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호

‘쇼추텐고쿠(燒酎天國)’ 가고시마… 한국 소주는 슬프다

캬~ 한 잔 추억의 희비

  •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민속학 duruju@aks.ac.kr

    입력2008-03-06 10:1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가고시마 고구마 소주는 공업이 아니라 ‘농업’이라고 강조한다. 가고시마 농촌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만 사용하기 때문이다. 요사이 중국에서도 역사 문헌에 나오는 ‘바이주’를 재현한다고 성(省) 정부와 대학 연구소들이 앞장서 연구하고 있다. 그들이 역사에 나오는 ‘전통’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온갖 허망한 전설을 술 이름과 내력에 갖다 붙이는 것도 바이주 생산으로 지역 농촌을 살려보겠다는 의도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희석식 소주 산업은 지역사회에서 과연 농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희석식 소주가 많이 팔리면 과연 농민들도 행복할까.
    ‘쇼추텐고쿠(燒酎天國)’ 가고시마… 한국 소주는 슬프다

    심수관 공방의 소주 주전자.

    2006년 여름, 35℃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시에 처음 가봤다. 도쿄나 오사카에 비해 작은 도시이지만, 중앙역 앞에서 마주친 궤도전차가 인상적이었다. 일제 강점기 서울의 종로와 왕십리, 그리고 마포 종점을 왔다갔다했다던 궤도전차가 아직도 이곳에서는 중요한 교통수단이라니 신기하기도 했다. 그날 저녁 가고시마대학의 기층문화(基層文化)학과 교수인 오자키 다카히로(尾崎孝宏)씨를 만났다. 30대 중반인 그는 젊은 학생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미 한국에서 만나 술 한잔을 한 적 있기에 그는 곧장 가고시마 술을 마시러 가자고 나를 이끌었다.

    가고시마시에서 술집이 가장 많은 곳은 번화가 ‘덴몬칸(天文館)’이다. 가운데 대로를 두고 양옆으로 펼쳐진 덴몬칸은 마치 서울의 종로1가 골목길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남쪽에 있는 덴몬칸 골목으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6시경이었지만, 골목에 들어선 가게마다 네온사인과 번쩍거리는 간판을 달고 있다. 이국적인 풍경에 들떠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가면서도 곳곳에 눈길을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술집과 점포가 연달아 이어진 골목, 그 입구에는 이곳에서 유명한 술 회사의 브랜드 로고가 붙어 있다. 정말 술맛 나는 거리다.

    이윽고 그가 한 술집 입구에서 나를 불렀다. 무심코 바라본 술집 간판이 재미있다. ‘쇼추텐고쿠(燒酎天國)’다. 술집 안은 일본의 여느 도시에 있는 선술집인 ‘이자카야(居酒屋)’와 비슷했다. 그러나 다른 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벽면을 온통 대개 ‘대병(大甁)’이라 부르는 술병으로 장식해놓았다. 자리에 앉으면서 오자키 교수에게 저게 모두 ‘니혼슈(日本酒)’, 즉 청주(淸酒) 술병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대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쇼추(燒酎)’ 술병이란다. 나는 오사카 외곽인 이바라키(茨木)에서 역사가 100년이 다 된 술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집의 카운터 뒤에도 술병들이 즐비했는데, 모두 니혼슈 대병이었다. 일본 하면 니혼슈의 나라인데, 웬 ‘쇼추’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벽면에 진열된 대병들을 찬찬히 살폈다. 100여 개 되는 술병 중에는 새것도 있지만, 이른바 ‘키핑(keeping)’해 놓은 고객의 이름이 적혀 있기도 했다. 술의 상표도 같은 것이 별로 없어 보였다. 언뜻 보아 술병의 모양이나 상표는 니혼슈 대병과 다를 바 없었다. 알코올 도수를 확인해야 그 정체가 확인될 듯싶었다. 마침내 찾아낸 알코올 도수는 모두 25%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소주의 종류만도 100여 개가 넘는다는 말인가. 도대체 여기가 일본인가 아니면 한국인가.

    ‘신식 소주’와 희석식 소주



    보통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은 증류주(蒸溜酒)에 속한다. 중국의 바이주(白酒), 러시아의 보드카, 영국의 위스키, 프랑스의 브랜디가 모두 증류주다. 최근에야 알코올 도수가 20~30%까지 낮아졌지만, 원래 증류주는 40%가 넘었다. 증류를 하는 대상은 주로 양조주(釀造酒)다. 중국의 바이주는 쌀이나 수수로 만든 양조주인 청주나 황주(黃酒)를 먼저 만든 후, 그것을 증류하면 된다. 가오량주(高粱酒)는 그 재료가 수수라서 생긴 이름이다. 위스키는 주로 보리로 양조주인 맥주를 만든 후 그것을 증류해서 만든다. 브랜디는 포도를 원료로 만든 와인을 증류한 술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소주는 과연 증류주인가.

    당연히 증류주라고 해야 옳다. 다만 시중에서 즐겨 마시는 ‘국민 대중의 술’ 소주는 온전한 증류주라고 말하기 어렵다. 상표를 자세히 살펴보면 ‘희석식 소주’라고 표시돼 있다. 도대체 무엇에 무엇을 희석했다는 것인가. 고구마나 타피오카 같은 곡물을 알코올 분해해 정제시킨 주정(酒精)에 물과 향료를 희석시킨 것이 바로 이 술이다. 주정은 그냥 마시면 너무 독해서 치명적이기에 물을 섞어야 한다. 이와 같은 주정은 결코 전래의 증류 방식이 온전하게 도입된 것이 아니다. 밑술인 양조주를 굳이 만들지 않고 발효균을 원료에 넣어 기계에서 연속으로 증류시켜 만든다. 당연히 양조주가 지닌 원래의 독특한 향기도 주정에는 없다.

