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을 찍어내는 조선은행 평양지점에서 78만원을 도난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78만원이면 당시 신문기자 한 달치 봉급인 50원을 매일 쓴다 해도 40년 이상 쓸 수 있는 거금. 사건 해결의 단서를 찾지 못한 경찰은 한동안 좌충우돌했고, 범인의 인상착의조차 모르는 엉터리 수배령이 조선 각지는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내려졌다. 그러나 난폭한 성격의 범인에게 평소 심하게 착취당하던 사람의 제보로 범인은 신속히 검거되고 만다.
‘동양 초유의 대도난: 78만원 사건’을 보도한 ‘신동아’ 1932년 3월호(위). 아래는 조선은행 전경. 조선은행권을 발행한 식민지 조선의 중앙은행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법주임이 자리에 없어 수사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수사주임도 자리를 비웠다. 미심쩍은 마음이 들어 형사계를 찾았지만, 그곳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2층에 올라가 주임급 가운데 유일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경무주임을 붙잡고 넌지시 물었다.
“서장님은 어디 가셨나요?”
“평안남도 경찰부에 들어가셨소만….”
월요일 오전에 서장이 경찰부를 방문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지만, 오기영은 경무주임이 뭔가 숨기고 있음을 기자의 육감으로 알아차렸다.
‘방금 경찰서에 오는 길에 구(舊)시가로 달려가던 차가 서장 차였지. 하지만 평안남도 경찰부는 신시가에 있잖아. 음, 사법주임이 없다. 수사주임도 없다. 형사는 죄다 외근 중이다. 경무계 주임은 서장의 행방을 정반대로 속이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졌나? 강도사건이라도 일어난 걸까. 그렇지만 강도사건쯤에 서장까지 출동할 리 없지.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것도 큰 사건이!’ (‘동양 초유의 대도난, 78만원 사건’ ‘신동아’ 1932년 3월호) |
오기영은 30분 정도 경찰서 아래위층을 오가며 정보를 수집했지만 그럴싸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경찰서에 남아 있는 인원들은 경무계 주임을 제외하곤 그에게 뭔가를 숨기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다급한 마음에 경찰서를 나와 부랴부랴 평안남도 경찰부로 달려갔다.
‘동양 초유’의 大도난
보안과에 들르니 예상대로 과장은 자리에 없었다. 보안과 차석과 전속형사도 보이지 않았다. 미심쩍은 표정을 애써 감추고 과장실 앞자리에 앉은 순사에게 태연하게 물었다.
“과장님은 어디 가셨나요?”
“조선은행 평양지점에….”
“이봐!”
순사가 입을 떼기 무섭게 경무보(경위)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상관의 노기 띤 경고에 순사는 차마 발설해서는 안 될 비밀이나 폭로한 듯 당황했다. 자기 때문에 애꿎은 순사가 욕을 듣건 말건 오기영은 특종이라도 잡은 듯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동아일보 1932년 1월20일자에 실린 사진들. 조선은행 평양지점(위), 범인이 들어간 창(아래 왼쪽), 은행 후문(아래 오른쪽).
오기영은 허겁지겁 평안남도 경찰부를 뛰쳐나와 전차를 집어탔다. 지국에 들러 대강의 사정을 설명한 후 곧장 조선은행으로 달려갔다.
‘아니야. 조선은행으로 가봐야 소용이 없을지도 몰라. 경찰도 비밀에 부치는 일을 그들이라고 곧이곧대로 발설하겠어? 이런 문제는 에둘러서 풀어야 해.’
오기영은 방향을 틀어 조선은행 인근에 있는 동일은행 평양지점으로 들어갔다. 학교 선배인 지배인을 찾아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형님, 조선은행에 무슨 일 있는 거죠? 그렇죠?”
“아니 이 사람, 조선은행 일을 왜 예서 묻나.”
“그러지 말고 좀 알려주세요. 제가 취재원 보호에 철저한 것 잘 아시잖아요.”
