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호

포용의 작가 강익중

일상에서 빚어내는 화합과 조화의 ‘소통 미학’

  • 정준모 미술비평가 curatorjj@naver.com

    입력2008-03-06 11: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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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욕에서 활동 중인 강익중의 작품 특징은 작은 패널들이 조합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된다는 점이다. 하나이되 여럿이며 여럿이되 하나다. 이질적인 것들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비빔밥처럼 한 화면에서 공존하며 재탄생하는 화합과 평화의 미학이 세계인의 공감을 얻고 있다.
    포용의 작가 강익중

    ○1960년 충북 청주 출생<br>○홍익대 동양화과, 미국 뉴욕 프랫아트인스티튜트 석사<br>○여름그룹전(1985, 뉴욕 라세갤러리), 빙리 강익중 2인전:많은 것이 더 좋다(1991, 뉴욕 아멜리에이왈레스미술관), 강익중 3×3전(1992, 뉴욕 퀸스 미술관), 백남준 강익중 2인전:멀티플/다이얼로그(1994, 코네티컷 챔피언 휘트니아메리칸 미술관), ‘놀라운 세상’전(2001, 유엔본부) <br>○1997년 제47회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상, 1999년 독일 루드비히 미술관 선정 ‘20세기 미술작가 120명’

    뱀의 꼬리가 머리에 붙으면 그걸 ‘사두(蛇頭)’라고 해야 할까, ‘사미(蛇尾)’라고 해야 할까. 바꿔 생각하면 그냥 그대로인데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뱀을 처음 보았다면 그냥 넘어가겠으나 머리와 꼬리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강익중(姜益中·48)은 이렇게 하찮은 고민을 통해 쓸모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는 ‘발명가’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찬찬히 듣다 보면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아 그렇겠구나’ 하고 맞장구를 치게 된다.

    그는 달변에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동안(童顔)을 가졌다. 그의 ‘제2의 고향’ 같은 맨해튼 차이나타운을 걸을라치면 주변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에 대해 다양한 지식과 해석을 동원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던지는데, 그 말을 받아낼 재간이 없다.

    그렇게 그는 주변에 관심을 두고 찬찬히 생각하면서 들여다보기를 좋아한다. 그것도 한번 보고 스쳐 지나는 게 아니라 다시 찾아가 확인하고 그 변화를 기억해둔다. 이런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나름의 공부를 토대로 한 자신만의 해석이 그대로 작품이 된다. 작은 패널들은 하나의 커다란 패널을 이루고, 이것들이 조합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되는 과정을 보면 그의 작업이 곧 그 자신의 일상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하철 화실



    사실 그의 작업은 단순하고 간단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여러 얼굴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고 그걸 이해하거나 알았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아닌 ‘내’가 보고 느낀 것에 불과하다. 내가 그렇게 봤으니 남도 그렇게 봤으리라 착각할 뿐이다.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라고 하지만 각자 보는 것이 다르기에 믿는 것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할 만큼 여유롭거나 넉넉하지 못하다. 오직 자신의 것을 강요할 뿐이다.

    그의 작품을 보면 작품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단위와 그것의 조합의 차이가 매우 큼을 알 수 있다. 한 해 동안 쓴 일기장을 읽다 보면 지난날의 일과 느낌이 되살아나지만, 한 권의 일기장을 모두 읽고 한마디로 한 해를 규정하려면 당혹스러운 것처럼. 그의 작품은 하나이되 여럿이며 여럿이되 하나다. 그 차이에서 오는 느낌과 감동의 차이 또는 다름이 바로 그의 예술의 요체다.

    1960년 어머니의 고향인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강익중은 홍익대 미대 동양화과에서 수묵채색화를 전공했다. 1984년 대학 졸업식을 한 달 앞두고 미술학도라면 누구나 꿈꾸는 뉴욕으로 떠났다. 그에게 뉴욕생활은 어렵고 고단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우선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 아니 주업을 시작했다. 낮에는 맨해튼 청과물가게에서, 저녁에는 퀸스 파락어웨이의 벼룩시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했다.

