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지조론’ 낳은 370년 명가의 저력

  • 조용헌·원광대 사회교육원 교수

    입력2006-08-11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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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 ‘삼불차(三不借)’ 원칙을 370년간 지켜온 조지훈의 생가 호은종택. 조지훈도 삼불차 집안의 훈도를 받으면서 자라나 ‘지조론’을 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굳세게 명가의 지조를 지켜오면서 박사만 14명 배출시킨 산골동네 주실마을 조씨 집을 들여다보니….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 ‘땡감을 따먹고 살아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라는 한국 속담이 있다. 죽어서 저승 가는 것보다는 어찌되었건 간에 숨이라도 쉬고 살아 있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만고풍상을 겪어본 팔십노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면 삶에 대한 애착이 어떠한 것인지를 새삼 느낀다.

    냄새가 진동하는 개똥으로 범벅된 개똥밭에 굴러도, 떫디 떫은 땡감을 삼시 세끼 목구멍에 삼키더라도 죽음보다는 삶이 낫다는 것이 한국 사람들의 사생관(死生觀) 아니었나 싶다. 정말 끈끈한 사생관이다. 필자가 과문한지는 모르겠지만, 세계 어디에도 이처럼 질기디 질긴, 사생관이 농축된 속담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 속담대로라면 한국 사람들의 자살률은 세계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어야 맞지 않을까?

    ‘개똥밭에 굴러도’ ‘땡감을 따먹고 살아도’가 형성된 이면에는 우리 조선사람들이 겪은 근세 100년간의 눈물겨운 역사가 있다. 조선후기 탐관오리들의 끝없는 착취와 굶주림, 참다 참다 못견뎌서 백성들이 떨쳐 일어선 동학농민혁명과 죽음, 식민지 36년간 쥐어짜는 수탈과 압박, 뒤이어 6·25라는 겁살, 자유당 정권의 혼란과 부패….

    정말이지 이처럼 눈물나는 근세 100년을 겪은 민족이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눈물어린 빵을 너무 지나치게 먹은 감이 있다. 근세 100년 동안 한국인들은 마치 공수부대의 살벌한 유격 훈련을 받았다고나 할까. 고강도 훈련 과정에서 고래심줄 + 잡초와 같은 끈기와 생존력을 체득하게 된 한국인이다.

    혹독한 고생을 겪고 살아남은 인간은 대략 2가지 유형으로 변화해간다. 하나는 생존을 위해서 품격이고 나발이고 다 던져버리고 악착같은 인간으로 변해가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달관(達觀)하는 인간으로 변해간다. 비율을 따져보면 대략 8대 2 정도로 전자의 인간형이 많지 않나 싶다. 유감스럽게도 달관의 인품보다는 체면이고 자존심도 던져버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앞에 큰 감을 놓고 보려는 범부(凡夫)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우리 인간세상이다.



    악착같은 인간형에게서 우리는 강인한 생명력은 느낄지 몰라도, 그윽하게 풍겨오는 초절(超絶)의 향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해관계 때문에 왔다 갔다 하지 않는 일관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도덕경’의 ‘총욕불경’(寵辱不驚:총애를 받거나 욕됨을 당해도 놀라지 않음)의 경지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소설가 서머싯 몸도 ‘서밍업(Summing up)’에서 ‘Man is inconsistent(인간의 속성은 일관성이 없다)’라고 설파한 바 있듯이, 범부가 일관성을 견지하고 지조를 지키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 일관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거기에 비례하여 현실에 돌아오는 결과는 불이익이라는 차디찬 열매였음을 길지 않은 인생에서 여러번 경험하였다.

    그렇기에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년)이 죽으면서 남긴 절명시 한구절, ‘秋燈掩卷懷千古하니 難作人間識字人(가을 등불 아래에서 책을 덮고 지나간 천년 세월을 회상하니, 인간으로서 식자 노릇하기가 정말 어렵구나)’을 가슴속에 새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래에도 한국 사회의 여러 명망가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이해타산 때문에 왔다갔다 하다가 훼절하고 망신당하는걸 지켜보면서, 식자 노릇하기가 쉽지 않고 인간으로서 한평생 지조를 지키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삶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물론 지조를 지키면서 살아가기에는 우리 근대사가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가시밭길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숱한 변절과 기만을 상황 탓으로 합리화하기에는 내면의 양심과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양심과 자존심을 지킨 지조 있는 인간을 보고 싶다!

    지조론으로 유명한 조지훈

    조지훈선생(趙芝薰, 1920∼1968년)은 시인이지만 그가 남긴 ‘지조론(志操論)으로 더 유명하다. 나 역시 조지훈을 시보다는 지조론의 저자로 기억한다. 지조론에 그 어떤 힘이 담겨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그를 ‘마지막 선비’ 또는 ‘지사문인(志士文人)’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명한 ‘지조론’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하는 자이기 때문에 지도자, 배신하는 변절자들을 개탄하고 연민하며 그와 같은 변절의 위기 직전에 있는 인사들에게 경성(警醒)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식견은 기술자와 장사꾼에게도 있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조지훈은 말로만 지조를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처신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일제때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잡혀가 신문을 받고 풀려난 후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신분으로 숨어 지냈다. 비록 총을 들고 항일투쟁은 하지 않았지만 비굴하게 일제에 날품팔이와 같은 행동은 결코 하지 않았다.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林鍾國)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은 문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지훈을 꼽고 있다. 광복 이후 삶의 궤적을 보아도 선비로서 품격을 잃지 않았다.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필자는 조지훈이 남긴 어떤 시보다도, 바로 이 대목에 그가 일생 연마한 내공(內功)이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남긴 이 초식은 입에서 휘파람처럼 나온 소리가 아니라, 저 아랫배 단전(丹田)에서 수십년 가다듬어 올라온 소리임이 틀림없다. 매사를 파고 들어가면 연원(淵源)이 있고 끌탱이가 있는 법이다. 단전에 지조의 힘이 차곡차곡 쌓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의 적공(積功)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조론’을 낳은 조지훈의 연원과 끌탱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정신을 낳게 한 배경이 무엇인가? 그것이 궁금하였다. 한국이 비록 작은 나라지만, 국토가 좁다고 해서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찾아보면 골짜기 골짜기마다 그래도 인물이 있다. 천하명산(天下名山)을 주유(周遊)하는 취미를 가진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그 인물의 출산지를 보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조지훈의 생가인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을 찾아가 보았다.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경북 봉화쪽에서 청량산(淸凉山)을 끼고 돌아 들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에서 영덕 쪽으로 가다가 영양으로 꺾어 들어와 주실로 가는 길이다.

