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군복수집에서 전쟁영화 엑스트라 출연까지

  • 김세랑 월간 ‘플래툰’ 기자

    입력2006-11-21 13:3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밀리터리 마니아. 우리말로 군사애호가쯤으로 풀이되는 이들은 각종 군용품을 수집하고 희귀한 군복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천리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휴일엔 근교 야산에서 ‘어른들의 전쟁놀이’인 서바이벌게임을 즐긴다. 한 수 위의 마니아들은 2차대전이나 6·25당시 전투장면을 연출하는 리인액트먼트게임을 펼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그만큼의 직업과 삶의 방식, 그리고 다양한 관심사와 취미가 존재한다. 마니아라는 단어. 어느 때부터인가 그리 낯설지 않게 된 이 단어를 우리는 흔히 광(狂)이라는 글자와 동일시하고 있지만, 사실 이 단어는 취미라는 말과 맥을 같이한다. 특별히 한쪽으로 이끌리는 흥미라는 뜻을 가진 이 취미라는 단어는 숨가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이미 본래의 뜻이 많이 왜곡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단의 영역

    사람들은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대부분 독서 영화보기 음악감상이라고 대답하지만, 사실 이런 것들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 지극히 익숙한 일상의 하나일 뿐 취미로 보기 어렵다. 초고속으로 전송되는 각종 정보와 하다못해 자장면 한 그릇도 인터넷으로 시켜 먹는 시대에, 위에 언급한 취미 아닌 취미들은 PC 앞에 앉은 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요즘 신세대들에게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런 종류의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저요? X재팬 CD 수집과 일본 애니메이션 원판 수집이요.”



    “예전에는 액세서리 만들기를 좋아했는데요, 요즘은 그때 만든 것들을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통신판매하고 있어요.”

    이 정도면 골수 마니아거나 아예 ‘준사업’ 수준 아니냐고 평할지 모르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제대로 된 취미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요즘 10∼20대의 취미생활이 30∼40대 마니아의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누군가가 내게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다. 예전처럼 간단하게 ‘영화감상이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도무지 이 취미는 말하기 좋게 간단한 단어로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내 취미는 대강 이렇다.

    주말에는 콩알만한 BB탄이 나가는 장난감총을 들고 야산에서 총싸움질을 하고, 청계천 바닥에 눈을 붙인 채 쓰레기더미를 뒤져 군대넝마 따위를 주워오며, 허구한날 총이니 탱크니 하는 흉칙한 물건들과 관련된 책만 읽어대는 이상한 인간이 바로 나다.

    사실 주변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 우리 사회에서 군이라는 단어는 결코 긍정적인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는 군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일 뿐이고, 그보다는 그간의 역사 속에서 보여준 굴절된 군의 실상이 훨씬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로부터 12·12 사태, 광주 민중항쟁으로 이어지는 오욕의 역사는 군이라는 단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놓았고, 덕분에 우리는 한동안 군복 앞에 서면 까닭 없이 위축되고 떨어야 했으며 수많은 징집 기피자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1960∼9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군대는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될 성역이자 금기였던 것이다.

    군사애호가

    이런 금단의 영역을 넘보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남들은 제대하고 나면 부대 있는 쪽으로 오줌도 안 눈다고 한다는데, 금쪽 같은 주말에 칙칙한 군복을 걸치고 총을 둘러멘 채 산에서 뛰고 구르는 그놈의 서바이벌인가 뭔가가 그렇게 좋으냐며 빈정거리는 내 친구, 개업 이래 한번도 대여된 적이 없어 먼지가 수북한 옛날 전쟁영화만 골라 빌려 가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동네 단골 비디오가게 아저씨(물론 잘 안 나가는 테이프만 골라 빌리는 내게 무척 친절하다), 옷장 가득한 것으로도 모자라 집안 곳곳을 비집고 들어찬 각종 군복과 관련 소품들 때문에 진저리치시는 부모님까지….

    그렇다. 난 군사애호가다. 군대 이야기에 귀가 쫑긋해지고 군대 물건을 보면 그 족보 캐기에 여념이 없다. 내가 즐기는 것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는 모형 만들기요, 둘째는 군복 수집, 셋째는 서바이벌게임, 넷째는 군사관련자료 수집이다.

