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호

바리톤 김동규의 오페라 이야기

고지식한 테너, 청순한 소프라노, 사고뭉치 바리톤, 위험한 여인 메조소프라노

  • 구미화│신동아 객원기자 selfish999@naver.com│

    입력2010-04-05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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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크다. 경험해본 것과 경험해보지 않은 것의 차이는 더 크다. 사랑이 그렇고 오페라가 그렇다. 막장 드라마는 재미있지만 유치하고, 오페라는 고상하지만 어렵다는 생각은 오페라를 모르거나 경험해보지 않고 하는 얘기다. 막장 드라마만큼 흥미진진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수준 높은 성악가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바로 오페라다.
    바리톤 김동규의 오페라 이야기
    ‘오페라’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오페라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은 많다. 그렇다고 오페라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얘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 트라비아타’ ‘라 보엠’ ‘리골레토’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 ‘나비부인’ ‘토스카’ ‘투란도트’…. 모두 들어봤음직한 오페라 제목이다. 우리나라의 공연문화가 크게 성장하면서 세계 정상급 성악가들이 등장하는 초대형 오페라 여러 편이 국내에서 관객들을 만났고, 조수미 홍혜경 신영옥 등은 해외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오페라는 여전히 ‘알면서도 모르는’ 장르다. 드라마와 영화, 광고 배경음악 등으로 오페라의 아름다운 선율을 수없이 접하지만 정작 그게 오페라 아리아인지 알지 못한다. 오페라를 직접 즐겨본 적 없이 막연히 고상한 문화생활 정도로 간주해버리기 때문이다.

    ‘바리톤 김동규’ 하면 클래식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도 쉽게 얼굴을 떠올린다. 콧수염과 털털한 웃음이 인상적인 그는 10여 년 전부터 KBS ‘열린음악회’ 같은 대중적인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해왔다. 덕분에 길에서도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 ‘모든 성악가의 꿈의 무대인 라 스칼라 극장에 선 최초의 한국 성악가’라는 수식어가 일반인에게 감흥을 주기 어렵다고 해도, 그는 노래 잘하는 성악가로 확실하게 각인되어 있다. 몇 해 전부터는 라디오 진행자로 활동 중이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 자신은 ‘오페라 가수 김동규’로 불리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

    대중과 친숙한 오페라 가수 김동규가 최근 오페라에 관한 책 ‘이 장면을 아시나요’를 냈다. 4년째 진행하고 있는 클래식 음악방송 CBS FM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통해 청취자에게 소개했던 오페라 작품들을 엮은 것이다. 오페라 관련 서적이 시중에 여러 권 나와 있지만, 관객이 아닌 오페라 가수가 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름다운 당신에게’의 정혜진 작가와 함께 썼는데, 그의 오페라 지식과 무대 경험이 잘 녹아 있다. 대부분 제목과 주요 아리아가 귀에 익은 작품들이라 읽다보면 흰 도화지에 군데군데 찍혀 있던 점들이 선으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그럴듯한 그림이 완성되는 기분이 든다. 작품명은 오페라.

    “오페라가 사실 전혀 어렵지 않거든요. 전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스토리, 그게 사랑일수도 있고 복수일 수도 있는데, 그것이 다만 클래식음악과 어우러져 표현된다는 특징 때문에 많은 분이 기초지식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하고 겁부터 먹는 것 같아요. 한국에 와서 놀란 건, ‘내가 무슨 오페라를…’ 하면서 지금껏 오페라를 한 번도 안 본 분이 굉장히 많다는 점이에요. ‘토스카’의 아름다운 선율을 생각해보세요. 세 시간 공연에서 한 곡도 걸러낼 게 없을 만큼 정말 좋은데, 이렇게 좋은 경험을 놓치고 살면 너무 아쉽잖아요.”

