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SF작가 필립 K.딕 & 윌리엄 깁슨 다시 보기

메시지 분명한 선구적 몽상가

  • 박상준 SF칼럼니스트

    입력2004-09-08 16: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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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한 지 20년이 지난 미국의 SF작가 한 명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생전에 SF문학계에서조차도 대가로 추앙받지 못했다. 수십편이 넘는 장편소설을 발표했지만 선뜻 “이것이다”고 꼽을 수 있는 대표작도 마땅찮다. 그러나 그는 최근 들어 포스트모던 문화담론의 선구자로 각광받고 있다. 동시에 SF영화 사상 걸작고전으로 남을 몇몇 작품의 원작자로도 조명받고 있다. 이번에 개봉된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원작자로서 그의 이름을 다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발표했던 소설만큼이나 혼란과 모호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던 작가. 그는 필립 K. 딕이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딕은 우리 문학계에도 간접적이나마 영향을 끼쳤다. 1987년 복거일이 발표한 소설 ‘비명을 찾아서’는 ‘대체역사’라는, 당시로서는 무척 생소한 설정 기법을 채택하여 독자들과 평단 양쪽으로부터 상당히 열띤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 중반의 한반도는 1945년에 일제식민지 치하에서 독립하지 못한 채 ‘대일본제국’의 한 부속영토로 남아있는 ‘조선’이다.

    복거일은 이 소설 서문에서 “대체역사는 서양 SF문학계에서 예전부터 즐겨 다루던 제재다”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 분야의 몇몇 대표작을 언급하였다. 그중에 필립 딕의 ‘높은 성의 사나이’도 있는데, 이 작품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와 설정이 매우 비슷하다. 2차대전 당시 미국이 독일군에 패해서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가정 아래 이야기가 벌어진다.

    필립 딕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1982년에 발표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다. 딕이 작고한 바로 그해에 발표된 이 영화는 시한부 생명의 인조인간이 삶을 더 늘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 작품은 인간 그 자체의 정체성까지 고민하게 하는 걸작이지만 스필버그 감독의 ‘E.T.’와 개봉 시기가 겹쳐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잊혀졌다. ‘블레이드 러너’가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으로 불리게 된 까닭이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주요 문화매체로 서서히 떠오른 비디오테이프 확산에 힘입어 이 영화는 입소문으로 전파되며 언더그라운드 컬트로 추앙받게 되었다. 급기야 10년 만인 1991년에 감독 편집판으로 다시 개봉되는 행운을 누렸다. 사실 ‘블레이드 러너’는 1982년 개봉 당시 너무나도 암울한 스타일 때문에 배급업자가 멋대로 해피엔딩 장면을 갖다붙이는 등 감독 의도와는 상관없이 손상된 상태였다.



    그밖에 자아의 정체성 혼란이라는 테마를 박진감 넘치게 그린 영화 ‘토탈 리콜’ 역시 딕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SF영화팬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스크리머스’ 역시 그의 단편이 원작이다. ‘스크리머스’는 인간이 만든 전쟁로봇이 스스로 진화하여 인간 그 자체를 완벽하게 복제한다는 이야기로, 같은 팀의 사람들 중에서 누가 진짜 인간이고 로봇인지 가려낼 수 없어서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공포가 매우 섬뜩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올해 미국에서 개봉되었으나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임포스터’라는 영화도 딕의 작품을 바탕 삼아 만든 것이다.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은 지구와 전쟁중인 외계인이 몰래 지구에 심어놓은 시한폭탄이라는 혐의를 받는다. 하나의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서 정체성을 의심치 않던 주인공이 ‘설마 내가 정말…’이라는 내용의 독백을 하는 순간 터져버린다는 이야기다. 바로 그 독백이 시한폭탄의 방아쇠였던 것이다.