    가장 오래 즐겨온 모형 제작은 나를 군사애호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어준 분야다. 내 또래라면 어릴 때 ‘조립식’이라 불리던 플라스틱 군인인형이나 탱크 한두 대쯤 만들어 보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학교 앞 문방구 진열장에 놓여 있던 탱크, 비행기, 독일군 인형은 모든 아이들이 갖고 싶어한 귀물(貴物)이었다. 나 역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좋아했는데, 유별난 점이 있었다면 다른 아이들보다 손재주가 좋아 훨씬 빨리 만들고 멋지게 색칠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에 난 조립식 탱크와 비행기 제작의 제왕이었고, 가끔은 입소문을 들은 선배나 형들이 보름달빵이나 부라보콘 같은 것을 사들고 와서 자기 탱크를 대신 만들어달라고 청탁할 정도였다.

    군인 인형 제작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친구들은 공부 때문에 포기했는데, 난 오히려 더욱 모형 만들기에 몰두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멋진 장난감쯤으로 여겼지만 모형 만들기에 빠져들다 보니 좀더 잘 만들고 좀더 실감이 나게끔 색칠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당시 군대나 무기관련 기사가 심심찮게 실리던 잡지인 ‘학생과학’에 나온 탱크나 비행기 기사와 사진을 스크랩해두고 모형을 그 사진과 똑같아 보이게 색칠하는 비법을 연구해 들어갔다. 탱크 캐터필러를 실물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시뻘건 녹을 긁어다가 발라보기도 하고 탄흔을 표현하기 위해 성냥불로 모형을 그을리다가 탱크 포신을 홀랑 태워먹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난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국내 최초의 전국 프라모델 콘테스트에 참가해 동상을 수상했다. 이후 매년 한 차례씩 열리는 이 대회에 세 번 더 참가해 장려상과 2회 연속 대상을 수상하는 제법 화려한 경력을 갖게 되었다. 상이란 건 역시 좋은 것이다. 매일 모형만 안고 산다며 밤낮 가리지 않고 꾸중하시던 부모님의 꾸지람이 큰상을 몇 번 탄 뒤에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덕분에 난 별 어려움 없이 모형을 잘 만들기 위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필연적으로 모형 탱크나 비행기가 아닌 실제 무기들의 구조와 역사 같은 것에까지 관심을 갖게 됐다.

    이런 관심은 특히 군인인형을 만들 때 더 커졌는데, 인형이 착용하고 있는 옷과 장비, 총 등의 실제 모양이나 재질, 색상, 용도가 궁금해진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군복과 군장류를 수집하기 시작해서, 주로 재래시장에서 작업복으로 팔리고 있는 헌옷들 속에서 군복과 장비를 찾아냈다. 1950년대에 6·25전쟁을, 겪고 60∼70년대에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나라기 때문에 당시의 군복을 찾아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수많은 헌옷더미에서 군복만을, 그것도 어느 시대에 어떤 부대가 입은 복장인지를 구별할 줄 아는 사전지식이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지만.

    이렇게 해서 찾아낸 옷들은 대부분 미군과 한국군이 입던 것이다. 6·25 당시 체형이 작은 국군이 주로 입어 스몰 작업복으로 알려진 OG-107작업복(1950년대에 등장, 1970년대까지 사용), 미 해병대가 방한용으로 입었던 파카, 제1·2차 세계 대전 때의 각종 군장, 미군 장교의 정복, 50∼60년대의 국군 군복 등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우리나라는 한 시대를 기록하는 일에 참 인색하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국군의 군복이나 군대에 관련된 장비나 장식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료가 없어 수집하는 데 몹시 애를 먹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장비가 시골집 부뚜막을 닦는 걸레로 쓰이거나 공사장 작업복 등으로 쓰인 탓에 50∼60년대에 사용한 국군 군복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미국 사람들의 경우 근래의 것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1차 세계대전 때의 물건이나 독립전쟁 당시의 물건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옛날 물건에 대한 애착이 깊다. 난 1998년, 일본 후지산에서 열린 베트남전쟁 재연 행사인 ‘아호칼립스 98’행사에 참가했다가 일본의 밀리터리 컬렉터들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파월한국군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한 일본인 컬렉터가 다가오더니 가슴에 달린 계급장(깡통 계급장으로 불린 60년대 계급장. 황동판을 프레스해서 만들었다)을 보더니만 내 손을 잡아끄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기 짐을 뒤져 그림액자만한 케이스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IT IS MY COLLECTION.”