    아리아의 앞뒤 맥락



    바리톤 김동규의 오페라 이야기
    오페라 가수로서 차별화된 라디오방송을 하고 싶었던 그에게 마침 ‘아름다운 당신에게’ 김효진 프로듀서가 ‘이 장면을 아시나요’라는 코너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클래식 음악방송을 즐겨 듣는 청취자들이 들어봤을 법한 오페라 아리아를 골라, 그 아리아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쉽게 설명해주자는 취지였다.

    “정말 좋은 접근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절대 하이라이트를 소개하는 게 아니에요. 잘 알려진 아리아의 앞뒤 맥락을 얘기해주는 거죠. 많은 분이 ‘별은 빛나건만’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푸치니의 ‘토스카’), ‘그대의 찬 손’(푸치니의 ‘라 보엠’) 같은 아리아는 들어봤어요. 아름다운 그 아리아가 어떤 상황에서 불리는지 조금만 알면 오페라에 푹 빠지죠. 노래는 수십 번 들어봤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고 있던 분들이 제 설명을 듣고 ‘아!’ 하신다는데, 그 ‘아!’의 의미가 크지요. 평생 오페라를 본 적 없는 사람이 저로 인해 오페라를 관람한다면 최고의 보람이죠. 오페라 가수로서 오페라 시장을 넓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니까요.”

    김동규는 연세대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1989년 이탈리아 베르디국립음악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베르디국립음악원을 졸업하던 해인 1991년에 베르디 국제성악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한국 성악가로는 처음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무대에 섰으며, 오페라의 본고장 유럽에서 ‘세비야의 이발사’ ‘오텔로’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토스카’ ‘라 보엠’ 등 유명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했다. 작곡가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 어릴 적부터 오페라를 자주 접했던 그는 고등학교 때 이미 삶의 목표를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정했다.

    바리톤 김동규의 오페라 이야기

    베르디의 비극 ‘리골레토’에서 곱사등이 리골레토 역을 맡은 김동규(가운데).

    “중학생 때부터 오페라를 좋아했어요. 듣기 싫어도 음악이 계속 들려왔으니까요. 어머니 제자들이 부르는 노래도 들어야 했고. 집에 오페라 관련 책과 자료들이 시대별로 집대성되어 있어서 책을 사본 적이 없어요. 환경이 분명 다르긴 했어요. 부모님이 사업을 하는 친구 집에 가보면, 음악 관련 책을 찾아볼 수 없었거든요. 전 공짜로 얻은 게 많아요.”

    부모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긴 했지만, 동양인으로서 유럽에서 실력을 인정받기까지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됐다. 한국에서 공부할 때는 무대에서의 손짓 발짓, 심지어 몇 걸음 걸어야 하는지까지 연출자로부터 지시를 받고 그것을 외워서 무대에 올랐지만, 유럽에선 모든 게 연기를 하는 성악가의 판단에 맡겨졌다.

    “서양에서 한국 사람이 먹고살려면 자세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리허설을 하는 데 굉장히 어색하더라고요. 다른 배우들이 나를 우습게보지 않을까 싶고. 외국인이 춘향전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설픈 흉내로 비치기 싫었어요. 오페라는 노래만으로 안 되고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손짓 발짓이 자연스러워야 해요. 그래서 생활 자체를 이탈리아식으로 바꿨어요. 한국 사람을 만나도 이탈리아 제스처를 했어요. 무대에서 거리낌 없이 서양극을 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결국 동료들로부터 이탈리아인이 아니면서 가장 이탈리아인답다는 얘기를 들었지요.”

