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로 사이클 경주에선 어느 팀이나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천천히 달리는 선수들은 하인이라는 의미의 ‘도메스티끄’라 불린다. 그들은 팀 리더를 다양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바람막이 역할을 한다. 나의 팀에는 동료가 8명 있다. 가파른 경사를 오를 때는 동료 뒤에서 달린다. 그의 바퀴에 붙어서 바람을 피하면 에너지를 30%나 아낄 수 있다. 바람이 심한 날에는 8명의 동료가 앞에 나서서 바람을 막아줘 에너지를 50%나 아낄 수 있다.
- -랜스 암스트롱 자서전 ‘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에서.
2004 서울국제마라톤에서 이봉주와 나란히 뛰고 있는 외국 페이스메이커들.
육상선수의 꿈은 오직 하나다. 지금보다 더 빨리 달리는 것이다. 좀 더 빨리 달릴 수만 있다면, 모두들 영혼이라도 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단거리선수의 경우 한겨울 내내 죽어라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도 기록을 0.01초 단축하기가 힘들다. 아니 오히려 뒷걸음질치는 경우가 숱하다. 이쯤 되면 야생마의 몸을 빌려서라도 달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치타의 발을 빌려 달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스프린터(단거리선수)에게 0.01초의 거리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멀다. 0.01초는 서울과 부산만큼이나 까마득한 길이다. 어느 선수는 출발선상에서 0.01초 정도를 번다. 출발 총성과 함께 총알처럼 튕겨 나간다. 중력을 절반밖에 받지 않는 우주인 같다. 전기 스파크처럼 팍! 하는 순간에 저만치 뛰쳐나간다. 그들은 뭔가 확실히 다르다. 스타팅블록을 어떻게 놓는가, 두 손은 땅에 어느 정도 벌려 어떻게 짚는가, 어깨나 엉덩이의 위치는 어떤가, 다리의 각도는 얼마나 되는가, 총성이 울릴 때의 첫 스텝과 투스텝 그리고 이후 리듬은 어떠한가….
총성이 울리기 전에 출발하는 선수도 있다. 육상용어로 ‘플라잉’이라고 한다. 첫 번째는 누가 범하든 상관없이 다시 출발한다. 하지만 두 번째 출발신호 때 플라잉을 범한 선수는 무조건 실격이다. 첫 번째 플라잉 유무와는 관계없다. 플라잉은 총성이 울리기 전 먼저 출발한 것만 뜻하지 않는다. 심판의 “준비” 구령에 맞춰 엉덩이를 쳐든 후 몸의 어느 부분이건 흔들리거나 움직이면 무조건 플라잉이다.
출발이 빨랐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가속거리다. 가속거리가 길면 길수록 기록이 좋아진다. 자동차 기어를 순식간에 1단에서 3단으로 올릴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진 게 아니다. 하지만 출발 이후에도 계속 3단기어로만 간다면 문제가 있다. 비록 2단으로 출발했지만 계속 3단→4단→5단으로 가속한 뒤 그대로 결승선까지 골인하는 선수가 기록도 좋다. 보통 출발이 빠른 선수는 가속거리가 짧다. 100m선수의 경우 40~ 50m에서 가속거리가 끝난다. 그 정도라면 4단 기어까지밖에 끌어올릴 수 없다. 5단 기어까지 자신의 절대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데도, 최고속도가 4단 기어밖에 안 나오는 셈이다.
세계적인 스프린터는 가속거리가 적어도 60~70m는 된다. 출발해서 차례로 5단 기어까지 끌어올린 뒤, 40~30m를 5단 기어로 질주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자신의 절대속도와 최고속도가 같아진다. 한국 스프린터들은 스타트도 느릴 뿐더러 가속거리도 짧다. 그뿐인가. 60m 이후에는 최고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남자 100m 한국기록(10초34)이 29년째 깨지지 않은 이유다.
