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이재오, 이광재와 접촉 피해 北으로부터 그들을 지켰다” ● 主思 이론 공부하며 인천지역 공장 위장취업 ● 주사파 주도권 싸움, 윤리 부재에 회의감 ● 큰아버지 만나러 사할린 갔다 北 공작조직 접촉 ● 기차 타고 밀입북…‘실패한 혁명’에 울다 ● 북한 초대소 정보 꿰는 안기부 “그 처녀는 시집갔다” ● 안기부, 정씨 제보로 한민전과 해외 비밀 아지트 파악 ● 북측이 준 가명은 ‘박성태’, 안기부는 ‘천왕산’으로 불러 ● 남북정상회담 후 중단된 대북공작 ● “김정일이 노 대통령 거칠게 다룬 데는 이유가 있다” |
기자는 상당히 키가 크다. 그리고 이 표현을 읽는 순간 많은 사람이 웃겠지만, 꽤 잘생긴 용모를 갖고 있다. 큰 키와 그럴듯한 외모 때문에 종종 기자는 남들 눈에 잘 띄는 것을 경험한다.
기자가 허두에서 ‘실없는 소리’를 해대는 것은 공작원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서다. 키 크고 잘생긴 사람은 공작원으로 부적합하다. 너무 못생긴 사람도 좋은 공작원이 되기 어렵다. 한 번만 봐도 그 인상이 오래 남기 때문이다.
기자의 어깨쯤에 오는 작은 키의 정태환(鄭泰煥·45)씨는 아주 평범한 얼굴을 갖고 있다. 하지만 목과 손목이 굵은 것으로 봐선 강단 있는 성격임이 분명했다. 미간이 넓어 웬만한 일로는 고민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술 담배도 하지 않는다. 이성에 대한 관심도 매우 옅었다. 상황에 쉽게 끌려 다니지 않을 조건을 두루 갖춘 것인데, 공작원은 이러한 사람 가운데에서 선발해야 한다.
정태환씨는 러시아의 극동지역 수도인 하바로프스크에서 15년 이상을 살아왔다. 그곳에서 고려인 여성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개인사업을 하다 지난해 가을 정리하고 한국 회사에 취직했다. 이 회사는 유명한 건축 설계 전문 회사다.
정씨는 이 회사에 러시아 전문가로 취업했다. 이 회사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 등지에 호텔과 아파트를 짓는 데 컨설팅 해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어와 러시아권 사정에 밝은 정씨를 영입한 것이다.
노 대통령을 아랫사람 대하듯
정씨는 가족이 있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와 사업장이 있는 카자흐스탄 그리고 본사가 있는 한국을 오가며 활동한다. 정씨는 첫 만남에서 한마디 질문으로 기자의 관심을 확 잡아끌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아주 정중하게 김 대통령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에 갔을 때는 아랫사람 대하듯이 했습니다. 똑같은 대한민국 대통령인데, 왜 김정일은 노 대통령에 대해서는 다른 대우를 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바로 대답을 이어나갔다.
“김정일은 노 대통령과 그 세력들이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 무엇을 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시시콜콜하게 다 알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1990년대 내내 노무현 대통령과 그 세력들에 대한 동향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동향보고를 한 인물이 바로 접니다. 그러니 김정일은 ‘당신 생각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어’ 하는 생각에, 노 대통령을 아랫사람 대하듯이 한 겁니다.
오랜 이중 공작원 생활에 대해 설명하는 정태환씨(왼쪽).
이어 정씨는 대통합민주신당 이광재 의원과의 인연,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 등에 대한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간략하게 말하면 1990년대 북한은 이광재 의원을 관리대상으로 선정해 정씨로 하여금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동향보고를 하게 했다. 이재오 의원은 관리대상보다 한 차원 높은 ‘포섭 대상’으로 선정해 역시 정씨로 하여금 동향보고를 하게 했다는 것이다. 정씨는 “동향보고는 두 사람이 전혀 모르는 가운데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정씨는 이 동향보고를 북한뿐만 아니라 국가안전기획부에도 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정씨는 북한과 안기부에 모두 정보를 주는 이중 공작원 노릇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안기부의 후신인 국가정보원은 노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의 정보가 어떻게 북한에 전달됐는지 훤하게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입을 꾹 다물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한 햇볕정책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정치적 상황 때문에 본심과 다른 일을 해야 했던 국정원 사정에 대해서도 그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
정씨는 “북한의 중앙노동당 대남 사업부와 2005년 3월23일 이후 ‘반제(反帝)전선’으로 이름을 바꾼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 해외대표부의 제의로 그들에게 한국 동향 정보를 제공하다 ‘북한은 말로만 통일을 떠들지 실제로는 통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안기부에 자수했다. 그런데 안기부는 나를 통해 북한 공작조직의 움직임을 파악하려고 계속해서 북한에 정보를 제공하게 했다. 이른바 역(逆)공작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국정원은 북한 노동당의 생각과 한국의 주요 정치인에 관한 어떤 정보가 어떻게 북한에 들어갔는지 손금 보듯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이 있은 후 국정원은 김대중 정부의 지시로 모든 대북공작을 중단했다. 그때 나를 이용한 역공작도 중단됐다. 공작을 중단하려면 자수한 나에 대해 법적인 정리를 해야 한다. 2001년 국정원은 나에 대한 자료를 서울지검 공안부로 넘겼고, 공안부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하는 것으로 내 사건은 정리된 것으로 안다. 그리고 나와 관련된 모든 자료는 국정원의 비밀 캐비닛으로 들어갔다. 그때 국정원 직원들은 반 농담으로 ‘당신은 대통령이 되어야 이 캐비닛에 들어간 당신 파일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태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중 공작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의 삶을 추적하면서 남북한 간에 만들어진 비밀의 문을 열어보기로 한다. 이러한 탐구는 1980년대 후반 주체사상 이론으로 이 땅을 휩쓴 NLPDR(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계열의 한계와 우리 노동운동계의 문제점을 밝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북한 한민전 대표의 애환과 타성에 젖어 관료조직화하는 북한 공작 조직의 한계도 보여줄 것이다.
▼ ‘제1부’ 노동 운동가의 탄생… “한국을 바꾸고 싶다”
정씨는 1963년 경남 진주에서 전기제품 도매상을 하는 집안의 4형제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진주 배영국민학교 6학년 무렵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신문을 정독했고 그 과정에서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죽은 지식’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러한 생각은 진주중학교에 진학한 그에게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아주 어린 나이였지만 ‘혁명에 대한 그리움’을 키워나간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생각은 더욱 절실해져, 1979년 2월 진주중 졸업장을 받는 것을 끝으로 그는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한국 공안기관의 촉수가 뻗치지 않는 제3국에서 만나 정씨가 한국에서 수집한 정보를 받고자 했다. 제3국으로 나온 정씨를 매번 북한에서 나간 사람이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로는 제3국에 나가 있는 북한 공작원이 접선해 정보를 받을 수도 있다. 생면부지의 사람끼리 만나는 것이므로 정씨는 ‘석(石) 선생’을, 정씨와 접선하기로 한 북한인은 ‘차(車) 선생’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다.
