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정보원은 내곡동으로 이사간 뒤 더 이상 ‘남산’으로 불리지 않는데, 영화계를 상징하는 말은 여전히 도산대로가 아닌 ‘충무로’다. 영화판의 대부가 충무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까.
충무로는 한국 영화계의 ‘절대군주’ 강 감독을 키워준 거리다.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무작정 충무로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영화판의 1인자이지만, 차비가 떨어져 충무로에서 서대문구 홍은동 집까지 걸어간 적도 있다.
강 감독은 영화전문지 ‘시네21’ 평가에서 2003년까지 9년 연속 한국 영화계 파워 1위를 지켰다. 한국 영화에서 이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장기집권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영화의 연간 제작 편수는 70~80편. 이중 15~20편이 그가 전액 또는 일부 투자한 돈으로 만들어진다. 전국의 스크린 수는 약 1000개. 강 감독이 대표로 있는 시네마서비스의 자회사인 프리머스가 보유한 스크린 수가 현재 20개 정도인데, 2년 후엔 230개로 늘어난다.
한국 영화계의 ‘절대군주’
시네마서비스에는 김상진 감독의 ‘광복절 특사’와 강 감독의 ‘실미도’ 포스터가 여기저기 붙어 있다. 그는 직원들이 모두 쉬는 일요일에도 회사에 나오는 일중독자다. 그래서 세들어 사는 빌딩의 경비원이 일요일에 꼬박꼬박 출근하는 그를 귀찮게 여기는 눈치란다.
영화감독치고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다. 목을 졸라매는 넥타이가 상징하는 속박과 규제가 예술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일까. 부스스한 머리에 점퍼 차림의 그가 주는 이미지는 한국 영화계 1인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등 주로 웃음을 선사하는 코믹물 감독을 맡던 그가 이번에 1970년대 실화를 소재로 한 ‘실미도’를 찍었다. 진지하고 무겁고 강렬한 영화다.
-‘실미도’에서 위험한 장면을 많이 찍었다지요.
“위험한 장면에서 대역을 쓰지 않고 배우들을 그냥 출연시켰습니다. 사고 위험이 컸습니다. 웃으면서 즐겁게 찍은 장면은 기억에 없고 계속 화를 내며 스태프들을 다그쳤습니다. 배우들로부터 ‘도 닦는 영화 같다’ ‘너무 힘들다’ ‘공포스럽다’ ‘감독이 너무 무섭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 생존자들이 있습니다. 사실을 지나치게 극화하면 생존자들이 말도 안 된다고 할테고, 증언이나 자료에 충실하면 상업적으로 성공할 확률이 낮겠죠. 그래서 중간지대에서 타협했어요. 드라마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나한테는 재미없게 느껴졌어요. 묻어둬도 될 얘기를 굳이 바깥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요.”
-어떤 신이 그렇게 위험했습니까.
“가령 배를 폭파하는 신입니다. 바다에 뜬 상태에서 배를 폭파해야 하는데 배우들도 배 주변에 있어야 합니다. 수심이 14m였는데 배우들에게 떠내려가다 위급하면 손을 들라고 했지요. 구명튜브를 던져줘야 하니까요. 그런 장면 찍을 때 힘들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면 관객들이 눈치챕니다. 할리우드나 한국이나 모두 화면 장치에 돈을 많이 들이거든요. 지나치게 컴퓨터 그래픽에 의존한다든지, 비사실적 그림으로 관객의 눈만 현혹시키려 합니다. 눈 위의 폭발 장면을 찍다 배우 두 명이 타죽는 줄 알았습니다. 계산보다 일찍 터졌거든요. 스킨스쿠버 장비 없이 맨몸으로 수심 10m에서 잠수훈련하는 장면도 힘들었습니다.”
-북파공작원(HID) 동지회 쪽에서 압력은 없었습니까.
“HID 설악동지회 쪽에서 리얼하게 그리려면 자기들 자료를 보라며 도와줬습니다. 희생자가 생기고 가혹훈련을 받는 장면은 그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 촬영했습니다. 대신 ‘고생해도 될 놈들’ ‘국가로부터 버림받아도 될 놈들’이란 식으로 그리지는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실미도 생존대원들은 고인들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말도 했습니다.”
-40대 후반이나 50대도 실미도 사건이 어렴풋이 기억 날 정도입니다. 요즘 젊은 세대한테 실미도가 실감나게 다가올까요.
“감독의 딜레마죠. 사건을 모르는 관객이 재미없다고 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사건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하게 만들어야지요. 실화와 픽션을 잘 버무려야 관객을 감동시킬 수 있어요. ‘실미도’는 가상 드라마로 생각하고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