페이스메이커의 탄생
1953년 5월29일 오전 6시15분. 인간이 마침내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꼭대기(8848m)를 밟았다. 그 주인공은 영국원정대 소속의 뉴질랜드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그리고 그 나흘 뒤인 6월2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이 열렸다. 영국인들은 열광했다. ‘지는 해’ 대영제국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다. 바로 1마일을 4분 안에 달리는 것이다. 1마일은 약 1609m로 육상트랙 4바퀴를 도는 거리. 영국인들은 그 마의 벽도 반드시 영국인이 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세계 최초의 페이스메이커는 개였다.
페이스메이커란 ‘육상의 가게무샤’나 같다. 가게무샤(影武者)는 일본어로 ‘가짜 무사’를 뜻한다. 자신이 상대할 무사와 비슷한 스타일의 대역 무사를 말한다. 가상 라이벌과의 연습을 통해 실전에 대비하는 것이다. 인간은 능력이 비슷한 라이벌과 피 말리는 경쟁을 펼칠 때 자신의 한계치를 뛰어넘는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형체도 없는 ‘인간 대 시간의 경주’에서 벗어났다. ‘인간 대 인간의 경주’가 기록을 단축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냥개가 아니라 인간을 ‘라이벌 대역’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만약 1마일 경기에서 누군가가 트랙을 2, 3바퀴까지만 전속력으로 끌어준다면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800m, 1500m 달리기 선수들이 1마일 경주에 페이스메이커로 하나둘 등장했다. 기록도 점점 나아졌다. 1886년 윌터 조지가 4분12초8까지 끌어올렸고, 1915년 미국 타버가 0.2초(4분12초6)를 또 앞당겼다. 사람들은 타버의 기록이 당분간 깨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핀란드의 육상영웅 파보 누르미가 있었다.
1923년 누르미는 4분10초4의 신기록을 세웠다. 여기엔 스웨덴의 1마일 주자 에드빈 와이드의 초반 오버페이스가 큰 힘을 발휘했다. 와이드는 첫 바퀴를 너무 빨리 돌았다. 누르미도 와이드의 페이스에 따라 평소보다 빨리 달릴 수밖에 없었다. 와이드는 3바퀴까지 빠른 속도로 달리다 결국 힘이 달려 뒤처졌다. 하지만 훈련벌레인 누르미는 그 속도를 계속 유지했다. 결과적으로 와이드가 페이스메이커 노릇을 해준 셈이다. 결승선을 끊은 누르미는 “앞으로 기록을 4분4초까지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1마일 4분벽을 깨라!
1931년 10월 프랑스의 줄리 로도메그가 사상 처음으로 ‘4분 한 자릿수대(4분9초2)’를 끊었다. 역시 페이스메이커의 도움이 컸다. 800m 전문선수 르네 모렐이 2바퀴 반까지 전속으로 끌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기록이었다. 1937년 영국인 시드니 우더슨의 4분6초4 신기록도 여러 명의 페이스메이커가 3바퀴까지 끌어준 덕분이었다. 두꺼운 안경을 쓴 우더슨은 168cm 57kg의 볼품없는 체구였지만 4바퀴째의 폭발력은 대단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스웨덴에 세계 최고의 1마일 주자 2명이 함께 등장했다. 몸이 부드럽고 자세가 자연스러운 군다 하에그, 자세는 딱딱하지만 연습벌레인 아르네 안데르손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 말리는 경쟁을 벌였다. 4분벽을 깰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들은 자연스레 서로 페이스메이커 노릇을 하며 조금씩 4분벽에 다가갔다.
4분4초6(1942년 하에그)→4분2초6(1943년 안데르손)→4분1초6(1944년 안데르손)→4분1초4(1945년 하에그). 하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4분벽은 끝내 깨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10년 가까이 이들을 넘어설 만한 선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기록이 뒷걸음질쳤다. 1954년 4월까지 4분벽에 가장 근접한 선수는 호주의 존 랜디. 그는 그때까지 4분3초 이내로 6번이나 결승선을 끊었다. 하지만 그를 끌어줄 페이스메이커가 없었다. 그는 늘 2바퀴쯤 지난 뒤엔 혼자 맨 앞에서 달려야만 했다. 1953년 12월12일 4분2초, 1954년 1월21일 4분2초4…. 지긋지긋한 2초였다. 랜디는 끝내 지쳐버렸다.