    이상의 작품들로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딕은 항상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진실인가’하는 주제에 집착했다. 이것은 사실 SF장르 고유의 정서라고 일컫는 ‘경이감(sense of wonder)’이나 과학기술적 상상력과는 그 줄기가 다른 테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딕은 생전에 SF팬으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한편 주류문학계 역시 이 SF라는 마이너 영역에서 괴상한 이야기를 계속 토해내는 작가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작고한 뒤 1980~90년대로 넘어오면서 비로소 주류문학계가 그의 ‘시대를 앞서가는 정서적 방랑’을 재발견했고, 급기야 21세기 노벨문학상 후보라는 찬사까지 보내게 된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작가로서의 딕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그의 생애가 매우 독특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인생 후반부를 우리 식대로 말하자면 ‘귀신에 홀린, 또는 신내림을 받은 듯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이런 삶은 그의 작품세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1928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필립 딕의 소년시절은 쾌활하고 낙천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고, 내성적인 성격에 신경과민에 시달리는 상태였다. 그에게는 쌍둥이 누이가 있었는데 출생 직후에 죽고 말았다. 그뒤 딕은 이 일이 어머니의 태만 때문이라고 확신하면서 평생을 보냈다.

    딕은 고독한 아이였고, 어머니는 냉정했다. 딕의 전기를 쓴 작가는 딕의 어머니를 ‘정신적으로 경직된’ 여인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녀는 신장염을 앓는 등 건강이 좋지 않아서 오랫동안 몸져누워 있는 때가 많았다. 딕 자신도 천식을 앓았으며, 먹고 삼키는 것에 대한 공포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목동을 꿈꾸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스포츠에 흥미를 갖게 하려는 아버지 말도 그는 듣지 않았다.

    다섯 살 때 그의 부모는 이혼했고, 아홉 살 때 그와 어머니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로 이사했다. 거기서 딕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당시 가냘프고 예쁜 용모를 지녔던 어머니와의 관계는 고전적인 프로이트식 모자관계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10대였을 때는 어머니와 함께 자는 꿈을 꾸기도 했지만, 마침내 19세 때 집을 떠나 동성애 화가를 수용하는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하숙집으로 옮겨갔다.

    19세의 딕은 아직 키스도 해본 적이 없는 순진한 총각이었다. 그러다가 자넷이라는 이름의 키가 작고 뚱뚱하며 열 살 연상인 여자에게 동정을 잃었는데, 곧 딕은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바로 그녀가 그가 인생에서 만난 다섯 아내 가운데 첫번째였다.

    결혼한 지 2개월이 되자 자넷은 다른 남자들과 접촉할 권리를 주장했고, 이에 딕은 그녀의 물건을 아파트 밖으로 내던지고 자물쇠를 바꾸어버렸다고 한다. 그 뒤 그의 애정생활은 산발적이었으며 그다지 만족스러운 경우는 없었다. 그가 사랑했던 한 여자는 오히려 딕의 직장동료를 택했고, 또 다른 여자는 동성연애 상대와 떠나버리고 말았다. 다음 상대였던 여자는 딕이 사회적으로 부적당한 사람이라며 그를 버렸다. 신경쇠약에 광장공포증까지 있던 딕은 캘리포니아대학에 입학했지만 결국 1년 만에 그만두고 만다.

    “나는 어찌된 셈인지 가는 곳마다, 누구에게나 멸시받았다.”

    훗날 어느 인터뷰에서 딕이 털어놓은 말이다. 그는 자신을 약골이라고 생각했고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을 허약하게 서술한 계기는 청소년 시절에 싹튼 것이라고 술회했다.

    딕은 어릴 때부터 고통과 불행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그의 아버지는 네 살 된 딕에게 가스공격과 창자가 파열된 군인 이야기를 해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어린 딕은 뉴스에서 화염방사기에 정통으로 한방맞은 한 일본인 병사가 관중들의 환호와 야유 속에서 불에 타면서 달리고 또 달리는 광경을 보았다. 딕은 그때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나는 공포로 정신이 아찔했다. 그리고 무언가 몹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전적인 어느 글에서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인간과 동물의 고통은 나를 미치게 한다. 내가 기르는 고양이가 죽을 때마다 나는 신을 저주했다. 이는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나는 신에게 분노를 느낀다. 나는 신을 붙들고, 인간은 죄를 지어서 파멸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강요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어린 날 어느 땐가는 덫에 걸린 쥐를 죽여야만 했던 경험이 평생 동안 고통스런 기억으로 남기도 했다. 원래 잔인함에 대한 충동이 있었지만, 소년시절 딱정벌레를 괴롭힌 이후 그 충동은 갑자기 사라졌고 대신 생명의 동일성 의식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을 ‘인간 무상’이라는 하나의 깨달음으로 인식했다.

