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호

‘논어는 진보다’

다시 쓰는 논어 이야기

  • 김형찬 고려대 철학과 교수·한국철학 kphil@korea.ac.kr

    입력2008-03-05 16: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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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는 진보다’

    ‘논어는 진보다’: 박민영 지음, 포럼, 472쪽, 1만9500원

    ‘논어는 진보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보는 순간 떠오른 것은 1999년 출간돼 화제가 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김경일 지음, 바다출판사)였다. 공자와 유교를 “오해했다” “폄하했다”는 등 출간 당시에는 논란도 많았지만, ‘공자’로 상징되는 유교문화의 폐해를 비판한 그 책은 그 시기 한국 사회가 요구한 책이었다.

    당시는 한국정치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로 이른바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지 1년 남짓 지났을 때였고, 외환위기의 급박한 고비를 넘기며 한국 사회의 구조와 국가발전 전략 전반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던 시기였다. 정부는 ‘박정희 시대’ 이래 약 40년에 걸쳐 구축된 정치·경제구조를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하며 사회 전반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모델에 기반한 구조조정을 시도했다.

    일부 지식인들은 196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를 이끌던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 모델이 유교의 가부장적 문화를 답습하고 있어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른 세계화에 장애가 된다고 비판했다. 이는 1980년대 일군의 지식인들이 후발 자본주의국가의 성공사례로 주목받던 일본과 네 마리 용(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의 발전모델을 ‘유교적 자본주의’ ‘유교적 민주주의’라고 추어주며 지식인 엘리트의 역할을 강조했던 것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했다.

    그 무렵 등장한 ‘공자가 죽어야…’의 노골적인 유교 비판은 한국 사회에서 의미 있게 받아들여졌다. 증거가 바로 눈앞에 있는 듯이 여겨졌다. 그때 겪고 있던 외환위기의 잔인한 현실이 그 증거물이었고, 그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정경유착의 부패구조와 비효율적인 가부장적 조직문화는 바로 그 지식인들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던 유교적 자본주의와 유교적 민주주의의 결과라는 것이었다. 그런 폐해가 공자사상 혹은 유교의 일면적 부작용일 뿐이라는 반론의 목소리는 무기력하게 허공에 흩어졌다.

    ‘공자가 죽어야…’, 그 후 9년



    그 후 9년, 이번에 나온 책은 공자의 ‘논어’를 ‘진보’라고 단언한다. 이미 박정희 시대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며 박정희를 역대 최고의 대통령으로 꼽는 평가도 낯설지 않게 됐으니, 그 시대의 제왕적 대통령제나 국가주도형 경제발전모델을 뒷받침했다는 유교문화에 대한 평가도 다시 할 때가 된 모양이다. 다만, ‘공자가 죽어야…’류의 비판을 넘어서기 위해서인지, 이번에는 공자에게 ‘진보’의 이름을 부여했다. 서문 첫머리에서 “종이를 둘둘 말아 10년을 두었다가 평평하게 펼쳐놓으려면 다시 뒤집어 말았다가 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면, 저자도 이 책을 쓰면서 그 화제의 책을 염두에 두었던 듯하다. 공자를 보수로 몰며 근 10년을 보냈으니, 이제 평평하게 펼쳐놓기 위해 다시 진보의 방향으로 뒤집어 말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직설적인 어법으로 펼쳐진다. 공자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 고리타분한 보수주의자, 국수주의자, 형식주의자로 각인”(5쪽)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공자는 옛것에 집착하는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오랑캐를 차별하는 민족차별주의자가 아니다’ ‘국가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주장한 것이 아니다’ ‘여자와 민중을 천시한 것이 아니다’ 등의 주장을 통해 저자는 공자를 “개혁주의, 만민평등주의, 박애주의의 선각자이자 실천적 지식인”이라고 규정한다. ‘논어’의 관련 구절들을 하나하나 재해석하고 그 배경까지 상세하게 곁들여 설명하는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점이 적지 않다. 공자에게는 확실히 그러한 ‘진보’의 면이 있다.

    그런데 공자는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주나라 중심의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중원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주나라가 번성하던 시절에 사회질서를 유지하도록 했던 것이 근본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안정된 사회의 구축 방안을 찾았던 사람이다.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변함없는 바람이겠지만, 그 내용으로 한 걸음만 들어가면 2500년의 시간차는 엄연하게 드러난다. 사실상 공자를 보수 혹은 진보로 평가하는 소재가 되는 오랑캐, 국가, 여자, 민중 등의 문제는 공자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공자가 사회 안정을 위해 근본적인 철학 또는 삶의 태도로 제시한 ‘인(仁)’의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도록 설득하는 과정에서 언급된 소재였을 뿐이다.