    ‘쇼추텐고쿠(燒酎天國)’ 가고시마… 한국 소주는 슬프다

    가고시마시에서 술집이 가장 많은 번화가 ‘덴몬칸’ 술집 골목.

    한국에서 팔리는 희석식 소주는 알고 보면 국가에서 일률적으로 제공하는 똑같은 주정을 이용해 만든 것이다. 단지 희석하는 방법에 약간의 차이를 두기 때문에 술맛이 아주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나는 2000년에 출간한 ‘음식전쟁 문화전쟁’이란 책에서 알코올 농도가 95%인 주정으로 만든 희석식 소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대중적인 국민의 술 소주를 두고 너무 심한 비판을 했다고 나무랐다. 나 역시 희석식 소주를 즐겨 마시는 편이라 그들의 항의를 무조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인들이 희석식 소주를 즐겨 마시기 시작한 때는 그리 오래지 않다. 희석식 소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연속 증류를 할 수 있는 기계가 필요하다. 이것이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대략 1930년대 전후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연속 증류기를 일본인 주류제조업자들이 들여와 술을 생산했다. 1937년 11월3일 ‘동아일보’에는 ‘신식소주대증산(新式燒酒大增産)’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조선의 신식 소주는 1932년경에는 7만여 석에 불과하더니 매년 증대하여 1936년에는 18만7000석에 달했다”고 했다. 여기에서 신식 소주가 바로 연속 증류기에서 생산한 소주다. 당시 기사에는 재래주(在來酒)의 생산량이 43만4000석에 이른다고 했으니, 여전히 재래식 증류 소주가 주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값싸고 알코올 도수가 일정한 신식 소주는 날이 갈수록 인기가 높아졌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주세법이 허가제로 완전한 궤도에 오른 1934년 이후, 개인은 집에서 술을 담글 수 없게 됐다. 이로 인해 밀주가 아니면 소주는 오로지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만 마셔야 했다. 여기에 재래식 소주의 주재료인 쌀은 주식이기에 문제가 됐다. 주식도 부족한 사정에 쌀로 증류주를 만드는 행위는 무모하기까지 했다.

    결국 같은 식민지이던 대만에서 사탕무를 수입하거나, 구황작물로 적극적인 재배를 독려하던 고구마 감자 등의 전분을 ‘신식 소주’의 원료로 썼다. 여기에는 일본인 양조업자와 조선총독부의 결탁도 한몫했다. 조선인 중에서도 개량된 신식 소주가 재래식에 비해 훨씬 ‘문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조선 술은 청주?

    조선시대 이래 한반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마시던 술은 막걸리와 청주였다. 보통 ‘약주(藥酒)’라고 하는 것도 청주에 특정의 약재를 넣어서 만든 술을 가리킨다. 그중에서도 ‘청명주(淸明酒)’라고 이름 붙은 술들은 조선시대 양반 집에서 가양주(家釀酒)로 담그던 술 중 대표적인 것이다. 1986년 가을, 서울올림픽을 2년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서울 대한상공회의소 강당에서 국세청이 주관한 민속주 지정 관련 공청회가 열렸다. 300명 가까운 참석자 중에는 자신의 집에 전해오는 청주 제조법 자료를 근거로 들며 왜 자신들이 민속주 지정을 받지 못하느냐고 항의하는 이도 많았다. 국세청이 주관해 1도(道)에 하나의 민속주를 이미 지정한 상태에서 법률 개정을 목표로 했던 이 공청회는 결국 순조롭게 끝나지 못했다.

    자기 집에 비전(秘傳)하는 양조법이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조선 후기에 전체 인구의 반 이상이 양반으로 변모한 상태에서, 조상 제사를 모시기 위한 ‘가례(家禮)’ 책이 없는 집이 드물 정도였다. 특히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제물이 가양주였기에 이 책에는 반드시 양조법이 적혀 있었다. 더욱이 양반 집의 종부(宗婦)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 중에는 봉제사(奉祭祀)와 함께 접빈객(接賓客)의 임무도 있었기에, 집에서 각종 가양주를 담가두는 일은 필수였다. 그렇다고 모든 집이 자신만의 특색 있는 가양주 제법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집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가양주는 비슷했다.

    조선시대는 ‘한자’라는 문자로 계급을 표현하는 사회였다. 한자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양반이나 상층부를 뜻했다. 한자는 무척 상고적(尙古的)인 문자다. 말로 표현되는 것과 달라서 항상 문헌적 근거인 전고(典故)를 따지도록 만든다. 이로 인해 한자로 적힌 가양주 제법은 모두 전고를 갖고 있게 마련이다. 결국 유사한 책들에서 베낀 가양주 제법이 각 집안 ‘가례’에 담겨 있다. 1986년 공청회 때 몇몇 사람이 제시한 이른바 ‘비전’ 가양주는 알고 보면 조선 후기에 상당히 보편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소주를 만드는 제법이 별도로 적히지는 않았다. 소주는 가양주를 증류하면 됐기 때문이다.