접선할 때 정씨는 외국신문과 겉표지가 청색인 소책자를 들고 나간다. 그러면, 그와 접선하기로 한 북한 사람이 다가와 “석 선생 안녕하십니까” 하고 묻고, 정씨가 “차 선생 안녕하십니까” 하고 반문한다.
이것이 접선해야 할 상대임을 확인하는 절차다. 정씨는 입수한 정보를 구두로 불러준다. 구두로 정보를 주고받아야 검거돼도 증거를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한민전, 가정집을 아지트로 활용
그리고 한민전 대표는 정씨에게 ‘박성태’라는 가명을 주었다. 북한에서는 박성태가 곧 정태환을 뜻하는 이름이다.
가끔 북한 지도원을 만나지 않고 3국에 나와 있는 북한 공작조직에 일방적으로 보고해야 할 때도 있다. 이때 정씨가 사용하는 이름은 박성태다. 그러나 외부인이 북한대사관 등을 찾아가면 안기부는 물론이고 그 나라 정보기관도 신경을 곤두세운다.
따라서 이때는 전혀 다른 기관을 이용한다. 한민전이 비밀리에 마련한 아지트에서 접촉하는 것이다. 이러한 아지트는 외관상 일반 가정 집이어서 이곳으로 거는 전화는 거의 도청되지 않는다. 정씨가 “저는 박성태입니다”라고 전화를 걸면, 상대는 정태환씨가 정보 보고를 하는 것으로 알아듣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을 받으면서 정씨는 ‘나는 혁명의 주역이고 싶은 사람인데, 이들은 나를 도구로 여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지도원들은 다롄(大連) 등 중국 각지의 중소도시 가정집에 마련한 아지트와 한민전이 일본과 쿠바 등지에서 운영하고 있는 아지트 연락처와 접선방법도 알려줬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 정씨는 일본과 쿠바의 한민전 대표는 어떤 사람이고 평양에 와 있는 것으로 돼 있는 한국 출신의 한민전 대표의 실체도 파악할 수 있었다.
당시 안기부는 평양에 있는 한민전 대표의 실체를 알지 못했는데, 정씨는 한민전 평양 파견 대표가 1980년대 부산의 모 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를 하다 가족을 이끌고 월북한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훗날 안기부에 자수한 정씨가 이러한 사실을 제보함으로써 안기부는 전세계에 뻗어 있는 한민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안기부의 놀라운 정보력
정씨가 하바로프스크에서 한민전 대표 등을 만날 무렵 한국에서는 민중당 사건이 일어났다. 북한이 민중당 공동대표인 김낙중씨에게 공작금으로 210만달러를 제공했다고 안기부가 밝히면서 거대한 공안사건이 터진 것이다. 김낙중씨 구속으로 민중당에 몸담았던 사람들도 안기부의 조사를 받게 됐다.
그러나 북한 공작원과 직접 접촉한 혐의가 없는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당시 민중당에서 사무총장을 하던 이가 이재오씨였는데, 이씨도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 혐의가 없어 처벌받지 않았다. 한민전은 민중당 붕괴에 대해 매우 아쉬워했다. 이들은 서민통 시절 정씨가 이재오씨를 만난 사실을 알고는 정씨에게 이재오씨와 접촉할 것을 요구했다.
한민전 측은 민중당에 있던 이재오씨를 포섭하고 싶어했다. 반면 노무현 의원이나 이광재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다. 한민전은 이재오씨를 결정적인 시기에 혁명을 일으키는 주체세력으로 포섭하고자 했고, 노무현 의원과 이광재씨 등은 주체세력이 봉기할 때 지원군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관리를 하고자 했다.
이러한 학습을 받고 서울로 들어온 정씨는 큰 고민에 빠졌다. 북한은 이미 혁명을 할 능력도 자신감도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민중의 도탄은 외면한 채 지도층끼리만 잘 먹고 잘살려고 하는 것으로 느껴졌기에 그는 사회주의 혁명과 북한이 말하는 통일에 큰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손가락에 힘을 주어 전화기 버튼 중 113을 눌렀다.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나는 한국인으로 허가를 받지 않고 북한에 갔다 왔다”고 자수했다. 1992년 10월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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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출신의 노동운동가가 북한에 들어가 공작원 임무를 부여받고 돌아와 자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민중당 사건에 이어 할머니 공작원 이선실을 중심으로 한 남조선 노동당 사건을 수사하고 있던 안기부가 발칵 뒤집혔다.
안기부는 1987년 구속될 당시 정씨를 담당했던 직원을 불러들이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정씨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고 했다. 이미 마음을 굳힌 정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민전 조직과 한민전이 포섭하라고 한 인사와 관리대상으로 선정한 인사가 누구인지 등에 대해 털어놓았다. 이때 정씨는 거꾸로 안기부의 정보력에 놀랐다고 한다.
정씨는 방북시 자신이 머물렀던 초대소가 평양 인근에 있었다는 것만 알았지 그 초대소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간판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행길이라 초대소의 위치도 설명할 수 없었다.
정씨는 생활하면서 본 초대소의 특징을 설명했는데, 수사관은 단박에 초대소 이름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북한 측 지도원들과 통일결혼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전했더니, 이들은 “그 초대소에 근무하던 예쁘장한 김○○ 여성 복무원은 시집갔다. 이제는 그곳에 근무하지 않는다”고 했다.
천왕산 프로젝트
논란 끝에 안기부는 정씨를 기소하지 않고 역공작을 하기로 결정했다. 북한이 주문한 대로 하바로프스크에 거주하면서 “북한 공작원으로 활동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안기부는 정씨를 이용한 역공작을 ‘천왕산 프로젝트’로 명명했다. 이때부터 안기부 직원들은 그를 “왕산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정씨는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북측에서 요구하는 공작에 응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남측에서 공작을 요구하니 그로서는 모든 것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역공작을 결정한 안기부 측은 정씨를 집요하게 설득했고, 정씨는 “한번은 해보겠다”며 받아들였다. 남북은 비슷했던 것이다. 이러한 정씨에게 안기부는 “형식적인 절차니까 협조해달라”라면서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충성 맹세서를 쓸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태극기 앞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 맹세서를 쓰는 정씨의 모습을 촬영했다.