1954년 5월6일 세계 최초로 1마일 4분벽을 깬 로저 배니스터.
랜디의 뒤를 바짝 쫓는 선수는 영국의 로저 배니스터였다. 그는 내심 2명의 페이스메이커가 자신을 끌어만 준다면 4분벽을 충분히 깰 수 있다고 생각했다. 2번째 바퀴까지 2분에 이끌어줄 사람 1명과 3번째 바퀴를 60초 이내에 이끌어줄 사람 1명이 필요했다. 그는 그의 달리기 친구 브래셔와 채터웨이를 끌어들여 연습을 시작했다. 브래셔가 2바퀴까지 2분 이내에 끌어주고, 채터웨이가 3번째 바퀴를 1분 이내에 끌어주는 방식이었다. 나머지는 배니스터 몫이었다. 다행히 배니스터는 후반 스퍼트가 탁월했다. 만약 그가 4번째 바퀴를 1분 이내에 달릴 수만 있다면 4분벽은 깨지는 것이었다.
1954년 5월6일. 마침내 1마일 경주가 시작됐다. 브래셔가 첫 번째 바퀴를 57초에 끊었다. 배니스터는 브래셔의 등 뒤에 바짝 붙어 57.5초를 기록했다. 3번째 바퀴까지 이끌어줄 채터웨이도 바짝 따라왔다. 브래셔는 2번째 바퀴도 1분58초 기록으로 배니스터를 선두에서 끌었지만 곧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3번째 바퀴에는 채터웨이가 있었다. 채터웨이가 3번째 바퀴까지 3분으로 선두에서 끌었다. 이젠 배니스터가 마지막 스퍼트를 할 차례였다. 그건 그의 장기였다. 배니스터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내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승선을 끊었다. 3분59초4. 배니스터는 극심한 고통으로 의식을 잃었다. 배니스터는 말한다.
“인간의 몸은 생리학자들보다 수백 년은 앞서 있다. 생리학이 비록 호흡기와 심혈관계의 육체적 한계를 알려줄지는 모르지만, 생리학 지식 밖의 정신적 요인들이 승리냐 패배냐의 경계사선을 결정한다. 운동선수가 얼마나 절대한계까지 갈 수 있는지를 좌우한다.”
배니스터가 1마일 4분 장벽을 깬 지 6주 후인 1954년 6월21일, “4분벽은 벽돌 장벽이다. 다시는 도전하지 않겠다”던 존 랜디가 3분58초로 1마일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그뿐인가. 배니스터 신기록 이후 두 달도 안 돼 세계에서 10명이 4분벽에 진입했다. 그 숫자는 1년 후엔 27명, 2년 뒤엔 300명으로 늘었다. 현재 1마일 세계기록은 1999년 모로코의 히참 엘 구에로가 세운 3분43초. 17초나 빨라졌지만 심장이 파열된 경우는 없었다. 최근엔 37세의 노장이 4분벽을 넘어 화제가 된 경우도 있다.
절대적 존재 ‘육상 용병’
페이스메이커는 일정한 거리까지 선두를 끌어주는 ‘육상 용병’이다. 요즘 1500m, 3000m 트랙 경기에선 흔히 볼 수 있다. 주로 800m 선수들이 ‘트랙 용병’으로 나서 빠르기를 이끌다 적당한 순간에 빠지거나 꼴찌로 처진다. 여자 마라톤에선 남자 선수가 페이스메이커로 나서 결승선까지 끌어준다. 그뿐인가. 레이스 내내 앞에서 바람까지 막아준다.
사이클에도 페이스메이커가 있다.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도 팀 동료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투르 드 프랑스에서 내리 7번이나 우승할 수 없었을 터. 이런 면에서 페이스메이커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목장에 있는 말을 따라 달리면 마라톤 2시간 벽도 얼마든지 깰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요즘 마라톤 페이스메이커는 다른 선수와 뚜렷이 구별되도록 하기 위해 원색 유니폼 차림이 보통이다. 등번호도 다르다. 대회 주최 측에선 아예 얼마의 속도로 달릴 것이라고 다른 선수들에게 미리 알려주기까지 한다.