    이때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집념으로 고안해낸 것이 지하철에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3˝×3˝ 캔버스가 그것. 그는 손바닥에 딱 잡히는 크기의 캔버스에 뉴욕의 일상을 일기처럼 담아갔다. 지하철은 그에게 움직이는 화실이었다. 그는 단순한 선묘로 일상의 이미지나 영어단어를 그려나갔다. 바지런함이 방법을 마련해준 셈이다.

    포용의 작가 강익중

    프린스턴 공립도서관 로비의 ‘행복한 벽화’ 부분. 지역주민들이 기증한 애장품 중 2억년된 돌이 보인다.

    이렇게 고된 삶 속에서 제작한 1000점의 작품을 가지고 롱아일랜드 대학에서 처음 개인전을 연다. 뉴욕에 당도한 지 2년 만에 개인전을 연 그에게 그림은 일상이었으며 작품은 생활 속에서 얻어진 재료와 방법, 소재로 이뤄졌다. 그린버그류의 모더니즘이나 주관적인 신표현주의가 범람하는 뉴욕 미술동네에서 그의 작품은 관객에게 매우 친근하게 다가갔다.

    당시 작품에는 이방인에게 약속의 땅인 동시에 절망의 도시였던 뉴욕에서 겪는 소수인종의 낯설음과 자유로움이라는 이중성이 공존한다.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한 화면에서 공존하는, 아니 공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마치 용광로처럼 서로의 이질적인 요소들을 녹여내어 새로운 합금으로 재탄생되는 형국이다. 이는 백남준이 늘 이야기하던 ‘비빔밥론’과 맥을 같이한다.

    서로 다른 것들의 조화

    촌음을 아껴 지하철에서 작업하던 그는 한 달간 갤러리 내에 텐트를 치고 하루 10시간씩 작업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뉴욕에 존재를 알린다. 1988년에 그때까지 제작한 6000여 점의 그림을 브로드웨이 윈도갤러리에 설치한 그는 다음 개인전에서는 ‘사운드 페인팅’을 발표한다. 작품 뒤에 소형 스피커를 설치해 조각그림의 집합과 함께 파도소리, 천둥소리, 바람소리들을 교차시켜 자연에 인공적 화면을 결합한 새로운 자연을 창조했다.

    이후 그는 3인치 정방형 캔버스 대신 목판을 선택한다. 일상을 목판에 새기기 시작한 것은 당뇨로 시력을 잃은 아버지를 위한 것으로, 촉각으로 느낄 수 있는 미술의 시도였다. 목판에 새기는 일은 자신에게 몰입하는 과정이자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을 담은 것으로 팔만대장경을 떠올려보면 그의 작업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91년 빙리와 함께한 2인전 ‘많은 것이 더 좋다’를 통해 목각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또 같은 해 한인 밀집지역인 퀸스 플러싱에서 맨해튼 타임스퀘어까지 왕래하는 7호선 플러싱 메인스트리트 역에 벽화 ‘해피월드’를 제작한다. 2000여 조각그림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뉴요커’라는 하나의 단어로 규정되는 다양한 인종군상의 일상을 담아 ‘다른 것들의 조화’를 표현해 뉴욕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뉴욕에 도착한 후 그를 괴롭힌 것은 생활고와 언어 소통의 부재 였다. 그는 뉴욕이라는 생경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다. 한국에서 하던 대로 무작정 암기했다. 그래서 그의 화면에 이미지가 사라지고 영어 단어가 등장한다.

    주로 GRE 시험 가이드북에서 발췌한 영어 단어와 숙어는 붉은색으로 그리고 한글 뜻은 파란색으로 칠해 마치 영한사전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연상시키는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영어 사전 한장에 수록된 단어를 모두 외운 후 이를 찢어 씹어 먹던 공부법과 닮았다. 또 스펠링을 반복해서 쓰면서 외우는 방법이 바탕이 됐다.