    푸치니의 ‘라 보엠’

    김동규는 1991년부터 10년간 유럽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오페라 40작품을 외워 부르고, 어떤 오페라도 사흘 정도 시간을 주면 바로 공연할 수 있도록 피나는 연습을 했다. 1년에 10작품 정도 출연했다. 한 해 같은 작품을 여러 번 공연하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자주 무대에 오르는 오페라가 30∼40편에 불과한 걸 감안하면, 1년에 10작품은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렇게 오페라를 피와 땀으로 체화한 덕분에 지금은 어느 오페라든 쉽고 편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대의 찬 손’ 얘기를 해봅시다. 손이 왜 찰까요? 배경은 정말 단순해요. 보헤미안 젊은이들이 하숙집 위 아래층에 살면서 땔나무 살 돈이 없어서 외투와 숄을 걸치고, 촛불 하나 켜놓고 살던 시절이에요. 극작가인 남자주인공은 소설을 써놓고 마음에 안 드니까 원고를 통째로 난로에 던져버려요. 따뜻하게 불이나 쬐자는 거죠. 춥고 가난한 젊은이들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리아가 바로 ‘그대의 찬 손’이에요. 그대의 찬 손, 내가 녹여줄게요. 하지만 나는 불을 때줄 능력은 못돼요. 사랑과 따뜻한 마음으로 녹여주겠습니다, 이런 거예요. 강원도 산골의 처녀총각 얘기에 접목시킬 수도 있는 쉽고 간단한 스토리죠.”

    ‘라 보엠’은 가난한 청춘들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다. 1830년경 크리스마스 이브, 파리의 낡은 아파트에는 작가인 로돌포와 화가 마르첼로가 난로에 희곡 원고를 던져 넣고 온기를 쬐고 있다. 가난한 예술가 친구들이 모여들어 시끌벅적해지자 집주인이 나타나 밀린 집세를 내라며 흥을 깬다.

    바리톤 김동규의 오페라 이야기
    집주인이 가고 난 뒤 친구들도 모두 단골 카페로 향하고 신문사에 보낼 원고를 써야 하는 로돌포만 남는다. 그때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린다. “제 초에 불을 좀 옮겨주시겠어요?” 촛대를 들고 서 있는 창백하고 아리따운 여인, 바로 여주인공 미미다. 파리한 미미는 힘이 없는 듯 촛대와 집 열쇠를 떨어뜨리고, 간신히 기운을 차려 불붙은 초를 들고 나가려는 순간 떨어뜨린 열쇠를 생각해낸다. “열쇠 좀 찾아주시겠어요?” 그 순간 미미의 촛불이 휙 꺼져버린다. 로돌포는 자신의 촛불에 훅 입김을 불어버린다. “제 것도 꺼져버렸네요.” 캄캄한 방바닥을 더듬으며 열쇠를 찾는 두 남녀. 예상대로 둘의 손이 부딪친다. 미미가 놀라고, 로돌포도 놀라는 척하지만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오, 그대의 손은 작고 차갑군요!”로 시작되는 아리아 ‘그대의 찬 손’을 노래한다.

    김동규는 1995년 이탈리아 베니스 오페라극장 등에서 남자 주인공 로돌프의 친구인 마르첼로 역으로 ‘라 보엠’ 무대에 여러 차례 올랐다. 그해 소프라노 홍혜경은 대서양 건너 메트로폴리탄에서 미미로 열연했다.

    “그 유명한 아리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자기가 우는 게 아니에요. 아디나가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시골 총각 네모리노가 마침내 사랑이 확인됐다며 순수하게 노래하는 거죠.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그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있잖아요. 상대방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홀로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아주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잘 끄집어내 시적으로 잘 표현했어요.”

    “Amami, Alfredo”

    바리톤 김동규의 오페라 이야기

    김동규는 증학생 때부터 오페라를 좋아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음성으로 널리 알려진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도니제티의 유쾌한 희극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아리아다. 오페라는 새침한 아가씨 아디나가 마을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바로 ‘사랑의 묘약’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신화다. 아디나를 짝사랑하는 네모리노는 마침 나타난 돌파리 약장수 둘카마라 박사로부터 사랑의 묘약을 구입한다. 네모리노가 전 재산과 바꾼 사랑의 묘약이 실은 값싼 포도주에 불과했다. 그런데 술에 취한 네모리노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아디나의 마음이 흔들린다. 네모리노가 숙부의 유산을 물려받게 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동네 아가씨들이 네모리노에게 추파를 던진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사랑의 묘약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믿는 네모리노는 사랑의 묘약을 한 병 더 사고 싶은 욕심에 급기야 돈을 받고 군대에 자원한다. 뒤늦게 네모리노의 진심을 안 아디나는 네모리노가 떠나버릴 것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그 모습을 우연히 본 네모리노가 부르는 아리아가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다. 멜로디가 서정적이어서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지만 기쁨의 노래다.