2003년 4월 런던마라톤, 영국의 폴라 래드클리프가 2시간15분25초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여자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이때 래드클리프는 무려 5명의 남자 페이스메이커에 둘러싸여 결승선까지 달렸다. 전문가들은 ‘과연 그 기록을 인정할 수 있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남자선수와 여자선수가 동시에 출발한 것도 아니었다. 같이 출발한다면 남자선수들이 여자선수와 비슷한 빠르기로 뛴다고 해서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남자선수들 중에도 느린 선수가 있기 때문. 하지만 그날 여자선수들은 남자선수들보다 15분이나 먼저 출발했다. 그런데도 남자 페이스메이커 5명이 출발부터 래드클리프를 이끌었다. 여자선수들 가운데 남자선수는 오직 페이스메이커 5명만 있었다.
마라톤 세계기록 보유자 게브르 셀라시에(왼쪽)와 그의 라이벌인 케냐의 폴 터갓.
국제육상연맹 규정에는 마라톤 선수가 그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되게 돼 있다. 만약 도움을 받은 것으로 판단되면 그 즉시 실격판정을 받게 된다. 가령 마라톤 선수가 결승선을 1m 앞에 두고 쓰러졌다 해도 아무도 그 선수를 일으키거나 손을 대면 안 된다. 혼자 힘으로 일어나 결승선을 통과할 때만 기록으로 인정된다. 국제육상연맹은 래드클리프의 기록을 “아무런 문제없다”며 인증했다.
그만큼 현대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엔 공식적으로 페이스메이커가 없다. 대신 기준 기록을 통과할 경우 한 국가에서 최고 3명까지 나올 수 있다. 자체적으로 3명 중 1명을 페이스메이커로 활용할 수 있다.
서울 마라톤의 아쉬운 순간들
“페이스메이커가 35km 지점까지만 같이 달려줬다면 한국최고기록도 얼마든지 가능했는데 그게 좀 아쉽다.”
2007 서울국제마라톤에서 우승한 이봉주가 나중에 한 말이다. 그렇다. 대회를 주최한 동아일보사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초 페이스메이커로 케냐 선수 2명과 계약할 때 ‘5km를 15분 속도로 30km까지만 달리기로’ 했다. 그들은 임무를 훌륭히 마치고 30km지점에서 달리기를 멈췄다. 하지만 그들이 빠지자 문제가 생겼다. 선두권에 있던 선수들이 서로 견제하느라 속도가 떨어진 것이다. 멈칫멈칫 상대 눈치를 보느라 속력을 내지 않았다.
결국 30~35km 지점까지 15분57초나 걸렸다. 무려 57초나 더 걸린 것이다. 35km 지점에서 케냐의 키루이가 치고나가고 이에 봉달이가 따라붙는 형국이 되면서부터 다시 원래 속도(35~40km 14분58초)를 유지했지만 좀 늦은 감이 있다. 만약 페이스메이커가 35km 지점까지 끌어주고 이봉주와 키루이가 좀 일찍 맞붙었다면 한국최고기록은 물론 2시간6분대까지 기록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사실 2명의 페이스메이커가 30km 이후 더 달리게 되면 1km마다 일정한 보너스를 받기로 했었는데 이들은 그만 포기해버렸다.
페이스메이커는 경험을 쌓아가는 풋내기가 대부분이다. 5000m, 1만m, 하프코스(21.0975km)를 달리면서 스피드를 키우고, 그 다음 페이스메이커를 하면서 훈련비용도 벌고 경험도 쌓는다. 만약 그들이 35km까지 그런 속도로 달릴 수 있다면 내친김에 결승선까지 달려 우승할 수도 있다.
페이스메이커가 우승하면 상금도 많이 받는다. 페이스메이커 계약금에다 우승상금까지 챙길 수 있다. 세계적인 마라톤대회(보스턴·뉴욕·시카고·런던·베를린)에서는 반드시 페이스메이커를 고용해 2시간6~7분대의 기록을 유도한다. 보통 ‘5km 14분대 후반이나 15분 빠르기’로 선두권을 끌고 간다. 세계최고기록이 나온 베를린 코스 경우는 페이스메이커의 빠르기도 엄청나다. 페이스메이커도 선두권을 이끄는 ‘1그룹’과 그 다음 그룹을 이끄는 ‘2그룹’이 있는 게 일반적이다.