    콜린 윌슨은 딕의 잔인함에 대한 강박관념을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 속 주인공인 이반 카라마조프의 입을 빌어서 “이 세계의 잔인성과 야만성은, 이런 세계로 오는 입장권을 신에게 돌려주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런 배경에서 성장한 딕의 작품은 편집증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병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영화 ‘스크리머스’의 원작인 ‘두번째 변종’이나 ‘임포스터’등이 모두 이런 성격의 초기 작품이다. 딕의 작품들은 혼미 속에 휘말린 개인을 도드라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 혼란은 목적의식적으로 행동하려는 모든 시도를 무너뜨린다. 또한 기술적인 설정에서는 컴퓨터나 로봇이 스스로 지능을 진화해 인간이 하는 일을 대신한다는 테마를 상당히 좋아했다.

    그는 또한 ‘진실’이라는 용어는 무의미하며, ‘진실’은 살아있는 생물만큼 많이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진실’이란 순전히 주관적이라는 개념에 천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입장은 대개 유아론(唯我論), 즉 우주 안에 자기 하나밖에 없다는 믿음으로 흐르기 쉽다. 결국 내 주위에 있는 진실이 ‘상대적’이고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면, 다른 사람이란 내 고독을 부인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낸 환영이라는 것이다.

    딕의 초기 소설 중 하나인 ‘하늘에 있는 눈’(1957)은 이러한 ‘진실’에 대한 견해를 대변하는 입장에 서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자신의 진실처럼 다른 사람의 믿음도 ‘진실’이 될 수 있는 ‘양자 택일의 진실’ 속에 모여 있다. 그들 각자는 스스로가 집단 중 한 사람이 가진 비정상적인 진실의 덫에 걸려버린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이 환영에서 도망가려 하지만 그 즉시 다른 이의 환영에 다시 포획된다. 결국 그들이 ‘진실’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각자의 ‘개인의 진실’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 초기작에서 딕은 적어도 ‘진실로의 복귀’는 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뒤의 작품은 더 어둡고 비관적으로 흘러, ‘진실’은 없고 개인의 환영이 있을 뿐이라는 확신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1963년에 딕은 마침내 장편 ‘높은 성의 사나이’로 비교적 널리 인정받고, SF계의 최고 권위인 휴고상(Hugo award)을 받았다. 앞에서 간단히 소개했듯이 이 작품은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미국이 독일과 일본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대체역사가 선택한 또 다른 진실을 그린 소설이다.

    작가로서 경력은 계속 쌓였지만 딕의 생활은 위기의 틈바구니에서 비틀거렸다. 신경쇠약, 자살미수, 이혼, 빚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도한 속도의 집필과 편집적 망상 등. 어느 때는 커다란 금속얼굴의 눈이 하늘에서 자기를 내려다본다는 착각까지 일으켰다. 이 불안한 영혼의 소유자는 어쩌다 매력적인 여인을 만날 때에만 잠시 마음의 평화를 찾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성질은 모든 관계를 원만하게 지속하지 못했다. 그의 고독감과 편집증은 작가로서 치명적이었다.

    “1960년대 후반에 그의 소설을 지배한 풍조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었다.”

    숨 막히는 답답한 분위기만이 감돌던 그 즈음의 작품세계를 두고 딕의 전기작가가 표현한 말이다.

    그의 신경쇠약과 피해망상은 자신을 편집적인 정신분열 환자라고 설명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말년에는 인생을 재구성해줄 일종의 ‘외계 존재’에 사로잡혔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주장은 단순한 자기 기만이나 환각으로 돌리기에는 상당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자신의 기록에 따르면 딕은 1974년 3월2일, 인생을 완전히 바꾼 하나의 ‘환상’을 경험했다. 훗날 그는 당시 일을 이렇게 구술했다.

    “사악하지 않은 자비로운 어떤 신성한 힘이 나타나서, 내 정신을 되찾아주고 몸을 치유해 주었으며, 심미감과 기쁨과 온전한 정신세계의 감각을 선사했다.”

    그 즈음 딕은 미국과 소련 당국이 자신을 감시하고 기관원이 집을 뒤지기도 했다고 믿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곧 죽을 운명에 놓였다고 확신하기도 했다. 그렇게 ‘두려움과 우울’에 시달리며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는 현기증을 부르는 불빛을 보기 시작해 연속적으로 환상을 접하게 된다.