안기부는 정씨에게 생활비를 제공할 테니 하바로프스크에 정착하라고 했다. 이때 안기부는 첫 작품으로 공중전화를 이용해 일본에 있는 한민전 대표에게 “인천 시절 가깝게 지낸 △△산을 데리고 가겠다”는 연락을 하게 했다. 전화를 받은 한민전 대표는 큰 관심을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안기부는 △△산의 동의도 받지 않고 이 제의를 하게 한 것이었다. 그 후 정씨는 △△산에게 진짜로 북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고 제의했는데, △△산은 겁을 먹었는지 몸을 사렸다. △△산과의 동행이 실패한 상태에서 정씨는 일단 하바로프스크로 돌아갔다.
이듬해 정씨는 하바로프스크 사범대 러시아어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한민전 대표를 만나기로 한 마카오로 가기 위해 다시 서울로 들어왔다.서울에서 항공기를 갈아타고 마카오로 가는 것인데, 이미 △△산은 정씨와의 동행을 확실히 거절한 다음이었다.
北, 고혈 짜내 공작금 마련
정씨는 △△산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마카오에 가는 것이 불안해진 것이다. 그런데 공항 안으로 들어온 안기부 직원들은 정씨에게 “한번 해봐라. 죽지는 말고…. 여차하면 튀어라. 당신은 상황 대처를 잘할 것 같다”라고 격려했다.
정씨는 약속한 대로 마카오 리스본호텔에서 한민전 대표와 첫 번째 접선을 가졌다. 그리고 국내 정치 상황을 설명하고 이어 “남쪽 사람이 몰래 북한에 다녀오면 최소 무기징역이다. 서울구치소에 있는 김○○선배는 북한에 간 사실이 없는데도 사형 선고를 받지 않았느냐. 아무리 운동권이고 주체사상으로 무장했다고 하지만, △△산에게는 당신들을 만나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하자, 그들은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씨는 한민전 대표들과 같은 호텔방과 식당에서 자고 먹으면서 대화를 계속했다. 길고 긴 이 대화에서 정씨는 한민전 사람들의 고통을 알았다. 하나같이 엘리트인 이들은 젊은 시절 정씨처럼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월북해 한민전 대표를 맡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열정은 식고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자신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자기 수정’을 할 수 없어 고통스럽게 한민전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술 담배를 많이 했다.
정씨가 “우리는 구국의 소리 방송을 녹취해 그대로 믿었다. 그런데 그중에는 사실과 다른 것이 있었다”라고 지적하자, 이들은 “우리 방송을 그대로 받지 말라. 우리가 방송으로 확실히 밝히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러한 것을 전달하기 위해 따로 대남사업을 하는 것이다”라고 둘러댔다.
첫 접선을 소화해냄으로써 정씨는 그 후 모스크바, 베이징 등 장소를 바꿔가며 한민전 대표를 만나 한국 정세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들과 헤어진 다음에는 거꾸로 안기부 측에 한민전 대표들의 생각을 전달했다. 북한 측은 접선할 때마다 정씨에게 달러를 제공했다. 공작금은 한민전 대표가 아닌 당에서 나온 사람이 허리에 찬 전대에 넣어 왔다.
김일성 사망으로 위기 넘겨
정씨를 만나면 이들은 전대를 풀어 달러를 내놓았는데 금액은 대개 정씨의 항공료와 체류비에 불과한 수천달러 수준이었다. 북한 측은 이 돈을 어렵게 마련한 것 같았다. 정씨는 이 돈을 안기부에 넘겼는데 그러면 안기부는 그에 해당하는 원화를 제공했다. 안기부 측은 실적 때문인지 정씨에게 더 많은 공작금을 받아올 것을 주문했지만, 정씨는 북한이 달러 마련에 애를 먹는 것 같아 공작금을 더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안기부 측은 정씨가 받아온 달러에 대해 위폐 검사를 했으나 단 한 번도 위폐 판정이 나오지 않았다. 북한은 어려운 사정임에도 공작원에 대해서는 고혈을 짜서 진폐로 공작금을 마련해준 것이었다. 안기부는 정씨가 전해주는 첩보를 토대로 한국에 남아 있는 한민전 대표들의 가족을 찾아내, 한민전의 실체를 완벽하게 파악했다.
정씨에게도 한 차례 위기는 있었다. 김일성이 사망하기 직전인 1994년 여름, 북한은 갑자기 정씨에게 평양으로 들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상한 생각이 든 정씨는 안기부와 상의했는데 안기부는 ‘그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북한이 당신의 이중플레이를 눈치 챌 수도 있다’며 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베이징으로 가는 준비를 하면서 정씨는 이것이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변 정리를 했다.
당시 남북한은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씨는 ‘정상회담을 앞둔 북한이 한국 정세를 알고 싶어 불렀나 보다’ 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리고 베이징으로 날아갔는데 접선 장소에 북한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정씨는 일본에 있는 한민전 조직을 통해 자신이 접선장소에 제대로 나갔다는 것을 알렸다. 그래도 연락이 없어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한국 여권을 가진 그가 바로 들어갈 수는 없어 서성이는데 마침 빨간색 차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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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차가 회전하기 위해 멈춰섰을 때 그는 차 문을 열게 한 다음 타고 있는 사람에게 “나는 박성태라는 사람이다. 평양에서 나를 만나러 온 이가 있는데 만나지 못했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니 이를 그에게 알려주라”고 했다. 그러자 며칠 후 그가 묵고 있는 호텔로 한민전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급히 평양에 들어가자며 정씨의 북한 위조여권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후 이들은 “미안하다.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그들끼리 평양으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정씨는 중국신문을 보고 김일성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일성 사망으로 그의 2차 방북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다. 그를 맡은 사람들이 바뀌면서 루틴한 정보 보고가 반복된 것이다. 정치 격변을 거치면서 북한에서는 제 살길만 찾는 관료주의가 보편화된 듯했다. 그 후 정씨는 1년에 서너 차례씩 제3국에서 한민전 대표와 북한에서 나온 지도원을 만나는 생활을 1996년까지 계속했다.
이때도 북측은 이재오씨와 접촉해 포섭할 것을 요구했으나 정씨는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정씨는 자신이 만나는 한국인이 훗날 안기부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게 될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정씨 삶은 평온해져 갔다. 그는 5년제인 러시아의 대학을 4년만에 마쳤다(1996년 6월). 그리고 이듬해 10월에 한인 교회에서 만난 고려인 여성과 결혼했다. 이 여성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다가 하바로프스크로 유학와 ○○대학을 수석졸업한 재원이었다. 그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얻었다.