    ‘그녀의 눈에서 남몰래 흘러내린 저 눈물은 저 떠들썩했던 여자들을 향한 질투였던 것 같구나. 어째서 나는 그녀의 마음을 더 깊이 보지 못한 거지? 그녀는 나를 사랑해. 그렇고 말고. 그녀는 날 사랑한다고!’

    “오페라를 해보니 베르디가 위대한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정말 노래하기 편하게 만들어놨어요. 그러면서 어쩜 그렇게 맛있게 요리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을 고백하는 방식 하나도 측은지심이 절로 들 만큼 처절해요. ‘라 트라비아타’를 보세요. ‘알프레도, 나를 사랑해주세요’ 하는 간단한 얘기를 “Amami, Alfredo” 하면서 소프라노가 간절하게 노래하고 오케스트라의 트레몰로 현이 휘몰아치면서 빵 터지면 듣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어요. 그냥 ‘날 사랑해주세요’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감정을 자극하죠. 오죽하면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가사도 못 알아들으면서 눈물을 훌쩍거리며 봤겠어요.”

    ‘춘희’로도 알려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19세기 파리의 유명한 사교계 여성 비올레타와 번듯한 집안의 순수한 청년 알프레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대중적인 음악회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는 그 유명한 ‘축배의 노래’는 파티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노래로 주고받는 사랑의 줄다리기다. 사교계의 꽃인 비올레타는 늘 많은 사람 속에서 웃지만 지독한 외로움에 속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진심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알프레도. 마침내 두 사람은 파리 교외의 작은 시골집에서 함께 생활한다.

    행복도 잠시, 알프레도가 집을 비운 사이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등장한다. 알프레도의 누이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알프레도가 가족과 연락을 끊고 화류계 여성과 놀아난 게 알려지면 혼사가 깨질 거라며 비올레타에게 알프레도와 이별할 것을 당부한다. “알프레도, 나를 사랑해주세요” 하고 노래하는 대목은, 비올레타가 알프레도를 떠나기 전 알프레도를 안심시키기 위해 속으로는 울고 겉으로는 웃으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장면이다. 분위기를 한층 더 안타깝게 만드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마지막에 비올레타가 죽어가는 장면에서 다시 들려온다.

    “충청도 지주의 아들이 서울에 공부하러 왔다가 압구정동의 잘나가는 화류계 여성과 사랑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란 말이에요. 그러니 아버지가 올라와 여자에게 그만 헤어지라고 하는 거죠. 그런 얘기예요. 우리말 사투리로 해도 재미있지 않겠어요? 오페라는 아무런 기초 지식이 필요 없어요. TV 연속극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오히려 더 단순해요. 오페라는 아날로그 중에서도 앤티크니까요. 두세 시간 안에 작품을 완성하려면 등장인물이 많으면 안돼요. 등장인물의 한계가 분명하죠, 테너, 바리톤,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좀 더 나가면 베이스까지 주역이 많아야 네댓 명밖에 안돼요. 스토리가 복잡할 수가 없지요. 별것 아닌 이야기지만 아름다운 음악으로 표현을 극대화한 거예요. 여러 가지 양념으로 관객의 눈과 귀를 자극해 감정을 뒤흔들어놓는 거죠.”