    ‘쇼추텐고쿠(燒酎天國)’ 가고시마… 한국 소주는 슬프다

    덴몬칸 소주천국 내부. 이 집에서 제공되는 소주는 800여 종이나 된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은 결코 소주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맑은 술’인 청주가 조선 사회의 문화적 특징을 더 드러내주는 술이었다. 더욱이 쌀을 주재료로 하면서 여기에 술마다 각종 약재 하나씩을 넣은 ‘약주’는 성리학적 조선 사회를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는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맛이 달고 진한 한산 소국주(小麴酒)는 ‘앉은뱅이 술’로 통할 만큼 뒷맛이 지독하다. 그토록 취하게 만드는 술이 지게미를 아래로 가라앉히고 위의 ‘맑은 술’만 걸러낸 청주다.

    지난 10여 년 사이에 가장 성공한 한국의 술로 나는 ‘백세주’를 꼽는다. 청주를 개량해 만들어낸 술이라서 더욱 좋다. 하지만 희석식 소주를 덮어버릴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아쉬운 일이다.

    ‘쇼추텐고쿠’라는 술집이 있는 가고시마는 과연 소주의 도시인가. 결론을 먼저 말하면, 그렇다. 60대 초반의 이 술집 여주인 하마조노 사치코(浜園幸子)씨의 말만 들어도 이곳이 소주의 천국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자신이 개발한 소주 안주를 서비스로 가져온 그녀에게, 나는 도대체 이 집에서 제공하는 소주 종류가 몇 가지나 되기에 상호가 ‘소주천국’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대답이 걸작이다.

    “세상 모든 소주를 팝니다”

    “소주천국에 오셨는데, 세상의 모든 소주를 다 제공해야지요.”

    도대체 세상의 소주가 몇 가지인데 그런 말을 할까. 그는 웃으면서 자신의 집에서 제공할 수 있는 소주가 800여 종이라고 했다. 순간 말문이 막혀 한참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이곳 홀에 진열된 술은 800종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더니, 약 150종을 진열해두고, 나머지는 별도의 창고에 뒀단다.

    그가 이 술집을 연 지는 28년쯤 됐다. 미나미사쓰마(南薩摩) 출신인 그는 적어도 소주를 고향의 특산물로 내세우는 처지에서 가고시마에 이런 술집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렇다면 손님들은 어떻게 술을 선택하는가. 각자 좋아하는 술들이 있기 때문에 선택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가고시마 시내뿐 아니라 가고시마현 내 다른 곳에서 온 손님들은 좀체 시내에서 찾기 어려운 자신의 고향 소주가 있다는 점 때문에도 이 집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마침 우리 옆에 앉은 20대 젊은이 네 사람이 자신들의 소주를 나눠주겠다고 제안했다. 결코 혼슈(本州) 사람들이 할 행동이 아님을 눈치 채고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역시 그중 세 사람은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 출신이고, 나머지 한 명은 나가사키(長崎) 출신이란다. 아마미오시마는 가고시마에서도 남쪽으로 약 400km 떨어진 섬이다. 일본의 4개 본섬을 제외하면 그 크기가 가장 큰 섬에 속한다. 고대에는 독자적인 정치단위를 운영하다가 11세기 이후 지금의 오키나와에 있던 류큐국(琉球國)에 편입됐다. 17세기 이후에는 다시 지금의 가고시마현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사쓰마번(薩摩藩)에 예속당한다.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이 천황제 공화국으로 바뀌면서 비로소 아마미는 일본 땅이 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1944년에 미국의 점령지가 됐고, 1953년 겨울에야 다시 일본에 반환됐다.

    이런 의미에서 아마미오시마 출신자들은 일본 문화의 주변부 중에서도 샌드위치와 같은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개성도 독특해서 일본인답지 않은 면도 많은 편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자신들이 마시는 술을 주겠다고 나선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들이 건넨 소주는 방금 마신 소주와 맛이 매우 다르다. 비린내도 약간 나는 것이 그다지 입에 맞지 않았다. 그러자 아마미오시마 출신 한 명이 유리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나서 소주를 탔다. 그러고는 5분쯤 기다린 후 내게 술잔을 건넸다. 마셔보니 비린내가 사라졌다. 사실 나는 도쿄나 오사카에서 일본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술맛이 나지 않는다면서 스트레이트로 잘 마셨다. 그런데 이렇게 뜨거운 물을 먼저 타서 마시니 술맛이 훨씬 부드러우면서도 맛이 상쾌했다.

    가고시마현에만 소주공장 119개

    ‘쇼추텐고쿠(燒酎天國)’ 가고시마… 한국 소주는 슬프다

    가고시마 지역의 소주 판매장.

    혼슈의 일본인들은 양주처럼 얼음을 넣어 온더록(on the rocks) 방식으로 소주를 잘 마신다. 그러나 가고시마 사람들은 물과 소주의 양을 5:5 혹은 6:4 혹은 7:3으로 해 마시기를 즐긴다. 그것도 반드시 물을 먼저 부어야 한다. 뜨거운 물을 부은 것을 ‘오유와리(お湯割り)’, 찬물을 부은 것을 ‘미주와리(水割り)’라고 한다. 심지어 손님이 올 예정이면 그 전날에 미리 오유와리나 미주와리를 해뒀다가 대접한다. 희석식 소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재래식으로 증류한 소주에 물을 타는 것이기 때문에 희석식 소주와 전혀 다른 맛을 낸다. 원래의 향이 살아 있다고 해야 옳다.

    가고시마는 정말 소주의 도시다. 한국의 1개 도에 해당하는 가고시마현에 있는 소주 공장이 2007년 12월 현재 119곳이나 된다. 이렇게 많은 소주 공장에서 적게는 4개, 많게는 10개 이상의 서로 다른 상표를 붙여 상점에 내놓으니 그 종류가 800여 개에 달할 수밖에.