    영양으로 가는 길은 부드러운 길이고, 청량산을 돌아 들어가는 길이 훨씬 장엄한 것 같다. 청량산이 어디 보통 산인가. 층층의 바위 절벽, 마치 중후하고 청결한 신사의 기품을 느끼게 하는 바위절벽이 돋보이는 산이다. 산의 이름처럼 산의 전체적인 기운이 맑고 상쾌하다. 이런 산이 남아 있다는 것은 축복 아니겠는가! 아직 관광객의 탁기로 오염되지 않은 산임을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이 항상 청량산을 흠모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다.

    내가 보기에 청량산은 야성과 품위가 어우러진 산이다. 승용차 창문을 열고 청량산 정기를 아랫배 단전으로 끌어당겨 본다. 단전으로 들어간 정기는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나의 뇌수(腦髓)까지 충실하게 채워줄 것이 틀림없다. 이런 길이라면 돌아다녀 볼 만하다. 지금 이 길을 달리고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三不借의 조지훈 생가

    청량산을 지나 첩첩 산중의 산길을 20분 정도 더 가니 주실마을(注谷里)에 닿는다. 동네는 60 가구 정도에 200명 남짓한 주민이 거주한다고 한다. 조지훈의 생가를 동네사람에게 물으니 동네 중심부의 맨 앞집이란다.

    대문 옆에는 ‘호은종택(壺隱宗宅)’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조지훈의 생가는 보통 집이 아니라 종택(宗宅)이다. 즉 그는 종가에서 태어난 것이다. 호은(壺隱)은 주실 조씨(趙氏)들의 시조이자, 1629년(인조7년) 주실에 처음 들어와 이 동네를 일군 사람의 호이다.

    그러니까 이 집은 370년의 역사를 지닌 집이다. 4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집안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만한 노하우가 있었을 것 아닌가.

    현재 이 집을 관리하고 있는 조동길(趙東吉)씨를 만났다. 객지에서 공무원 생활하다가 정년퇴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종택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말년을 의미있게 회향(回向)하고 있는 셈이다. 생년이 신미생(辛未生)이라고 하니까 올해 칠십의 연세다. 꽉 다문 입과 약간 매서운 눈매, 그리고 깔끔한 차림새로 보아서 음양오행론으로 보면 ‘금(金) 체질’에 속하는 관상이다.

    대개 금 체질들은 맺고 끊는 것이 정확한 사무라이 기질이 강하다. 이야기를 할 때도 앞뒤가 분명하고 요점만 이야기하는 특징이 있다. 서론이 짧고 뼈다귀만 이야기하므로 인터뷰 상대로는 최적이다.

    “호은종택에는 370년 동안 내려온 가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삼불차(三不借)라는 것이죠.”

    “삼불차(三不借)가 무슨 뜻입니까?”

    “3가지를 불차한다, 즉 빌리지 않는다는 뜻이죠. 첫째는 재불차(財不借)로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서 빌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불차(人不借)로 사람을 빌리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문불차(文不借)인데,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 삼불차를 호은(壺隱) 할아버지 때부터 현재까지 계속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삼불차 중 두번째의 인불차가 확실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아- 그것은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른 종가들은 중간에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많이 들였지만, 이 집안에는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16대 동안 양자를 들이지 않고 친자로 계속 이어져왔죠. 우리 주실 조씨들은 대체로 성질이 좀 꼿꼿한 편입니다. 머리를 숙이지 않으니 손해도 많이 봅니다. 주실 조씨들이 공직에도 많이 가 있는데 뇌물 받아 먹고 형무소에 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손해 보면 보았지 비굴하게 살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

    금체질의 검기(劍氣)를 지닌 조동길씨의 대답이다.

    그렇다! 호은종택은 삼불차의 집안이다. 조지훈 선생의 집안에 370년 동안 이어져온 가훈 삼불차는 한마디로 요약하면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살자는 정신이다.

    가훈을 이렇게 정한 걸로 보아서 호은공(壺隱公)이라는 양반의 성품이 짐작된다. 대단히 자존심이 강하고 강직했던 분이었던 것 같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살자는 것이 어디 쉬운 각오인가! 그것도 당신 자신에게만 강요한 원칙이 아니라 후손 대대로 그렇게 살도록 당부한다는 게 어디 보통 신념인가!

    이 쾌남아의 사주팔자(四柱八字)나 한번 뽑아보면 대강 어떤 사람인가 짐작해 볼 수 있을텐데, 생년월일을 알 수가 없고 초상화도 남아 있는 게 없어서 아쉽기만 하다.