    그것을 본 내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6·25전쟁 때부터 베트남전쟁 당시까지의 한국군 깡통계급장이 이병에서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수집되어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가슴에 차고 있는 깡통계급장을 구하기 위해 두 달여를 헤매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날 그 자리에서 알 수 있었다.

    일본에는 이 친구 같은 사람이 많고 많았다. 지리적으로 가까운데다 한국사람들은 자기네 군복이나 군대물건을 천시하고 값도 엄청나게 싸기 때문에 자주 한국에 나와 물건을 사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군복을 사도 한두 벌이 아니라 수십 수백 벌 단위로 사가는데, 그렇게 모은 군복 중에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시절 군복이나 대한제국 시대의 물건까지도 있다고 한다.

    ‘하노버 스트리트’에 나온 군복

    내가 깡통계급장에 관심을 보이며 몇 개만 팔 수 없겠느냐고 묻자 그 친구,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다.

    “내가 이걸 산 것은 80년대 중반인데, 그때 한 개당 100원꼴에 구입했다. 지금 내가 이걸 판다면 한 개에 1만엔은 받아야겠는데 그 값에 살 수 있겠는가? 그나마 앞으로 10년쯤 뒤에는 값이 세 배는 더 오를 것이다.”

    불과 10년 만에 100원짜리를 10만원짜리로 만들어내는 그 친구가 무섭도록 얄미웠지만 그 물건들을 지켜내지 못한 것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현재 깡통 계급장은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모두 진품이 아닌, 새로 만든 모조품이다. 어쩌면, 국군 박물관을 일본에서 개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군복을 구하러 다니다가 횡재한 얘기를 한번 해보자. 내가 특별히 아끼는 수집품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도 미군 장교용 정복(1930~50년대까지 사용품)을 입수한 얘기를 할까 한다. 이 물건은 평소 무척 갖고 싶어했지만 울로 만들어져 좀이 잘 슬기 때문에 제대로 된 물건을 본 적이 없었다.

    먼저 만난 것은 바지였다. 남대문시장은 다양한 물건이 있기 때문에 자주 들르는 곳인데, 좁은 골목 안에 한 줄로 군복과 작업복을 전문으로 파는 상가가 밀집해 있다. 워낙 자주 들르는 곳이기 때문에 어느 가게에서 어떤 물건을 파는지 줄줄이 꿰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눈길이 가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간의 경험에 비춰 이렇게 느낌이 꽂히는 날에는 평소 구하고 싶던 물건이 눈에 띈 적이 많았기 때문에 유심히 물건들을 살피며 걸었다. 이 시장 가게들의 특징은 옷을 겹겹이 쌓아 놓고 팔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맨 위에 올려진 물건 외에는 어떤 물건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난 나라별 시대별 군종별 군복의 색상과 사용옷감 등에 대해 항상 공부해온 덕에 쌓여 있는 옷들의 단면만 봐도 그것이 어느 나라의 어떤 군복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다른사람이 보기에는 무슨 초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건 순전히 경험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쨌든 이렇게 물건들을 살피며 지나가던 내 눈에 무엇인가가 쏘옥 빨려들어 오는 것 아닌가? 자동적으로 걸음은 멈춰지고 눈에 걸린 옷을 옷더미 사이에서 뽑아냈다. 밀리터리 컬렉터들 사이에서 ‘오피서스 핑크 트라우저’(장교용 핑크색 바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장교들에게는 회색빛이 약간 도는 핑크색 셔츠와 바지가 지급되었다)로 불리는 바지, 바로 그놈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폭격기 조종사와 영국 여인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 ‘하노버 스트리트’를 보면 주인공 해리슨 포드가 이 바지를 멋지게 입고 나온다. 일단 물건을 찾은 후에는 이것이 진품인지를 가리게 된다. 군복, 특히 미군복에는 반드시 생산지와 제조사, 생산일자, 옷의 명칭 등이 적혀 있는 라벨이나 이에 해당하는 스탬프가 찍혀 있으므로 이를 통해 진위 여부와 그 옷의 족보를 캔다. 이 바지의 경우에는 허리부분 안감에 미 육군 장교용 바지라는 제품 명칭이 적혀 있고 호주머니 안감의 안쪽에 천으로 덧붙인 라벨이 붙어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품인 것이다!