사업가로 변신
결혼할 무렵 그는 한국산 화장품을 수입하는 사업을 벌였다. 한국의 K화장품사를 찾아가 “러시아 에이전트를 하겠다”고 제의한 끝에 그는 이 회사 화장품을 전 러시아에 독점 판매하게 되었다. K 화장품은 러시아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어 그는 꽤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이어 그는 L화장품도 수입해 판매했다. 또 플라스틱 창호를 만드는 공장을 설립해 돈을 모았다. 오랜 방황과 시련을 겪어온 그의 삶은 안정기에 들어섰다.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그리고 햇볕정책이 추진되더니 2000년 6월 1차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다. 6·15 공동선언에는 ‘서로 신뢰를 다져 나간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는 적대적인 행위를 중단한다는 것으로 이해됐는데 그래서인지 국정원은 대북공작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명확한 문서 형태로 하달된 것은 아니었다. 공작자금 예산을 책정하지 않는 형태로 진행됐다.
그와 함께 국정원은 밀입북한 사실이 있는 정씨 사건을 법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국정원은 정씨 사건에 대한 자료를 보여주지 않고 서울지검 공안부로 넘겼다. 사건을 맡은 검사는 정씨를 만나보고자 했다. 그러나 정씨는 이 면담을 피했다. 따라서 정씨는 자신의 사건이 어떻게 정리됐는지 알지 못한다. 그는 국보법 위반 혐의인데 기소유예로 처리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6·15합의 때문인지 북쪽에서도 그를 찾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하바로프스크의 북한기관원들도 죄다 바뀌었다. 이들은 정씨와 북한의 관계를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를 담당했던 국정원 간부들도 하나둘 퇴직했다. 이들은 대북공작이 중단된 데 대해 불만을 품었지만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도 햇볕정책을 고수했기에 이들은 활동공간을 가질 수 없었다. 2002년 12월 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던 날 정씨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한민전과 북한 지도원을 접하면서 나는 노무현·이재오·이광재씨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들은 내가 전해준 이야기를 나름대로 자료화했을 것이다. 유사시 그들이 지원군으로 사용하겠다고 한 인물이 한국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몸살이 나 일주일여를 앓아눕기까지 했다.… ”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1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김대중 정부가 현대그룹 등을 동원해 5억달러를 북한에 보낸 사실이 특검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조용하게 지내던 정씨는 이 사실을 접하며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은 한 푼의 달러가 아쉬운 정권이다. 달러는 김정일과 공작조직만 사용한다. 북한에는 두 부류의 국민이 있다. 하나는 달러로 외제품을 사들여 생활하는 김정일과 간부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 인민들이다. 북한 간부들은 외제를 이용하는 생활에 익숙해 있어 인민의 어려움에는 무관심하다. 김대중 정부가 제공한 달러도 그렇게 김정일 세력과 공작조직이 사용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비밀리에 김정일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씨는 많은 변곡점을 돌아 김정일과는 같이 갈 수 없는 쪽에 섰다. 그는 새로 출범하는 정부도 북한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서울의 강남을 저주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내가 만난 북한의 간부들은 풍요로움과 편리함의 상징으로 강남을 거론했다. 우리는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북한이 반미를 외치는 것은 미국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제 어설픈, 그래서 북한에 이용당하는 좌파는 이 땅에서 더 이상 나오지 말아야 한다.”
정태환씨는 한국 혁명을 꿈꾸던 운동가였다. 정태환씨가 서민통 조직원 시절인 1987년 시위에 참여했다 부상을 입은 것을 인정해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가 발급한 인정서.
서울역 건너편, 그러니까 지금은 대우센터가 들어선 남산 일대를 ‘양동’이라고 했다. 당시 양동은 유명한 사창가였다. 1980년대만 해도 주요 기차역 주변에는 사창가를 뜻하는 ‘색시촌’이 있었다. 서울역은 한국 최대의 기차역이니만큼 양동에는 한국 최대의 색시촌이 있었다.
색시촌은 대개 판자촌이었다. 정씨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고 진주 시내에서만 학교를 다녔기에 어렵게 사는 농촌 구경은 했어도 얼기설기 판자로 엮은 성냥곽만한 집들의 동네는 처음 보았다. 이때의 충격이 소년의 가슴속에 있던 ‘혁명의 열정’을 건드렸다.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
소년은 한국일보를 돌리며 도시의 더 많은 그늘을 관찰했다. 정씨 부모는 서울로 떠난 아들에게 고향으로 돌아와 공부를 하라고 간곡하게 원했다. 태환은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의 장사를 거들다 다시 서울에 올라와 신문을 돌리며 독서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호기심은 더욱 커져서 그는 광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어느 날 그는 강원도 태백으로 향했다. 그러나 태백에서 본 것은 ‘인생의 막장’이었다. 잿빛 도시와 시커먼 도랑 물, 무표정한 광부의 얼굴을 보고 그는 광부가 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소년의 힘으로는 혁명이 어렵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서울에 있는 외삼촌댁으로 주소를 옮겨놓고 한샘학원에 다니면서 대입(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한 것이다.
의식화 독학
이러한 때인 1982년 방위병 소집통지서가 날아들었다. 그는 육군 행정학교에 근무하게 됐다. 방위병 근무를 하면서 그는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나 혁명을 향한 열정은 여전해, 어느 곳에서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으면 짬짬이 달려가 가담했다.
1984년 초 방위병 근무를 마친 그는 그해 고졸(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그 후 한양대 앞에 있는 사회과학 전문 서점을 드나들며 이영희씨의 ‘전환시대의 논리’ 등을 구해 탐독했다. 혼자만의 의식화에 들어간 것이다.
1980년대의 한국 학생운동은 1983년부터 본격화했다고 봐야 한다. 1983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주요 대학에는 이른바 ‘언더(under)’로 불리는 이념서클이 있었다. 이 서클에서는 이념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일을 반복했다. 대학가에서는 ‘짭새’로 불리던 전경 병력이 상주하며 시위를 억눌렀다. 그러나 1983년 들어 이념서클의 세력이 커지면서 ‘짭새’들의 감시를 뚫고 대형 시위가 자주 일어났다.