    1주일 뒤에는 ‘현대 추상화’ 같은 수많은 그림이 눈부신 속도로 눈앞을 지나갔으며, 이어 한 여성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3월16일에는 빛나는 색깔과 균형 잡힌 무늬가 뚜렷한 불의 형태로 나타나 내부와 외부의 모든 속박에서 그를 해방했다. 그 뒤 딕은 자신의 내부에 또 다른 존재가 있음을 느낀다고 했다. 이를테면 무엇인가에 홀린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딕 자신은 그 존재를 자애로운 것으로 파악했다. 또 그 존재가 자신을 시공연속체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했다고 말했다. 그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나를 정복했으며, 내 주위의 세계가 세트와 같은 가짜임을 깨닫게 했다. 그 힘을 통해 나는 사실 그대로의 우주를 보았고, 그것을 느껴서 진실의 존재를 보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내 자신을 해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정신병 환자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실제 그에게 일어난 일은 헛소리로 돌리기엔 좀 미묘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지혜의 존재’가 어마어마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학, 의학, 우주론, 철학은 물론이고 과거 2000년 전의 기억도 갖고 있으며, 그리스어, 히브리어, 산스크리트어까지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 그는 그 존재를 신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지구 둘레를 도는 외계인의 인공위성에서 오는 일종의 신호라고 간주했다.

    그는 이 지혜의 존재를 ‘발리스(VALIS)’라고 부르며 나중에 자신이 쓴 장편소설 제목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VALIS’는 ‘Vast Active Living Intelligence System’의 약자로서, 우리말로 옮기자면 ‘광범위하게 활성화된 살아있는 지식체’쯤이 될 것이다. 아무튼 그 ‘지혜의 존재’는 네 살 난 아들이 하복부에 선천적으로 탈장증세가 있음을 일러주었다는데, 의사의 진단 결과 사실로 밝혀져서 수술로 치유했다고 한다.

    분명한 사실은 그 신비체험을 한 뒤로 딕은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건강이 좋아지고 작품활동도 왕성해졌으며 전보다 쾌활하고 활기찬 삶을 살게 되었다. 인세 수입도 늘어나 이전에는 누려보지 못한 윤택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작가로서 독자나 평단으로부터도 더 높은 평가를 얻어갔다. 이렇게 극적으로 바뀐 그의 삶은 1982년 3월 심장발작으로 갑작스레 사망하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SF작가로서 필립 K. 딕은 어떠한 점이 돋보일까. 서구 평론가의 일치된 견해를 보면, 그는 ‘가장 독창적이고 개성이 뚜렷한 등장인물을 창조하는 작가, 가장 복잡한 구성을 구사하는 작가, 전통적인 SF의 제재(초능력, 로봇, 우주여행, 미래의 가공할 무기, 대체역사, 병렬 세계, 외계인 등)를 채택하면서도 통속적인 우주 활극으로 빠지지 않고 탁월한 구성과 진지한 메시지를 담는 작가’로 요약된다.

    SF평론가 브라이언 스태블포드의 표현에 따르면 SF문학비평에서 형이상학적 요소를 들여오는 데 가장 이바지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엔 그를 20세기 미국 SF문학사에서 가장 비중 있는 작가 셋, 심지어는 둘 중의 하나로 꼽는 평론가도 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명성을 널리 알린 작품 ‘앤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를 보자. 이 작품에는 영화에서 살리지 못한 여러가지 배경이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암울한 미래상 정도로 묘사되는 시대배경(서기 2019년 로스앤젤레스)이 원작에선 핵무기가 지구 전체를 불모지로 만들어버린 세계대전 이후로 서술된다.

    ‘머서’라는 조작된 메시아라든가 살아있는 생물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부분은 핵전쟁으로 지구상의 동물을 거의 멸종시킨 인간의 속죄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또 감정의 인위적 조작이나 주인공 데커드의 부부생활 등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 많다. 줄거리 전개 자체도 영화와는 상당히 다르다. 특히 영화에서 가장 압권인, 주인공 데커드(해리슨 포드)와 로이(러트거 하우어)가 대결하는 장면은 매체 특성을 십분 살려서 영화에만 등장하는 이야기다.