    이 장교용 핑크 바지의 경우 미국에서는 100∼150달러에 거래되는데, 내가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가격은 불과 1만5000원이었다. 상의는 바지를 발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원래 이 옷은 희귀품인지라 돈을 주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인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한 벌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은 억세게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청계천 골동품점

    상의 재킷은 청계천의 한 골동품점에서 찾아냈다. 이 가게의 주 품목은 오래된 일상용품으로 군복과는 좀 거리가 먼 곳이다. 그렇지만 가끔 오래된 앨범들 속에 끼어 있는 창군 초기의 군대 관련 사진들을 구하는 즐거움에 종종 들르던 곳인데, 내가 찾아간 날에는 주인 할아버지께서 연신 흘러내리는 돋보기를 추어올리며 낡은 옛날 양복 몇 벌을 진열하고 있었다.

    문제의 재킷은 바로 그 낡은 양복들 사이에 끼어 있던 것. 짙은 올리브드랩색의 이 옷은 바바리처럼 허리끈이 달려 있다는 것을 빼고는 그 모양이나 소재가 영락없는 양복상의여서 주인 할아버지도 보통 양복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목표를 포착한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일단 힘들게 일하시는 할아버지를 돕는 것부터 시작한다.

    짐 정리를 도와드리며 넌지시 물건값을 떠보는 것이다.

    “어휴, 이 옷은 엄청 낡았네요. 이런 옷도 사오세요?”

    주인어른 왈.

    “아 글쎄, 60년대 양복하고 옛날 학생복을 주문했는데, 좀 이상한 놈이 끼어 왔어.”

    “이거 팔기 힘들겠네요.”

    “글쎄, 거 단추를 보니까 무슨 군대옷 같기도 한데… 자네 군복 잘 알지? 이거 무슨 옷이야?”

    “이거 미군 정복 같은데요. 한번 입어나 볼까?”

    입어보니 몸에 꼭 맞는다. 자, 이쯤 되면 이 물건의 주인은 나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가격 흥정. 밀고당기는 흥정은 이 글에서는 생략하자. 내가 치른 값은 3만5000원. 청계천 길에서 파는 중고 양복 한 벌이 2만원쯤 하니 좀 비싸게 준 게 아닌가 싶지만 미국에서 거래되는 이 재킷의 가격은 200∼250달러다. 물론 그것도 물건이 나왔을 때의 얘기이고, 그중에서 자기 몸에 꼭 맞는 사이즈를 구하기는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얘기다. 횡재란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이렇게 군복을 모으면 자꾸 입어보고 싶은 것이 사람 심리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옷장에 빼곡이 걸린 옷들을 하나씩 꺼내 혹시 손상된 곳이 없나 확인하고 몸에 걸쳐보기 시작한다. 몇 벌의 옷을 갈아입다 보면 노르망디 해안의 독일군 진지에서 쏟아지는 기관총탄을 헤치며 상륙하는 미군 레인저 부대원이 되기도 하고 베트남 정글에서 스콜을 맞으며 고국을 생각하는 파월 맹호부대 병사도 된다.

    하지만 이렇게 방 안에서만 노는 것은 군복수집이 주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낮은 등급의 일이다. 군복이란 물건의 본래 용도-땅바닥을 기고 수풀을 헤치는-인 전장 한가운데 서야 입는 맛이 나는 법. 이래서 시작하게 된 것이 바로 ‘어른들의 전쟁놀이’인 서바이벌게임이다. 콩알만한 BB탄을 쏘는 모형총을 이용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전투체험을 할 수 있는 서바이벌게임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단순히 게임 그 자체를 즐기는 형, 야외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소풍 나온 기분으로 가족을 대동해 낮잠과 불고기 파티를 벌이는 형, 서로 쏘고 맞히는 게임보다는 전장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하는 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내 경우는 후자에 가까운데, 이런 사람들끼리 모여 즐기는 새로운 형태의 서바이벌게임이 있으니 이른바 리인액트먼트 게임이다. 이것은 역사재연게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당시의 복장과 장비, 총기류까지 완벽하게 고증을 마쳐 특정 전투를 그대로 재연해 내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런 행사가 전무했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매우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 기념 리인액트먼트나 배틀 오브 벌지, 노르망디 상륙작전 리인액트먼트 등은 아주 유명한 사례.