언더 세력은 교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총학생회 구성을 주도했다. 그리하여 1984년 고려대를 시작으로 서울대 연세대 등 주요 대학에서 학도호국단장 제도를 없애고 선거로 총학생회장을 뽑는 운동이 일어났다. 서울대에서는 이정우, 연세대에서는 송영길(현재 대통합민주신당 의원), 고려대에서는 김영춘(현재 창조한국당 의원)씨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총학생회 결성을 계기로 학생시위는더욱 격렬해졌다. 학생운동 세력이 내건 주요 이슈는 ‘군부독재 종식’과 ‘광주학살 주모자 처벌’이었다. 학생운동은 이미 정치운동 단계에 와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하는데 학생운동 세력은 정치 문제를 주로 다뤘다. 이 때문에 1984년 이후 각 대학에서는 학생운동을 노동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많았다. 정태환은 시위에 참가하면서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서민통 가입
정태환씨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풀려난 이후 인천의 한 기업체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벌였다. 서 있는 사람 중 가운데가 정태환씨.
당시 서민통 의장은 조용한 성품의 김승균씨였고, 학원 강사를 하던 이재오씨가 부의장을 맡고 있었다. 김두관(전 행자부 장관), 이영순(전 서울시 의원)씨도 있었다. 정씨는 남해가 고향인 김두관씨 그리고 이영순씨와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그는 이영순씨가 주도하는 토론회에 많이 참여했다. 이념 서적을 읽고 이해한 것을 토론하는 것인데, 그 열기가 대단했다. 하루는 이재오 부의장이 “태환이가 세다고들 하는데 한번 들어보자”며 토론을 제의했다. 정태환씨는 서울 가회동에 방을 마련했다. 부모님이 일찍이 재산을 분배해줬기 때문인데, 덕분에 그는 ‘P(print의 약어)’로 통하던 유인물 등을 만드는 공간으로 자신의 방을 활용했다.
1985년을 고비로 학생운동 세력은 노동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정씨도 지식인인 대학생 중심의 학생운동보다는 노동자가 주축이 되는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운동이 사회를 바꾸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본 그는 공장이 많고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으로 활동무대를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서민통을 이끄는 세력은 감상적인 민주화와 통일론을 갖고 있어 지하활동으로 남한 혁명을 이룬다는 의지가 약했다. 정씨는 이것이 불만이었다.
가회동 방을 뺀 정씨는 인천에서 작은 방이 딸려 있는 만화가게를 빌렸다. 그리고 만화 보는 책상을 없애고 그곳을 토론과 P를 만드는 작업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 무렵 학생운동권은 사회주의에 관한 토론을 넘어 북한의 주체사상(주사)에 대한 탐구로 치닫고 있었다.
주체사상을 구성하는 수령론과 후계자론, 그리고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혁명가가 지켜야 할 품성론 등에 관한 자료를 읽고 토론하는 것이 대세가 된 것이다. 정씨의 토론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전부 가명을 썼다. 정씨는 소싯적 구름사다리를 뜻하는 ‘운잔(雲棧)’을 호로 삼겠다고 한 적이 있어, ‘운잔’을 가명으로 썼다. 그러나 ‘운짱’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토론회의 멤버인 ○○○씨는 ‘△△산’이라는 가명을 썼다. 정씨의 말이다.
“안기부나 보안사 경찰 등에 검거됐을 때 검거되지 않은 다른 조직원을 보호하려면 서로 본명을 모르는 것이 좋았다. 때문에 토론회에서 만난 사람의 본명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산’으로 불리던 멤버의 본명이 ○○○인 것도 훗날 관계기관에 검거돼 공소장을 보고 알았다.
가명을 사용한 또 다른 이유는 혁명역량이 충분하지 않을 땐 흩어져서 싸우는 산개(散開)투쟁을 하고, 결정적인 시기가 왔을 때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남한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그만큼 철저했다.”
정태환씨는 “그때의 우리는 자생적 코뮤니스트, 즉 ‘자콤’을 자임했다. 자콤으로 활동하려면 공장 등에 침투해 조직(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에 대해 공부를 해야 했다. 그리고 노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품성을 갖추도록 품성론에 대한 토론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 무렵 운동권 세력은 이념 서적은 거의 다 탐독하고 새로운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러한 갈증에 비를 뿌려준 것이 한민전이 운영하는 ‘구국의 소리’ 방송이었다. 구국의 소리 방송은 “남쪽 혁명가들은 남한 혁명의 전위대를 만들어 대중 투쟁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정씨 등은 이를 믿고 그 내용을 P로 옮겼다.
인천으로 활동무대 옮겨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있는 유즈노사할린스크 소련공산당 청사 앞에 선 정태환씨. 그는 이곳에서 북한 수산대표를 만났다.
언더 출신 대학생들이 사회로 나오면서 시위의 수위가 한층 높아졌다. 1986년 인천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가장 격렬했다는 5·3인천사태가 일어났다. 그리고 반년 후인 1987년 1월,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분실에 끌려가 조사받던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물고문을 당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한국 사회 전체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해 4월 전두환 정부는 직선제 개헌을 거부하는 호헌(護憲)조치를 발표했다. 그러자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부글거리던 분노가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위한 시위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6월항쟁이 일어난 것이다. 6월항쟁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1980년대는 한마디로, 6·25전쟁 이후 이 땅에서 사회주의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노동자가 이끄는 사회주의 건설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6·29선언을 유도함으로써 시민 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사회주의 혁명을 바라고 시작한 운동이 민주주의 사회를 이끄는 혁명이 된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사회주의는 크게 퇴조했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난 후 동유럽과 소련의 공산주의가 일순간에 무너져내린 것이다. 이로써 나라 안팎에서 운동권은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6·29선언이 있고 난 어느 날이었다. 예전처럼 정씨 집으로 멤버들이 모이기로 했는데 △△산이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출판 관계 일을 하는 한 멤버가 “원고료를 받았다”고 해서 멤버들은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기분 좋게 취한 상태에서 정씨 집으로 몰려갔다.
그날 모든 멤버가 술에 취했지만 술 담배를 전혀 못하는 정씨는 정신이 말짱했다. 멤버들은 △△산이 빠진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씨 집은 만화가게를 하던 곳이라 골목길 쪽으로 유리 문이 있었다. 밤늦은 시각, 누군가 유리문을 두드렸다. 정씨가 나가보니 한 남자가 “주소를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순간 정씨는 짚이는 것이 있어 얼른 문을 닫았다.
안기부에 검거되다
그 순간 ‘와장창’유리문이 깨지고 골목에 숨어 있던 장정들이 뛰어들어 정씨와 술에 취해 늘어져 있던 멤버들을 덮쳤다. 멤버들이 저항하자 이들은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며 하나씩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 차에 태워 서울 쪽으로 달려가는데, 부평 부근에서 경찰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끌고 가던 이들이 “우리는 정보부야”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보안사를 최고 악질, 그 다음을 안기부와 경찰 대공(對共)으로 꼽았다. 보안사에 걸리면 뼈도 추리지 못하나 경찰에 걸리면 ‘그래도 좀 낫다’는 인식이 있었다. 정씨는 ‘보안사는 아니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이들은 제3한강교를 거쳐 안기부 남산 청사 지하로 끌려갔다.