페이스메이커가 너무 빨리 달려도 문제가 된다. 선수들이 초반에 오버하면 후반에 지쳐 잘 달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5년 3월에 열린 서울국제마라톤이 그 좋은 예다. 동아일보사는 2004년 남아공의 거트 타이스가 세운 대회 최고기록 2시간7분6초를 깨기 위해 존 유다(탄자니아) 등 내로라하는 전문 페이스메이커들을 대거 불러들였다. 하지만 이들은 선두권을 너무 빨리 끌었다. 25km까지 1시간14분22초. 이 기록은 2003년 베를린마라톤에서 세계 최고기록을 세운 폴 터갓의 1시간14분40초보다도 무려 18초 빠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30km 지점 이후부터 선두권의 빠르기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5km를 14분55초~15분 정도로 끌어야 했는데 그만 10여 초나 앞당겨 끌었던 것이다. 결국 케냐의 윌리엄 킵상이 우승을 차지했지만 기록은 2시간8분53초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마라톤 2시간4분벽은 과연 깨질 것인가. 깬다면 누가 깰 것인가. 현재 마라톤 세계최고기록 보유자는 에티오피아의 게브르 셀라시에(35). 그는 지난해 9월30일 베를린마라톤에서 2시간4분26초로 폴 터갓(케냐)의 종전 세계기록(2시간4분55초)을 4년 만에 29초 앞당겼다. 34㎞ 지점까지 1㎞를 2분55초~3분에 끊었고, 마지막 8㎞에선 1㎞당 2분50초~2분55초로 더 빨랐다.
고수의 향연, 두바이마라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세계 기록으로 우승한 손기정 선생.
베를린대회의 출발시 기온은 10℃, 골인 시점엔 16℃. 바람이 약간 불었지만 코스까지 평탄해 레이스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역대 남자 세계기록 톱10 가운데 베를린 코스에서 1, 2, 3위 기록을 포함해 5개(여자 포함 6개)가 나올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다른 대회 세계기록은 시카고 3개, 런던 2개다.
세계최고기록은 ‘날씨(10℃ 안팎)-코스(평탄하고 굴곡 없는)-선수 컨디션-페이스메이커 리드’의 4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이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기대하기 어렵다. 코스는 갈수록 평탄해지고 있다. 세계 유명대회마다 앞다퉈 쉬운 코스를 선보이고 있다. 지난 1월18일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는 올해로 3회째 맞은 두바이국제마라톤대회에서 ‘환상의 코스’를 선보였다. 말 그대로 오르막길 하나 없는 ‘완전 평탄 코스’를 내놓았다. 직각으로 꺾어지는 구간도 8곳뿐이었다. 게다가 5㎞부터 35㎞까지 왕복 구간은 굴곡 없이 쭉 뻗은 직선 도로. 두바이 정부는 세계 마라톤 전문가를 동원해 완벽한 평탄 코스를 `기획’했다.