“글쎄 뭘 알아야 알려줄 것 아닌가. 조선은행이 얼마를 도둑맞았는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형님 지금 ‘도둑’이라고 하셨어요?”
“그럼 자넨 여태 조선은행 금고가 털린 것도 모르고 나를 찾아온 거야?”
“돈 찍어내는 중앙은행에 도난사고라는 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그래 얼마를 잃어버렸답니까.”
“그거야 기자인 자네가 나에게 알려줘야지. 나는 조선은행 지배인이 아니라 동일은행 지배인일세.”
오기영은 조선은행에 도난사건이 발생한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라고 생각하고 동일은행을 나왔다. 조선은행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도대체 어떻게 정보를 캐내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대동문통 조선은행 앞에는 두 대의 관용차가 나란히 서 있었다. 평양경찰서 서장 차와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 차였다. 은행 안으로 들어서자 수십 명의 형사가 널따란 청사 곳곳에 흩어져 조사하고 있었다. 평양지방법원 검사국 요코다 검사와 사이토 검사도 보였다. 은행원들은 대부분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벌집 쑤신 듯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영업은 정상적으로 이뤄질 모양이었다.
“얼마를 도난당했답니까?”
창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다가가 슬쩍 묻자, 그는 아무 일도 아닌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78만원이요.”
오기영은 입이 쩍 벌어졌다. 78만원이면 신문기자 한 달치 봉급인 50원을 매일 쓴다 해도 40년 넘게 쓸 수 있는 거금이었다. 조선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大)도난 사건이었다. 창구 직원에게 되물었다.
“오늘도 평상시처럼 영업합니까? 지급도 정상적으로 이뤄집니까?”
“금고에 있는 410여만원 중 78만원쯤 없어졌기로 지급에 지장이 있을 리 있겠소.”
일본, 만주까지 엉터리 수배령
사건이 알려진 것은 2시간 전인 9시45분이었다. 조선은행 평양지점 금고책임자 이구치 차장은 평상시처럼 금고문을 열어두려고 금고실로 들어갔다가 비상구 철문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는 금고를 열지 않고 곧장 평양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신고를 접수한 평양경찰서에서는 즉각 서장 이하 사법주임, 수사주임, 사법계 형사 전부가 달려왔다. 이구치 차장은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손을 부들부들 떨며 금고문을 열었다. 출납계 주임이 금고에 남은 현금을 헤아리니 일본은행권 100원짜리 100장, 10원짜리 1000장, 조선은행권 100원짜리 6100장과 10원짜리 1만5000장, 합계 78만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검증 결과 경찰은 78만원을 도난당했다는 것과 금고문 옆에 있는 비상구 철문이 없어진 것, 두 가지 사실밖에 알아내지 못했다. 범행은 실로 절묘했다. 금고 안팎을 20여 명의 형사가 혀끝으로 핥다시피 살펴 보았으나 지문 하나 남긴 것이 없었다. 철문을 어떻게 뜯어가지고 갔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동양 초유의 대도난, 78만원 사건’ ‘신동아’ 1932년 3월호) |
오기영은 자기가 범인이라고 가정하고 은행 정문 오른쪽에 있는 쪽문에서 비품실 창을 넘고 수표교환실을 거쳐 사무실을 가로질러 금고까지 걸어본 후 지국으로 달려갔다. 조급한 마음에 체력에 부치게 달린 탓에 제1보를 본사에 보내려고 수화기를 들었을 때는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가 보낸 제1보는 이튿날 동아일보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됐다.