안기부 직원들은 이들을 지하의 한 방으로 몰아넣더니 팬티까지 옷을 홀랑 벗겼다. 그리고 방에 불을 끄고 여러 명이 덤벼들어 무차별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무수한 발길질과 주먹질을 당하는 것은 끔찍한 치욕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안기부에 정씨 집 모임 정보를 준 이는 그날 오지 못한 △△산이었다. △△산은 일주일여 앞서 안기부에 검거됐다고 한다. 안기부 팀은 △△산을 초주검이 될 정도로 고문했는데, △△산은 이 고문을 견디지 못해 정씨 집 모임에 대해 자백했다고 한다.
구치소에서 만난 이광재
정태환씨의 동선을 보여주는 동북아 지도.
1987년 9월15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노동현장 침투 좌경용공학습소조 지도책 안○○씨와 그 조직원인 정태환, ○○○, 김○○씨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한다고 발표했다. 안씨를 지도책으로 발표한 것은 멤버들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었다.
정씨는 서울 서대문에 있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그해 11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으로 옮겨감에 따라 그도 의왕에 있는 서울구치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서울구치소에서 그는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선고받은 김○○씨와 학생운동연합 기관지 ‘백만학도’를 제작한 혐의로 구속된 연세대생 이광재씨 등을 만났다.
사형 선고를 받은 김○○씨는 나이가 많아 대하기가 어려웠지만, 이광재는 정씨보다 두 살이 어려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서울구치소 측은 사상범에게 독방을 줬다. 사상범들은 서로 생각을 전하는 ‘통방(通房)’을 시도했는데, 사동 위치상 이광재씨의 독방이 연락하기 좋아, 이씨가 주로 통방을 담당했다.
1987년 12월16일은 제13대 대통령선거 투표일이었다. 구치소 수감자들은 형이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3대 대통령선거가 있기 한 달 전쯤인 11월29일 KAL 858기 폭파사건이 벌어졌다. 바레인 경찰은 용의자로 김현희씨를 체포해 조사했는데, 안기부는 김씨를 대선 하루 전인 12월15일 서울로 데려왔다.
13대 대통령선거 부재자 투표는 김현희씨가 서울로 압송되기 전에 실시됐다. 그런데 이미 운동권에서는 KAL 858기 사건이 노태우 후보 당선을 위해 안기부가 만든 자작극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런 만큼 정부 여당이 불법투표를 감행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구치소의 부재자 투표는 교도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므로 100% 여당 후보 지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씨는 투표 거부운동을 주도했다.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을 두드리며 “부재자 투표를 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인데, 이를 이광재씨가 받아 다른 사동을 향해 같이 고함을 쳤다. 이를 샤우팅(shouting)이라고 한다. 샤우팅이 일어나면 교도관들은 주모자를 징벌해 같은 행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한다. 정씨와 이씨가 샤우팅을 주도하는데도 교도관들은 재소자를 한 명씩 데려가 부재자 투표를 강행했다.
보다 못한 정씨는 “강제 투표에 항의해 죽겠다”며 옷을 벗어 목에 감고 그 옷자락을 창살에 걸기 위해 창틀에 올라갔다. 그러자 교도관들이 달려와 문을 열고 그를 끌어내렸다. 이것을 본 이광재씨가 소리 높여 ‘정태환이 강제 부재자 투표 실시에 항의해 자살하려 한다’고 전파했다.
정씨의 돌출행동으로 서울구치소 측은 강제 부재자 투표를 중단했다. 이 일로 정씨는 징벌방에 들어가야 했다. 이후 정씨는 1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인정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1988년 2월말 노태우씨가 13대 대통령에 취임했는데 이때 정부는 시국사범을 대거 석방하고 얼마 후 사면 조치를 했다. 이광재씨도 석방됐다. 석방 뒤에도 이씨와 정씨는 석방되지 못한 사형수 김○○씨를 돕기 위해 몇 차례 만났다. 이러한 때 이광재씨가 부산으로 가겠다며 함께 가자고 했으나 정씨는 인천에서 활동할 생각이었다.
위장 취업
하바로프스크에서 한국의 K 화장품 수입 회사를 운영할 때, 러시아 여성 판매원들과 함께 한 정태환씨.
연투에 나간 어느 날 그는 경찰에 체포됐다. 당시는 경찰 대공(對共) 파트에서 노동운동 세력을 다뤘다. 정씨에 대한 전과 조회를 하자 1987년 국보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기록이 나왔다. 경찰은 즉시 그를 검찰에 송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씨는 노동쟁의를 주도하다 검거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검거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동료들은 재빨리 그의 집을 치웠으므로 경찰은 정씨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 확보에 실패했다. 때맞춰 동료들은 경찰서 밖에서 “정태환을 석방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정씨는 경찰서에서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6·29선언 이후 세상은 확 바뀌어 있었다.
바깥세상도 확 변해 있었다. 폴란드와 헝가리를 시작으로 동유럽 국가들이 공산주의를 포기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폴란드에서는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가 공산주의 종식을 주도했다. 주사파들은 공산주의를 지탱하는 핵심인 노동운동 세력이 공산주의 붕괴에 앞장서는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폴란드와 헝가리는 바로 한국과 수교했다. 이어 체코와 동독 등지에서도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2월에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분노한 국민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북한의 경제사정이 매우 어렵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때까지도 한국 운동권은 북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동유럽 공산국가가 무너지고 북한의 경제사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일부 운동권 세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북한이 어떤 사회인지, 과연 북한은 주체사상이 구현된 곳인지 알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정씨는 이 지적에 공감했다. 이때부터 정씨의 눈에는 그간 애써 외면해왔던, 운동권의 순수하지 못한 모습이 들어왔다.
운동권 모순에 눈뜨다
운동권의 윤리부재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이다. 정씨는 “혁명가로서 우리는 품성론을 공부했는데 과연 품성론대로 살고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라고 말했다. 운동권 내부에서 일어나는 헤게모니(주도권) 쟁탈전도 그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 정씨의 건강은 나빠져 있었다. 5분 대기조식으로 연투에 참여하다 보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도 휴식을 권유해 그는 고향에 내려가 휴양을 했다. 휴식하는 동안 그는 진짜 혁명가가 되려면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봐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기 노태우 정부는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해나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사할린 동포 모국 방문이 추진됐다. 일제 강점기에 징용으로 끌려간 정씨의 큰아버지는 과거 일제가 장악했던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살고 있었는데, 큰아버지가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진주의 정씨 집을 방문하게 됐다.