    소설에만 등장하는 지구 잔류인의 종교적 메시아인 ‘산을 오르는 머서’는 돌팔매질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정상 정복을 포기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머서에 감정을 이입하며 삶의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정이입 자체가 앤드로이드와 사람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잣대가 된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머서가 조작되고 연출된 가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인간성은 순식간에 허망한 빈껍데기로 떨어진다.

    그야말로 현대 문명사회에 대한 불안과 비관을 SF작가가 어떻게 표현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이는 또 인간 존재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앤드로이드는 끊임없이 인간을 동경하지만, 오히려 주인공은 그들을 통해 나약하고 부조리한 인간의 모습을 절감한다.

    일반적으로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딕의 원작소설보다 더 낫다는 평을 듣는다. 영상매체와 활자매체의 미학을 수평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각각의 영역 안에서 획득한 상대적인 평가를 봐도 그렇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역시 필자가 보기엔 스필버그의 각색이 딕의 원작보다 나은 것 같다. 미래의 범죄를 내다보느라 인간다운 삶을 송두리째 저당 잡힌 예지자에 대한 배려를 딕의 원작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딕은 아름다운 문장가도, 솜씨 좋은 이야기꾼도 아니었다. 연약한 영혼을 힙겹게 지탱하며 혼란스럽고 불안한 세계에다 약간의 과학기술적, 미래적 상상력에 버무린 절규를 줄기차게 토해낸 몽상가였을 뿐이다. 다만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에서야 그 혼란과 혼미를 실감하고 있는 대다수 사람과는 달리 시대를 앞서간 선구적 몽상가였다는 점이 돋보인다.

    아무튼 그의 작품세계는 아직까지 우리나라엔 제대로 소개되고 있지 않다. 50편에 육박하는 그의 장편소설 중에서 국내에 번역된 것은 ‘높은 성의 사나이’와 ‘블레이드 러너’뿐이지만, 그나마도 지금은 절판되어 구해보기가 쉽지 않다.

    그가 작고한 이듬해인 1983년에 ‘필립 딕 기념상’이라는 SF문학상이 새로 제정되었다. 물론 SF작가로서 그의 업적을 기려 만든 것이다. 그런데 딕 자신이 생전에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출판사로부터 외면당했기 때문에, 이 상도 이전 해에 염가보급판 문고본으로 처음 출간된 SF나 환타지 소설을 심사대상으로 삼는다. 즉 크게 주목받지 못한 무명 작가 작품에서 숨은 진주를 가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상의 역대 수상작은 그 뒤 대부분 뛰어난 작가와 작품으로 평가받는데 그중에 1984년 수상작인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가 있다. 바로 ‘사이버펑크의 성경’으로 꼽히는 그 작품이다.

    서구 SF문학사를 시대별로 살펴보면 몇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을 볼 수 있다. 191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는 장르소설로서 SF 탄생기를 보낸 뒤, 1930년대에서 1940년대를 거치며 이른바 ‘황금시대’를 누리며 대중오락소설로서 탄탄한 기반을 쌓는다. 1950년대에는 전반적으로 문학적 완성도가 일정 수준에 이르고 1960년대에는 ‘뉴 웨이브(New Wave) SF’가 나타나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실험적 스타일로 묘사하기 시작한다.

    딕의 경우 뉴웨이브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그 역시 이 시기부터 SF의 형이상학적, 철학적 숙성에 이바지하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더욱 빨라진 1970년대 이후 특히 1980년대 후반에 와서는 다시 스페이스 오페라풍의 전통적인 활극 SF가 주류를 이루는 느낌이지만, 1980년대 서구 SF문학사에서는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바로 ‘사이버펑크(cyberpunk) SF’의 등장이다.

    윌리엄 깁슨이 1984년에 발표한 장편과학소설 ‘뉴로맨서’는 바로 ‘사이버펑크 SF’의 대표작으로서, ‘사이버펑크’란 말을 만든 시초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발표와 함께 휴고상, 네뷸러상, 존 캠벨 기념상, 필립 딕 기념상을 모조리 석권하면서 지은이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사이버스페이스’에 사로잡힌 SF작가들이 너도나도 그의 작풍을 본받기 시작하면서 곧 ‘사이버펑크 SF’작가 무리가 등장하였고, 독자들의 반응 또한 뜨거웠다. 어떤 SF작가가 “잘 아는 진부한 미래와는 이젠 안녕이다”라고 평한 사실은 ‘뉴로맨서’의 작품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다.

