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주5일 근무시대 200% 즐기기

사소한 재미에서 즐거움 찾아라

  • 김정운 명지대 교수 cwkim@mju.ac.kr

    입력2004-09-07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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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행권에 이어 제2금융권에도 주5일 근무제가 도입되는 등 사회 전반에 주5일 근무제가 확산되면서 여가 활용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 국내의 여가 관련연구는 아직 걸음마 단계. 그러나 외국의 경우 ‘레저 사이언스(Leisure Sciences)’란 학문으로 정착될 만큼 연구가 활발하다. 잘 놀아야 잘 산다는 건 자명한 사실. 우리 현실에 맞는 여가문화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나.
    몇년 전 방영된 TV 연속극에서, 우연히 마주친 첫사랑 황신혜에게 최민수가 던진 대사다. 물론 이 순간부터 황신혜의 마음이 흔들리며 상투적인 내용이 전개된다. 개인적 판단으로는 ‘모래시계’의 “나, 떨고 있니?” 이후 최고의 대사가 아닌가 한다. 따지고 보면 “너 행복하니?”는 “나, 떨고 있니?”보다 훨씬 더 무서운 질문이다. 왜 사느냐는 말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성공’ ‘성취’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산다. 그러나 사회적 성공이 성공 그 자체로만 끝난다면 누가 그처럼 죽을 힘을 다해 매달리겠는가.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란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과연 목표한 바를 성취하면 행복해질까. 목적한 바를 이룰 때 얻어지는 행복이란 잠시뿐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너, 행복하니?”란 질문에 우리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끼는 것일 게다. 그렇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산다.

    ” 재밌잖아요! ”

    2002한일월드컵 때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서 미친 듯 응원에 열중하고 있던 한 20대 초반 청년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더운데 나와서 고생하느냐, 힘은 안 드냐?”고. 청년은 “재밌잖냐”는 한 마디로 모든 질문을 일축했다. 정말 그렇게 재미있나 싶어 그 다음 경기 날 거리 응원에 나섰던 40대 교수는 일사병에 걸려 이틀을 꼬박 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거리응원에서는 경기 내용을 거의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월드컵 당시 갑자기 나타나 한국을 온통 빨갛게 물들인 ‘붉은악마’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력했다. 뿌리 깊은 레드 콤플렉스를 단번에 뿌리 뽑아버린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바로 ‘재미’다. 붉은악마의 힘은 재미에 기인한 것이다. ‘그물에 공 차 넣기’를 구경하는 ‘사소한’ 재미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이데올로기보다 더 강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무엇이 이러한 ‘재미의 힘’에 대해 속시원히 설명해낼 수 있겠는가.



    4년 전 프랑스월드컵 당시, 우리 선수들은 단 한번의 승리라도 얻기 위해 너무도 열심히 뛰었다. 그건 축구시합이 아니라 전투였다. 머리가 깨져 피가 나도 뛰었다. 경기종료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필사적이 되었다.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다 보니 다리에 쥐가 나 쓰러지는 선수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차례도 이기지 못했다.

    2002년, 신이 나면 어퍼컷을 올려치는 히딩크라는 묘한 사람이 그때와 별 차이 없는 선수들을 데리고 월드컵 4강까지 올라섰다. 오직 정신력으로, 경기장에서 숨을 거두겠다는 각오로 뛰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믿어왔던 선수들에게 이 사나이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당부했다. “축구를 즐겨라!”

    월드컵이 끝날 즈음 한국인들이 히딩크에게 어렴풋이 배운 것은 축구는 재미있는 게임, 즉 놀이일 따름이며, 놀이는 즐기는 사람만이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에 목숨 걸기를 즐겨 하는 한국사람들이지만 공놀이에 목숨을 걸려고 한 것은 축구라는 ‘놀이’의 본질을 몰랐기 때문이다. 즐기는 사람만이 이길 수 있다.