사할린에 가다
그는 백부와 만나면서 소련에 가봐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한국이 소련과 수교한 것은 1990년 9월이다. 하지만 주한 소련대사관이 설치되기 전이라 소련을 방문하려면 제3국에 있는 소련대사관에서 소련 입국 비자를 받아야 했다. 당시 일본에는 소련대사관이 주재했다.
1990년 초 정부는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운동권에서는 운동을 하다 검거된 전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여권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정씨는 개의치 않고 여권을 신청했는데 뜻밖에도 여권이 나왔다. 일본 비자를 받아 바로 일본으로 날아간 그는 사할린 큰아버지댁으로 연락을 취했다. 1990년 가을의 일이다.
이에 큰아버지는 초청장을 보내줬고 그는 이것을 들고 도쿄의 소련대사관을 찾아가 ‘별지(別紙)’ 형태의 입국 비자를 받았다. 그의 여권에는 소련 비자가 찍히지 않은 것이다.
당시 극동 소련으로 가는 항공기는 니가타에서 하바로프스크로 가는 것뿐이었다. 그는 니가타에서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유즈노사할린스크에 내려 큰아버지 가족을 만났다. 정(鄭)씨 성은 일본어로 ‘테이’로 발음된다. 큰아버지는 일제 때 사할린에 갔기에 사할린에서도 일본어 발음으로 불리는 성을 사용했는데, 사할린에서는 정씨 성을 ‘테이’가 아닌 ‘텐’으로 표시했다.
그런데 사할린의 소련공산당 시당 위원 가운데 ‘텐’ 성을 쓰는 한국계 인물이 있었다. 성이 같은데다 한동네에 살았기에 그와 사촌형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큰아버지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사촌형들은 사할린에 돌아와 그에게 “한국에 갔더니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구속된 사촌동생이 있더라. 그 동생이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해 알고 싶어 사할린에 오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사촌형들은 정씨를 시당 위원회에 있는 텐씨 사무실로 데려가 인사를 시켰다. 시당 위원회가 있는 사무실 한쪽에 텐 위원과 합작 사업을 하는 북한의 수산대표부의 사무실도 있었다. 사촌형과 텐 의원은 북한 수산대표에게도 “한국에서 진짜 사회주의자가 왔다”는 말을 한 모양이었다.
북한 수산대표는 정씨를 스스럼없이 만나주었다. 정씨는 북한 수산대표와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며칠 후 북한 수산대표는 사촌형 집으로 “정씨를 다시 만났으면 한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하여 수산대표를 만나러 한 고려인 집으로 갔는데, 가보니 나홋카에 주재하는 북한의 이모 영사가 와 있었다. 수산대표는 정씨가 투옥된 적이 있다는 것을 보고한 모양이었다. 이모 영사는 정씨의 투옥 경험 등에 대해 물어보는 등 많은 관심을 표현했다.
정씨는 살아온 과정과 생각, 자신이 생각하는 주체사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영사는 정씨에게 한국 운동권의 경향과 움직임, 주체사상에 대한 이해 정도, 혁명론, 김일성 항일투쟁사, 후계자론 등에 대한 생각 등을 물었는데, 토론에 이골이 난 정씨는 구구절절 생각을 뽑아 올렸다.
하바로프스크에서 벌인 토론
이 영사는 정씨의 사상이 확실하다고 여겨 평양에 보고한 듯했다. 며칠 후 그는 정씨에게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인지를 물었다. 정씨가 항공권에 찍힌 날짜를 밝히자 그는 “여기 큰아버지도 계시니 돌아가는 날짜를 늦춰라. 평양의 중앙당 지도원이 당신을 만나보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정씨가 귀국 날짜를 늦추자 그는 나홋카로 돌아가면서 “가는 길에 하바로프스크에 들르면 경제대표부 최모 부대표에게 전화를 걸어라. 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북한은 하바로프스크 일대에 벌목공을 파견해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었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경제대표와 별도로 임업대표부도 두고 있었다. 하바로프스크로 간 정씨가 경제대표부 사람을 만나러 가자 그곳에는 부대표와 함께 평양에서 온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지도원 두 명도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통일 문제, 한국의 운동권 현황, 남조선 혁명 문제, 주체사상 등에 대해 물었다. 정씨는 이들과 심도 있는 토의를 했다. 이곳에서도 정씨의 토론이 북한인들을 압도하자 이들은 정씨에게 북한으로 정식 초청하겠으니 응해달라고 요구했다.
정씨는 며칠을 고민하다 주체사상이 북한에서 어떻게 구현됐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가 북한에 들어갈 때 사용할 위조 여권을 만들기 위한 사진을 찍고 니가타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바로프스크를 떠나기 전 그는 북한인들과 1992년 초에 다시 보자고 약속했다.
▼ ‘제2부’ 삶과 죽음 넘나든 이중 공작원의 삶, 그리고…
1991년 12월말,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독립하는 대사건이 있었다. 그렇건만 약속한 1992년 1월 말이 오자 정씨는 다시 일본으로 가 하바로프스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약속한 대로 하바로프스크에 나타난 정씨를 북한 대표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정씨를 반긴 사람 가운데는 특별히 평양에서 날아온 중앙당 지도원도 있었다.
이들은 1년 전에 정씨가 찍어놓고 간 사진을 토대로 북한 벌목공 신분으로 가장한 북한 여권을 만들어놓았다. 북한 지도원들은 하바로프스크에서 국제선 항공기를 타고 중국 하얼빈으로 갔다가 하얼빈에서 중국 국내선 항공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북한 여객기로 갈아타고 평양으로 가는 일정을 마련했다.
정씨는 평양에서 온 지도원 2명과 함께 하바로프스크 공항으로 나갔다. 그리고 임업대표부에 있다는 안 영사와 경제대표부 사람들이 환송을 하러 따라 나왔다. 먼저 지도원 두 명이 출국대를 통과했다. 그런데 정씨의 순서가 되자 심사관은 출국 도장을 찍지 않고 시간을 끌더니 직원들을 불렀다. 일이 잘못된 것이다. 이미 출국대를 통과한 지도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들은 되돌아 나올 수가 없었다.
그날 정씨는 말쑥한 양복 차림이었다. 북한 벌목공은 이런 차림을 하지 않는다. 벌목공들은 대개 하산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는 국제열차편으로 북한을 오갔다. 북한 벌목공이라는 사람이 양복을 입고 항공기로 하얼빈·베이징을 거쳐 평양으로 간다고 하니 심사관이 수상하게 생각해 여권을 살펴보다 위조 사실을 안 모양이었다.