지난 18일 오전 10시경 평양 대동문 조선은행 평양지점에서 78만원 도난사건이 발생했다. 78만원이라는 거금을 도난 당한 사건은 조선에서 일찍 그 예를 볼 수 없는 공전의 중대 사건이다. 지난 16일 토요일 오후 1시경에 조선은행 평양지점의 출납 사무를 마치고 현금 410여만원을 금고에 수납한 후 금고열쇠를 굳게 채우고 주말을 지낸 후 18일 오전 10시경에 금고 열쇠를 열어 보니 현금 410여만원 중에서 78만원이 사라졌다. 18일 아침 조선은행 평양지점 도난사건이 발각되자 급보를 받은 소관 평양경찰서에서는 후루카와 서장 이하 사법주임, 사법계 형사를 필두로 고등계 형사까지 20여 명의 형사대가 출동하여 경계를 엄중히 하고 있다.(‘조선은행 평양지점에 78만원 대도난’ ‘동아일보’ 1932년 1월19일자) |
평안남도 경찰부는 전국 각지로 전보를 치고 전화를 걸어 범인을 수배했다.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오전 10시를 기해 범행수단과 시간, 범인의 인상조차 모르는 엉터리 수배령이 조선 각지는 물론 일본과 만주까지 내렸다. 일본 경찰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 비상이 걸렸고, 도회지에는 호외가 뿌려졌다. 사건 발생 사실은 전파를 타고 전세계에 알려졌다. 수표교환실에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200여 명의 사복수사대가 평양시내를 누볐다.
78만원이 없어졌으니 배당이 줄어들 것이라 하여 조선은행 주가는 51원80전에서 31원으로 폭락해 재계에 충격을 주었다. 절정에 달한 공황. ‘실업자 홍수시대’의 가두에 행방을 잃은 78만원은 얼마나 굉장한 이야깃거리인가. 적막하던 거리가 갑자기 활기를 띠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생전 구경도 못할 78만원. 바람같이 사라진 78만원. 사람들은 78만원을 입에 올리며 이상한 흥분에 싸였다. 저녁 굶은 실업자가 78만원을 잠꼬대로 외친다 해도 비웃을 일은 못 된다.(‘78만원 범죄비화: 절도사상 신기록’ ‘동광’ 1932년 3월호) |
사라진 철문을 찾아라!
범행은 치밀했다. 범행시간을 알 수 없는 것은 물론, 범인이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조차 알 길이 막막했다. 단독범행인지, 공모자가 있는지, 외부에서 침입해 금고 비상구를 파괴했는지, 미리 금고 내부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토요일 금고 폐쇄 이후 현금을 훔쳐 달아났는지….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게 오리무중이었다.
수사본부에서는 범인이 금고 안에 은신했다가 돈을 훔쳐 탈출했다는 ‘내부설’과 외부에서 침입했다는 ‘외부설’이 팽팽히 대립했다. 내부설의 유력한 근거는 금고 내부에서 발견된 철가루였다. 금고로 통하는 비상구는 두 장의 두꺼운 철문이 가로막고 있고 그 중간에 암호장치가 설치돼 있다. 비상구 안쪽 철문에 박혀 있던 10개의 못은 모두 빠지고 사건 발견 당시엔 철문 자체가 사라졌다. 안쪽 철문의 못은 구조적으로 안쪽이 아니면 뽑을 수 없었다. 범인은 토요일 금고 폐쇄 전 금고 안에 침입해 있다가 금고 내에서 안쪽 철문의 못을 뽑고 철문을 뜯어낸 후 암호를 맞춰 바깥 쪽 철문을 열고 탈출했다는 것이 내부설의 설명이었다.
그럴듯한 추리였지만, 외부설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철가루는 금고 안쪽뿐 아니라 바깥쪽에서도 발견됐다. 외부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범인이 금고 내부에 숨어 있었다면 비상구 철문을 가지고 달아날 이유가 없지 않으냐’고 반박했다. 오히려 외부에서 침입하느라 철문을 파괴했기 때문에 범행 흔적을 감추기 위해 무거운 철문을 들고 달아났다고 추리했다. 안쪽 철문은 3년 전 금고 수리 당시 불필요하다는 이유에서 못을 박아두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었다. 만일 못을 박아뒀다 해도 범인은 내부에서 나온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일부러 철문을 들고 나갔을 것이라고 외부설은 설명했다.