    현실주의 오페라

    오페라가 모두 통속적인 줄거리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리스 신화나 고대 영웅담을 소재로 한 작품도 많다. 하지만 오페라를 처음 접할 때는 역사를 다루고 있거나 인물 중심의 작품보다 ‘라보엠’ ‘라 트라비아타’처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 중심의 작품이 낫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그러면서 오페라 ‘첫 경험’ 추천작으로 이탈리아 사실주의 걸작 ‘팔리아치’를 소개했다.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는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광대들의 이야기다. ‘팔리아치’는 이탈리아어로 ‘광대들’을 의미하며 단수형은 ‘팔리아초’다. 유랑극단의 단장 카니오와 그의 아내 넷다, 그리고 곱사등이 어릿광대 토니오는 무대 위에서 각각 어릿광대 팔리아초와 불륜에 빠진 그의 아내 콜롬비나, 그리고 하인 타데오를 연기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넷다가 실비오란 젊은이와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를 계획한다.

    토니오의 고자질로 이를 알게 된 카니오는 분노하지만, 쇼는 계속되어야 하므로 감정을 억누르고 막을 올린다. 그러나 극중 내연남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아내의 모습에 이성을 잃고 무대로 뛰어오르는 카니오. “그놈이 누구냐”고 다그치는 카니오의 모습에 관객들은 연기력이 대단하다며 열광한다. 광기에 휩싸인 카니오와 어떻게든 연극을 이어가려고 안간힘 쓰는 넷다. 카니오가 칼을 꺼내들고 위협하자 넷다도 연기를 포기하고 “당신이 날 죽인대도 말할 수 없다”며 반항한다. 그제야 객석이 술렁이고, 넷다가 도망치려는 순간 카니오는 넷다를 붙잡고 등에 칼을 꽂는다. 넷다를 외치며 달려오던 실비오도 카니오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19세기 말로 접어들면서 신화나 전설에 기반을 두고 있거나 영웅이 주인공인 오페라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페라에 담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연속극을 보다가 ‘어쩜 딱 내 얘기야’ 하면서 빠져들잖아요. 노래도 그렇고. 당시 사람들도 그런 것에 굶주려 있었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방식의 사랑, 빈부 격차, 젊은이의 야망, 청년의 순수함, 친구들의 우정, 사랑의 갈등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얘기예요. 오페라를 처음 경험할 때는 이런 얘기를 다룬 현실주의 오페라가 공감하기 쉽지요. ‘토스카’도 유명하지만, 시대 배경을 좀 알고 봐야 극에 몰입할 수 있어요. 로마교황청과 나폴레옹 군대가 대립하는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경찰 고위간부인 스카르피아가 나폴레옹의 스파이들을 쥐 잡듯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지요. 먼저 배경지식이 필요 없는 작품들로 오페라의 재미를 편하게 맛본 다음에 ‘토스카’를 보면 더 흥미로울 거예요.”

    성부와 캐릭터

    바리톤 김동규의 오페라 이야기

    “노래와 연기의 폭이 넓어 좋다”고 바리톤 예찬론을 펴는 김동규.

    김동규는 바리톤이다. 길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의 60~70%는 “테너 김동규다”며 반가움을 표시한다. “바리톤 김동규다”라고 정확하게 불러주는 사람은 20~30%. 정말 그럴까 싶지만 열 명 중 한 명은 “소프라노다”라고 한다는데, 그는 꼭 ‘바리톤 김동규’라고 알려준다. 그러면 “어쨌든 성악을 하는 사람 맞지 않으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지만, 그는 다시 “그렇긴 해도 테너는 높은 음을 내는 사람이고, 바리톤은 중간 음을 내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파바로티나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는 모두 테너이고, 조수미 신영옥 홍혜경은 소프라노다.

