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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착륙한 젊은 한국 소설의 표정

프랑스에 착륙한 젊은 한국 소설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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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착륙한 젊은 한국 소설의 표정

Le Placard(캐비닛)<br>김언수, Ginkgo, 2013, Paris

2013년 5월 6일, 에펠탑이 내려다보이는 센 강 기슭 이에나 거리에는 파리에서 좀처럼 접하기 쉽지 않은 두 편의 한국 소설이 작가의 육성으로 울려 퍼졌다. 2000년대 한국 소설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 천운영과 김언수가 처음으로 파리의 독자와 만나는 문학의 밤 행사가 열린 것.

형이 내 귀에 입을 바싹 대고 속삭였다. (…) 목소리를 조금만 높여도 형의 목에서는 쇠톱 소리가 났다. (…) 쇠톱 소리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골라낼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나뿐이었다. 내가 형을 데리고 이곳 중국으로 맞선여행을 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언제까지나 형의 목소리를 대신해줄 수는 없겠지만, 형의 신붓감을 구해줄 수는 있었다. 우리는 삼박사일 동안 예닐곱 명의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서커스와 관광은 덤이었다.

-천운영 ‘잘 가라, 서커스’ 중에서

이 캐비닛의 이름은 ‘13호 캐비닛’이다.

그러나 ‘13’이라는 숫자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그것은 그저 이 캐비닛이 왼쪽에서 열세 번째에 놓여 있다는 뜻일 뿐이다.

뭔가 근사한 이름이 있었다면 소개하기가 훨씬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캐비닛 따위에게 뭘 더 바라겠는가. (…)

‘13호 캐비닛’에 대해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는 짓은

일찌감치 집어치우기를 권한다.

그런 상상을 한다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김언수 ‘캐비닛’ 중에서

이번 행사는 2009년 황석영, 신경숙, 김영하 작가의 프랑스 독자와의 만남에 이어 젊은 작가로는 지난해 10월 문인클럽(Societe des gens de lettre)에서 열린 편혜영, 김중혁, 김애란의 한국 젊은 작가 프랑스 포럼에 이어 두 번째. 천운영과 김언수는 2000년대 한국 소설의 지형도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새로운 세대의 소설을 대표해왔다.

내성적 감수성 교란한 ‘바늘’

천운영은 날카로운 ‘바늘’ 하나로 1990년대 한국 소설의 내성적 감수성을 통렬하게 교란시키며 2000년대 벽두에 등장했고, 김언수는 정체불명의 ‘캐비닛’으로 2000년대 한국 소설의 혼종적 물결을 타넘으며 곧바로 중심으로 진입했다. ‘바늘’의 위력이 어찌나 깊고 강렬했던지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소설계는 단연 천운영의 문체와 서사에 뜨겁게 반응했다. 작가의 재능은 무엇보다 소재를 선택하는 감각과 그것을 서사화하는 지력(智力)과 인내력에 있다. 이전 작가들이 주로 선택하지 않았던 소재를 선택해 완전히 체득할 때까지 취재하고, 삶에 아로새긴 뒤에 뽑아내는 천운영의 문장에 누구라도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매일 저녁 승강기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길게 두 번 벨을 누르지 않아도 나는 그가 내게 오고 있다는 것을 안다. (…)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을 하나 그려주었다.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 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빠져들어갈 것 같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 가장 얇으면서도 가장 강하고 부드러운 바늘.

-천운영 ‘바늘’ 중에서

이번에 파리에서 번역 출간된 ‘잘 가라, 서커스’는 천운영의 첫 장편소설. 작가의 육성으로 작품의 일단이 낭독됐고, 이어 전문 낭독가에 의해 프랑스어 번역문으로 낭독됐다. 나는 눈을 감고 작가의 음성에 실려 전달되는 문장들을 흡수하듯 감상했다. 그런데 같은 문장임에도 프랑스 전문 낭독자가 읽은 프랑스어 문장들이 이질적으로 들렸다. 2주 전, 파리의 국립고등사범학교에서 장 에쉬노즈라는 작가를 대상으로 열렸던 심포지엄의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주제가 새삼 환기됐다.

이 심포지엄에서 제기된 몇몇 논의 중 설득력 있게 다가온 것은 ‘작가가 소설에 사용하는 고유명(propre name)들을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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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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