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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헤고 종이香 맡으며 감각하고 사유하다

숨어 있기 좋은 방 3選

별 헤고 종이香 맡으며 감각하고 사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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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헤고 종이香 맡으며 감각하고 사유하다

햇살이 따사로운 봄이 마침내 찾아왔다.

“집집마다 조그마하나마 뜨락을 가지고 있는 이 신흥 주택가는 지금 한창 장미철이다. 너도 나도 담장에 덩굴장미를 올려, 담장에 꽂힌 그 미운 쇠꼬챙이를 난만하게 핀 장미송이가 감쪽같이 뒤덮고 있다. 낮에 보면 그야말로 꽃동네다. 골목마다 달콤한 향기가 짙게 서려 있고 사방에서 꿀벌이 잉잉대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다. 어느 집이고 ‘오오, 즐거운 나의 집’ 아니면 ‘우리집 낙원’이지 고통이나 불행이 있을 것 같은 집은 한 집도 없다.”

그러나 겉보기에 그럴 뿐이라는 것이 소설가의 인식이다. 드높은 담장, 널찍한 마당, 청신한 정원수…. 그러나 도회의 삶은 폐쇄적인 구조로 점점 좁아지고 그렇게 하여 사람끼리의 대화, 심지어 가족끼리의 관계마저 심리적으로 서서히 단절된 것이 우리가 겪어온 산업화다. 그래도 그때는 옥수수나 감자를 넉넉히 삶아서 이웃끼리 나눠 먹기도 했으나 근래 들어 그런 것을 들고 저녁 9시쯤 아파트 윗집을 방문하면 혹시라도 신고를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저마다 고독하게 자기들의 처소(혹은 아파트의 구석 방)에 유폐되었으되 이 또한 박완서가 오래전 ‘도시의 흉년’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대목의 일직선 끝에 선명히 보인다.

“집이 다만 넓기 위해서 넓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 구석 저 구석에 그득그득 들어찬 손때 묻지 않은 가구들도 빈집 같은 느낌을 한층 더했다. 고가한 것일 뿐, 몰취미한 것들이 한껏 난잡하게 집합하여 있을 뿐, 집합한 것끼리 서로 사귀어 관계를 맺을 맥락이 없었다. 그래서 그것들은 빈집에 인부가 막 부린 가구들처럼 뿔뿔이 있었다. 화려한 카펫은 그 위의 응접세트와 관계가 없고, 응접세트는 그 옆의 사방탁자와 관계가 없고, 사방탁자는 그 위의 도자기와 관계가 없었다. 가까이 모여 있을 뿐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무리 값비싸고 사치한 것들이라지만 이것들을 통일시켜 어떤 살아 있는 분위기를 만들 주인의 정신과 만나지지 못하니 잡동사니처럼 무의미했다.”

아무것도 없는 방을 찾아서



이렇게 말하고 나니, 답답한 심정이다. 요컨대 어디 먼 곳으로 떠나서 숲 속을 걷고 새벽 안개와 더불어 명상을 하고 청신한 봄 기운을 쐬는 것을 ‘힐링’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마치고 돌아온 후의 삶에 뭔가 작은 변화의 기미라도 있어야 할 테지만, 삶이란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간단한 것이 못 된다. 더욱이 다시 아파트로 돌아와 밋밋한 거실과 어두운 방과 어수선한 베란다를 마주하게 되면, 정녕코 힐링이라면 지금 이 몸이 거처하고 있는 일상의 공간 속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무망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자책하게 되는 것이다.

더러 이 도심지 안에 그러한 피난처를 어렵사리 확보해놓은 처사들의 공간을 본 적이 있다. ‘신동아’연재를 통해 클래식 문화의 심연을 들여다본 초절정 클래식 고수 김갑수의 마포 작업실은 도시 중장년층의 로망을 현현한 압도적인 공간이거니와 누구라도 그 마포 작업실을 방문한다 하면 돌아설 때의 허망함도 감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만한 공간, 아니 그 공간보다는 그곳을 가득 채운 수많은 음반과 책은 몇 천 만 원 들여서 며칠 상간에 뚝딱 장만할 만한 그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평생을 바쳐 고관대작이 되고, 또 누군가 악착같이 벌어 수십억 대 부자가 되고, 또 누군가 필생의 일념으로 학문의 대가가 된다고 하면 김갑수의 그 공간과 그 책들과 그 음반들은(특히 음반!) 이 헛헛한 대도시에서 성장한 소년이 필생의 수미일관으로 이룩한 고독한 성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1984년에,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쯤에 강북구 수유리의 허름한 집 방 하나를 온전히 책과 음반으로 채우고 짙은 커피 한 잔을 마시던 그를 기억한다.

만약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오히려 빈 방이 낫지 않겠는가. 생의 귀한 시간을 온전히 바쳐 그 무언가를 모으고 아끼고 완상하며 살아온 경우가 아니라면, 차라리 텅 비워버리는 게 낫지 않은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새 봄이라, 단언컨대 굳게 다짐하고 명심한다면 사실 우리 주변에는 버릴 것이 너무나 많다. 물건의 쓰임새를 귀히 여기고 재활용이라는 사회적 숙제도 동시에 생각나는 바이지만, 그러나 잠시만 거실이며 방이며 베란다를 거듭 살펴보면 ‘참으로 나는 쓸모없는 것들과 더불어 힘겹게 살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당장 세간을 다 내다버릴 수는 없는 일! 그러니 찾아가보자. 빈 방을 찾아가보자. 아니, 그 무엇보다 텔레비전이라는 요상한 물건조차 들여놓지 않은, 그래서 그곳에 가면 억지로 텔레비전부터 켤 일이 없고 그리하여 ‘이왕이면…’ 하는 마음으로 휴대전화 전원도 꺼놓고 싶은, 그런 공간을 찾아 나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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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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