    여하간 나는 삼불차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지훈의 ‘지조론’은 삼불차의 바탕 위에서 나온 것이다. ‘강장(强將) 밑에 약졸(弱卒) 없다’는 말마따나 그 선조에 그 후손이다. 조지훈은 어릴 때부터 삼불차 집안의 훈도를 받으면서 자랐기에 지조론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400년 가까이 내려온 집안의 자랑스런 전통을 돈 몇푼하고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아니면 일신의 출세와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이래서 전통은 무섭다. 전통은 불가(佛家)의 엄한 계율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조만 가지고 370년 동안 집안을 유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본다. 물질력 없이 정신력만 가지고 연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고금의 이치다. 강직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도 있어야 한다.

    이런 각도에서 삼불차를 뒤집어 보자면, 빌리지 않아도 될 만큼 재(財) 인(人) 문(文) 3가지 요소를 주실 조씨들이 갖추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돈이 없어서 굶어 죽는 상황에 무턱대고 재불차만 부르짖을 수 없은 법이며, 후사가 없어서 대가 끊어졌으면 현재까지 집안이 내려왔겠는가. 무식한 사람이 문불차를 주장한다는 것이 어디 성립될 수 있겠는가. 주실 조씨들이 재물과 인물과 문장을 유지해온 지혜를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에 이 3가지 요소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재물을 보자. 호은 종택 앞에는 논 50마지기가 있는데 평수로는 1만 평이다. 이 논은 370년 전 호은공 때부터 마련해 놓은 문전 옥답이다. 중간에 누가 손댄 사람 하나 없이 현재까지 그대로 내려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물과 문장을 보자. 주실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나왔다는 점이 주목된다. 박사만 해도 14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궁벽진 산골 동네에서 14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긴 있는 동네다. 전북 임실군(任實郡)의 삼계면(三溪面)이라는 곳에서도 박사가 40여 명 나왔지만, 그것은 면 단위이고 여기는 일개 조그만 마을이다. 조그만 마을 하나에서 현재까지 14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더군다나 주실마을에서 나온 박사들은 시원찮은 나이롱들이 아니다. 한국 인문학의 대가(大家)들이다. 대표적인 3인방만 꼽자면 조동일(趙東一), 조동걸(趙東杰), 조동원(趙東元) 교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조지훈 선생의 호적 이름이 조동탁(趙東卓)이니까 이들은 모두 동자 돌림의 같은 항렬이다.

    서울대 국문학과의 조동일 교수는 ‘한국문학통사’(6권)로 유명한 학자다. 한국문학 전체를 삼국시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통시적으로 정리한 이 책은 문학 뿐만 아니라 역사와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까지도 필독서로 꼽는다. 조동일 교수 특유의 직절(直切)한 필치로 문사철(文史哲)을 꿰뚫은 명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동일 교수는 93년에 나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 책 ‘우리 학문의 길’을 펴낸 바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조교수의 팬이 됐는데, 그는 외국이론의 수입중개상 노릇이나 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을 통렬히 비판한다.

    “학문의 수입업자나 하청업자 노릇을 하면서 행세하려고 하지 말고, 요즈음 유행하는 문자로 국제 경쟁력을 가진 자기 상표의 제품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생각이 깨인 다른 모든 나라에서 함께 채택하고 있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노선이다.”

    그는 그만 굽실거리고 이제는 자기 상표의 제품을 내놓을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주장한다. 조교수의 글에서는 ‘주체성’이 느껴진다. 지조와 자존감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국민대 대학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는 조동걸(趙東杰) 교수는 고려대의 강만길 교수와 함께 근세사의 양대 고수로 꼽히는 학자다. 또 성균관대 부총장을 지낸 조동원(趙東元) 교수는 발로 뛰어다니면서 한국의 금석문(金石文) 탁본을 20년에 걸쳐 정리한 ‘학국금석문대계’(韓國金石文大系, 7권)의 저자다. 남한 전지역의 비석에 새겨진 금석문을 집대성했기 때문에 현장에 직접 가지 않더라도 이 책만 있으면 원본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미술사, 역사, 불교 ,민속, 도교, 서예 전공자들에게 필수 장서임은 물론이다.

    요즘에야 인문학이 파리 날리는 신세로 전락하여 겁없이 함부로 인문학을 전공했다간 자칫 쪽박차기 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 그 민족의 혼과 정신은 역시 그 나라의 인문학에 들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인문학이 죽으면 그 나라의 주체성도 죽는다. 이런 점에서 주실마을 태생의 인문학자 3인방을 경외(敬畏)의 염(念)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다 조지훈까지….

    주실마을 조씨들의 항렬을 따져 보면 동자(東字) 윗대 항렬은 영자(泳字)가 된다. 항렬 정하는데도 법칙이 있다. 오행(五行)의 상생(相生) 법칙으로 볼 때 목(木)인 동 자를 생해주는 것은 수(水)인 영 자 항렬이다(水生木의 이치).

    납북 한의학자 조헌영

    영자(泳字) 항렬 가운데서도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은영(趙銀泳, 1896∼1970년), 조헌영(趙憲泳, 1899∼1988년), 조준영(趙俊泳, 1903∼1962년), 조애영(趙愛泳, 1911년∼) 4남매가 그렇다. 은영은 일본 와세다대 출신으로 국립도서관장을 지냈고, 헌영은 일본 중앙대 출신의 유명한 한의학자이고, 준영은 보성고보를 나와서 초대 민선대구시장, 경북도 지사를 지냈으며, 애영은 여류 시조시인이다.

    이중에서 조헌영이 바로 조지훈의 부친인데 한의학의 대가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납북된 뒤에도 한의학을 계속 연구하여 많은 한의학 제자들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상당수의 이북 한의학자들이 그의 제자라는 것이다.

    조헌영이 한의학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있다고 한다. 영문학도인 그가 엉뚱하게도 한방에 정통하게 된 것은 일본 유학시절 병에 걸린 친구를 치료하기 위해 독학으로 ‘동의보감’을 연구한 결과라는 것이다.