어떻게든 범인이 가져간 철문을 찾아야 한다! 철문을 찾지 않고서는 범행의 경로조차 파악할 길이 없었다. 20kg 정도의 현금 뭉치야 어딘가에 꼭꼭 숨겨둘 수 있다 하더라도 100kg이 넘는 크고 육중한 철문을 멀리 들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수사본부는 아무런 단서도 없는 범인을 추적하기보다는 사라진 철문을 찾는 데 주력했다.
사건이 알려진 1월18일, 수사대는 밤을 새워 동분서주했지만 아무런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수사대는 어디로 가야 범인을 찾을 수 있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범인 체포가 녹록지 않을 것임을 시인했다.
범인… 그는 사람이었나, 바람이었나. 문제는 철문을 찾는 데 있다. 철문만 찾으면 범행의 10분의 8은 짐작할 것이다. 그것은 범인을 절반쯤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철문이 없다. 철문! 철문! 그것을 가지고 간 범인은 과연 지혜로운 자다.(‘동양 초유의 대도난, 78만원 사건’ ‘신동아’ 1932년 3월호) |
78만원 도난사건의 주범 사나타 진키치(아래 오른쪽)와 그의 아내, 유곽 ‘소나무집’(위). 동아일보 1932년 1월21일자.
하지만 얼음 아래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물고기들만 놀라게 할 뿐 뾰족한 성과가 없었다. 제2조는 평양시내 하수구와 소방전 등의 구멍을 전부 뒤졌고, 제3조는 거리 주변으로 분뇨를 치우는 구멍을 뚫어놓은 변소통을 모조리 뒤져보았지만 애꿎은 경찰들의 코에 하수구 냄새, 똥 냄새만 배었을 뿐 모두 허사였다. 철문을 찾지 못하면 범인을 잡기 어렵고, 범인을 잡지 못하면 철문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였다.
범행 후 최장 30여 시간이 지나서야 범행 사실이 밝혀진 것도 수사를 더디게 했다. 만일 범인이 범행 직후 만주 방면으로 도피했다면, 범행 사실이 밝혀진 시각 이미 국경을 넘었을 것이었다. 용의주도한 범인은, 새 지폐는 사용 중에 발각될 우려가 있음을 알고 금고에서 묵은 지폐만 골라서 꺼내 달아났다. 범인이 국경을 넘었다면 희대의 대도난사건은 속절없이 미궁에 빠질 것이었다.
“여보게, 범인이 검거됐네”
1월19일 밤, 오기영 기자는 평양경찰서에서 수사본부 경찰들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서장실에 설치된 수사본부는 문을 꼭 닫고 경찰부장, 각과 과장, 서장, 각계 주임이 들어앉아 졸음을 쫓으며 범인 검거를 위해 꾀를 짜냈다. 신문기자 네댓 명도 경찰서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경관 하나 하나의 동정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다.
새벽 1시30분, 총독부 경찰국에서 보낸 경찰과장이 평양역에 도착하기 직전 일본 형사 한 명이 수사본부로 불려들어갔다. 조금 후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수사본부를 나왔다. 오기영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다른 기자들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 가는 체 하면서 일본 형사의 뒤를 쫓았다. 그는 동료형사 한 명을 데리고 수사본부에 들어갔다 나왔다. 두 형사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외투와 모자를 꺼내 입고 쓰면서 황급히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경찰서를 나온 두 형사는 수정(壽町) 공설시장 앞으로 걸어갔다. 오기영은 혼자서 두 형사를 미행하는 것이 역부족임을 깨닫고 잠시 경찰서 현관 앞에서 주저했다. 마침 매일신보 평양지국 주윤 기자가 동료와 교대하려고 경찰서로 들어왔다.
회수한 78만원(위 오른쪽). 범인을 구경하기 위해 평양경찰서 앞에 운집한 군중(아래). 공범 마키노 마사오(위 가운데). 쇼다이(위 왼쪽). 동아일보 1932년 1월22일자.
