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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선, 매혹과 공포의 역사’

비행선을 통해 본 서양의 근대 경험

‘비행선, 매혹과 공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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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체펠린은 넓게 보아 근대 서구인의 우월의식을, 좁게 보아 신생 독일민족의 자부심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체펠린에 내포된 다양한 정치적 상징의 층위를 깊이 있게 분석한다. 정치적으로 볼 때 체펠린 상징 속에는 서로 다른 여러 정치체제의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독일제국시대에는 무엇보다 신생 독일국민국가의 미래낙관주의를 표현한 민족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총력전을 위한 쇼비니즘이, 바이마르공화국 때는 민주주의와 국제평화의 이념이 체펠린 상징 속에 투영됐다.

국민을 체제 속에 통합하려는 이러한 노력은 나치 독일에 이르러 그 절정을 이룬다. 체펠린은 히틀러가 집권할 당시 이미 독일인의 일상생활에서 전통이 돼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나치 정권은 체펠린을 전통과 새로운 전체주의적 실험의 매개체로 이용했다. 나치에 있어 체펠린은 자신이 전통과 근대성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것을 선전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전체주의적 지배가 공고해졌을 때 나치 정권은 체펠린을 새로운 독일을 위해 사라져야 할 유물로 간주, 힌덴부르크호의 참사를 계기로 과감히 폐기했다. 이로써 체펠린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기술과 근대문명, 그리고 대중

그러나 체펠린이 지닌 상징의 힘과 원천은 저자가 강조하다시피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근대 문명의 핵심인 대중과 대중문화다. 테크닉과 군사적 견지에서, 혹은 경제적 유용성에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체펠린은 이미 강력한 라이벌인 비행기에 밀려났다.

그렇지만 체펠린은 단순한 기술 이상의 것이었다. 체펠린 속에는 무엇보다 대중의 꿈과 염원이 담겨 있었다. ‘하늘을 나는 거대한 호텔’ 체펠린이 대중에게 호소한 전율과 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대중의 민족적 자부심과 애국주의,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욕구, 시선의 자유, 쾌적한 하늘 여행,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탐험과 모험 정신에 이르기까지 대중의 모든 욕망에 체펠린은 부합했다.



대중은 새로운 비행선 프로젝트를 위해 기꺼이 기부금을 내고 열광했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체펠린이 공습할 때 그 거대한 비행체를 구경하려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왔다. 대중은 체펠린에 광적으로 매혹당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체펠린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새로운 생활양식을 담보하는 근대 기술문명의 유토피아로서 대중을 사로잡았다.

최후의 비행선 힌덴부르크호가 사라진 지 수십년이 지난 오늘에도 비행선은 여전히 도달하지 못한 근대적 유토피아에 대한 향수를 낭만적으로 표현한다. 오늘날 대중문화 속에 바다를 위해서 타이태닉호가 있다면, 하늘을 위해서는 체펠린이 있다. 체펠린은 또한 독일어 체펠린을 영어식으로 차용한 영국의 록그룹 레드제플린을 통해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각국에 여러 비행선 동호회가 존재하며, 비행선은 새로이 친환경적 항공운송 수단 및 전략무기, 우주개발의 새로운 수단으로 재평가받고 있음도 언급에서 빼놓을 수 없다.

저자도 강조했듯이 과학기술과 대중문화의 상호관계는 현대 산업세계의 문화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주제다. 이 책은 미국의 우주탐사선 아폴로 및 디스커버리호, 혹은 프랑스-영국의 콩코드호, 혹은 우리나라의 황우석 신드롬과 같은 기술적 근대성의 상징과 대중문화 및 정치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조명하려는 앞으로 연구할 모델로서도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아쉽게도 저자는 기술적 근대성과 근대문명이 갖는 허약하고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는 그다지 진지한 비판을 가하고 있지 않다.

또 하나 부연한다면, 전반적으로 매끄러운 번역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미흡한 점이 눈에 걸린다. 예를 들어 ‘국가주의’는 ‘민족주의’로, ‘국가사회주의’는 ‘민족사회주의’로 바꿔야 할 것 같다. 또한 ‘베젤 숲의 노래(Horst Wessel Lied)’는 명백한 오역임을 지적하고 싶다. 호르스트 베셀은 나치돌격대원으로 바이마르 시대 베를린에서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당한 나치의 영웅이다. 그가 작사한 노래가 바로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이며, 나치 시기 이 노래는 공식행사에서 빈번히 애창되곤 했다.

신동아 2005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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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호 대구대 교수·서양사 nainhobu@daeg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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