    그런데 가고시마 소주의 주원료는 쌀이 아니다. 바로 고구마다. 앞서 언급한 아마미오시마의 소주는 흑사탕을 주원료로 사용해 만든다. 아마미오시마도 현재 가고시마현에 속해 있으니 가고시마 소주의 주원료는 고구마와 흑사탕이라고 해야 옳겠다. 그런데 흑사탕 소주는 소주라기보다는 럼(rum)주에 가깝다.

    원래 아마미오시마 사람들은 사탕무에서 뽑아낸 흑사탕을 원료로 한 소주인 흑탕주(黑糖酒)와 류큐국의 오래된 쌀 소주인 아와모리(泡盛)를 주로 마셨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쌀이 부족해진 반면 더 이상 혼슈에 흑사탕을 조공으로 바치지 않아도 되면서부터 흑탕주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마미오시마가 일본에 반환된 이후 발생했다. 일본 국세청에서는 흑탕주를 소주라고 보지 않고 양주로 봤다. 당연히 주세를 많이 붙여 흑탕주의 값이 소주보다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쌀로 만든 누룩을 쓴다는 전제로 흑탕주가 소주로 분류됐다. 하지만 그 맛은 상당히 독하면서 누룩에 흑사탕이 녹은 것이라 비린내가 강할 수밖에 없다.

    갑류소주, 을류소주

    10여 년 전, 가고시마에 고구마 소주가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것과 한국의 희석식 소주가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고향 마산에 있는 소주공장 마당에 무수히 널린 고구마를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자료를 통해 확인한 사실은 이른바 고구마 소주가 ‘무수(無水) 알코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원래 무수 알코올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2년부터 석유 대용품으로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개발됐다. 그 재료는 각국의 사정에 따라 달랐다. 가령 독일에서는 감자, 프랑스에서는 사탕무, 러시아에서는 쌀보리, 미국에서는 당밀을 원료로 무수 알코올을 만들었다. 일본에서는 고구마와 감자를 이용해 무수 알코올을 만들었지만, 실용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경부터였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1936년부터 신의주와 안동 등지에 톱밥으로 무수 알코올을 생산하는 공장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주정용 고구마 재배에 성공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36년 6월, 고구마를 원료로 한 무수 알코올 공장을 제주도에 세운다. 1938년 말부터 제주도의 무수 알코올 회사에서는 이 주정으로 소주를 생산했다. 당연히 신식 소주의 원료로 제주도의 고구마가 쓰인 때도 이쯤부터였다. 그렇다면 가고시마의 고구마 소주도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 것일까.

    일본 국세청이 정한 소주의 종류는 갑류(甲類)와 을류(乙類)로 나뉜다. 갑류소주는 당밀 등을 원료로 발효액을 만들고 그것을 연속증류기에 넣어 높은 순도의 알코올을 뽑아내서 만든다. 이것이 주정이다. 이 주정에 물을 섞어 알코올 도수를 35% 이하로 만들면 갑류소주가 된다. 일제 강점기 신식 소주가 바로 여기에 속하며, 한국의 희석식 소주도 같은 계통이다.

    ‘쇼추텐고쿠(燒酎天國)’ 가고시마… 한국 소주는 슬프다

    심수관 공방의 옹기들. 가고시마 소주 공장은 여전히 옹기로 ‘본격소주’를 발효시킨다.

    을류소주는 재래식 증류 소주를 가리킨다. 주로 쌀·보리·고구마 등을 원료로 단식증류기에서 만든 소주다. 일본 주세법에서는 알코올 도수가 45% 이하여야 한다고 정해뒀다. 이 술은 반드시 쌀이나 보리로 누룩을 만들어야 하며, 누룩은 탱크나 옹기에 넣어서 발효시킨다. 1차 발효된 밑술에 주원료를 넣는데, 이것이 주재료가 된다. 2차 발효를 시킨 후에 증류기에서 술을 내린다. 처음에 내린 술은 맛이 거칠기 때문에 수개월 저장해 부드럽게 만든 후 상품으로 내놓았다.

    그런데 갑과 을로 나눈 이유는 오로지 근대적 시각에서 보았을 때 신식 소주가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을로 마치 등급이 나누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문제점을 지적받고, 일본 국세청에서는 1971년에 을류소주를 ‘본격소주(本格燒酎)’로 이름을 바꾸었다. 가고시마의 고구마 소주는 본격소주에 속한다. 그러니 이른바 신식 소주가 아니다.

    고구마의 원산지는 아메리카 대륙이다. 유럽인이 1492년 처음으로 신대륙에 도착한 이후 유럽과 아시아로 전파됐다. 그러나 고구마는 감자에 비해 재배도 어렵고 오래 저장할 수도 없다는 단점이 있어 유럽인들의 주목을 덜 받은 상태에서 아시아로 전해졌다. 아시아에서도 고구마는 그다지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다만 스페인 무역선에 실려 필리핀과 중국의 푸젠(福建)성 정도에 도착했을 뿐이다. 감자가 먼저 들어와 널리 퍼져 있던 중국에서는 말의 목에 다는 방울 같다고 해 고구마를 ‘마링수(馬鈴薯)’, 혹은 땅에서 나는 콩 같다고 해 ‘투더우(土豆)’라 불렀다.