    놀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

    산업혁명 이후 나타난 대다수 학문분과들이 초점을 맞춘 것은 생산하는 인간,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 공작인)였다. 이 호모 파베르는 사실 재미나 즐거움과는 별로 관계없는 인간상이다. 이렇듯 노동과 여가의 이분법에 바탕을 둔 근대학문에서 여가란 노동의 부차적 산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즐거움이나 재미와 관련해 여가가 우리의 관심대상이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여가 개념이 ‘노동시간 이외의 남는 시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 또한 산업혁명 이후의 일이다. 가내수공업과 농업에 기반한 사회에서 노동시간을 정해놓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한 일이었다. 밤낮, 계절 등 자연적 시간이나 가변적인 수요에 따라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산업혁명 이후엔 동일한 시간에 수많은 노동력이 투입되는 새로운 방식이 일반화됐다. 노동시간을 정해놓고 일하고, 그 시간에 상응하는 임금을 받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가능해진 것이다. 대량생산을 위한 집단적 노동력 투여가 전제가 되는 이런 산업사회에서 여가란 단지 ‘노동을 위한’ 시간이다. 즉 노동으로 지친 몸을 회복하는 시간으로나 존재했을 뿐 재미나 행복, 즐거움 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렇다면 노동과 여가의 이분법적 사고에 전환이 이뤄진 것은 언제쯤일까.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는 각종 기계가 개발되고 노동시간이 단축되면서부터 여가는 노동하고 남는 시간, 노동으로 지친 몸을 회복하는 시간이란 제한적 의미를 탈피할 수 있었다. 이는 20세기말의 일이다. 여가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신의 취미나 가족을 위한 시간, 여행 등에서 점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은 주말의 즐거움을 위해 주중에 노동한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른다. 여가를 위해 노동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노동을 위한 여가’에서 ‘여가를 위한 노동’으로의 인식 전환이 가능해진 것은 무엇보다 주5일 근무제의 도입 덕분이다. 주5일 근무제는 수면시간을 제외한 자유시간, 즉 자신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노동시간보다 더 많아짐을 의미한다. 사회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주5일 근무제 도입은 산업사회에서 여가사회로 전환하는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산업사회에서 인생의 목적은 노동을 통한 성취와 성공이었다. 때문에 여가는 ‘노동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를 뜻할 뿐이다. 그러나 노동이 여가를 위해 존재하는 여가사회에서는 자유의 개념이 ‘무엇을 위한 자유(free to)’ 즉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유를 뜻한다. 인생의 의미가 노동을 통한 성취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통한 행복으로 전환된 것이다.

    21세기 정보화사회에서의 노동은 산업사회의 노동과 그 내용 및 형태가 전혀 다르다. 일하는 시간이 아닌 창의적 능력의 유무에 따라 생산력이 결정되는 것이다. 노동시간이 아닌 창의적 지식을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쌓느냐가 관건이 되는 셈이다. 이같은 지식기반사회에서 재미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재미가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창의적이 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여가사회는 이처럼 놀듯이 일하고 일하듯이 노는 지식기반사회에서 시작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바본가? 공짜로 놀아주게!”

    글머리에 적은 세 가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면 여가의 개념이 더욱 분명해진다. 어떠한 방식이든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그러나 행복을 무엇인가 성취한 뒤에 얻어지는 결과로만 생각하면 웬만해선 행복해지기 어렵다. 아무리 좋은 차를 사도, 아무리 큰집을 사도 우리가 느끼는 행복은 순간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가학자들은 행복을 과정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재미있어 하는 일을 할 때 느끼는 만족감, 즐거움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 재미가 곧 행복이라는 논리다. 결과로서의 행복은 어지간해선 얻기 힘들지만, 과정으로서의 행복은 자기가 즐기는 일만 있으면 언제든 느낄 수 있는 기쁨이기에 그렇다.