    원래 조헌영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에 머물며 허헌(許憲)이 회장으로 있던 신간회 동경지회장을 지냈다. 귀국한 후에도 신간회 총무 간사를 지냈는데, 신간회가 해산된 뒤 일경의 감시를 피하는 방편으로 서울 명륜동과 성북동에 ‘동양의약사’라는 한의원 간판을 달고 의원 행세를 하며 광복을 기다렸다고 한다.

    그는 한편으로 ‘동양의학사’ ‘통속한의학원론’ 등 전문 한의학서를 여러 권 저술했는데, 한때 한의과대학의 교과서로 사용됐다. 이 책자에 대해 경희대 한의과대학 김병운(金秉雲) 교수는 “한의학의 과학성과 민족의학적 가치성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입문서”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한의사 일 외에 조선어학회가 주관한 ‘한글맞춤법통일안’ 심의위원을 지냈다. 광복 후 고향에서 한민당 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민족 반역자를 척결하기 위한 반민특위위원에 선임된 후 한민당과 결별했다. 2대 의원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나와 연속 당선되었다. 그러다가 6·25전쟁 때 납북됐는데, 북한에서도 한의학 연구서를 내는 등 북한 한의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한다. 북한은 88년 5월 평양방송을 통해 ‘조헌영이 노환으로 작고했다’고 그의 별세를 보도했다(조선일보 ‘新名家’, 1995.6.12일자에서 인용).

    역사학자 조동걸이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기술한 ‘주실이야기’를 보면 1930년대에 조헌영이 약재를 채취하기 위해서 동네 초동(樵童)들을 데리고 경북 영양 일월산을 누볐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조지훈의 부친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근영, 헌영, 준영, 애영 4남매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바로 조인석(趙寅錫, 1879∼1950년)이다. 영자 위 항렬은 금(金)인 석자(錫字)이다(金生水의 이치). 조인석은 1900년 경 서울에 올라가 개화가 대세임을 목격하고, 동네에 돌아와 신학문을 가르치는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종가이자 자신의 집인 호은종택에 설치한다. 그는 ‘초경독본(初經讀本)’이라는 청소년용 교육 책자를 저술하고 동네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계몽가이자 교육자였던 셈이다.

    조인석은 자식 4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교육했지만 그 자신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여기에는 6·25 전쟁의 비극이 개입돼 있다. 당시 그의 3남인 준영이 경북도경국장을 지내고 있었기에 아버지인 조인석은 좌익 청년들에게 매일 시달렸다.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집에 들어와 “이 영감! 아들 어디에 있어? 아들 찾아내?” 하면서 칠십노인에게 반말로 모욕을 가하자 참지 못하고 마침내 근처 방죽으로 가서 투신 자살하였던 것이다.

    나는 조인석의 자살도 주실 조씨들의 전통과 직접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존심과 목숨 중에서 자존심을 선택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은 칠십 나이가 되면 어지간한 수모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 마련인데, ‘삼불차’의 지조를 중시하였던 선비 조인석은 새파랗게 어린 것들로부터 이런 치욕을 받고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된다. 조인석은 조지훈의 직계 조부다. 1950년 당시 30세였던 조지훈은 칠십 조부의 자살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기왕 족보 조사한 김에 조인석의 부친도 알아보자. 석자 위 항렬은 토(土)로 기자(基字)다. 조인석의 부친 조승기(趙承基, 1836∼1913년)는 일제가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을 하였다. 조승기 역시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행동하는 선비였던 것이다.

    이처럼 주실 조씨들은 학자도 많고, 그 학자들도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는 백면서생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 날릴 줄 아는 행동하는 선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주실에서는 이외에도 많은 인물이 배출됐음은 물론이다.

    지리적 안목으로 분석

    경북 영양군 일월면의 주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이처럼 지조와 학문을 갖춘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배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재인문(財人文)의 삼불차를 4세기 가까운 세월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비방이 있었다면 그 비방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 방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그것이다. 이판이란 눈에 안 보이는 데이터(invisible data)를 가지고 사태를 파악하는 방법이고, 사판이란 눈에 보이는 데이터(visible data)를 가지고 사태를 파악하는 방법이다. 전자가 다분히 신비적인 파악이라면, 후자는 요즘 말로 합리적인 파악이다. 사판이 드러난 현상에 대한 분석이라면, 이판은 배후에 잠재하는 부분에 대한 분석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어떤 사안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판과 사판 양쪽을 모두 보아야 한다는 것이 불가(佛家) 고승(高僧)들의 입장이다. 한쪽만 보아서는 미급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을 모두 통과해야 실수가 적다. 그래서 이판사판이란 말이 나왔다. 이걸로 보나 저걸로 보나 답은 하나로 나왔으니 행동에 옮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판사판이다.

    불교의 화엄철학에서는 이 경지를 이사무애(理事無碍)라고 표현한다. 이(理)와 사(事)에 모두 걸림이 없는 경지다. 고려 때까지만 하더라도 국사(國師)나 왕사(王師) 제도가 있었는데, 이런 정도의 경륜은 이사무애의 경지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요즘 공식적인 국사 제도는 사라졌지만 가톨릭의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어느 정도 국사 노릇을 한 듯하다. 최근 20년간 대통령이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김추기경 하고 상의하는 경우가 많아서 하는 말이다.

    아무튼 사판적(事判的) 분석(分析)이야 세상사에 밝은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제쳐두고, 주로 이판적 입장에서 주실마을의 인물배출 배경을 뜯어보자.

    이판의 입장이란 천문(天文) 지리(地理) 인사(人事), 삼재(三才)의 안목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천문이란 시간, 즉 타이밍을 가리킨다. 지리란 넒은 의미로는 환경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명당이다. 인사는 넒은 의미로는 천문과 지리를 매개하는 존재인 사람을 말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인간의 몸에 대한 식견을 지칭한다. 이 3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일이 성취된다.

