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BS 드라마 ‘스타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같은 영화들은 고가의 상품과 브랜드에 대한 소비가 바보 같은 짓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겉과 달리 이러한 종류의 영화는 오히려 잘 몰랐던 브랜드를 광고하고 그 고가의 브랜드야말로 가질 만한 것이라고 충동질한다.
영화가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윤리적 선택은 변명에 가깝다.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처럼 남성 관객이 많은 영화에 유독 고가의 자동차가 자주 등장하는 까닭도 유사하다. 남성 관객을 겨냥해 고가의 자동차, 오토바이가 브랜드의 옷 대신 등장한다. 소비를 자극하는 영화적 소도구가 비단 여성 관객을 노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수많은 브랜드를 통해 호소하는 이러한 작품들은 소비문화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기는 하지만 훨씬 더 교묘하게 소비자를 자극한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라고 불리는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는 광고 문구에 둘러싸여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고가의 브랜드는 더 많아지고 또 그에 대한 욕망도 견고해질 것이다. 바야흐로 생필품이 아닌 취향과 선택에 의한 소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쇼퍼 홀릭’
‘뮤리웰의 웨딩’을 만들었던 P.J 호건 감독이 연출한 ‘쇼퍼 홀릭’은 ‘쇼퍼 홀릭의 고백’이라는 원제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쇼핑에 중독된, 독한 표현으로 쇼핑에 미친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레베카 블룸우드는 원예잡지의 기자다. 그녀는 100원을 벌면 1000원을 쓰는 여자다.
이 사실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그녀가 소비하는 품목이 모두 패션 아이템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직종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같은 ‘패션잡지’라고 믿고 경력사원 모집에 응시한다. 하지만 보기 좋게 낙하산 직원에게 밀리고, 복수심에서 보낸 편지가 잘못 배달된 덕분에 투자잡지사에 취직하게 된다.
영화 ‘쇼퍼 홀릭’은 쇼핑 중독에 빠진 한 여자의 이야기를 발랄하게 보여준다. 발랄한 영화의 문법은 쇼핑 중독자 레베카에게 “이 물건을 사, 꼭 사야 돼”라고 말을 거는 마네킹에게서 읽을 수 있다. 마네킹은 그녀가 지나가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에게 속삭인다. “이 초록색 스카프는 네 거야, 내가 입은 옷을 사 가, 사 가”라고 말이다. 쇼핑 중독자들의 “이 옷을 사 가요, 라고 말을 거는 듯해요”라는 고백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셈이다.
쇼퍼 홀릭 레베카의 삶은 피곤하다 못해 한심하다. 월급으로 감당하지 못한 카드대금 때문에 상습 연체자로 분류돼 카드회사의 집중 관리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녀를 찾는 각종 카드회사의 연체 담당 직원에게 아버지, 어머니부터 친구까지 모두 죽은 것으로 변명을 갖다댄 지도 오래다. 그러던 그녀는 투자잡지에서 엉뚱하게 패션 코드의 사고방식으로 일관하다가 역설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 투자의 의미에서 보자면 패션에 대한 그녀의 집착이 일종의 알레고리이자 메타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유명세를 타지만 그녀를 집요하게 뒤쫓는 카드회사 직원 때문에 그녀는 전국적 망신을 당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쇼퍼 홀릭을 치료하는 모임, 중독자 모임에 나가며 개선책을 찾는다. 그와 함께 자신에게 신뢰를 보여준 직장 상사의 사랑을 되찾고자 노력한다. 예상하다시피 로맨틱 코미디답게 이 영화는 결국 모두 다 잘된 결말을 보여준다. 레베카는 자신의 고가 의류 및 가방, 신발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그 수익으로 빚을 청산한다. 그와 함께 사랑하는 남자의 신뢰도 되찾는다. 쇼핑 중독증도 고치고 사랑도 찾는 결말은 쇼핑 중독을 코믹한 실수 정도로 보여준다.
하지만 과연 현실에서 쇼핑 중독이 이렇게 쉽게 고쳐질까? 영화는 미치도록 카드를 긁고 싶고 또 긁어댄 카드 때문에 고민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달한다. 당신도 그 못된 버릇을 끊고 더 나은 삶으로 갈 수 있다고 말이다. 분명 이러한 작품은 크레디트 카드로 오해된 자신의 능력에 조금의 위안을 전해주기는 한다. 하지만 어딘가 허전한 건 왜일까.
영원히 늙지 않는 쇼퍼, 섹스 홀릭
‘섹스 앤 더 시티’를 소모하고 소비하는 관객은 그녀들이 첫 시즌에 발을 내밀었던 그때나 지금이나 직장생활을 하는 30대 여성들이다. 과연 내 이름이 새겨진 크레디트 카드를 가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20대를 지나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며, 자기 앞으로 된 적립식 펀드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30대 커리어 우먼들, ‘섹스 앤 더 시티’는 그녀들의 관심을 통해 성장해온 드라마다. 6편까지 제작될 수 있었던 드라마의 힘도 실상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섹스 앤 더 시티’는 남성 중심적이며 수구·마초적이던 로맨틱 코미디의 문법을, 그것을 소비하는 여성의 시점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들은 결혼보다는 섹스가 문제이며 직업만큼이나 연애가 중요한 양식임을 설파했다. 결혼이 아닌 연애, 사랑이 아닌 섹스를 주장하는 그녀들은 새로운 인간형으로 자리 잡았다.
유능하고 이기적인 미란다, 사랑스럽지만 유별난 공주 샬롯, 섹스 매니악 사만다, 연애 중독자 캐리 등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 등장하는 4명의 캐릭터는 주부 혹은 예비 신부로 이분화되었던 여성을 다양화해준 셈이다. ‘섹스 앤 더 시티’는 말 그대로 30대 여성의 고민을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입체화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섹스 앤 더 시티’는 내추럴 본 뉴요커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비꼬아보자면, ‘섹스 앤 더 시티’는 한국의 30대 여성이 살고 ‘있는’ 삶이 아니라 살고 ‘싶은’ 욕망을 보여준다. 부모님이 잠든 새벽 시간에 거실에 앉아 늘어진 면 티셔츠를 입고 바라보는 욕망의 드라마가 곧 ‘섹스 앤 더 시티’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