    그는 부처님에게도 영어 공부를 시켜 ‘영어를 배우는 부처’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기도 했다. 당시 작품에 동양을 상징하는 부처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동양에서는 현인이며 깨달음을 얻었지만 뉴욕에서는 부처도 소통을 위해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

    반복해서 읽는 방식은 한국식 영어수업법 중 하나다. 이런 방법은 마치 절에서 스님들이 목탁을 치며 불경을 암송하는 것과 흡사한 것으로, 그는 어릴 때 절에서 보던 전통적인 방식을 작품에 차용함으로써 뉴욕에서 적응하고자 했다. 이런 작업의 결과물들은 퀸스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3×3’전과 퀸스 직업학교 벽화를 통해 선을 보였는데, 이를 통해 그는 뉴욕 화단의 주류에 확실하게 얼굴을 알린다.

    1994년은 그의 화업에 큰 의미가 있는 해다. 2만여 점의 3인치 작품을 모아 ‘모든 것을 함께 넣어 더하다’라는 제목의 프로젝트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진행하는 한편, 샌프란시스코 공항벽화를 제작한다. 높이 3.2m 길이 22m의 이 벽화는 모두 5925개의 단위화면으로 이뤄졌는데 일상에서 채집한 단어, 그림, 오브제 등 다양한 제재를 동원해 장식적이면서도 친숙한 작품으로 완성시켰다. 이는 ‘3인치의 미술’이 자리 잡았음과 동시에 미국생활 10년을 결산하는 의미를 갖는다.

    비빔밥과 초콜릿

    포용의 작가 강익중

    광화문 복원 공사장 가림막으로 설치한 작품 ‘광화문에 뜬 달’ 부분.

    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백남준과 함께 코네티컷 주 스탬퍼드의 챔피언 휘트니 아메리칸 미술관에서 연 ‘멀티플(multure)/대화(dialogue)’ 전이다. 이를 통해 한국에도 그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백남준은 모니터의 단위 조합을, 강익중은 3인치 화면의 조합을 통해 여럿이자 하나인 작품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두 작가의 공통된 ‘비빔밥론’을 확인시켰다. 비빔밥론은 서양과 동양, 피부색과 종교, 빈부, 정착민과 이민자의 차이를 비빔으로써 하나로 융합시키는 다문화 공동체를 의미한다.

    비빔밥은 초콜릿으로 진화한다. 강익중에게 초콜릿과 미국에 대한 기억은 어릴 적 살던 이태원에 뿌리내려 있다. 그때 미국은 ‘달콤한 땅’이었다. 그는 미군들에게 초콜릿과 사탕을 얻기 위해 ‘기브 미 어 쪼꼬레또’를 외쳐야 했다.

    그렇게 어릴적 달콤한 초콜릿은 미국을 상징했지만 철들고 보니 초콜릿도 박래품에 불과한 다중의 기호품이었다. 부처도 미국 땅에 오면 먹어야 하는 일상적 식품이었다.

    강익중은 도미 12년 만인 1996년 고향에 돌아온다. 조선일보 미술관과 학고재 등에서 열린 그의 한국전은 성황을 이룬다. 물론 미국에서 백남준과 2인전을 연 신예작가라는 점에서 관객의 눈길을 끌었지만 그의 재담 섞인 작품 이야기와 새로운 작품의 조합방식은 모더니즘의 방관적 자세와 참여라는 테제에 경도된 채 대안을 찾지 못하던 젊은 미술인들에게 돌파구가 됐다.

    그는 이 전시에서 뉴욕생활 12년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8490개의 3인치짜리 정방형 초콜릿에 미군 부대의 문장을 새겼고, 역시 같은 크기의 상자엔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추억상자들 위에 초콜릿으로 만든 6·25전쟁 영웅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세워졌다.

    ‘8490일간의 기억’이라 명명한 이 작품의 사물과 이미지의 조합은 1984년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한국에서 지낸 23년(8490일)을 거슬러 올라간 것이었다. 이 작품은 뉴욕의 파크 애비뉴 42번가 그랜드센트럴 역 바로 맞은편에 있는 필립모리스 본사 빌딩에 있는 휘트니 미술관 필립모리스로 이어졌다.

    잠시 브루클린에 작업실을 마련한 것을 제외하고 그는 차이나타운을 벗어난 적이 없다. 현재 작업실도 차이나타운에 있다. 차이나타운에서 아시아인이 아닌 사람들이 보면 그는 중국인이다. 하지만 중국인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는 뉴욕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이민자이지만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인이다. 이렇게 그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도 하고 따로 놀기도 한다.