    최근 신학문으로 급부상한 여가학(餘暇學)의 관점에서 볼 때 재미라는 것은 주로 놀이이론과 관련돼 있다. 조금 학문적으로 얘기하자면, 놀이에 관해서는 호이징가(Huizinga)의 문화학적 이론에서부터 피아제(Piaget)의 발달심리학 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명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이 한결같이 정의하는 놀이의 기본 속성은 자발성이다. 놀이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어야 하며 규칙을 임의로 정하거나 바꿀 수도 있어야 한다. 아무리 자신이 재미있어 하는 놀이도 타인의 강요나 외적 보상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면 금방 싫증나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놀이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한적한 곳에서 글을 쓰는 한 소설가가 있었다. 어느날부턴가 동네아이들이 바로 자신의 서재 창문 앞에 모여 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참을만하더니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이 늘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졌다. 아이들을 야단치고 달래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루는 그가 아이들을 불러 설명했다. “내가 그 동안 외로웠는데 너희들 노는 소리를 들으니 너무 행복하다. 앞으로 매일 우리집 앞에 와서 놀아다오. 그 때마다 1000원씩 주마.” 그 후 아이들은 열심히 와서 놀았고 1000원씩을 받아갔다. 며칠이 지난 후 소설가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내가 요즘 돈이 없다. 하루만 공짜로 놀아줄 수 없겠니?” 아이들은 몹시 화를 내며 돌아갔다. “아저씨!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세요? 공짜로 놀아주게!”

    자발적으로 잘하던 일도 남이 시키면 이렇게 재미없어지는 법이다. 프로게이머가 되기 위해 열심히 PC방에서 인터넷게임을 하던 청년이 정작 프로게이머가 되니 게임이 재미없어졌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자발적으로 놀이에 참여해 즐거움을 추구하는 심리적 과정을 ‘내재적 동기’라고 하는데, 이때 얻어지는 보상은 돈처럼 외적인 것이 아니다. 즐거움, 재미와 같은 내적인 보상이다.

    자발적 놀이의 백미는 ‘축제’

    정말 재미있는 일을 할 경우 사람들은 누구나 몰입하게 된다. 집중한 나머지 무아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정말 재미있는 일에 몰두하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놀이이론을 통해서 보면 행복해지기는 참으로 간단한 것 같다. 단 자신이 재미있어 하는 일이 있을 때에 한해서라면.

    그러나 아쉽게도 여가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대다수 한국인들은 행복해지기 어렵다. 자신이 정말 재미있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설령 재미있어 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재미있는 일을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타인이 제공하는 재미를 소비하는 식이 대부분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화보기나 TV 시청이다. 원래 놀기를 즐겨하던 우리 민족이 뒤떨어진 산업화 과정을 짧은 시일내에 만회하려다 보니 생긴 결과라 하겠다.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는 놀이가 집단적 형태로 나타나면 ‘축제’라는 이름이 붙는다. 축제가 없는 민족은 없다. 개인적인 재미뿐 아니라 문화를 전승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일 또한 축제를 통해 이뤄진다. 한동안 축제를 잊고 살았던 우리 민족이 얼마전 몰입을 통한 최고조의 행복을 맛보았다. 바로 월드컵 축제다.

    여가학적 관점에서 보면 2002한일월드컵의 백미는 거리응원이다. 수백만명이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모두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88올림픽의 경우 경제적으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축제를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반면 이번 월드컵의 거리응원은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재미를 맛보려는 사람들의 자발적 축제였다. 이들이 벌인 거리축제의 목적은 축구경기의 승리를 위한 응원이 아니었다. 선수들은 그들의 응원소리로 힘을 얻기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군중의 목적은 즐기기였다. 그렇기에 전광판이 잘 보이지 않아도 소리를 지를 수 있었고 경기 진행상황과는 상관없이 춤출 수 있었던 것이다. 축제의 중요한 특징인 수단과 목적의 전도현상도 이번 거리응원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축구의 승리(목적)를 위해 응원(수단)한 것이 아니고 즐겁게 응원(목적)하기 위해 축구(수단)가 활용된 것이다.

    월드컵이 끝난 후 덩달아 흥분한 정치인들은 카 퍼레이드와 임시 공휴일, 운전자 벌점 취소 등 조치를 통해 축제 분위기를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축제열기는 그로 인해 오히려 차갑게 식어버렸다. 마치 그 소설가의 집 앞에서 놀던 아이들처럼 말이다.