오기영이 황급히 외치자 그 소리를 들은 듯 두 형사는 돌연 달리기 시작했다. 주윤은 영문도 모르고 그들을 추격했다. 오기영은 다시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른 기자들과 잡담을 나눴다. 30분 후, 주윤이 돌아와 형사 두 명이 특급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갔다고 전했다. 오기영은 주윤에게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해달라고 부탁하고, 평양경찰서를 나와 동아일보 평양지국에 가서 신의주지국으로 지급(至急)전화를 걸었다. 새벽 3시, 두 형사가 안주를 지날 때쯤 오기영은 신의주지국에 그들의 행적을 추적하라고 통보했다.
전화 통화를 마친 후 소파에 걸터앉았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이틀 동안 잠 한 숨 못 잔 탓에 소파에 걸터앉기 무섭게 졸음이 쏟아졌다. 새벽 5시, 소파에 드러누워 새우잠을 자고 있을 때, 평양경찰서에 있는 주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주윤은 다급한 목소리로 급박한 상황을 전했다.
“여보게, 범인을 검거했네.”
돌아온 78만원
오기영은 자느라 입가에 흘린 침을 양복 소맷자락으로 대충 닦은 후 지국을 뛰쳐나갔다. 평양경찰서까지 헐떡거리며 달려가자, 정문을 경계하고 있던 순사 두 명이 가로막았다. 기자증을 보여주고, 아무리 떼를 써도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그중 한 명에게 택시라도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순사 한 명이 전화를 걸기 위해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자 남은 순사에게 검거 장소를 물어 알아냈다. 경찰서 정문 앞에 택시가 도착하자 미처 멈추기도 전에 집어타고 외쳤다.
“진정(賑町)! 진정!”
택시가 진정 유곽 어귀에 들어서면서 마주 보고 나오는 수사대의 자동차를 만났다. 상대편에서 기자의 출현을 알아차리고는 범인의 얼굴을 감추기 위해 자동차 안의 불을 꺼버렸다. 얼마 후 택시는 범인이 체포된 ‘소나무집(松の家)’ 앞에 멈췄다. 범인은 유곽의 손님이 아니라 주인인 사나타 진키치(佐奈田甚吉)였다. 오기영은 기다리고 있던 택시에 올라타고 경찰서로 돌아갔지만, 역시 가로막는 통에 들어가지 못했다. 문 밖에서 주저하는 동안 사법주임이 인솔한 수사대 10여 명이 나와서 또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나는 다시 그들을 추격했다. 새벽거리는 죽은 듯이 고요하다. 안개는 자욱해 전등조차 희미하다. 앞에 가는 자동차 속의 수사대는 공명심에 불타고 있으나, 나는 어떤가. 어젯밤 송고한 원고는 아직 찻간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범인 체포와 동시에 벌써 뉴스의 생명을 상실했다. 밤을 새우며 활동해 쓴 기사가 찻간에서 생명을 잃고 지면에 나타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휴지통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서울로 가고 있을 생각을 하니 속상하지 않을 수 없다.(‘동양 초유의 대도난, 78만원 사건’ ‘신동아’ 1932년 3월호) |
새벽 6시, 수사대는 행정(幸町) 공설시장에서 공범 쇼다이를 체포하는 것을 끝으로 범인 6명을 일망타진했다. 범인들이 모두 체포된 이후에도 평양경찰서는 기자의 출입을 금지했다. 기자 네댓 명은 영하 20℃의 새벽 추위에 떨면서 경찰서 정문에서 출입금지 해제를 기다렸다.
6시30분, 경찰부장이 정문에서 떨고 있는 기자들을 경찰서 안으로 불러들여 ‘범인 전부를 체포했다’는 간단한 담화를 발표하고, 압수해온 78만원의 돈뭉치를 보여줬다. 사건이 발생한 후 경찰이 신문기자에게 공식적으로 제공한 최초의 정보였다. 그때까지 기자들은 오로지 자기의 손발과 머리를 움직여 사건을 독자에게 보도했다. 서울 본사에 지급전화로 기사를 송고하고 나니 어느덧 7시였다.