    대만 총통의 국사를 역임한 남회근(南懷瑾, 1918∼) 선생은 그의 역저 ‘역경계전별강(易經繫傳別講, 국내에서는 ‘주역강의’로 번역돼 있음)에서 이를 명리(命理), 지리(地理), 의리(醫理)로 요약한다.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관습에 따르면 식자라면 반드시 이 삼리(三理)를 공부해야 한다.

    자기 운명의 이치인 명리(命理)를 알아야 천시(天時)가 언제 오고 가는가를 알 수 있고 거기에 따른 진퇴를 결정할 수 있다. 지리(地理)를 알아야 살아 있을 때의 양택(陽宅)과 죽은 후의 음택(陰宅)을 제대로 잡을 수 있고, 의리(醫理)를 알아야 병의 원인을 파악해서 몸을 건강히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삼리 중에서 의리는 70년대 초반 한의학이라는 제도권 학문에 들어가 학문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지리와 명리는 여전히 제도권 밖에서 ‘학문적 시민권’도 없이 서성대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이긴 하지만 지리도 학문적 영역으로 조금씩 진입하는 분위기다. 서울대 최창조 교수가 한국사회의 식자층에 지리를 소개하면서 인식이 약간 개선된 것 같다. 미신 잡술이라는 종래의 인식에서 약간 벗어나 풍수라는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제일 천대받는 것이 명리다. 명리는 아직도 미아리 골목에서 잠자고 있는 것 같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새버렸지만 다시 주실마을로 돌아가자. 내가 보기에 주실마을은 삼리 가운데서도 지리적 안목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문화현상은 한국의 토양에서 우러난 문법으로 해석해야 깊이 들어갈 수 있으며, 나는 그 문법이 바로 지리라고 생각한다.

    주실마을의 가장 중심맥에 자리잡은 호은종택(壺隱宗宅) 터는 이름 그대로 호은공이 잡은 자리다. 한양 조씨인 호은공 선대는 한양에서 거주하다가 1519년 조광조의 기묘사화를 만나 멸문 위기에 처하자 전국 각지로 흩어져 피신했는데, 그 후손중의 하나인 호은공이 인조7년(1629)에 주실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호은종택이 자리잡은 지맥은 영양 지방의 명산인 일월산(日月山)에서 흘러 내려온 맥이다. 주실에서 일월산까지 능선을 타면 12km 정도다. 주실에 도달한 지맥은 야트막한 3개의 봉우리로 응결된다. 그 가운데 봉우리 밑 부분에 호은종택이 자리잡고 있다.

    호은종택에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이 집터를 잡을 때의 일화가 흥미롭다. 호은공이 매방산(梅坊山)에 올라가 매(鷹)를 날려 매가 날아가다가 앉은 자리에 집터를 잡았다는 일화다. 매방산은 100여m 정도의 야트막한 산으로, 주실에 맺힌 3개의 봉우리중 맨 오른쪽에 해당하는 3번째 봉우리다. 이때의 매는 아마도 야생 매가 아닌 집에서 꿩 사냥용으로 기르던 보라매로 생각되는데, 이 매가 앉은 지점은 흥미롭게도 물기가 질컥질컥 배어 있는 늪이었다고 한다.

    호은종택 터는 원래 늪지대였던 것이다. 늪을 메워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다소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매를 날려서 집터를 잡았다는 점, 그리고 늪지대를 메워 집을 지었다는 점에서 호은종택의 터잡기는 일상적인 택지법(擇地法)과다르기 때문이다.

    불가에서 고승들이 오리를 날려 그 오리가 착지(着地)하는 지점에 절터를 정한 경우는 발견된다. 전남 순천의 송광사(松廣寺)가 그런 경우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암자 터를 정할 때 오리를 날렸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사례는 조선중기 호남지역에서 많은 신통(神通)을 나투었다고 회자되는 진묵대사 역시 나무로 만든 오리를 날려 절터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불가에서는 오리를 해수관음(海水觀音)의 화현으로 보기도 한다. 항해를 업으로 하는 뱃사람들에게 해수관음은 바다의 풍랑을 다스리는 신으로 여겨지는데, 비록 오리는 바다가 아닌 육지의 저수지에서 살지만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물결 위에 떠 있을 수도 있어서 해수관음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물론 이때의 오리는 집오리가 아닌 청둥오리로 여겨진다. 이처럼 고대인들은 오리를 신령한 능력을 지닌 동물로 여겼다. 솟대 위에 나무오리를 만들어 올려놓는 한국의 민속도 이러한 신령함의 표현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여하간 불교에서 절터를 잡을 때 오리를 날렸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매를 날려 집터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호은종택에서 처음 접한다.

    왜 매를 날렸을까? 아마도 날짐승은 하늘에서 날다가 땅에 내려앉을 때 본능적으로 유리한 지점을 잡는 능력이 있지 않나 싶다. 동물은 사람보다 감각이 발달돼 있다. 매를 날린다는 것은 동물의 감각 내지는 본능을 이용하는 방법 같다. 물론 처음부터 무턱대고 매를 날리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어느 정도 범위를 잡아놓은 다음에, 정확한 지점을 찍을 때 매를 날리지 않았을까. 혹은 2∼3군데 후보지를 잡아놓고, 그 가운데 어느 쪽을 최종적으로 선택할 것인지 고심하다가 마지막 결정에 동물의 촉각을 이용했을 개연성도 있다. 일종의 동물점(動物占)이라고 볼 수도 있다.