    그는 성악가들의 음성에 따른 전형적인 캐릭터를 알아두면 오페라를 쉽고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오페라에는 테너, 소프라노, 바리톤, 메조소프라노 등 다양한 성부의 성악가들이 출연하는데, 각 성부는 음의 높낮이가 다를 뿐 아니라 주로 연기하는 배역의 성격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제가 오페라 작곡가라면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오페라로 만들겠어요. 등장인물들이 각 성부의 특색과 아주 잘 들어맞거든요. 주인공 막시무스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좋은 사람이에요. 전형적인 테너지요. 반면 막시무스를 질시하는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는 바리톤이 적격이에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캐릭터지요. 기회주의적이고요.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 극이 전개되는 거예요. 테너는 누구 앞이건 간에 일단 내질렀을 때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무아지경의 소리가 나야 해요. 소리 하나로 승부를 내야 하죠. 무대에 섰을 때 감정적으로 폭발할 수 있어야 해요. 반면 바리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로 승부를 내지 않아요. 캐릭터가 강한 역을 주로 맡기 때문에 연기의 비중이 높죠. 착하고 순수한 여인은 소프라노예요. ‘글래디에이터’로 보면 역할은 비록 작지만 막시무스의 아내가 되겠죠. 막시무스를 사랑하지만 권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코모두스의 누이 루실라는 전형적인 메조소프라노예요.”

    노래하는 음이 높을수록 캐릭터가 단순하고, 저음일수록 폭넓은 연기력이 필요하다. 테너는 오페라에서 오직 정열로 세상을 사는 사람, 그래서 ‘열 받으면’ ‘한판 붙자’고 달려들어 일을 내고야 마는 캐릭터이고, 바리톤은 말이 앞서고 절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바리톤이 나쁜 역할을 도맡아요. 물론 예외는 있어요. ‘세비야의 이발사’ 같은 희극 오페라에서는 코믹한 역을 맡으니까요. 하지만 대체로 테너는 우직한 반면 바리톤은 음모와 계략에 능하죠. 소프라노는 자주 사랑에 상처를 입지만 메조소프라노는 자유연애를 즐기고 남자를 유혹해요. 이간질도 하고….”

    카르멘은 메조소프라노

    ‘토스카’는 테너와 바리톤의 성격적 대립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화가 카바라도시는 교황 추종세력에 타협하지 않고 나폴레옹의 스파이를 돕는다. 반면 출세가도를 달리는 고위 경찰 스카르피아는 카바라도시와 그가 숨겨준 안젤로티를 붙잡아 처단하기 위해 비열한 방법을 동원한다. 카바라도시의 연인 토스카는 스카르피아의 유혹과 협박에도 카바라도시를 향한 일편단심을 바꾸지 않는다. 카바라도시는 테너, 스카르피아는 바리톤, 토스카는 소프라노임을 알 수 있다.

    “‘카르멘’에서 카르멘은 메조소프라노의 전형이에요. 좋지 않은 여자죠. 자유연애를 즐긴다지만 날라리죠. 순수한 테너 돈 호세.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고 카르멘을 따라 집시 소굴로 들어가잖아요. 결국 참담한 결말을 맞고 말죠. 에스카미요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카르멘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는 돈 호세에게도 흥분하지 않고 ‘쿨’하게 굴잖아요. 바리톤이죠. 돈 호세의 약혼녀인 청순한 미카엘라는 소프라노이고….”

    그의 설명을 듣고 보니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인물의 성격에 따라 성악가들의 성부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주역을 맞는 성부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라 보엠’의 로돌포는 테너, 미미는 소프라노다.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는 소프라노, 알프레도는 테너, 아버지 제르몽은 바리톤이다. ‘사랑의 묘약’의 아디나는 소프라노, 네모리노는 테너이고, ‘팔리아치’의 카니오는 테너, 넷다는 소프라노, 곱사등이 광대 토니오는 바리톤이다. 남녀주인공은 거의 테너와 소프라노가 맡고, 유명한 아리아도 그들이 부른다. 그는 왜 바리톤이 되었을까?

    “그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제 성대가 바리톤으로 타고난 거죠.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구나 테너를 하려고 하겠죠. 돈도 많이 벌고 빨리 유명해지니까. 바리톤은 노래와 연기의 폭이 넓어서 좋아요. 목소리 때문에 노심초사하면서 살지 않아도 되고요.”