두바이 정부는 마라톤 2시간3분대 진입을 ‘사막 두바이 땅’에서 만들어낼 속셈이었다. 우승상금도 남녀 모두 25만달러를 내걸었다. 보스턴마라톤(10만달러)의 2배반이 넘는 엄청난 금액이다. 여기에 세계최고기록을 작성하는 선수에겐 세금 없이 100만달러를 보너스로 주기로 했다. 두바이는 이것도 모자라 세계최고기록 보유자 게브르 셀라시에를 불러들였다. 게다가 하프마라톤 세계최고기록을 세운 적 있는 파비아노 조셉 나시(탄자니아), 2002년 보스턴·뉴욕 마라톤 우승자 로저스 롭(케냐), 세계 3위 기록 보유자 사미 코리르(케냐) 등 세계의 내로라하는 남녀 유명선수 25명씩 50명을 초청했다. 굳이 페이스메이커가 필요 없었다. 고수들끼리 피 말리는 선두다툼을 하다 보면 기록은 자연히 좋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최고기록은 나오지 않았다. 게브르 셀라시에가 2시간4분53초로 1위를 하긴 했지만 자신의 세계최고기록보다 27초가 뒤졌다. 물론 이날 기록도 2003년 베를린마라톤에서 폴 터갓(케냐)이 세운 기록보다 2초가 빨랐다. 역대 세계 1, 2위 기록을 모두 게브르 셀라시에가 세운 것이다. 셀라시에는 두바이대회에서 중반 레이스까지 자신이 세운 세계기록보다 빠른 페이스로 달렸다. 하지만 막판 7㎞에서 스피드가 떨어져 27초가 밀렸다. 결국 두바이대회는 ‘세계최고기록 작성 4요인’ 중 선수 컨디션이 2% 부족한 대회였다고 할 수 있다. 셀라시에는 현재 세계 마라톤 무대에서 ‘절대지존’이다. 다른 선수들은 도저히 따라붙기 힘든 스피드와 지구력을 가졌다. 결국 그만이 2시간4분벽을 깰 수 있는 유일한 후보인 셈이다.
게브르 셀라시에는 에티오피아 아셀라(해발 2430m)에서 태어났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산과 들로 뛰어다녔다. 학교도 왼손에 책보를 꽉 쥐고 바람같이 달려갔다가 바람같이 돌아왔다. 통학버스 같은 것은 처음부터 아예 없었다. 집과 학교의 거리는 정확히 10km. 그의 심장은 기관차 엔진처럼 튼튼했고, 두 다리는 무쇠처럼 단단했다.
최고의 페이스메이커는 ‘라이벌’
1992년 19세의 나이에 세계주니어선수권 대회 500m, 1만m를 석권하며 세계무대에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에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다르다면 트랙 위를 달린다는 것뿐, 날마다 학교 오가는 것과 똑같았다. 오히려 왼손에 책보가 없어 허전했다. 뭔가 가슴 한쪽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래서 트랙에서도 왼손은 늘 책보를 쥔 폼으로 달렸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왜 왼손을 구부정하게 늘어뜨린 폼으로 달리느냐며 수군댔다. 스무 살 때인 1993년부터 95, 97, 99년까지 세계선수권 1만m 4회 연속우승. 1996년 애틀랜타, 2000년 시드니올림픽 1만m 우승. 크로스컨트리, 5000m, 1000m에서 24번 세계기록 작성. 그 앞엔 거칠 것이 없었다. 마치 어릴 적 학교에 늦어 허겁지겁 교문을 향해 달려가듯 막판으로 갈수록 더 빨라졌다.
게브르 셀라시에와 케냐의 폴 터갓이 나란히 경주를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 이들이 결승선까지 불꽃 튀는 다툼을 벌인다면 4분벽도 깨질 가능성이 크다. 상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인간 대 인간의 경쟁’이다. 셀라시에와 터갓은 나이와 국가를 초월한 10년 지기. 하지만 경주에선 한 치도 양보가 없다. 터갓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과 2000년 시드니올림픽 1만m 결승에서 연거푸 셀라시에에게 무릎을 꿇었다. 애틀랜타에선 0.83초 차, 시드니에선 0.09초 차로 금메달을 연거푸 친구에게 내줘야 했다.
하지만 터갓은 실망하지 않았다. 곧장 마라톤으로 방향을 바꿔 2003년 베를린 마라톤에서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며 세계 1인자로 우뚝 섰다. 그러나 결국 이것마저도 게브르 셀라시에게 잡힌 셈이 됐다. 터갓은 말한다.
“그가 기록을 세우는 것을 TV로 보고 너무 기뻤다. 기록은 깨지게 마련이다. 그 기록을 친구가 깨서 더욱 기쁘다. 당분간 깨지기 힘든 대기록이다. 현재로선 그를 이길 선수가 없기 때문이다.”
게브르 셀라시에는 말한다.