    늪지에 집터를 잡은 도인

    그다음 주목할 사항은 평지나 언덕이 아닌 늪지를 집터로 선택한 부분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양택을 늪지에 잡은 경우를 나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절터를 늪지에 잡은 경우는 있다. 백제 때 무왕(武王)이 잡은 익산의 미륵사 터가 원래 늪지였고,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잡은 김제 금산사의 미륵전이 늪지였다. 이외에도 치악산 구룡사, 도선국사가 말년에 주석한 광양 옥룡사, 고창 선운사 대웅전 자리가 애초에는 늪지였다는 기록이 있다. 풍수의 좌청룡 우백호를 따지지 않고 늪지를 메워서 사찰을 세우는 것은 고대 불교에서 행해지던 유풍이다.

    늪지에 건물을 세우면 습기가 차서 목재가 쉽게 부식되기 때문에, 늪지를 메울 때는 반드시 숯을 집어 넣는다. 숯은 습기를 빨아들이는 작용이 탁월하다. 미륵사나 금산사 미륵전 자리에서 실제 숯이 출토되었는데, 호은종택 자리가 원래 늪지였음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 밑에도 숯이 깔려 있을 공산이 높다.

    아무튼 불교사찰이 아닌 유교 선비가 양택을 늪지에 잡았다는 사실은 상당히 이색적일 뿐 아니라 흥미로운 일이다. 매를 날려 터를 잡은 호은공도 정신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있었던 분이었다고 짐작된다. 호(壺)는 호리병을 지칭한다. 따라서 호은(壺隱)이란 호리병을 가지고 숨었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이는 다분히 도가적인 취향이 내포되어 있다. 호리병은 방랑과 은둔을 좋아하는 도사들의 휴대품이다.

    이렇게 볼 때 호은종택을 잡은 호은공은 주자 성리학을 연마한 유가의 선비이긴 하지만, 내면세계 한 부분에는 다분히 도가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호은공은 방외(方外)의 학문에도 일가견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붓처럼 생긴 문필봉

    호은종택의 대문을 등지고 정면을 바라보면 아주 인상적인 봉우리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다. 눈이 부실 정도의 봉우리다. 정신이 번쩍 나게 한다. 바로 문필봉(文筆峰)이라서 그렇다. 집터나 묘터의 정면에 위치한 산을 안산(案山)이라 하는데, 홍림산이라고 불리는 문필봉이 호은종택의 안산에 해당된다. 이 문필봉이 왜 눈부신가 하면, 그 모습이 너무 문필(文筆)처럼 뚜렷하고 대문의 정면 일직선상에 교과서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문필봉은 글씨 쓰는 붓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쉽게 말하면 정삼각형 산이다.

    삼각형 모양의 산은 오행으로 따지면 목형(木形)의 산이다. 풍수가에서는 문필봉이 정면에 있으면 공부 잘하는 학자가 많이 나온다고 본다. 문필봉이 안산으로 자리잡고 있는 지역에서 장기간 거주하면 그 기운을 받아 사람도 역시 문필가나 학자가 된다고 신앙하는 것이 풍수이다. ‘천지여아동일체 아여천지동심정(天地與我同一體 我與天地同心正, 천지와 내가 한 몸이요, 나와 천지가 같이 바른 마음)’이라는 한자 문화권의 세계관에 비추어보면 이러한 신앙은 납득이 간다.

    문필봉이 있으면 대개 그 동네에는 특출한 학자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문필봉이 보이면 나는 다짜고짜 그 동네에 들어가보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이 동네에 어떤 학자가 살았느냐고 동네 사람에게 물어본다. 십중팔구는 누구 누구가 있었다고 대답한다. 신기할 정도다. 문필봉이 있어서 학자가 나왔는가, 아니면 학자들이 문필봉을 보고 일부러 찾아 들어가서 학자가 나왔는가. 어찌됐든 둘 중 하나는 틀림없다.

    한국의 산천에서 주목할 현상은 삼각형 모양의 문필봉과 그 지역의 학자배출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산천과 인물이 같은 쳇바퀴로 돌아간다.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중간 공식은 범부인 나로서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드러난 결과를 놓고 볼 때는 분명 상관관계가 있는데 어쩔 건가! 문제는 중간과정의 공식을 현대인이 모른다는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문필봉이 보이는 터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땅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돈만 있다고 되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 서민들은 천신도 못했다. 특히 주실마을 앞에 보이는 문필봉 같으면 내가 살펴본 문필봉 가운데서도 최상급의 문필봉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양이 뚜렷하고 방정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쓰다듬어도 보고 보듬어도 보고 싶다.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 같다. ‘문필망식(文筆忘食)’이라고나 할까.

    폐일언하면 주실마을 산세의 모든 정기는 이 문필봉 하나에 집중되어 있다. 주실에서 학자가 많이 배출된 것도, 박사가 14명이나 나온 것도, 인문학의 조씨 3인방도 이 문필봉의 정기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주실 마을 박사들은 고향에 오면 그냥 가지 말고 이 문필봉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실 사람들도 이 문필봉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올해 4월에 제작된 ‘주실마을’이라는 14페이지짜리 팸플릿 첫 페이지는 문필봉 사진으로 시작된다. 첫페이지에 실었다는 것은 그만큼 마을의 명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마을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나이드신 어른들로부터 이 문필봉의 영험성에 대하여 귀가 아프도록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실 마을의 집들은 거의 이 문필봉을 향하여 방향을 잡고 있다. 문필봉을 안대(案帶)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일월산(日月山)에서 12km나 달려온 용맥(龍脈)은 주실에 와서 3봉우리로 맺혔다. 그리고 그 3개의 봉우리에서 제각기 인물들이 나왔다. 주실을 정면에서 보았을 때 제일 왼쪽에 있는 제1봉에는 노계(魯溪) 조후용(趙容, 1833∼1906년) 고택과 만곡정사(晩谷精舍)가 자리잡고 있다. 노계 고택에서는 주실마을 개화와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두석(斗錫), 붕석(朋錫,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용해(龍海) 등이 태어났고, 현대에는 운해(雲海, 의학박사, 한솔그룹)와 서울대 국문학과 조동일 교수의 생가이기도 하다.