    그는 바리톤의 성대를 가졌다는 데 아쉬운 점은 없지만, 바리톤이라서 “푸치니에게 한이 맺혔다”고 말한다.

    “푸치니는 베이스와 메조소프라노의 아리아를 하나도 안 썼어요. 저음 가수들은 푸치니가 원망스럽죠. ‘토스카’ ‘나비부인’에 출연은 하지만 아리아가 없어요. 아리아는 한마디로 독무대예요. 3시간 공연 중에 바리톤 김동규라는 가수가 혼자 무대를 장악하고 노래하는 거예요. 관객은 아리아에 열광하지요.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도 모두 아리아고. 오페라에 출연하는 성악가에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독무대가 없다는 건 맥 빠지는 일이죠. 푸치니의 작품에서 딱 떨어진 아리아가 없는 건 바리톤도 마찬가지예요. ‘라 보엠’의 마르첼로를 수차례 연기했지만 아리아는 없어요. 한이 맺히죠. 푸치니가 테너와 소프라노를 위해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들을 만들면서 왜 바리톤 아리아는 작곡을 안 했는지 원망스럽죠. 그게 현실이에요.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캐릭터이지만 독무대는 허락되지 않으니 미칠 노릇이죠.”

    ‘여자의 마음’

    그는 베르디의 비극 ‘리골레토’의 곱사등이 리골레토를 맡아 여러 차례 무대에 섰다. 바리톤 리골레토는 4시간 동안 거의 쉼 없이 노래하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만토바 공작이 부르는 테너 아리아 ‘여자의 마음’이다. “La donna ? mobile qual piuma al vento(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이리저리로 흔들리지)”로 시작하는 이 아리아는 전자제품 판매점 광고에서 “시간 좀 내주오 갈 데가 있소”로 가사를 바꿔 불렀을 정도로 멜로디가 귀에 익었다. 베르디의 오페라에는 바리톤의 아리아가 있지만 대중이 기억할 만한 ‘히트곡’이 없다는 점에서 테너가 아닌 바리톤은 또 ‘열 받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는 베르디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도 베르디의 ‘오텔로’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원작으로 한 ‘오텔로’는 질투에 사로잡힌 한 영웅의 몰락을 그린 대작이다. 이 작품에서 바리톤 이아고는 높은 지위와 아름다운 아내 데스데모나까지 모든 것을 가진 남자 오텔로를 파멸로 치닫게 하는 간교한 인물이다.

    “‘오텔로’가 좋아요. 내가 악해서 그런가? 구성이 참 잘 되어 있어요. 베르디에 찬사를 보내고 싶은 작품이죠. 앞으로는 코믹한 작품도 많이 해보고 싶어요.”

    바리톤 김동규의 오페라 이야기

    “결혼생활을 할 때는 하루하루가 소중한 줄 몰랐다”고 후회하는 김동규.

    그를 만나기 전 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던 중 우연히 1996년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를 발견했다. 인터뷰 당시 그는 2년 뒤인 1998년 스케줄을 잡고 있을 정도로 유럽에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인터뷰도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뤄졌다. 인상적인 것은 미국 진출 의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앞으로 20∼30년간 유럽에서 활동할 작정”이라고 밝힌 대목이다. “오페라만은 유럽이 세계 중심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데서 젊은 성악가의 패기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 인터뷰가 있은 후 15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그가 유럽에 있지 않다는 게 의아했다. 그가 베이스캠프를 유럽에서 한국으로 옮긴 걸로 따지면 유럽에서 활동한 기간은 훨씬 더 짧아진다. 오페라의 중심 유럽에서 실력을 인정받기 위해 91년부터 10여 개국을 돌아다니며 오디션을 치르느라 수시로 코피를 쏟았던 그가 아닌가.

