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꽃 소식을 지켜보던 아파트 앞마당의 매화와 산수유가 환한 꽃망울을 터뜨렸을 때 도리어 참을 수 없는 무상(無常)을 느끼는 것은 그래서일까. 그러나 무상하다는 말은 한순간 한순간이 복음(福音)이라는 말과 같다.
봄날은 가지만 순환의 짧은 틈새마다 꽃이 핀다. 야산 산록에서 알싸한 생강냄새가 나는 생강나무와, 향기가 너무 좋아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길마가지꽃이 서둘러 봄소식을 알리더니, 뒤이어 매화와 산수유가 꽃을 피우고 보춘화, 개불알꽃, 머위꽃, 현호색, 산자고의 꽃이 피었다. 산과 들에 노루귀, 얼레지, 바람꽃, 진달래, 벚꽃이 피고 도로변 여기저기 개나리꽃, 목련꽃, 애기사과꽃, 농촌 마을에선 장미과의 유실수들, 모과꽃, 명자꽃, 사과꽃, 앵두꽃, 복숭아꽃, 살구꽃, 배꽃이 축제라도 벌이듯 만개한다. 그렇게 꽃이 피면서 단 한순간도 그 생멸의 흐름을 붙잡을 수 없는, 아쉬운 봄날은 한들거리는 봄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봄에 피는 산과 들의 조그만 꽃들 중에도 약으로 쓰이는 게 여럿 있다. 노루귀, 현호색, 산자고 등이 그것이다. 따져보면 약 아닌 것이 없지만 그중에서 좀 추려보자면 그렇다. 이른 봄, 산록의 잔설이 녹으면 앙증맞고 소담한 꽃이 잎보다 먼저 고개를 내미는 노루귀는 잎의 생김새가 귀여운 노루의 귀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흰색, 분홍색, 청색 등 여러 색으로 꽃이 핀다. 따사로운 봄기운이 느껴지기엔 아직 이른 시기에 산비탈 그늘진 곳이나 계곡 부근에 무리지어 피는 노루귀의 꽃은 흡사 봄을 맞는 여신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전역에 흔하지만 꽃피는 기간이 짧아 아차하면 못 보고 지나간다.
두통, 폐결핵 효용 노루귀

노루귀
한의원의 한약재로 쓰이지는 않으나 민간에서 단방(單方)약으로 써왔다. 6~7월경 전초를 채취해 두통 등에 진통제로 쓰거나 폐결핵, 오줌소태(임질), 설사 등에 쓰기도 하고 상처가 곪아서 잘 낫지 않는 화농성 피부질환에 전초를 달여서 세척제로 쓴다. 미나리아재빗과 식물이 대부분 그렇듯 뿌리에 독성이 있으므로 생식은 금한다.
산과 들판, 밭 주변을 걷다보면 흔히 볼 수 있는 봄꽃 중 하나가 현호색이다. 약간 눅눅하고 습한 곳을 좋아한다. 가녀린 줄기에 보라색 혹은 분홍색의 꽃이 5~10개씩 총상꽃차례로 피는데, 3월 말이나 4월 초쯤이면 밭두렁 옆 시골길이나 천변의 둔덕에서도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꽃 생김새가 종달새 머리 깃을 닮았다 해 희랍어 속명이 종달새를 뜻하는 ‘콜리달리스’다. 보라색의 꽃과 섬세하게 여러 갈래가 진 잎의 생김새가 사랑스러워 몇 무더기 캐다가 집 마당이나 화분에 심고 싶어진다.
온 산천에 흔하게 나는 이 현호색의 우리말 이름이 없다는 게 좀 의아스러운데, 워낙 한약재로 유명한 탓에 한약 명칭이 그대로 굳어져버리지 않았나 싶다. 조심스럽게 주변의 흙을 파보면 여린 꽃줄기 밑에 의외로 큼직한 알뿌리가 묻혀 있다. 잔 것은 콩알만하지만 큰 것은 조그만 감자알만하다. 이 덩이줄기가 한방에선 현호색(玄胡索), 또는 연호색(延胡索)으로 불리며 모르핀을 능가하는 진통제로 쓰인다. 신경통과 관절통, 생리통, 협심통 등에 뛰어난 지통(止痛)효과를 낸다. 혈액의 순환을 돕고 굳은 피를 없애므로 타박으로 붓고 어혈이 심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약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