    즐기는 법 배우지 못한 사람들

    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축제의 참맛, 즉 몰입을 통한 즐거움과 행복을 경험했다. 문제는 우리 일상에 그처럼 몰입할 수 있는 일들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을 그물 망에 발로 차 넣는 아주 사소한 놀이가 전세계를 뒤엎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아주 사소한 일들을 통해 매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 사소한 기쁨을 누리는 능력은 문화적 학습을 통해 가능하다. 월드컵에서 집단적으로 경험한 그 기쁨을 개개인의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는 것도 배워야 한다.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능력을 키워내는 과정을 문화적 학습(cultural learning)이라 한다. 문화적 학습의 핵심은 상호작용을 통한 정서의 공유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와 눈맞추기 놀이를 통해 정서를 공유하며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워간다. 나이가 들수록 다양한 형태의 놀이를 통해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문화도 학습하게 된다. 이같은 문화적 학습과정의 주된 형태는 바로 놀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놀이를 통한 문화적 학습과정을 박탈당한다. 부모세대 역시 과거에 노는 법을 학습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들과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즐기는 방법은 놀이에 따라 다르다. 히딩크가 말끝마다 “축구를 즐겨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에게 축구란 여전히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하고 운동장에 몸을 묻겠다는 각오로 사생결단해야 하는 전쟁이었다. 그래서 히딩크가 주문하는 “즐겨라”를 이해하고 실제로 게임을 즐기는 법을 배우길 주저하지 않았던 젊은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큰 활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가사회로의 전환이 시작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즐기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엄청난 재미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재미를 일상적으로 즐기는 법’을 학습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과 생산에만 초점을 맞추어 발전해온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이 다 바뀐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주5일 근무제와 관련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거의 경제적 측면에 집중돼 있었다. 생산성의 문제와 관련한 재계와 노동계의 대립, 법적·제도적 실행 시기에 대한 논의가 전부다. 사람들은 마치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 모두 행복해질 것처럼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된 초기에는 아마 모든 사람이 행복해 할 것이다. 가족과 함께 여행도 가고 각종 이벤트에도 참여하는 등 분주한 주말을 보낼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게 되면서 주말을 집에서 보내는 가정도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그 때부터다. 여행·관광과 같은 특별한 재미로만 상상해오던 가족과 함께 보내는 주말이 아주 일상적인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다음과 같은 상황마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가족과 함께 여행하는 것을 그처럼 좋아하던 아내는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집에서 뒹구는 남편을 점차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된다. 남은 반찬으로 대충 먹을 수 있는 점심식사도 복잡해진다. 남편 또한 집의 사소한 일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이전엔 전혀 관심 두지 못했던 일들에 관해 아내에게 묻지만 아내의 반응은 신통치 않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 방식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내에게 부드럽게 자기 의견을 개진하지만 아내는 벌써 짜증낼 준비를 하고 있다. 결국 회사 동료에게 전화해 “한잔 하자”며 슬리퍼를 끌고 집을 나선다.

    결국 가족이 함께 보내는 주말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동안 가려져왔던 온갖 사소한 문제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는 것이다. 주5일 근무제란 주말 동안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과 함께 ‘즐기는’ 일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화하는 능력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다수 가장들은 이런 능력이 없다. 어쩌다 생긴 주말, 가족과 함께 무작정 차를 끌고 밖으로 나간다. 무엇인가 엄청난 재미가 있을 것 같지만 점심 한끼 먹고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가는 차안에서나 식사할 때 가족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 가장들은 주문한 식사가 준비되는 시간마저 못 기다려 “아줌마, 여기 빨리 줘요!”를 외치곤 한다. 가족과 서로 눈 맞추는 시간이 편치만은 않기 때문이다. 불과 몇 시간도 못 견뎌 하면서 어찌 2박3일을 가족과 함께 보내겠는가. 주말을 가족과 함께하는 의무를 다했다고 가장은 뿌듯해할지 모르겠지만 잘 살펴보면 가족과 ‘함께한’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사소한 재미를 가족과 함께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주5일 근무제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여가학(543쪽 상자기사 참조)이란 학문의 중요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가족 여가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가족여가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뿐 아니라, 각종 동호인 모임을 바탕으로 하는 지역공동체의 운영을 기획할 수 있는 여가기획자(Leisure Planner)의 양성 등이 우리의 문화적 상황에서 요구되는 여가학의 중요 과제다.