범죄의 재구성
주범 사나타 진키치가 조선은행 평양지점 금고를 노린 것은 1930년 8월부터였다. 세계 대공황과 하마구치 내각의 긴축재정 여파로 평양부 진정에서 유곽 ‘소나무집’을 운영하던 그는 심각한 경영난에 처했다. 불황을 탈출하고자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8만여 원의 빚을 졌다.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달 궁리 끝에 생각해낸 묘책이 조선은행 평양지점을 터는 것이었다.
사나타는 우선 친동생 마키노 마사오와 마키노의 처남 가네코, 그리고 자신의 친구 하마다 등과 조선은행 평양지점 금고를 털기로 의기투합했다. 사나타 진키치와 마키노 마사오가 형제면서 성이 다른 것은 진키치가 아내인 사나타 마쓰노(佐奈田松野)와 결혼하면서 아내의 성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 괴기적 범죄를 빚어낸 범인들은 서로 서로 친족 관계가 있고 더욱 주범은 마키노 고우키치(牧野興吉)의 장남으로 사나타 집안에 수양자로 간 사람이므로 마키노 집안만 아비와 장남부처 둘째아들 등 4명이 체포된 것이다. 이들 범인은 어떠한 성향의 소유자인가. 사나타 진키치는 12년 전 스물여섯 살 때 ‘소나무집’의 창기로 있던 마쓰노와 결혼하고 마키노의 집에서 탈적하여 ‘소나무집’으로 들어가 사나타의 성을 갖게 되었다. 원래부터 성격이 난폭하기로 이름났고 주벽이 심하나, 뛰어난 기지의 소유자였다. 최근에 와서는 부채가 8만원에 달해 경제상으로 곤궁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사나타 마쓰노는 이전에 다롄에서 창기업을 하면서 중국인 부호의 첩으로 돈을 모아가지고 다시 조선으로 와서 평양 진정에서 현재의 ‘소나무집’을 개업하고 창기업을 계속하는 한편 자신도 매음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자주 찾아오는 마키노 진키치와 정이 들어 그와 결혼하고 마키노 진키치는 사나타 진키치로 성을 바꿨다. 사나타 마쓰노의 가정은 그리 나쁘지 않아 그의 형제 3인은 모두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78만원 사건 후문’, ‘동아일보’1932년 1월23일자) |
8월 하순, 사나타 진키치는 서울에 가네코를 보내 60원짜리 금고파괴용 천공기를 사왔다. 전기를 이용하는 그 천공기를 집에서 시험한 결과 소음이 심해 애석하게도 범행에 이용할 수 없었다. 공연히 피 같은 돈 60원만 날리고 범행을 일시 단념했다.
11월, 사나타는 친동생 마키노 마사오의 소학교 동창이면서 조선은행 평양지점 급사로 일하다가 부정행위가 발각돼 형사처분을 받고 해고된 쇼다이를 은밀히 포섭했다. 쇼다이도 일찍부터 꿈꾸던 일이라 흔쾌히 범행에 동참했다. 사나타 일당은 밤낮으로 모여서 조선은행 평양지점 금고를 털 묘책을 연구했다. 그때 사나타 마쓰노가 남편의 계획을 알아차리고 울면서 말리자 마키노, 가네코, 하마다 등은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하지만 사나타는 범행을 포기할 수 없었다. 8만원에 달하는 부채는 ‘소나무집’을 통째로 넘겨도 해결할 수 없었다. 파산해 거리로 쫓겨나지 않으려면 은행, 그것도 조선 최대의 은행을 털 수밖에 없었다.
허술한 경비에 완전범죄 자신
조직원의 절반이 떨어져 나간 이후에도 사나타는 쇼다이와 함께 범행을 궁리했다. 12월 초, 조선은행 평양지점에서 급사로 일한 적이 있는 쇼다이는 기억을 짜내 금고실 비상구 철문의 열쇠를 짐작해 곁쇠 10여 개를 만들었다. 사나타와 쇼다이는 깊은 밤 조선은행 평양지점 주위를 정탐한 후 허술한 경비에 완전범죄를 자신했다.