    이 집은 ㅁ자집의 전형적 건축양식이라고 팸플릿에 소개되어 있다. 만곡정사는 조선후기 명문장으로 이름 높은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 1729∼1803년)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문하생들이 뜻을 모아 창건한 정자다. 만곡은 옥천공의 손자로 이대산(李大山)을 사사했고 많은 문도를 길러냈다. 만곡정사는 원래 영양 원당리에 건립했는데 순조 초에 주실로 옮겼다.

    만곡정사의 액자는 정조 때 영의정 번암 채제공(蔡濟恭, 1720∼1799년)이 직접 썼다. 채제공은 남인(南人)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채제공은 죽기 2년 전인 1797년에 78세의 노구를 이끌고 주실을 방문해, 그 기념으로 현판 글씨와 자기 친필 사인을 남겨 놓았다. 같은 남인으로서 정치적 동지이자, 학문으로 이름 높았던 만곡을 만나기 위해 적어도 열흘은 걸렸을 여로를 마다하지 않고 산넘고 물건너 이 심심 산골까지 찾아온 그 동지애와 의리 그리고 풍류가 느껴진다.

    200년 뒤의 어느 비오는 날, 글을 쓰기 위해 찾아와 처마 밑에서 그 현판에 어린 사연을 쳐다보고 서 있는 나그네의 소회(所懷)도 무량하기만 하다. 사실 채제공 뿐 아니라 당시 남인 계통 실학자인 이가환(李家煥)과 정약용(丁若鏞)도 주실 조씨들과 깊이 교유했다.

    만곡정사는 제1봉이 내려온 제일 끝머리에 위치하고 있다. 만곡정사 뒤의 입수맥(入首脈)은 바위여서 기운이 다른 곳보다 강하다. 흙에 비해서 바위가 깔려 있으면 기운이 강한 것으로 본다. 강한 곳은 일반 가정집으로는 부적당하고, 젊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학교를 세우면 좋다.

    정사 앞으로는 냇물이 활처럼 돌아 흐르고, 앞에는 문필봉이 도합 4개나 포진해 있다. 하나도 아니고 4개씩이나 푸짐하게 도열해 있는 것이다. 주실마을 전체에서 볼 때 이 위치가 문필봉이 가장 여러 개 보이는 장소다. 학문하는 정사로는 제대로 잡은 터 같다.

    호은종택과 옥천종택

    제2봉은 주실의 내룡(來龍) 중에서 가장 중심 자리다. 풍수에서는 항상 중심맥을 높이 친다. 호은종택과 주실에 있는 또 하나의 종택인 옥천종택(玉川宗宅)이 제2봉의 줄기에 자리 잡았다.

    호은종택은 제2봉의 맥이 내려온 끄트머리에 자리잡았다. 호박을 보면 가지의 끝에서 열매를 맺듯이, 땅의 기운도 위 보다는 아래에 그리고 끄트머리에 맺힌다. 이 터가 주실의 센터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집이 없어져서 빈터로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호은종택 바로 뒤에도 집이 있었다. 이 집에서 국민대 조동걸 교수가 태어났다. 그런가 하면 호은종택 바로 우측에도 집이 한 채 있는데, 이 집에서 성균관대 조동원 교수가 태어났다. 조지훈, 조동걸, 조동원 교수가 앞 뒤 옆집에서 태어났다. 재미있는 일이다.

    옥천종택은 주실 입향시조 호은공의 증손자이며 장사랑 조군(趙)의 둘째 아들인 옥천(玉川) 조덕린(趙德, 1658∼1737년)의 종택이다. 옥천공은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정자(正字), 세자시강원 설서(說書), 홍문관 교리(校理),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지냈다.

    옥천공은 당시 시폐를 비판한 ‘십조소(十條疏)’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십조소’ 중 열째 대목이 노론을 자극해 제주도로 유배당하던 도중 강진에서 서거하였다. 희당(喜堂, 草堂) 운도(運道, 月下) 진도(進道, 磨岩) 술도(述道, 晩谷) 거신(居信, 梅塢) 만기(萬基, 독립운동 유공자 건국훈장) 대봉(大鳳, 교육학박사, 영남대) 등의 명사가 이 종택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옥천공의 아들 희당이 아버지를 기려 별당을 세우고 당호를 초당이라 하였는데 그에 따라 아호도 초당이라 했다. 이걸 보아 만곡정사의 주인공인 조술도는 옥천공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주실마을 양택 중에서 옥천종택의 좌향(坐向)만 특이하다는 점이다. 호은종택을 비롯해서 다른 집들은 거의 간인좌(艮寅坐, 南西向)를 놓았는데, 옥천종택만은 거의 남향(南向)에 가까운 임좌(壬坐)다. 내룡도 2봉에서 맥 하나가 내려오다가 중간쯤에서 남쪽으로 70도 각도로 틀었는데, 그 꺾은 지점에 자리잡았다. 그러므로 옥천종택의 안대(案帶)는 문필봉이 아니다.

    대신 토금체(土金體, 산의 끝이 약간 평평한 모습)의 안대가 놓여 있다. 이러한 안대는 보는 사람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중후하고 의지가 굳은 인물이 나온다고 한다. 안대 높이도 호은종택에 비해서 그렇게 높지 않고 적당하다. 호은종택은 안산인 흥림산이 높아서 약간 답답한 감이 있는데 비해서 옥천종택은 전망이 훨씬 시원하다. 툭 트였다. 주실에서 가장 전망좋은 집인 것 같다.