    쌀이 없어 고구마 술을 빚다

    이것이 류큐국에 전해진 때가 1604년쯤이다.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러 간 류큐국 사신들이 귀국하면서 푸젠성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돌아온다. 지금도 오키나와에서는 고구마를 ‘가라이모(唐芋)’라고 부른다. 이것이 사쓰마번에 전래된 때는 1698년쯤이라고 한다. 에도(江戶) 막부가 쇄국정책을 펼치던 17세기에 사쓰마번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류큐왕국을 통한 외국과의 무역을 원했다. 결국 막부의 허락을 받아 1609년에 류큐를 공격, 류큐국의 무역권을 사쓰마번에 복속시켰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쓰마와 류큐 사이를 오가는 사람이 늘어났고, 이 과정에서 고구마 종자가 지금의 가고시마로 전해졌다. 대체로 18세기 초반의 일이다. 그 후 고구마는 규슈와 혼슈 일대에서 구황작물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인들은 고구마라고 하면 ‘사쓰마이모(薩摩芋)’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가고시마는 지금도 활동하는 화산이 여럿 있을 만큼 제주도와 닮은 화산지대다. 그래서 과거에 쌀 재배가 쉽지 않았다. 당연히 먹을 양식이 풍부하지 않았기에 고구마 도입은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생산된 쌀도 대부분 공납으로 번주(藩主)에게 바쳐야 하는 실정이라 술을 만드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이때 고구마 전분이 소주의 재료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니 가고시마의 고구마 소주는 아무리 그 역사를 높이 잡아도 200여 년을 넘지 않는다. 더욱이 발효과정에서 고구마의 독특한 맛과 향이 그대로 배기 때문에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에게 그 맛은 특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보니 가고시마의 고구마 소주는 그 바탕이 되는 양조주를 갖고 있지 않다. 당연히 니혼슈도 이 지역에는 원래 없었다. 옛 사쓰마번에 니혼슈가 없었다는 사실을 두고 남일본신문사(南日本新聞社)의 사장을 지낸 가와고에 마사노리(川越政則)는 독특한 주장을 펼친다. 옛 사쓰마 지역이 혼슈와는 다른 문화적 맥락 속에서 독립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주장이다. 니혼슈가 일본을 상징하는 쌀과 연결되어 근대 이후 제대로 대접받았다면, 규슈와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펼쳐진 소주 생산지역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오히려 중국 남부와 대만, 그리고 한반도 남부와 더 밀접하게 교류했다.

    가고시마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약 25km쯤 떨어진 미야마(美山)에 가면 ‘주일한국 명예총영사’라는 간판이 붙은 심수관(沈壽官) 도자기 공방이 나온다. 정유재란이 끝난 1598년, 당시 김해지역에 참전한 사쓰마번의 사무라이들이 패퇴하면서 심당길(沈當吉)이란 도공을 끌고 이곳으로 온다. 그리고 공방을 만들어 장인으로서 호적을 계승하도록 했다. 지금의 14대 심수관은 이 공방의 주인 자격을 이어받은 사람이다. 원래 13대의 이름이 심수관이다. 일본 장인들은 호적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간혹 전대의 이름을 그대로 따르는 ‘쇼메이(襲名)’라는 관습이 있다. 14대 심수관의 이름도 이렇게 해서 얻어졌다. 하지만 그 혈통이 우리처럼 이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옹기에서 만드는 고구마 소주

    ‘쇼추텐고쿠(燒酎天國)’ 가고시마… 한국 소주는 슬프다

    가사사 마을 소주 전시관 사카우에 관장.

    심수관 공방에서 그다지 반가워할 이야기가 아닐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심당길은 옹기장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가고시마에서는 도자기에 쓰이는 고령토를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어른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옹기를 만드는 기술도 없었다. 당연히 심당길의 기술을 탐낼 수밖에 없었고, 그는 이곳에 와서 주로 대형 옹기 만드는 기술을 전했다. 특히 물이 새나가지 않는 옹기를 만드는 기술은 그들에게 매우 시급한 것이었다. 같은 화산지대인 제주도에서도 20세기 초반에야 육지의 옹기를 대량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당시 가고시마의 현실을 짐작하게 만든다. 이것이 가고시마 소주와 만나는 시점이 바로 19세기 초반이 아닐까.

    심수관의 공방은 물론 가고시마현에 있는 소줏집이나 소주공장에는 대형 옹기들이 즐비하다. 2006년 여름, 처음 가고시마의 소주공장을 방문한 나는 그들이 여전히 옹기로 ‘본격소주’를 발효시키는 광경에 무척 놀랐다. 심지어 가고시마 소주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소주 주전자 역시 옹기에서 발전한 흑도(黑陶)다. 19세기 중반 중국의 징더전(景德鎭) 도자기 공방이 쇠퇴하면서 규슈의 도자기 공방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유럽을 휩쓸었다. 이때부터 심수관 공방의 위상도 치솟았다.