하바로프스크 출국 실패
출영객들도 즉각 분위기를 파악했다. 이 가운데 안 영사는 외교관 신분이므로 출국 심사대로 재빨리 달려가 통사정을 하며 용서를 구했다. 덕분에 정씨는 러시아의 출입국사무소에 구류되지 않고 안영사 등을 따라 하바로프스크의 북한 임업대표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출국대를 통과한 지도원 두 명은 비행기를 타고 하얼빈으로 떠나야 했다.
10여 일이 지나자 하얼빈행 항공기를 탔던 지도원 중 한 명이 하바로프스크의 임업대표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정씨를 데려가는 작업에 착수했다. 정씨 여권을 새로 만든 것이다. 이때 북한 지도원들은 KGB를 비롯한 러시아 정보기관이 도청할 것을 염려해 정씨와의 대화를 필담(筆談)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출국 루트는 벌목공의 귀환 루트인 러시아의 하산을 지나 두만강을 건너 북한으로 들어가는 국제열차편을 선택했다.
그러는 사이 2월 초순이 지나갔다. 2월10일 무렵 정씨는 이들과 함께 국제열차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북한의 첫 번째 역인 두만강역에 내렸다. 그곳에는 평양에서 내려온 또 다른 중앙당 지도원과 그 지역의 책임자들이 나와 있었다. 두만강역 당비서는 “저희 조국을 방문하여주시고, 이곳 두만강역으로 오신 남조선 혁명가를 영접한 것을 영광으로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들은 정씨를 외국인 숙소로 데려가 칙사 대접을 했다.
다음날 그는 열차를 타고 꼬박 하루를 달려 평양에 도착했다. 기차 여행은 그에게 비행기를 타고 갔으면 절대 볼 수 없는 북한 실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한창 추운 계절인데도 북한 열차에는 유리가 끼워져 있지 않은 창이 많았다. 일반 객실의 의자는 전부 나무였다. 기찻길 주변에는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구호만 만발해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보면서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를 떠올린 정씨는 ‘혁명에 실패함으로써 룸펜이 돼버린 사회주의 인텔리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러한 느낌 때문이었을까. 평양역에 내리는 순간 28세 청년의 눈에선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나 북측 인사들은 그가 사회주의 조국에 도착해 감격에 겨워 우는 것으로 착각했다.
평양역에는 벤츠를 대동하고 당 중앙위원회 책임참사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웅장하고 조용한 초대소였는데, 입구에 ‘남조선 혁명가와 통일문제를 논의하였던 곳’이라는 김일성의 글을 새긴 비석이 서 있었다. 초대소의 응접실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작은 스크린이 있는 극장형이었다.
“통일결혼을 시켜달라”
한민전 해외대표부 대표인 이○○씨가 정씨에게 직접 적어준 해외에서의 접선 방법 노트.
초대소에 있으면서 그는 김정일 위원장 앞으로 ‘충성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받아든 지도원은 “김 위원장은 남조선 혁명가 편지는 꼭 읽어보신다”라고 했는데, 며칠 후 그는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남조선 혁명가의 글을 잘 읽어보았다는 답을 주셨다”라고 전했다.
토론과 학습으로 이어지는 초대소 생활은 답답했다. 이에 정씨가 “평양 인민들이 사는 것을 보고 싶다”고 조르자 이들은 평양 지하철을 태워주고 당 간부가 사는 아파트로 데려갔다. 그런데 정씨 눈에 비친 당 간부의 아파트는 서울의 보통 아파트보다 못했다. 물론 평양 시내도 서울보다 못했다.
직접 접할 수 없었지만 인민들의 삶은 고단한 듯했다. 정씨가 이러한 점을 지적하자 그를 상대한 한 교수는 “사람이나 사회는 잘살기도 하다가 못살기도 하는 것을 반복한다. 1960년대엔 우리가 더 잘살았지 않느냐. 북조선 경제가 어려워진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정씨는 북한의 몰락은 경기 순환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의 불비(不備)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지도원들은 정씨에게 유럽에 머물면서 한국을 드나들며 한국 정세를 알리는 일을 해달라고 했으나 정씨는 한국에 자주 드나들게 가까운 하바로프스크에 머물겠다고 해 그들의 동의를 받아냈다.
정씨는 이들에게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사형수 김○○씨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이들은 “김씨는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이다”라고 잡아뗐다. 이때 정씨는 ‘이들에게 남한의 혁명가는 도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고 한다. 그래서 지하전선을 구축해 남조선을 해방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며 남조선 혁명역량을 강화하려면 남한에서 온 자신과 북한 처녀가 결혼해야 한다며 이를 요구했다.
“석 선생, 안녕하십니까”
북한이 자신을 통해 공작하는 것을 막으려면 통일결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통일 제일주의자였기에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남북을 묶어 통일을 이루려면 남북 모두로부터 조종당하지 않는 통일부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은 나의 진심 어린 충고이며 제의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북측은 “그 문제는 더 높은 분과 의논하라”며 답을 피했다.
김정일 생일이 지난 어느 날 북한 지도원들은 그를 한국으로 돌려보내주었다. 방법은 밀입북할 때와 마찬가지로 기차를 타고 두만강역과 하산역을 거쳐 하바로프스크로 간 다음 항공기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정씨는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무도 그가 평양에 갔다 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 시기 서울구치소에서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이광재씨는 노무현 의원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정씨는 노 의원 사무실을 찾아가 이광재씨와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소개로 맞은편 방에 있는 조○○ 의원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노무현 의원은 사무실에 없었기에 인사를 하지 못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바 있는 정씨의 출국이 잦아지자 진주경찰서 대공과에서 그를 주목했다. 경찰은 그가 국보법 위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가족에게 접근해 잦은 출국 이유를 탐문했다. 이에 대해 가족들은 “태환이의 큰아버지가 러시아에 있지 않으냐. 그래서 태환이는 러시아에서 공부를 하려고 한다”고 대답해 경찰의 의심을 잠재웠다.
평양 방문은 그에게 북한과 혁명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이때의 그는 사회주의보다는 통일결혼을 주장할 정도로 통일 쪽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혼자서라도 남북을 연결해보겠다는 생각에 다시 하바로프스크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함께 평양에 갔었던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지도원을 만나 몇차례 토론을 했다. 이 토론에서 그는 크게 실망했다. 북측은 그를 공작원으로 활용하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정씨는 북측의 이러한 태도가 못마땅해 숙소를 바꾸었다. 그러나 임업대표부의 안○○ 영사와 한민전 해외대표부 대표 등이 수소문을 해 용케도 정씨의 숙소를 찾아왔다. 한민전 대표는 앞으로 연락할 방법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접선방법을 적어주었다(위쪽 사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