    ‘사이버펑크’란 원래 윌리엄 깁슨의 작풍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와 등장 인물들의 펑크풍 캐릭터를 결합하여 만들었다. 오늘날엔 사이버스페이스가 가상공간이나 가상현실을 일컫는 외래어로 사실상 굳어졌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전뇌공간(電腦空間)’이라는 어색한 일본식 한자어로 표현되기도 했다.

    아무튼 사이버스페이스는 인간의 두뇌와 컴퓨터를 전극으로 연결하여 형성된 일종의 가상공간으로, ‘뉴로맨서’에서는 감각신경까지도 컴퓨터와 연결되어 전세계 곳곳에 뻗어 있는 컴퓨터 통신망으로 자유롭게 타인과 감각을 공유한다. 즉, 타인이 느끼는 감각을 컴퓨터 통신망을 통해 체험하고 원격조종까지 가능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감각 이입은 물론, 타인에 대한 감정 이입까지도 가능하므로 가상 현실과 실제 현실과의 차이는 상당히 흐려진다.

    또한 신경화학이나 신경생리학, 생체공학이 발달하여 인체의 각 기관과 장기를 로봇 부속을 갈아치우듯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물론 인공적으로 인체를 변형할 수도 있다. 그에 따라 사회상과 가치관도 변화하여 폭력, 약물복용 같은 잔혹한 행동조차 매우 관대한 시각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람들의 전반적인 삶의 모습은 매우 허무하고 암울한 색채로 그려지고 있다. 깁슨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 하이테크 사회의 가능한 미래상을 매우 설득력 있는 묘사로 충격적으로 제시했다.

    ‘뉴로맨서’를 보면 세계의 정치경제를 지배하는 것은 초국가적인 거대 기업이다. 이 기업은 지구상 구석구석까지 컴퓨터 통신망으로 이어서 방대한 가상공간을 쌓고 있다. 주인공 케이스는 가상공간을 총괄하는 인공지능 컴퓨터에 고용되어 몰리라는 여자와 함께 위험천만한 임무를 맡는다. 줄거리는 이처럼 모험 활극적인 내용으로 전개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수준을 유지하는 알찬 세부 묘사가 단연 압권이다.

    앞에서 간략하게 서구 SF문학사를 짚어보았지만, ‘뉴로맨서’는 1980년대라는 특정 상황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탄생할 수 없는 작품이다. 원래 SF라는 장르가 풍부한 과학적 상상력을 생명으로 한다고 하나, ‘뉴로맨서’에 등장하는 사실감 넘치는 세부 묘사는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인 1970년대까지의 SF작가로서는 도저히 형상화할 수 없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컴퓨터 하이테크 사회에서 인간생활과 가치관 변화를 매우 예리하게 관찰한 점이다. 전통적인 SF작품은 고대 검투사의 칼과 말을 광선총과 우주선으로만 바꾸어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학기술 발달 그 자체를 내다보는 데만 치중하고 그에 따른 인간과 사회, 사상 변화는 등한시한 것이다.

    그러나 깁슨은 과학기술 발달이 인간과 그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깊숙하게 고찰하여 매우 개성 있는 캐릭터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립 딕처럼 진실의 모호함, 허무와 음울함이 주요 정서로 삽입된 것이다. 이런 결합이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정서에 진정성이 깊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성과로 볼 때 깁슨은 딕의 후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딕이 21세기적 혼미와 불안 그 자체였다면, 깁슨은 21세기적 정서의 한 트렌드를 기술적으로 적시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주기는 힘들다.

    윌리엄 깁슨은 1948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났으며, 월남전 당시 징병을 거부하고 캐나다로 이주한 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현재까지 가족들과 캐나다 밴쿠버에서 살고 있다.

    딕과 마찬가지로 깁슨의 작품 역시 우리나라엔 별로 소개되지 않은 편이다. ‘사이버펑크 3부작’으로 불리는 ‘뉴로맨서’ ‘카운트 제로’ ‘모나리자 오버드라이브’ 중에서 첫 작품만 번역되었고, 최근에는 장편 ‘아이도루’가 나왔지만 그다지 신통한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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