    사실 이 대목에서 나는 무척 슬프다. 한국의 이른바 무형문화재 소주공장에서 옹기가 사라진 지 오래기 때문이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1988년 여름에 처음 찾은 충남 한산의 소국주 무형문화재 김영신 할머니의 집에는 몇십 년이나 된 대형 옹기 술독에 술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가 내게만 특별히 술독이 보관된 창고를 개방했는데, 옹기의 겉면에는 진한 술 원액이 마치 꿀처럼 묻어났다. 그것을 손바닥으로 닦아서 핥아먹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새로 지은 지금의 한산 소국주 공장에는 더 이상 옹기에 술이 담겨 있지 않다. 한국의 주세법에 술을 주조하려면 위생에 문제가 없는 스테인리스를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혼케(本家)의 원칙

    원래 주세법이란 것이 일제 강점기에 시행된 것인데, 왜 일본 주세법은 그러한 ‘문명개화’의 환상을 ‘본격소주’에 적용시키지 않고 탱크나 옹기에 누룩을 발효시켜야 한다고 하는가. 이 문제를 간단하게 논하기는 어렵지만, 일본의 근대가 상당히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니고 진행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록 아시아에서 벗어나 유럽적인 일본을 꿈꿨지만, 근대화론자들은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적’인 특성을 유럽인에게 보여주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당연히 일본 내부에서는 ‘일본’이라는 동질화 작업이 진행됐고, 그 과정에 우리가 아는 ‘일본적’이라는 문화 양상이 만들어졌다. 심지어 특정 지방의 관습을 전국화하고, 일부 계층의 관행을 전국민화하는 작업도 이뤄졌다. 축제인 마쓰리(祭り)가 그러하고, 다도(茶道)와 유도가 그러하다.

    그러니 문명개화의 환상에서 신식 소주라는 새로운 소주도 개발했지만, 을류소주인 재래식 증류주는 가정 제조에서 공장제로 전환되는 근대화 과정에서 지금처럼 개량됐다. 하지만 그 개량에는 전래의 주조방법을 근대적으로 개선하는 데 초점을 뒀지, 모두를 신식 소주로 탈바꿈시키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공장을 운영하는 조직 시스템 때문이었다. 일본의 장인조직은 일종의 가업(家業) 형태로 운영된다. 여기에서 가업이란 반드시 한국이나 중국처럼 직계 혈통이 선대의 작업을 이어가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비록 자신의 장남이라고 해도 기술력이나 관리능력이 떨어지면, 그보다 우수한 사위나 직원 중에서 후계자를 찾아 정해버린다. 이것이 일본 상인들의 종가제도인 ‘혼케(本家)’의 계승 규칙이다.

    ‘혼케’를 이어받은 사람은 선대의 작업을 확장시키는 데 최고의 목표를 두기보다는, 선대의 작업을 계승하고 유지하는 데 우선한다. 자연히 오래된 작업장이 한순간에 신식으로 바뀌는 사례는 드물다. 약간의 시설을 개보수하고 새로운 기계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선대의 기술마저 버리지는 않는다. 만약 기술을 완전히 바꿀 경우, 그 ‘혼케’는 더 이상 지속될 명분을 잃어버린다.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상당히 많은 재래식 수공업 공방이 명맥을 유지하는 이유는 불가피한 ‘예속’의 결과이지, 결코 ‘장인정신’ 때문만은 아니다. 에도시대부터 구축된 이러한 가업 시스템은 옹기로 소주를 발효시키는 방식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니혼슈 능가한 쇼추 붐

    2003년은 가고시마의 본격소주 공장 업주들에게 신기원이 된 한 해였다. 본격소주 매출액이 일본 술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니혼슈 매출액을 추월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일본에서는 ‘쇼추 붐’이라고 일컫는다. 더욱이 메이지 유신 이후 ‘쌀은 자연을 사랑하는 일본인의 상징’이라고 단언하면서 서양의 육식 지향에 반대한 근대화론자 모리오 가이(森鷗外·1862~1922)가 이러한 붐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일본의 정신이라고 한 쌀, 그리고 그것으로 만들어낸 ‘신주(神酒)’ 니혼슈를 본격소주는 어떻게 추월했을까.

    일본에서 쇼추 붐이 인 것은 2003년이 처음은 아니다. 구마모토가쿠엔(熊本學院)대학 산업경영연구소의 나카노 모토(中野元)가 연구한 자료에서는 쇼추 붐이 대략 3단계로 나뉜다고 했다. 그 시작은 1970년대 중후반이다. 1971년 ‘본격소주’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쇼추는 전국적인 뉴스의 초점이 됐다. 이 기회를 타고 가고시마현에 공장을 둔 사쓰마주조(薩摩酒造) 주식회사에서는 고구마 냄새가 덜한 ‘사쓰마시로나미(さつま白波)’라는 소주를 내놓았다. 이 회사에서는 ‘온더록으로 오유와리(お湯割り)를 해서 마시자’는 광고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고도 경제성장 덕분에 양주 소비가 날로 증가하던 때라 새로운 온더록 방법을 제시한 이 회사의 전략은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그 인기는 주로 후쿠오카(福岡)가 있는 북부 규슈지역에 한정됐다. 원래 북부 규슈지역에서는 쌀을 주원료로 한 ‘류마쇼추(球磨燒酎)’가 구마모토 남부에서 400년 이상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니 북부 규슈 사람들이 가고시마의 고구마 소주를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런데 1970년대 중후반에 전개된 ‘사쓰마시로나미’의 광고 전략과 메밀을 주원료로 한 소주의 탄생 등으로 사람들은 쌀 아닌 다른 재료로 만든 소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넉넉해진 일본인들이 위스키를 대량으로 소비하면서 ‘쇼추 붐’도 덩달아 이어졌다. 이 붐 덕택에 침체산업으로 인식되던 가고시마의 재래식 고구마 소주공장들이 시설투자와 새로운 소주 개발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붐은 1970년대 말이 되면서 시들해져 이전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래도 가고시마 쇼추의 이름이 일본 전국에 알려진 결정적인 계기가 이때의 붐 덕분에 만들어졌다.