    공자의 문제의식은 仁의 실현

    공자는 오랑캐, 여자, 민중을 천시하는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진보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지만, 당시 엄연히 존재한 그들에 대한 제도적 차별을 극복하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그런 현실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가주의자는 아니지만, 당시 제후국 단위의 정치체제 이외에 다른 정치체제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모든 이상은 국가주의에 기반을 두었다고도 할 수 있다.

    “溫故知新(온고지신·옛것을 익히고 이를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안다면 스승이 될 만하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강조하는 ‘옛것’도 결국은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한 재료일 뿐이라는 점에서는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옛것에 대한 진지한 반성 없이 새로운 것을 섣불리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보수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공자의 문제의식은 ‘힘에 의한 통치’에 맞서 ‘덕(德)에 의한 통치’를 구현하고 나아가 모든 사람이 서로 배려하는 ‘인(仁)’의 인간관계를 실현하는 데 있었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는 그의 문제의식이 아니다. 더구나 요즈음 진보와 보수의 판단 기준으로 제시되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 평등, 국가 등은 2500년 전의 그에게는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에게 직접 책임을 물으려면, 그가 덕에 의한 통치 방안으로 제시한 인(仁), 효(孝), 충서(忠恕)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당시로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현재 배우고 비판할 점은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재평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진보와 보수의 기준을 넘어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다.

    ‘논어’의 언어인 한문은 표의문자 언어이고 그 말을 번역하는 우리말은 표음문자 언어다. 글자 하나하나가 다의적 의미를 가진 단어로 구성된 한문을 소리글인 우리말로 옮기는 데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논어는 번역문이 아닌 원문으로 읽어야만 진짜 공자의 사상이 무엇인지를 실감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7쪽)는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논어’ 중 주요 구절의 원문, 번역과 함께 어휘해설까지 정리해놓은 저자의 친절함은 독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 저자는 절마다 맨 앞에 논어의 한 구절을 제시하고 “종래의 해석”을 보여준 뒤 자신만의 독특한 해설과 해석을 제시한다. 그런데 둘둘 말려 있던 ‘논어’를 뒤집어 말려는 의욕이 앞서서인지 그 해석에 무리함이 보이는 곳이 적지 않다.

    ‘종래의 해석’과 ‘새로운 해석’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는 저자처럼 굳이 “옛것을 되살려 새롭게 깨닫는 것, 그것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다”(45쪽)로 ‘새롭게’ 해석하지 않고, “종래의 해석”대로 풀이해도 공자가 보수주의자가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을 펼치는 데 무리가 없다.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이적지유군, 불여제하지무야.)” 역시 저자처럼 “有君”을 “君有”로 억지로 바꾸어 “오랑캐 나라 임금의 [덕이] 있음은 중국 제후의 [덕이] 없음만 같지 않다.”(63쪽)고 어색한 번역을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오랑캐들에게도 임금은 있으니, 중원의 여러 나라에서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법도가 무너진 것과는 다르다”라는 정도로만 ‘종래의 해석’을 풀어써주어도 공자가 민족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저자의 주장을 펼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논어’는 2000년이 넘도록 수많은 사람에 의해 편찬되고 읽히고 재해석되어온 책이다. 그 사이에 기존의 해석은 다 틀렸다며 “새로운 해석”이라고 나온 해석본도 여러 권 있지만, 대부분 곧 잊혔다. 몇 문장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전반적인 “새로운 해석”이란 그동안 ‘논어’를 읽어온 인류 혹은 한국인의 지적 역량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다.

    물론 고전은 ‘이 시대’의 눈으로 읽힌다. 누구나 자기 시대의 눈으로 고전을 다시 해석할 권리는 있다. 다만, 이 책의 제목처럼 “논어는 진보다”보다는 “이 시대에는 논어를 진보의 관점에서 다시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는 태도가 바람직하다할 것이다.

    조선시대 500년 이래 한국인의 의식과 삶 속에 깊숙이 뿌리내린 유교적 전통의 근원에 공자와 ‘논어’가 있다는 점,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에 이뤄진 세상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책임 가운데 지나치게 많은 부분을 아직까지 유교가 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최근 10년 가까이 공자와 유교가 한국 사회에서 기필코 청산돼야 할 보수적 문화의 핵심으로 공격받아왔다는 점 등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다소 무리가 있을지라도 이런 책이 이 시기에 한 권쯤 나온 의미는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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