    “당연히 그렇게(20~30년간 유럽에서 활동) 했어야죠. 그런데 꿈이 깨지더라고요. 세계적인 무대를 누비며 활동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무거웠어요. 내가 꿈꿔온 게 호텔방 생활하는 거였나 싶고, 나의 개인적인 삶은 어떻게 되는 건가, 이렇게 늙을 생각을 하니 암담하더라고요. 한국에 초청공연을 자주 오고 또 이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굉장해서 베이스캠프를 한국으로 옮기자고 결심했지요.”

    실패한 결혼생활 반성

    그는 10년 전쯤 이혼했다. 귀국을 결심한 것도 그 무렵이다. 일생의 꿈이 거의 다 이뤄졌다고 생각됐을 때 결혼생활을 실패로 매듭짓고 아내, 아들과 헤어져 혼자 돌아온 그는 1년 가까이 노래를 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란 노래다.

    “어느 날 김기덕 국장(MBC 라디오 ‘골든디스크’ 진행자, 2006년 MBC 라디오본부 국장직을 끝으로 정년퇴직)이 찾아오셔서 크로스오버 앨범을 만들어보자고 하셨어요. 그땐 정말 그걸로 인기를 얻겠다거나 돈을 벌어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우울증이 있을 때라 그저 다시 짚고 일어설 게 필요하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앨범 이름도 ‘Detour(우회)’예요.”

    ‘Detour’에 들어 있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는 뉴에이지 그룹 ‘시크릿가든’의 ‘Serenade to Spring’에 우리말로 가사를 붙인 것이다. 그가 유독 가을을 좋아해 봄노래를 가을에 맞게 바꿔 불렀다는데, ‘너를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란 가사 때문인지 계절에 상관없이 축가로 많이 불리고, 생일잔치, 돌잔치에서 배경으로 틀어놓을 만큼 히트곡이 됐다. 세계적인 무대를 누볐지만 정작 유명한 바리톤 아리아가 없어 아쉬워하던 그에게 절망의 늪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만든 앨범이 ‘히트곡’을 만들어줬으니 이런 걸 두고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나보다.

    “외국 공연을 계속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의 삶에 아쉬울 것 없어요. 한국에 있으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삶이 또 열리더라고요.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하면서 청취자들과 만나고, 한국에서 공연하면서 나를 사랑하는 관객들과 만나는 게 행복해요. 외국 무대에 설 때는 늘 수험생 기분이었어요. 관객들은 제가 노래하고 난 다음에 박수를 쳐요. 어디 한번 들어보자 했다가 생각보다 괜찮네 하고 박수 쳐주는 거예요. 한국에서 공연하면 제가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당신을 보러 왔어요’ 하는 박수가 쏟아져요. 소리가 달라요. 지금 제 앞에 주어진 일이 가장 소중하죠.”

    이혼한 지 10년, 계속 혼자 살 생각이냐는 물음에 그는 “집안이 휑하지 않게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말했다. 10년 세월을 혼자 보내면서, 그리고 라디오 청취자들의 소소한 사연을 접하면서 결혼 생활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다.

    “엑스와이프와 제 아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하고 싶어요. 가정이 있을 때 못한 것에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반성하고 있다고. 제가 속이 좁았지요. 사소한 것으로 많이 다투고. 많은 남자가 그럴 거예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오만하게 굴었는지. 나이를 먹어서 좋은 건 지난날에 대해 이렇게 반성할 수 있다는 거죠. 하루하루가 모여서 평생이 되는 건데, 결혼생활을 할 때는 그 하루하루가 소중한 줄 몰랐어요. 막연히 결혼생활은 이래야 한다는 것만 있었지. 엑스와이프가 이 기사를 읽는다면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그는 오늘도 라디오부스에서 아내의 생일을 축하해달라는 남편, 남편이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달라는 아내의 사연을 읽으며 사람 사는 게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지지고 볶을 걸 알면서도 결혼을 하고, 다투고 화해하며 가정을 꾸려가는 데는 그만한 가치와 행복이 있기 때문이라고 깨닫는다. 운명적으로 다시 기회가 찾아오길 기대하면서. 그게 삶이고 오페라니까.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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