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행선, 매혹과 공포의 역사’ 기욤 드 시옹 지음/박정현 옮김/ 마티/352쪽/1만8000원
그러나 망각이 없이는 결코 과거를 다시 볼 수 없다. 우연히 빛 바랜 기념사진을 발견했을 때나, 서가 한 귀퉁이에서 먼지 쌓인 오래 전 일기장을 발견했을 때를 상상해보라. 망각이야말로 새로운 기억의 전제조건이며 망각을 통해서만이 과거와 현재의 관계가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행선은 잊혀버린 근대성의 역사의 단면을 새롭게 기억하고 재조명하기에 흥미로운 소재다.
부분을 통한 전체 읽기
이 번역서는 원본의 부제에 표현된 바와 같이 ‘1900년에서 1939년 사이 독일 비행선의 역사’를 다룬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독일사 연구라는 전문분야를 뛰어넘어, 우리의 근대 및 근대성의 정체를 탐색하는 데 하나의 문화사적인 비교 틀을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특히 ‘우리는 근대를 어떻게 경험했는가’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저자 기욤 드 시옹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과학·기술사 연구가다. 이 분야의 다른 연구서들과 마찬가지로 시옹의 이 책은 해박한 자연과학과 공학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비행선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사멸 과정을 꼼꼼히 추적한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는 비행선이라는 기계의 역사를 전문적으로 서술하려는 것이 아니라, 비행선을 통해 독일 사회, 나아가 서구사회 전반의 근·현대사를 읽어내려는 데 있다. 이른바 ‘부분을 통해 전체 읽기’의 방식을 취한 것이다.
부연하자면 저자는 비행선이라는 근대적 항공운송 수단을 정치사, 사회사 그리고 문화사적 맥락에서 다각도로 조명한다. 그는 여러 비행선 제작프로젝트와 경제계 및 사회 압력단체, 정치계 및 정부 관료와 군부 사이의 상호관계, 비행선과 정치이데올로기와 대중문화 사이의 상호 영향관계를 명료하게 풀어나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독일제국, 바이마르공화국 그리고 히틀러의 제3제국이라는 독일사의 각 시대간 연속성과 새로움이 드러난다.
‘부분을 통해 전체 읽기’라는 방법론은 ‘보편에서 특수로’라는 기존의 근대적 역사 연구방식이 아닌 ‘특수에서 보편으로’라는 새로운 문화사 연구방식이다. 이른바 미시사(微視史), 일상생활사 및 포스트모던적 역사와 같은 새로운 문화사 연구가 끊임없이 그 연구 소재와 대상을 확대시키면서 독자에게 역사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시옹의 책 또한 역사의 대중화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기대된다.
나치 선전의 유용한 수단
‘체펠린’은 원래 독일에서 비행선을 처음 만들고 비행선 산업을 발전시킨 체펠린 백작의 이름이었으나, 곧 비행선의 대명사가 됐다. 나아가 체펠린이 비행선의 상징으로 일반화됨과 동시에 이른바 ‘체펠린주의’라는 독일 근대주의 문화의 표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산업혁명의 시대에 서구인들은 대자연이 지닌 숭고함에 필적하는 ‘기계의 숭고함’에 전율하거나 열광하였다. 운송수단만 보더라도 19세기 전반기의 철도, 중반기의 증기선 그리고 후반기의 자동차는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자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감동의 눈물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 절정이 하늘을 통제하여 장거리 여행의 속도를 단축시킨 거대한 비행선-독일의 마지막 비행선 힌덴부르크호(號)는 길이가 무려 245m에 달했다!-의 출현이었다. 거대한 비행선이야말로 인간 이성과 진보의 가장 근대적인 상징이 됐으며, 특히 신생 국민국가인 독일제국에서 비행선(체펠린)은 근대 기술문명의 첨단에 선 독일민족의 우수함을 웅변하는 상징이었다. ‘체펠린주의’라는 근대주의적 표어는 외견상 자연과 기술의 조화를 강조했지만, 실상은 자연의 숭고함을 대표하는 하늘마저 정복한 독일적 이성과 문화의 우월감을 표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