“2007년 베를린대회 결승선에 골인한 직후 친구인 폴 터갓이 케냐에서 축하전화를 해왔다. 난 그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세운 기록은 네 것’이라고 했다. 4년 전 터갓이 기록을 세울 때보다 날씨도 서늘하고 바람도 가볍게 불어 조건이 훨씬 좋았다고 말해줬다. 그땐 기온이 높았다. 난 세계기록을 깨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친구인 터갓의 기록을 넘어서야 한다는 게 꺼림칙하기도 했다. 터갓은 내 처지를 이해할 것이다. 터갓은 내년 베를린에서 다시 나의 기록에 도전할 것이다.”
한국의 세계기록 독점 17년
손기정 선생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기록은 2시간29분19초. 100m 평균 21.23초의 빠르기다. 당시 역대 올림픽 사상 최고기록이자 2시간30분벽을 처음으로 깬 대단한 기록이다. 하지만 손 선생의 우승기록은 파울라 래드클리프의 여자 세계최고기록 2시간15분25초보다도 13분54초 느리다. 래드클리프는 100m를 평균 19.25초에 달려 손 선생보다 1.98초 빠르다. 요즘은 웬만한 아마추어 남자마라토너의 우승기록이 2시간20분대에 이른다. 그만큼 세계 마라톤 기록은 엄청나게 단축됐다. 식이요법, 신발개발과 함께 평탄한 코스 개발이 그 원인. 현재 한국 마라톤 최고기록은 이봉주의 2시간7분20초(100m 평균 18.10초, 시속 19.872km).
2008년 1월 현재 마스터스 세계 최고기록은 2003년 베를린마라톤에서 멕시코의 안드레스 에스피노자(43)가 세운 2시간8분46초. 물론 에스피노자는 엘리트 선수 출신이지만 서양에선 40세가 넘으면 무조건 마스터스로 간주한다. 세계 최초의 마라톤 공식기록은 1896년 제1회 아테네올림픽에서 그리스의 드미트리 오스 델리기아니스가 세운 3시간3분5초다. 이후 29년 만인 1925년 미국의 앨버트 미첼슨이 2시간29분2초의 기록으로 2시간30분대 벽을 처음으로 깼다(올림픽에선 손기정 선생이 처음 깸). 2시간20분벽은 1953년 영국의 제임스 피터스에 의해 무너졌다. 그는 2시간19분41초의 기록으로 2시간10분대에 진입하더니 그 다음해엔 2시간17분40초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끊었다. 자신의 기록을 2분1초나 앞당긴 것.
역대 세계최고기록 보유자 중엔 한국인도 2명이나 포함돼 있다. 스승인 손기정과 그의 제자 서윤복이 그 주인공. 손기정은 1935년 도쿄에서 2시간26분42초의 세계최고기록을 세웠고 이 기록은 12년 뒤인 1947년 서윤복이 보스턴대회에서 2시간25분39초의 최고기록으로 우승함으로써 깨졌다. 서윤복의 기록은 1952년 영국 제임스 피터스(2시간20분43초)에 의해 깨졌다. 17년 동안 한국 마라톤이 세계정상에 우뚝 서 있었다. 2시간10분벽이 깨진 것은 1967년. 호주의 데렉 클레이톤이 2시간9분37초의 기록으로 본격적인 스피드 경쟁에 불을 지폈고, 그 후 36년 만인 2003년 폴 터갓이 마침내 2시간4분대에 진입했다.
마라톤에서 인간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과연 2시간 벽도 깨질 것인가? 세계 마라톤은 1908년 미국의 존 하예스가 세운 2시간55분18초가 공식 기록으로 집계된 이래 올해로 딱 100년을 맞았다. 100년 동안 50분52초가 빨라진 셈이다. 1988년 4월 2시간7분벽이 깨진 뒤(에티오피아 벨라이네 딘사모, 2시간6분50초) 11년6개월 만에 2시간6분벽이 깨졌고(1999년10월 모로코 할리드 하누치, 2시간5분42초), 2시간5분벽이 무너진 것은 그보다 훨씬 짧은 4년 만(2003년 9월 케냐 폴 터갓 2시간4분55초)이다.
페이스메이커를 키우자!