    우리나라에서 이뤄지는 리인액트먼트는 대부분 베트남전을 소재로 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2차대전이나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리인액트도 기획하고 있다. 리인액트먼트 게임의 특징은 전장의 재현이라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파월 맹호부대원들이 화랑담배를 피워문 채 정글을 수색하고, 얼룩무늬 군복의 청룡부대원들이 반합을 끌어안고 밥을 먹고 있는 광경을 보노라면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려놓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전투가 시작되면 참가자들은 영화나 책, 사진자료를 보며 익힌 당시의 행동방식을 재연해내며 움직인다. 당시 유행한 군가를 흥얼거리는가 하면 입이 건 선임하사를 맡는 친구도 있다. 전투는 최대한 실감나게 한다. 바닥이 진흙탕이든 개울이든 적이 나타나면 뛰고 구르며 박박 긴다. 지휘관의 ‘사격개시’라는 구령이 떨어지자 사방에서 BB탄이 연발로 튀어나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바라라라락. 투투툭’.

    멀리서 달려오던 월맹군 한 명이 총을 맞더니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펄쩍 튀어 오른다. 장교 한 명이 쓰러진 월맹군에게 다가가 몸수색을 한다. 옆구리에 숨긴 지도를 꺼내 펼쳐드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총알이 철모에 맞는다.

    ‘으아악. 위생병! 위생병!’

    가자 전장으로!

    바람처럼 달려온 위생병이 소대장을 치료하는 동안 소대원들은 소대장의 복수를 하겠다고 일제히 돌격해 들어간다. 이처럼 리인액트먼트 게임은 실제 전투를 그대로 복사해 내기 때문에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는 사람도 있다. 물론 실제 행동을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일단 그 자체를 즐기지만 여기에는 단순한 재미말고도 주목할 만한 효과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게임이 살아 움직이는 박물관이라는 것. 일반 박물관에 가보면 그 밋밋한 전시방법과 빈약한 전시물에 실망을 금치 못한다. 전혀 입체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활동상을 짐작하기 어렵다.

    리인액트먼트 게임은 골동품 가치가 있는 물건들이 실제로 어떻게 쓰였는지를 그대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살아 있는 자료다. 이런 효과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국경일이나 전승·참전 기념일 등에 대대적인 리인액트먼트 게임을 벌인다. 이런 대규모 리인액트먼트 게임에는 병사들은 물론이고 당시의 차량, 탱크, 비행기, 군함까지 동원된다. 후세들에게 그들의 아버지 세대나 선조들이 어떻게 나라를 지켜왔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살아 있는 역사교육 아닐까?

    인천시와 해군본부는 인천상륙작전 50주년을 맞아 인천상륙 리인액트먼트 행사를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외국의 참전 베테랑과 전문 리인액터를 초청하는 대규모 행사로 기획했다는데, 예산이 턱없이 적게 배정되어 행사 개최 자체가 불투명한 모양이다. 불과 한 시간 남짓이면 끝나는 기념식에는 엄청난 예산을 쓰면서 이런 행사에는 인색한 것이야말로 우리 나라의 문화적 후진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취미생활은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다. 이런 개인적인 생활도 깊이가 깊어지다보면 그 지식을 환원할 기회가 생긴다. 군사애호가들도 마찬가지다. 많은 애호가들이 나름의 영역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군사지식을 쌓는 것에 주력했던 사람들은 대개 책을 저술하는 일을 하는데, 대부분 과거의 딱딱한 군사평론집 형태에서 벗어나 일반인들이 무기나 전쟁의 본질을 쉽고 재미있게 알 수 있게 한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군사관련 잡지나 소설 ‘데프콘’ 같은 가상 전쟁소설도 이런 아마추어 군사애호가들이 만든 것이다. 이중 ‘데프콘’의 경우 각기 해군, 육군, 공군 분야에 지식이 깊은 아마추어 군사애호가 세 명 이상이 모여 토론을 통해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공동집필을 하는 실험적인 형식을 선보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쉬리’ 촬영 현장을 누비며

    소설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노하우를 전파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영화라는 매체와 결합하는 것이다. 얼마 전 국내에서 최초로 경찰 특공대가 실감나게 등장해 눈길을 끌었던 영화 ‘퇴마록’의 특공대원들은 전원이 서바이벌 게이머다. 이들은 KOSSA(한국서바이벌게임연맹) 소속 회원들 중에 지원을 받아 구성된 팀으로, 각자 복장을 갖춘 사람들 속에서 선발되었다.