    제2단계 쇼추 붐은 1980년대 중반에 일어났다. 위스키 등의 양주 소비가 준 대신 갑류소주와 본격소주가 인기를 누렸다. 특히 본격소주는 농촌의 쇠락을 막을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여겨졌다. 도쿄나 오사카 등의 대도시에서는 현(縣)에서 생산된 본격소주를 광고하는 견본시(見本市)가 열렸다. 지방자치단체와 판매회사 사이의 제휴도 주효했다. 아울러 1촌(村)마다 하나의 특산물을 만들자는 지방 활성화 정책도 큰 기여를 했다. 여기에다 엔화의 가치가 높아지면서 수입 보리의 가격이 떨어졌다. 이로 인해 규슈 동북부의 오이타(大分) 지역에서 생산하던 보리소주의 가격이 그전보다 싸졌다. 이것도 중요한 요인이 되어 본격소주는 규슈를 넘어서서 오사카와 도쿄가 있는 혼슈로 판매망을 넓혀갔다.

    애국심에 호소한 ‘국민주’

    하지만 2단계 쇼추 붐이 가고시마 고구마 소주 붐은 아니었다. 이 붐을 통해서 가고시마 소주공장들도 자본을 축척하는 데는 성공했다. 고구마가 생산되지 않아 문을 닫던 여름철에 오이타 지역 소주공장의 하청을 받아 보리소주를 대신 생산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도시 소비자의 기호를 파악한 결과, 본격소주 회사들이 그 맛을 부드럽게 만드는 데 기술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잃어버린 10년’이라는 1990년대, 일본 경제성장의 둔화로 3단계 쇼추 붐이 곧바로 이어지진 못했다. 소주의 소비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더욱이 1986년부터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일본의 수입 술 관세가 과하다고 지적하기 시작했다. 결국 1989년에 수입 술의 관세를 낮추는 대신 일본 국내의 소주에 대한 주세를 올렸다. 소주 소비가 전만 못해진 것은 당연한 일. 더욱이 1996년 세계무역기구(WTO)로부터 수입 증류주와 일본산 증류주에 대한 주세를 동일하게 하라는 조치가 취해졌다. 일본 정부는 자국의 소주가 외국 증류주와 달리 식사 때 반주로 마시는, 일종의 밥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이 세계무역기구의 판정에서 패소하면서 주세 차등을 유지하려 했던 일본 정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사실 내가 아는 가고시마 친구들도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소주를 마시는 편이다. 지난해 11월1일 가고시마 중앙역 광장에서 열린 제19회 ‘소주의 날’ 행사장에서 만난 마사코라는 60대 할머니 역시 남편이 매일 저녁 소주를 반주로 마시고 자신도 조금씩 마신다고 했다. 그것도 ‘오유와리’나 ‘미주와리’를 해서 두서너 잔 마신다니 위스키나 브랜디처럼 안주 없이 술만 마시는 본격적인 술자리가 아닐 수 있다(한국인들도 반주로 즐겨 마시지만, 집에서 마시는 사람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1990년대 말에 아주 보편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세계무역기구와의 한판 싸움이 뉴스를 타면서, 본격소주를 반주로 마시며 일종의 ‘민족적 자긍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났다. 수입 양주와 함께 한국의 희석식 소주가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때도 이쯤이지만, 본격소주의 안정적인 소비 기반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본격소주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2003년의 쇼추 붐을 ‘국민주혁명’이라고 한다. 본격소주의 주된 고객인 50대들에겐 성인병이 문제였는데, 본격소주를 반주로 한두 잔씩 마시면 혈관이 맑아져 당뇨병에 좋다는 의학 연구결과가 보도됐다. 이것은 3단계 쇼추 붐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특히 NHK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 아침에 방영하는 ‘TV소설’이란 시리즈 연속극에 소주 전문 술집이 등장하고, 이곳에서 반주로 소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서 쇼추 붐은 일본 전국을 휩쓸었다. 50대 주당 남성뿐 아니라 젊은이와 여성들까지 쇼추 붐에 동참했다.

    “문화적으로 서양인의 양주와 재래식 증류주인 본격소주는 다르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반주로 본격소주를 마신다. 알코올 중독자를 만드는 서양 증류주에 비해 일본의 본격소주는 건강에 유익하다. 그런데 주세가 똑같아져서 마시지 않는다면 일본의 국민주인 본격소주를 생산하는 우리 고향이 망한다.”

    2003년에 불기 시작한 쇼추 붐에는 마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쌀문명론자들’처럼 애국심이 흠뻑 묻어난다. 여기에 고향회복운동, 고향음식 소비하기 운동과 같은 지역 활성화 프로그램도 큰 구실을 했다. 그래서 일본 술은 누룩을 기초로 ‘양조주=니혼슈’ ‘증류주=쇼추’라는 도식을 만들어냈다. 규슈에만 존재하던 쇼추를 일본 전국으로 보편화하는 절묘한 ‘국민화’의 결과였다.

    ‘사쓰마 소주’ 효과

    2007년 5월1일 ‘가고시마현주조조합연합회’ 이름으로 ‘사쓰마소주선언’이 발표됐다. 그 서론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 가고시마 소주 제조자는 사쓰마의 전통과 문화로서 계승되어온 고구마 소주가 WTO 가맹국 사이에서 국제적인 지적 소유권 보호 규정인 TRIPs 협정에 기초해 지리적 표시로서 ‘사쓰마’가 엄격한 조건 아래 인정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세계의 술 중에서 지리적 표시가 인정된 술은 와인의 보르도와 샹파뉴, 브랜디의 코냑, 위스키의 스카치와 버본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적 브랜드와 마찬가지로 ‘사쓰마’로 표시하는 뜻을 중요하게 받아들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지키려 합니다. 이에 따라 ‘사쓰마 소주’를 세계에서 사랑하는 증류주로 발전시킬 것입니다.”

