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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들의 스무살…혹은 살아남고 혹은 사라지고

스타들의 스무살…혹은 살아남고 혹은 사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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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피 문화가 세계를 휩쓸던 1960년대.춥고 배고픈 이 땅에도 청년문화가 꽃피었다.
  • 그 중심에 섰던 ‘쎄시봉’과 ‘청개구리집’멤버들. 한국 쇼비즈니스 생성기에 혹은 별이 되고 혹은 사라져간 재기와 순수의 청춘, 그 짧은 기록.
스타들의 스무살…혹은 살아남고 혹은 사라지고

1964년 경 TBS TV의 ‘굳 이브닝쇼’를 진행할 때의 모습. 맨 왼편이 나

1958년 나는 5년 간의 대학시절에 종지부를 찍고 딴따라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나이 만 25세.이 해에 기억나는 일은 보신각 바로 옆자리의 HLKZ-TV에 내가 몸담은 민들레 악단이 출연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황문평(대중음악평론가) 선배와 연극연출가 이기하씨를 처음 만났다. 이때쯤 우리 악단은 ‘타향살이’의 고복수씨 은퇴기념 호남순회공연에도 참가했다. 황금심, 남인수, 이난영씨 등 여러 원로가수들과 함께했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두 장면이 있다.

첫째는 물 끼얹은 듯 조용했던 객석의 ‘숙연함’이다. 어떻게 청중의 소리 듣는 분위기가 그토록 조용할 수가 있을까. 고복수씨의 은퇴공연, 이제는 더 이상 정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그리도 가슴 아팠던 것일까. 극장 안은 객석의 응시와 경청으로 공연 내내 숙연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여관에서 극장으로, 극장에서 여관으로 이동할 때 당시 스타들의 걸음걸이다. 지방도시 길가 건물들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일까. 길 한가운데를 횡렬로 걸어가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난쟁이 나라의 걸리버나 도시를 짓밟고 가는 ‘용가리’ 바로 그것이었다. 조금 뒤떨어져서 따라가는데 그들은 길가의 전주보다 더 높아 보였다.

남인수, 현인, 루이 암스트롱

서서히, 그러나 지체없이 50년대는 지나가고 60년대가 시작됐다.



1960년 4·19 의거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1961년 5·16 쿠테타가 일어나던 그 해 12월 문화방송 라디오가 개국했고 같은 달 KBS TV도 개국했다. 1963년 동아방송 라디오국 개국, 이듬해 봄 라디오서울(동양방송) 개국, 그리고 그 해 12월4일에는 TBC TV(동양방송)가 개국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아야 한다던가, 잇단 민간 상업방송 개국으로 우리 시청각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클래식, 가곡, 국악 위주로 방송하며 품위를 중시하던 KBS 주변에서 민방들이 새 리듬과 창법의 음악들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1961년 루이 암스트롱이 워커힐 개관기념 공연을 위해 방한했다. 그는 “레이디스 앤드 젠틀멘”이라는 인사 대신에 “Hello Folks!” 라고 했다. 트럼펫도 불고 노래도 불렀다. ‘블루베리 힐’ ‘헬로 달리’ 등. 쉰 소리에 서민적인 미소, 눈이 무섭게 컸고 볼과 입술이 두툼했다. 나는 대학 때부터 구독하던 재즈 격주간지 ‘다운 비츠(Down Beats)’를 통해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무대가 끝나고 나는 그와 둘이서 짧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전통 재즈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맞느냐 했더니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쿨, 모던, 프로그레시브 모두 좋아하며 음악이면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고 했다. 늘 다음 순간의 소리를 생각하는 것이 음악 아니겠냐고도 했다.

1962년 6월26일 오후 2시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38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산유화’ ‘청춘고백’ 등을 남겼다. 푸른 하늘보다 더 푸르게 하늘로 메아리치던 그 낭랑한 소리가 사라졌다. 눈부신 소리였다. 고복수 은퇴공연 무대에서 반주를 하던 내가 가장 좋아한 곡은 ‘청춘고백’이었다. 장례는 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졌는데 우리 악대가 행렬의 앞에 섰다. 필동에서 종로로 접어들고 다시 화신백화점을 끼고 조계사로 들어섰다. 나는 악단 맨 앞자리에서 대고(큰북)를 쳤다. 종로 길은 그렇게도 넓었고 연도에 늘어선 애도객들의 눈은 허공을 보고있는 것 같았다. 좋은 날씨였다.

한국일보 문화부 이명원 기자가 가수평을 매주 8매씩 써달라고 부탁했다. ‘한많은 미아리 고개’를 부른 이해연씨의 남편이자 길옥윤씨의 서울치대 선배이며 흥업주식회사 상무였고 트럼페터 겸 가수였던 김영순씨가 나를 추천했다. 주로 미8군 출신 가수에 대해 썼다. 최희준, 유주용, 위키 리, 박형준, 현미, 한명숙, 이금희, 박재란 그리고 현인 선생에 대해서도 평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현인 선생을 뵙게 되었다. “이백천씨, 미리 좀 알려주지 않고…”라며 섭섭해하시는 것이었다. ‘베사메 무초’가 여자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과 선생의 굵고 진한 바이브레이션에 대해 결례를 각오하고 한마디했던 것이 서운했던 것이다. 당시 내 나이가 30세도 안되었을 때였다. 그때 결심을 했다. 앞으로 20년 간은 아무것도 안 쓰겠다고. 그리고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은 하지 말자고. 나중에서야 ‘비평은 올바른 칭찬’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기사로 이명원씨는 내게 새 칭호를 주었다. ‘경음악평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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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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