    생활예술

    그는 뉴욕 생활 초기부터 값싸고 양이 많은 중국식당을 즐겨 찾았다. 하지만 한문교육을 건너뛴 세대라 한자에 약해 중국식당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눈치 빠른 그는 중국식당 메뉴판에 영어로 표기된 음식 외에 한자로 표기된 메뉴들이 값도 싸고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오직 중국음식을 주문할 목적으로 한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쌓은 한자실력을 바탕으로 차이나타운 중식당 가이드북을 낸다. 이것이 지난해 증보판으로 다시 발간된 ‘가난한 미술가들을 위한 강익중의 레스토랑 가이드’다.

    그는 자신의 목각작업에서 파생된 글자체를 이용해 ‘강익중체’라는 서체를 개발해 언제든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자른다. 남의 머리를 다루는 솜씨도 녹록지 않다. 이런 것들은 그의 바지런한 성품과 손재주가 결합한 것으로 일상의 예술을 실천하는 셈이다.

    이런 일련의 작업들은 그가 초기에 관심을 가진 퍼포먼스와 관련이 있다. 어찌 보면 작가가 엉뚱한 짓을 한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에게 이런 일은 생활이자 예술이다. 명명한다면 ‘생활예술’ 또는 ‘삶의 예술’ 쯤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포용의 작가 강익중
    1997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 대표작가로 지명된다. 당시 한국관은 작은 단위 작품들이 자기증식을 통해 자유자재로 공간을 점유해나가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는 작가 이형우와 함께 벽과 바닥을 절묘하게 사용하면서 특별상을 수상한다.

    이즈음 그는 3인치 화면에 변화를 주어 4˝×1˝ 크기의 목판을 사용한 풍경화를 선보였다. 한국의 전통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이런 변화는 과거 집안을 장식하던 산수화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광화문 복원 공사장 가림막으로 설치한 ‘광화문에 뜬 달’의 상단 배경 풍경도 이런 연장선상에 있다.

    그는 이즈음 다민족, 다문화를 통한 통일과 화합이라는 물과 기름을 섞어 하나를 만드는 실험을 시작한다. 그의 관심사가 개인의 일상, 신변잡사에 국한돼 있었던 것에 비하면 커다란 눈뜸이다. 그의 이런 눈뜸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화합과 평화

    1999년부터 그는 각종 단체, 병원, 학교를 통해 어린이들의 그림을 수집했다. 그리고 전세계 141개국 어린이들이 ‘나의 꿈’을 주제로 그린 그림을 전시하는 ‘십만의 꿈’전을 파주 통일동산에서 개최한다. 어린이 그림 수집을 통한 프로젝트의 목표는 비무장지대를 흐르는 임진강 위에 세계 어린이들이 평화와 희망의 염원을 담아 그린 그림들로 남과 북을 연결하는 그림 다리인 ‘꿈의 다리’를 놓는 것이다. 북한 당국의 비협조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를 완성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2001년엔 뉴욕 유엔 건물 로비에 9·11 테러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유엔아동특별총회를 기념하기 위한 작품 ‘놀라운 세계’를 설치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전세계 135개국 3만4000명 어린이의 평화를 소망하는 그림으로 제작된 이 작품에서 아이들은 맑고 티 없는 눈으로 평화를 그려내고 있다.

    어린이들이 ‘나의 꿈’ ‘나의 미래’라는 두 가지 주제 중 하나를 택해 그림을 그린 후 ‘놀라운 세상’ 웹사이트(www.amazedworld.com)에 올리면 이를 토대로 그가 나무판에 새겨 작품을 만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국경과 인종을 넘어 화합과 평화의 염원이 담긴 용광로지만 개체가 녹아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존재하는 가운데 하나를 이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04년에는 통일 염원을 담은 지름 12m 대형 풍선을 일산 호수공원에 띄우기도 했다. 어린이들이 보내온 13만여 장의 그림을 이어 붙인 작품으로 전세계 어린이의 꿈이 담긴 달이라는 뜻에서 ‘꿈의 달’이라 명명했다.