    팀이 꾸려진 다음에는 팀워크를 다지기 위해 훈련기간을 가졌는데, 실제 미국 경찰특공대에서 사용하는 교본을 이용해 실내진압 전술을 익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촬영장에 투입된 서바이벌 게이머들은 감독의 간단한 상황설명만 듣고도 각자의 움직임은 스스로 만들어냈다. 감독 또한 액션장면에 특별한 간섭 없이 게이머들의 평소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데 주력하여 멋진 그림을 만들어 냈으며 ‘최고의 배우들’이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990년대 한국 영화계 최고의 히트상품이라고 하는 ‘쉬리’ 또한 군사애호가의 손길이 깊숙이 닿은 사례다. 난 군사전문잡지 기자로 일하는 덕에 이 영화의 초기 기획단계부터 진행상황을 주시할 수 있었다. 영화 제작과정에 자문이나 의상, 특수효과 등 스태프로 일하는 분들이 모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동호인이기 때문에 직·간접으로 자료협조 요청을 받았다. 극중 폭발물처리 대원이나 지뢰탐지반 등의 모습이 내가 전해준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외국에서는 총기가 등장하거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 때 군사애호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전문적인 군사연구가는 지식의 깊이와 질은 높지만 학자 특유의 딱딱한 사고방식 때문에 유동적인 영화예술에 접목하기가 어려운 반면, 아마추어 군사애호가들은 상대적으로 사고방식이 유연하므로 자신의 지식을 영화적 설정에 재미있게 가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인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군인 엑스트라들은 실제 아일랜드군 병사들이지만 연기력이 필요하거나 가깝게 찍어야 하는 조연급 배우진은 상당수의 리인액터를 기용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영화에 필요한 의상이나 소품을 직접 소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식으로 화면에 등장시켜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www.kossa.or.kr

    한마디로 감독이 ‘공격 장면이야’ 하는 지시만 떨어뜨리면 자기들이 다 알아서 움직이기 때문에 자잘한 연기 지도나 장면 설명이 전혀 필요가 없었다. 이런 자세한 설정이 필요 없다는 것이 일을 얼마나 쉽고 빠르게 하는지는 단 한 번이라도 영화촬영 현장을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영화에 등장하는 각종 차량과 전차조차 모두 개인 수집가들의 소유물을 임대해 촬영에 동원한 것이다. 이렇게 열성적으로 참여한 수집가와 리인액터들 덕분에 영화는 1944년 여름의 노르망디 전투현장을 생생하게 되살려 놓을 수 있었고 전세계적으로 대히트를 기록했다. 국내에서도 이런 영화가 하나쯤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날이 오면 정말 신명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까지 군사애호가의 세계를 간단하게나마 소개해 보았는데, 혹시 흥미가 있는 분들을 위해 입문할 수 있는 길을 알려드리며 글을 마칠까 한다. 현재 밀리터리 관련 서적은 몇 종이 있지만 대부분 군인이나 전문 군사연구원을 위한 책들이다. ‘밀리터리 월드’ ‘군사세계’ ‘국방과 기술’ 등의 잡지가 이에 해당한다. 일반인을 위한 밀리터리 관련지식이나 서바이벌게임, 리인액트먼트 게임 등을 소개하는 잡지로는 (주)호비스트에서 발행하는 월간 ‘플래툰’이 있다.

    서바이벌게임 쪽에 흥미를 갖고 계신 분들이라면 하이텔에 접속해 GO SGA를 입력하면 서바이벌게임 동호회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 밖에 기타 통신사에도 서바이벌게임 동호회가 활동중이다. 인터넷을 이용하는 분이라면 www.kossa.or.kr로 가시면 한국 서바이벌게임 연맹의 홈페이지로 들어갈 수 있다. 이곳에 들어가면 지부별로 신규회원의 가입 및 활동을 도와주고 서바이벌게임 전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