갈수록 ‘가상의 벽’이 깨지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 2시간4분 벽은 언제 깨질까? 게브르 셀라시에는 “나는 2시간3분대까진 뛸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베를린에서 그렇게 뛸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적어도 2시간 3분벽, 아니 2분벽은 머지않아 그에 의해 깨질 가능성이 크다. 셀라시에는 2006년 1월 미국 피닉스하프마라톤에서 58분55초의 세계최고기록을 세웠다. 만약 똑같은 스피드를 유지할 수 있다면 풀코스를 1시간57분50초에 끊는다는 계산이다.
스포츠 생리학자들은 ‘2시간 벽은 깨지겠지만 1시간55분대까지 근접하진 못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미국 켄터키주립대 존 크릴교수팀은 날씨, 코스, 러닝화 등 최적의 조건으로 시뮬레이션할 경우 마라톤 풀코스 한계기록이 1시간57분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1시간57분에 풀코스를 뛰려면 100m를 16초63에 달려야 한다.
현대 마라톤은 ‘단거리의 확대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처절한 스피드 레이스다. 2시간5분대에 달리려면 5000m를 13분20초 이내, 1만m를 27분대에 끊어야 한다. 5000m 세계기록은 에티오피아의 케네니사 베켈레가 세운 12분37초35. 한국은 지영준이 13분49초99에 주파했다. 1000m 세계기록은 역시 베켈레의 26분17초35이고 한국기록은 김종윤의 28분30초54. 한국마라톤 최고기록은 2000년2월 도쿄마라톤에서 이봉주가 세운 2시간7분20초. 이 기록은 1985년 포르투갈의 카를로스 로페스가 2시간7분12초에 결승선을 끊으며 넘어선 기록이다. 한국 마라톤은 세계에 딱 23년 뒤져 있다.
한국 육상은 왜 느림보인가. 한국 마라톤은 왜 더디 가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라이벌이 없기 때문이다. 페이스메이커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과 싸움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남자 100m 기록은 언제 깨질 것인가. 아마도 10초34(1979년 서말구)라는 시간에만 얽매이다 보면 영원히 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라이벌, 즉 페이스메이커를 키워야 한다. 페이스메이커는 다르게 보면 ‘꿈나무’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커서 페이스메이커 꼬리를 떼는 날, 자연스레 대선수가 되는 것이다.
물론 100, 200m 단거리엔 페이스메이커가 없다. 하지만 60~70m까지 가속거리를 끌고 갈 수 있는 2명 이상의 라이벌이 있다면, 그 기록은 엄청 앞당겨질 것이다. 그들은 라이벌이면서, 서로에게 페이스메이커 노릇을 해준다. 엇비슷한 선수들을 동시에 경쟁시키며 키워야 하는 이유다.
이봉주는 외롭다!
한국에 이봉주를 30km까지 2시간7분대로 끌어줄 만한 페이스메이커가 있는가. 단연코 없다. 15km까지 리드해줄 선수도 없다. 어쩌면 손에 꼽을 정도의 몇몇 선수가 10km까지 끌다가 헉헉거리며 그만둘 것이다. 이봉주는 늘 외롭게 혼자 뛰어왔다. 그렇다고 사냥개나 말을 뒤따라 달릴 수는 없다. 이봉주는 올해로 서른여덟. 베이징올림픽 이후에도 계속 뛴다는 보장이 없다. 이제부터라도 젊은 선수들을 비슷한 기록끼리 그룹지어 피나는 경쟁을 시켜야 한다. 한 팀에서 자기들끼리 레이스를 하는 것은 효과가 적다.
단거리 달리기에도 전략적으로 페이스메이커를 활용할 수 있다. 레이스에 5단 기어로 70m까지 달릴 수 있는 선수를 투입하는 것이다. 가령 대학이나 일반경기에 고교선수를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고교선수는 70m까지만 전력으로 달리면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선배들과의 레이스를 통해 노하우를 쌓아가는 것이다.
강호엔 늘 피바람이 분다. 공짜는 없다. 감나무 밑에 누워 있어도, 감은 결코 입속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몸을 부대껴 경쟁해야만 겨우 떡 하나 얻어먹을 수 있다. 꿈은 늘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한다. 그게 강호의 법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