같은 달 말, 두 사람은 범행을 단행하기로 결심하고 자정 무렵 조선은행 평양지점 정문 오른쪽에 있는 쪽문을 넘어서 수표교환실을 거쳐 사무실을 지나 금고에 이르러 곁쇠를 가지고 비상구 철문을 열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곁쇠를 수정해 또 한 차례 침입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두 사람은 10여 개의 곁쇠를 대동강에 던져버리고 다른 방법을 궁리했다.
1월 초순, 두 사람은 길이가 50cm에 달하는 커다란 가위와 무쇠 곤봉 등을 가지고 두 차례나 침입했으나 비상구 철문에 미세한 균열만 내었을 뿐 철문을 뚫지 못했다. 네 차례나 침입하고도 실패했다면 웬만한 사람 같으면 포기했을 것이지만 그들은 집요하게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쇼다이는 조선은행 평양지점에서 해고된 후 잠깐 동안 철물점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손 드릴’을 이용하면 철판을 뚫을 수 있다는 쇼다이의 의견에 따라 사나타는 4원50전을 들여 손 드릴을 구입했다.
1월7일 자정, 두 사람은 다섯 번째 침입을 단행했다. 워낙 자주 들락거리다 보니 이번엔 자기 집 들어가듯 마음이 푸근했다. 익숙한 경로를 따라 비상구 철문까지 거침없이 다가갔다. 철문 이음새부터 맞은편 벽까지는 불과 50cm 남짓인데 그 사이에 사람이 끼어들어가 작업하기에는 손 드릴이 너무 커서 기껏 구입한 장비를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1월9일 자정, 두 사람은 처음보다 작은 손 드릴을 사들고 비상구 철문을 뚫기 위해 은행에 침입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은 틀리지 않았다. 여섯 번째 침입에서 비상구 철문 이음새 하나를 뚫었다. 크게 자신감을 얻은 두 사람은 11일, 14일, 15일 밤에도 계속해서 침입해 이음새를 하나씩 둘씩 뚫어나갔다. 동틀 녘 은행을 빠져나올 때면 현장에 떨어진 쇳가루는 자석으로 붙여 나갔고, 구멍 뚫린 자리에는 종이를 바르고 먹칠을 해서 감쪽같이 위장했다.
비상구는 어두컴컴하고 좁아서 그곳에 가자면 금고문에 부딪히곤 했다. 금고문을 건드려 손잡이가 조그만 비틀어져도 이튿날 아침 금고책임자 이구치 차장은 누가 금고 곁에 갔었느냐고 은행원들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그런 까닭에 숙직 행원조차 금고는 겉으로만 돌 뿐 금고 정문을 지나서 어두컴컴한 비상구까지는 살피지 않았다. 검은 종이로 대충 가려놓은 비상구 철문의 구멍이 일주일이 넘도록 발견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1월16일 토요일 자정, 열 번째 침입에서 두 사람은 드디어 비상구 철문을 뚫었다. 금고를 털겠다는 강렬한 의지와 조그마한 손 드릴 하나로 이룬 개가였다.
전후 침입 10회! 금고 속으로 뛰어들어가 돈 뭉치를 움켜쥔 쇼다이나 밖에서 내주는 대로 돈뭉치를 꾸리는 사나타나 흥분과 환희에 싸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되는지 알지도 못하는 거금을(그들은 신문 호외를 보고 비로소 훔친 돈이 78만원이나 되는 줄 알았다고 한다) 은행 안에 있던 급사의 자전거에 실어가지고 뒷골목으로 가면 오히려 수상하게 여길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하여 일부러 큰길 전차선로를 따라서 거침없이 돌아갔다. 우선 돈을 나른 후 이들은 또다시 침입해 철문과 사용도구 전부를 집어내왔다.(‘동양 초유의 대도난, 78만원 사건’ ‘신동아’ 1932년 3월호) |
사용도구와 철문은 하마다와 가네코가 대동강 양각도 북단 모래밭에 파묻고, 훔친 돈은 사나타, 마키노, 가네코의 집에 나눠 감췄다. 주범 사나타는 거금을 훔친 후 감쪽같이 ‘세탁’하기 위해 범행 한 달 전 미두 중매점까지 차려놓고 미두 투기로 치부한 것처럼 가장할 작정이었다. 계획과 실행 모두 완벽했지만, 머리로는 계산할 수 없는 돌발변수 하나가 사나타 일당의 범행을 완전범죄 직전에 좌절시켰다.