    ‘TRIPs’라는 것은 WTO의 부속 협정인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 협정’의 하나로, 기존의 특허권·의장권·상표권과 함께 한 지역의 자연환경과 인간이 빚어낸 공공의 재산에 대해서도 지적재산권을 인정하는 협정을 가리킨다. 1995년 이 협정이 발표될 때 일본 정부에서 내세운 대표적인 소주에 ‘사쓰마 소주’는 들어 있지 않았다. 이에 자존심이 상한 가고시마 사람들이 현(縣) 정부를 앞장세워 TRIPs에 가입시키는 운동을 전개했다. 2005년에 그 열매를 맺어 ‘사쓰마 소주’의 역사성을 인정받게 됐다.

    이에 따라 ‘사쓰마 소주’라는 브랜드의 기준이 명확하게 정해졌다. 반드시 고구마 소주에 한하며, 발효 누룩은 쌀이나 ‘사쓰마 고구마’로 만들며 물을 원료로 해 발효시킨 거르지 않은 1차 술에, 사쓰마 고구마를 넣어 발효시킨 거르지 않은 2차 술을, 단식증류기에서 증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원료도 꼭 가고시마현에서 생산된 ‘사쓰마 고구마’여야 하며, 제조과정에서 사용하는 도구와 술을 담는 용기도 모두 가고시마현 내에서 만들어진 것을 쓰도록 했다.

    가고시마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50km, 동중국해가 바라보이는 미나미사쓰마(南薩摩)시의 가사사마을(笠沙町) 입구에는 ‘도지(杜氏)의 마을, 쇼추를 만드는 전승전시관(傳承展示館)’이란 곳이 있다. 여기에서 ‘도지’는 본격소주 공장에서 누룩을 만드는 장인을 가리킨다. 1899년 일본에 주세법이 생기면서 규슈 일대에 중소규모의 소주공장이 여러 군데 생겼다. 가사사마을 사람들 중에서 세 명의 젊은이가 소주공장에 가서 누룩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러자 마을에 있던 청년들이 잇달아 ‘도지’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규슈는 물론이고 일본 전역에서도 보기 드물게 본격소주 잘 만드는 장인들의 마을이 됐다. 그런데 이 전시관의 사카우에 요시카즈(坂上美和) 관장은 “가고시마 고구마 소주는 공업이 아니라 농업”이라고 강조했다. 왜일까.

    오늘 한국의 소주는…

    우선 가고시마 농촌에서 생산되는 고구마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농민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전시관 내부에도 소규모 공장을 운영하는데, 이곳에서도 지역 농민들이 생산한 고구마를 사용한다. 더욱이 ‘사쓰마야키모노(薩摩燒物)’라고 하는 도자기도 소주의 누룩을 발효시키는 옹기와 술잔, 그리고 주전자 등을 생산하니 농업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의 전시관 내 공장에 있는 증류기도 가고시마의 나무로 만든 것이니 임업임에도 농업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고시마 고구마 소주를 마시는 행위 자체가 농업을 살리는 길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고구마 소주를 만들고 남은 지게미는 이곳의 유명한 특산물인 흑돈(黑豚)의 중요한 사료가 되며, 그것으로 식초를 비롯해 각종 피부 미용 제품까지 만든다. 그러니 고구마 소주 산업은 마치 자동차 산업과도 같다는 주장도 펼쳤다. 그래서 국립 가고시마대학에는 ‘소주학강좌’를 별도 프로그램으로 운영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희석식 소주 산업은 한국의 지역사회에서 과연 농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요사이 중국에서는 역사 문헌에 나오는 ‘바이주’를 재현한다고 지역 성(省) 정부와 대학 연구소들이 앞장서서 연구하고 있다. 그들이 역사에 나오는 ‘전통’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온갖 허망한 전설을 술 이름과 내력에 갖다 붙이는 데는 바이주 생산을 통해서 지역 농촌을 살려보겠다는 의도도 있다. 지역의 자랑거리로 역사성이 듬뿍 담긴 술을 내세우고 그것을 이용해 지역 관광까지 유인한다. 과연 한국에서도 희석식 소주가 많이 팔리면 농민들이 행복할까?

    ‘쇼추텐고쿠(燒酎天國)’ 가고시마… 한국 소주는 슬프다
    주영하

    1962년 경남 마산 출생

    서강대 사학과 졸업, 한양대 석사 (문화인류학), 중국 중앙민족대학 박사(민족학)

    現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 부교수

    일본 가고시마대에서 규슈 지역 음식문화 현지조사 진행 중

    저서 : ‘음식전쟁 문화전쟁’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 ‘음식 속의 그림, 그림 속의 역사’ 등


    2006년 봄 경북 안동시에서는 남아도는 고향의 쌀을 많이 소비하기 위해서라도 안동소주를 많이 마시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그 성과가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정도의 노력으로는 안동의 소주 산업을 농업으로 만들 수 없다. 안동시에 소주공장이 적어도 10개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지역사회에서 생산하는 각종 농산물과 공예품을 하나의 복합적 산업으로 키우기 위한 전략도 세워야 한다. 이 점에서 가고시마 고구마 소주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하지만 3단계 쇼추 붐이 점차 식어가는 요즘 가고시마 고구마 소주가 과연 가고시마 사람들의 주머니를 앞으로도 계속 두둑하게 만들어줄지는 지켜볼 일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