    마을에 하나뿐인 우물

    옥천종택에서 주목할 우물이 하나 있다. 마당 오른쪽 담장 곁에 있는 자그마한 우물이다. 특별히 깊은 우물은 아니지만, 이 우물은 주실에서 하나뿐인 우물이라는 특징이 있다. 옛날부터 주실마을에는 이 우물 하나뿐이었다. 60여 가구 사는 동네에 우물이 하나뿐이니 물 길어다 먹기가 상당히 불편했을 텐데도 우물을 여러 개 파지 않고, 오로지 이 우물 하나만 사용하였다.

    현재에도 주실에는 우물이 없다. 대신 50리 떨어진 곳에서 수도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로 사용한다. 다른 동네 같았으면 젊은 사람들이 불편을 견디지 못하고 진작에 마당 한가운데 지하수 관정이라도 박았을 텐데 주실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이유는 무엇인가? 풍수적인 원리 때문이다. 주실은 배 모양의 형국이므로 우물을 파거나 지하수를 파면 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린다고 믿어 왔다. 구멍이 뚫리면 배는 침몰하게 마련이다. 고로 우물을 파면 인물이 안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을 현재까지 굳게 가지고 있다. 복제인간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이 과학시대에도, 이처럼 신화적인 사고를 지키고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조상의 유업을 지키려는 정신이 살아 있다는 징표다. 1년이 멀다 하고 세태가 바뀌는 요즘 400년의 전통을 지키는 유서깊은 마을이라 무언가 다르긴 다른 마을임을 이런 데서도 실감한다. 무언(無言)의 법도와 기강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저녁해가 서산에 기울어갈 무렵 인적 없는 옥천종택을 이리 저리 살피고 있는데 갑자기 시골 아주머니가 대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긴장한 표정의 아주머니는 나를 한참 살펴보더니 한마디 꺼낸다.

    “아이고 나는 물건 훔치러 온 도둑인 줄 알았네요.”

    “저 도둑놈 아니고 답사 나온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얼마 전에 도둑놈이 와서 현판을 뜯어간 적이 있어요.”

    이야기 끝에 아주머니는 잠깐 어디로 가더니 음료를 한 병 사와 먹으라고 준다. 옥천공 후손으로 옥천종택을 관리하고 있는 조석걸씨(63) 부인이다. 털털하고 마음씨 좋은, 시골의 전형적인 어머니 모습이다.

    유서깊은 동네에 오면 하룻밤 자고 가야 한다. 낮에 잠깐 들어 휑하니 사진만 찍고 떠나기보다는 하룻밤 자보아야 그 동네의 정기를 느낄 것 아닌가. 그러나 주실에는 여관이 없어서 숙소가 마땅치 않던 차에, 염치 불고하고 아주머니께 잠 좀 재워줄 수 있느냐고 부탁드렸다. 그리하여 그날 밤은 조석걸씨 사랑방에서 자게 되었다.

    주인양반 조석걸씨 역시 공무원 하다가 정년퇴직하고 고향에서 농사도 짓고, 주실마을의 여러 문화재와 옥천종택도 관리하는 분이다. 사랑방에서 조석걸씨와 옥천공에 관해 이야기하던 끝에 주실 조씨들의 기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도 새끼들이 셋인데 공무원 박봉으로 어렵게 애들 대학을 마쳤죠. 용돈 한번 넉넉하게 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새끼들한테 항상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 집안은 절대 부정한 방법으로 돈 벌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막내 아들놈이 중학교 교사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애가 학부형들이 성의 표시로 갖다주는 봉투를 전혀 안 받았던 모양입니다. 하도 거절을 하니까 지나치다고 생각했던지, 나중에는 교장선생이 따로 부르더랍니다. ‘어이 조선생, 너무 그래도 못쓰네’하고 타이르더라는 이야기를 저한테 합디다.”

    혹자에 따라서는 좀 지나치다고 평가할 수도 있는 대목이지만, 삼불차로 상징되는 370년 지조가 30대 초반의 조석걸씨 막내아들에게까지 유전(遺傳)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신교육의 전당 월록서당

    마지막으로 제3봉은 매방산이라 일컬어진다. 이 봉우리에는 월록서당(月麓書堂)이 자리잡고 있다. ‘주실마을’이라는 팸플릿에서 조동걸 교수는 월록서당을 이렇게 설명한다.

    “1765년에 한양 조씨, 양성 정씨, 함양 오씨가 협력하여 일월산 기슭을 업고 흥림산을 안대하여 낙동강 원류인 장군천을 끌어안은 곳인 주실 동구에 세운 서당이다. 조선후기 실학의 학풍과 더불어 교육의 대중화를 위한 서당 건립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주실에는 월록서당이 건립되어 이 고을 교육의 중심을 이루었다.…

    건물은 겹집이며 팔작집으로 지었다. 내부 중앙은 강당이고 양편에 넓은 방이 꾸며져 있는데 좌편방에는 존성재(存省齋), 우편에는 극복재(克復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구한말 이후에는 신교육의 전당으로 변신하였다. 식민지 시기에는 조석기(趙碩基)가 설립한 배영학당이 있었는데, 배영학당은 1927년에 조선농민사로부터 모범야학으로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도 야학은 계속되었던 한편 은화청년회와 주실 소년회의 연극과 음악회가 열리던 문화의 전당으로 구실하였다.”

    주실의 세 봉우리를 다시 정리하면 1봉에는 만곡정사와 조동일 교수의 생가가 있고, 2봉에는 호은종택과 옥천종택, 그리고 조동걸과 조동원 교수 생가가 있으며, 3봉에는 개화기 이후로 신교육의 전당인 월록서당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지령(地靈)이 헛되지 않아 봉우리마다 열매가 맺혔다…. 주실마을을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가슴이 뿌듯하다. 지조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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