    주5일 근무제 논의에 밀려 그늘에 묻혀있는 사안이 있다. 주5일 수업제다. 이는 주5일 근무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양산할 수 있다. 현재 주5일 수업제를 가장 잘 준비하고 있는 곳은 사교육 시장이다. 자녀들과 재미있는 주말을 보낼 줄 모르는 부모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학원에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들의 사정은 좀 나은 편이다. 아무리 주5일 근무제가 실시된다 해도 모든 직종이 토요일에 쉴 수는 없다. 오히려 주말에만 일하는 새로운 직종들이 생겨나고 저소득층 근로자들은 주말에 제2의 직장을 갖게 될 것이다. 이들의 자녀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 주5일 수업제는 각종 청소년 범죄를 양산할 뿐이다. 청소년을 위한 시설과 각종 여가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 또한 한국의 여가학이 해결해야 할 중요 과제다.

    여가사회가 가지는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고령화사회(65세 이상 인구비중이 7% 이상 14% 미만인 사회)라는 점이다. 한국 역시 인구의 고령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는 국가로서 오는 2019년이면 65세 이상 인구비중이 14% 이상이 될 것이라고 한다. 노인인구가 는다는 것은 평균수명이 늘어남을 뜻한다. 평균수명이 는다는 것은 인생 주기 자체가 바뀜을 의미한다. 스핑크스의 3단계 구분법, 즉 ‘아침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인생 구분법은 수정될 수밖에 없다. 여가학에서는 너무 길어진 ‘두 발로 걷는 시기’에 대해 ‘50플러스 세대’란 새 단계를 도입했다. 50세 이전까지는 가족을 구성하고, 경제적으로 정착하기 위해 애쓰는 단계이고, 50세 이후는 자아를 찾고 새 인생을 설계하는 시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50플러스 세대를 위한 사회프로그램은 전무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강보조식품이나 건강프로그램에 불과한 실버산업의 내용 또한 바뀌어야 한다. ‘노인이라 하기엔 너무 젊은 노인들’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실버산업은 이들을 위한 각종 여가 및 문화프로그램 개발로 방향이 전환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아쉽게도 여가사회를 위한 준비는 아직 걸음마 단계일 뿐이다. 주5일 근무 시대의 여가활용법에 대해서도 아직 이렇다할 대안이 없는 상태다. 자, 그렇다면 곧 주어질 혹은 이미 주어진 주5일 근무 시대의 여가를 과연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어떻게 놀 것인가?

    놀 줄 모른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도대체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이냐? 매년 여름 휴가철이면 제기되는 우리나라 놀이문화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대안이 없다. 이제 막 시작한 여가학이 우리 사회에 맞는 구체적인 해결책을 당장 제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정말 잘 놀아야 한다

    우선 엄청난 재미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정말 재미있어 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돈을 들여 해외에 나가고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골프회원권을 사야만 재미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축구와 같은 공놀이가 전국민의 넋을 빼앗아버렸듯이 재미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 얻어진다. 만화책 보기, LP 모으기, 옛날 흑백영화 즐기기와 같은 사소하지만 마니아적인 취미가 우리의 삶을 기름지게 한다.

    문제는 자신이 정말 재미있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남들이 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영화, 여행 등을 빼고 자신만의 고유한 재미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재미있는 일이 없는 사람들은 적개심이나 공격성을 아주 쉽게 드러낸다. 재미있는 일 대신에 일터에서의 성공과 성취가 이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다. 성공하지 못하면 실패자라는 불안감으로 인해 자신보다 앞서 가는 사람을 지켜볼 수가 없다. 심지어 도로에서 자신의 차 앞으로 끼어드는 차들도 용납하지 못한다. 거리를 질주하는 우리의 적개심의 근원은 바로 제대로 놀지 못하는 데 있다. 성공하는 것 이외엔 삶의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살만한 사회로 바뀌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일은 각자가 재미있어 하는 일을 찾는 것이다. 아쉬운 대로 자신이 재미있어 하는 일을 찾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인터넷 검색사이트에 들어가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들을 입력해보라.

    그러면 관련된 여러 사이트가 뜨고 갖가지 동호인 모임들도 나타날 것이다. 이들의 활동을 살펴보고 함께할 수 있는 모임에 가입하거나 비슷한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취미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아주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사소한 재미를 언제든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분명 부드럽고 살만한 세상일 것이다. 거리에서 부딪히는 타인의 어깨 위에서, 긴장 팽팽한 사무실에서 적개심에 가득찬 눈길이 사라지려면 우선 놀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정말 잘 놀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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