깨어진 일확천금의 꿈
사건 해결의 단서를 찾지 못해 좌충우돌하고 있던 1월19일 오후 2시, 수사본부인 평양경찰서 서장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 범인을 신고하면 제보자 신변에 위협이 생기지는 않나요?”
“걱정 마세요. 제보자의 신원은 절대 비밀에 부치겠습니다.”
“제가 제보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는다면, 신문에 난 78만원 도난 사건의 범인인 듯한 사람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전정에서 ‘소나무집’이라는 유곽을 운영하는 사나타란 사람이 사건 이후 수상하니 한번 조사해보세요.”
‘소나무집’에서 일하는 창기의 제보였다. 사나타는 성격이 난폭했고, 자기 밑에서 일하는 창기들을 심하게 착취했다. 지난해 12월에는 창기들과 대낮에 난투극을 벌인 일까지 있었다. 일확천금을 향한 사나타의 꿈은 범행을 꾸미고 실행하는 능력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인성 때문에 좌절된 셈이다.
이렇듯 치밀한 범행은 어찌하여 범행 사실이 발견된 후 겨우 42시간 만에 꼬리가 잡혔나? 그것은 사나타에게 뼈에 맺힌 숙원을 가지고 있는 창기의 밀고라는 말도 있다. 밀고를 받고 사나타 일파를 철저히 수사한 결과 손쉽게 범인을 검거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런 사실을 한사코 부인한다.(‘동양 초유의 대도난, 78만원 사건’ ‘신동아’ 1932년 3월호) |
평양경찰서 사법주임은 범인의 검거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처음에는 내부설과 외부설이 구구했으나 재삼 검증한 결과 범행 시에 떨어뜨린 6개의 철 조각을 발견하고 범인이 외부에서 어떤 도구를 사용해 침입한 것을 확신했다. 사라진 철문을 수색하는 한편 사용 도구의 입수 경로와 종류, 장물아비와 금고 지식이 풍부한 자 등을 수사했다. 18일 밤, 평양 남문통 이승상회에서 안주 사람의 부탁이라고 말하고 4원50전짜리 손 드릴을 사간 사람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튿날 탐문한 결과 조선은행 평양지점 급사로 일하다가 부정행위로 형사처분을 받고 해고된 쇼다이와 사건 직후 거액의 부채를 상환한 ‘소나무집’ 주인 사나타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이들을 연계해 연구·수사한 결과 이처럼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을 체포하게 된 것이다.”
경찰이 제보자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과학적으로 수사를 한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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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처럼 빠른 시일 내에 범인이 검거된 데에는 꼭 사나타에게 원한을 가진 창기가 아니라도 누군가의 제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1월20일 오후 2시, 오기영은 사건의 개요를 본사에 전화로 통보하고 중국인 목욕탕에 가서 이틀 동안 물에 적신 수건으로 대충 닦았을 뿐인 얼굴과 몸을 씻고, 쌓인 피로를 풀고자 휴게실 침상에 드러누워 여유롭게 담배 한 개비를 피웠다. 머릿속에서 많은 상념이 떠올랐다.
“410여만원의 돈이 썩어나던 금고 속에서 78만원쯤 시원한 바람을 쐬려 나와 이틀 동안 간 곳을 몰랐기로 세상은 왜 그리 떠들썩했을까. 나는 왜 이틀밤씩이나 새우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돈. 돈. 언제쯤이면 인간은 돈의 마력과 그 횡포에서 해방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