    이렇게 지역 주민이나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전개해온 그는 2005년 켄터키 주 루이빌의 무하마드 알리센터 개관에 맞춰 141개국에서 모은 7000점의 작품과 사운드가 조합된 작품을 통해 종교와 인종의 차이를 넘어 평화를 소망했다. 또 뉴저지 주 프린스턴 시 공립도서관 로비의 ‘행복한 세상’은 주민들이 내놓은 애장품과 소품들을 활용한 작품이다. 아인슈타인의 파이프, 노벨상·퓰리처상 수상자 20여 명의 메모와 서명, 2억년 된 돌과 가족사진, 배지, 자녀가 쓰던 장난감 등이 작품에 녹아들어 지역의 도서관에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이다.

    달항아리

    이런 작업은 독일의 하일리겐담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서도 선을 보였다. 지난해 말에는 광화문 복원공사 현장의 가림막에 ‘달항아리’를 중심으로 흑백의 서울 자연풍경 그림을 배치해 새로운 광화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와 함께 신시내티 병원을 시작으로 세계 어린이병원 벽화 만들기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는 프로다. 평범하지 않은 예술가적 삶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하고 세상 사람들과 편견 없이 소통한다. 그는 예술을 통해 누구에게 교훈을 주거나 가르치려하기보다는 서로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털어놓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소외와 고독으로 특징지워지는 팍팍한 인간의 삶을 서로 털어놓음으로써 벽은 사라지고 하나가 된다.

    포용의 작가 강익중

    강익중은 전 세계 어린이들이 꿈과 평화를 주제로 그린 그림들을 모아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그는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현실을 못 견뎌 한다. 그래서 조국의 분단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래서 방향을 바꿔 내일의 주인인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하나로 묶어냄으로써 미래에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상생하는 지구를 만들어 보기로 마음먹고 시작한 게 바로 ‘놀라운 세상’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는 달항아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달항아리는 한국인의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처럼 푸근하고 소담하다. 또한 꾸밈이 없어 조금은 어설퍼 보이지만 모든 것을 수용하고 담아내는 넓은 포용력을 지닌다. 달항아리는 한국의 문화를 대신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는 달항아리를 통해 빠듯한 삶과 기계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일상으로부터 슬쩍 비켜서서 여유를 가지고 밤하늘을 밝히는 보름달의 여유를 가질 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달항아리는 이런 여유로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사실 달항아리는 그 크기 때문에 만들기가 쉽지 않다. 숱한 실패 끝에 한두 점을 건질 뿐이다.

    소박하고 풋풋한 달항아리의 제작과정이 이렇게 어려운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함께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달항아리는 원래 상하 두 개로 나누어 만든다. 이 둘은 불속에서 녹아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1500℃가 넘는 온도와 인고의 시간을 감수해야 한다.

    하찮은 것들의 미학

    그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일상과 생각들을 존중하면서 그들과 평화로운 공존을 꿈꾸며 실천한다. 그에게 개인은 우주인 동시에 개체다. 그는 획일적인 거대담론보다 작은 개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일상 속의 다양한 삶의 편린들을 채집해서 이를 작품화한다.

    포용의 작가 강익중
    정준모

    1957년 서울 출생

    중앙대 서양화과 졸업, 홍익대 석사 (미술학)

    제1회 광주비엔날레 전문위원, 국립 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덕수궁 미술관장

    現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 중앙대·고려대 강사

    논문 : ‘미술품은 땅인가’ ‘제3의 미학, 새로운 출구’ ‘한국의 모던이즘, 모더니즘’ 등


    민족이나 국가라는 거대담론에 함몰되던 개인의 삶은 뉴욕에서 마이너리티로 살아가는 그에게는 삶을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바탕이 된다. 따라서 그에게서 일상과 미술은 그의 미시사이자 일상사인 셈이다. 또 그의 삶은 특수한 그만의 것인 동시에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의 기록이다. 그의 작업은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이중성을 가진다.

    모눈종이처럼 균일하게 배열되는 질서와 원칙은 획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상 상황에 따라 그의 일상의 편린들이 조합되기에 늘 열려 있다. 이렇게 열려 있는 구조와 가변적인 일상의 조합 가능성은 그에게 ‘하찮은 것들의 미학’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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