었다. 지리산이 설악산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선 것은 1994년이고, 이후로는 한번도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설악산이 수학여행 등 단체관광객을 많이 유치한 반면, 지리산은 거대한 마니아 집단을 갖고 있다. 백두산과 금강산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서지 않는 한, 지리산은 앞으로도 국내 제1의 국립공원 자리를 지켜나갈 듯하다.
구례터미널에서 성삼재로 올라가는 길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굴곡이 심하다. 혹자는 이 길을 구 영동고속도로 대관령의 아흔아홉 굽이와 비교하기도 하는데,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맛은 성삼재 코스가 한 수 위다.
특히 여름철 장마 끝에 이 길에서 맛볼 수 있는 구름바다는 지리산 10경의 하나로 꼽힌다. 지리산 종주를 제대로 하고 싶다면 화엄사에서부터 등반을 시작해야 마땅하지만, 한번쯤은 차량으로 성삼재까지 드라이브도 해볼 만하다. 감히 말하지만 이 길은 한반도 남쪽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아침 6시20분. 다시 성삼재에 섰다. 오른쪽 길을 따라 노고단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을 뒤로하고, 필자는 인적은 물론 불빛조차 없는 왼쪽 철창문으로 들어섰다. 만복대로 가는 입구다. 멀리 반야봉 쪽에서 해가 떠오르면서 산 아래쪽에 치마폭처럼 둘러쳐 있던 안개가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성삼재에서 40여분쯤 오솔길을 걸어가자 헬기장 가장자리에서 야영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중년의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텐트 위의 물기를 제거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묘봉치다. 지리산 서부능선을 타는 사람들이 쉬어 가는 장소다. 묘봉치에서 곧장 내려가면 위안리가 나오고 그 길을 계속 걸으면 지리산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지리산 온천랜드가 있다. 지리산온천은 한겨울이 제맛인데, 그 중에서도 눈이 내리는 날 노천탕에서 즐기는 좌욕이 으뜸이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지만 마지막이 늘 힘들다. 필자는 수없이 산을 오르내리면서 ‘아무리 낮은 봉우리도 쉽게 머리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을 무수히 되새겼다. 만복대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한걸음에 내달릴 거리였지만, 세 번이나 숨을 고르고 밧줄에 몸을 기댄 채 힘겹게 만복대에 섰다.
여전히 후덕한 산골인심
말 그대로 만복대다. 필자에게도 복이 찾아들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중년의 아저씨들이 더덕술을 따라주며 배를 안주로 내놓았다. 필자가 백두대간을 종주할 생각이라고 말하자, 백전노장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겁부터 먹였다. 설악산에서 얼어죽은 모 산악회 총무의 얘기에서부터 혼자서 대간을 종주하다 다리를 못 쓰게 됐다는 친구의 사연까지 흘러나왔다. 서둘러 짐을 챙기는 필자에게 그분이 던진 충고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