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여배우는 아직까지 ‘톱’이었던 적이 없다. 본인은 서운할지 모르지만, 데뷔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 정점을 찍지 못한 미완성의 여배우다. TV에서나 영화에서나, 이정표가 되는 흥행대작의 주연이었던 적이 없는 탓이다. 그럼에도 많은 대중의 뇌리에 배우 추자현의 이미지는 명료하게 각인되어 있고, 스스로 뿜어내는 카리스마도 강하게 느껴진다. 대체 왜일까?
실제로 그녀에게선 굵은 선이 느껴졌고 섬세하게 균형 잡힌 아름다움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때론 보이시하게, 때론 거침없이 노출하는 두 얼굴의 여배우가 눈앞에 오롯이 마주 앉자 약간은 환상적인 분위기마저 풍겼다.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도도했다.
여신의 컴백
▼ 최근 언론에서 추자현씨에 대해 6년 만의 브라운관 복귀라고 떠들던데, 스스로는 어떤 느낌이에요?
“2004년 방영된 ‘오 필승! 봉순영’ 때부터 따지면 그렇게 됐네요. 이번에 박봉성 작가의 만화가 원작인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이하 신불사)’에 출연하면서 다들 오래간만의 컴백이라고 생각하시나봐요. 하지만 2005년 영화 ‘사생결단’에 출연한 이래 ‘미인도’‘실종’ 등에 출연하며 연기를 쉬지 않았기 때문에 저 스스로는 특별히 복귀다 컴백이다 하는 새삼스러움은 없어요. 저의 필모그래피가 그래왔듯 이번에도 주연급은 아니고요.(웃음)”
▼ 그 점이 너무 신기해요. 2009년 문제작 ‘실종’에서 주연을 맡은 것을 빼고는 대부분 조연이었는데, 추자현씨는 선이 굵은 스타급 카리스마로 비춰진단 말입니다. 한마디로 존재감이 있는 배우죠. 비결이 뭔가요?
“비결이라고까지 얘기할 특별한 요령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웃음) 제 나이에 비해 나름 짧지 않게 연기생활을 해오다보니 노하우나 테크닉이 생겼다고 할까요? 사실 전 애드리브가 없는 배우예요. 감독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콘티에 따라 충실하게 응하는 배우죠. 하지만 주연이건 조연이건 혹은 단역이건 제가 맡은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내면에서부터 임팩트를 끌어올리려고 노력합니다. 때론 연출이 위험하다고 말리는 과격연기도 제가 제안해서 실행하기도 하죠. 작품이 공개되고 관객에게서 ‘그런 노력이 먹히는구나’라고 느낄 때 연기자로서 뿌듯한 쾌감을 느껴요.”
연기론
▼ 이번 ‘신불사’에서도 한 방 날리셨나요?
“아직 본격적인 촬영은 시작되지 않았어요. 남매인 줄도 모르고 사건에 엮이는, 주인공 송일국씨의 어릴 때 헤어진 여동생역인데요. 전 4회부터 출연해요. 한번 촬영이 있었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갔더니 하필 액션신인 거예요. 폐차장에서 싸우는데 연출자님도 무리하지 말고 살살 하라고 걱정하시더라고요. 그림이 어떤 것이 좋을까 물었더니 ‘그야 자동차 위에 올라가서 발차기하는 게 그림이 좋긴 한데…’하고 말을 흐리시더라고요. 저 나름 노련하거든요. ‘그럼 올라가겠습니다’ 하고 기름이 미끌미끌한 차 지붕에 올라가서 발차고 구르고 그랬죠. 전 대충하는 거 싫어해요.”
▼ 흥행이 잘 되었던 아니던 그간 맡은 배역마다 지금 얘기하신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추자현만의 연기론을 풀어준다면?
“없어요! 그러고보니 굉장히 놀랐던 일이 있어요. 어느 대학의 연기과 학생들이 ‘추자현 연기론’을 주제로 세미나를 한다는 거예요. 후배들이 저만의 연기론을 물어왔을 때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난 먹고살기 위해 연기한다’라고 말해줬어요. 사실이 그렇고. 배우는 안정적이고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직업이 아니잖아요. 작품마다 선택받아야 하는 일이고요. 열심히 안 하면 누가 저를 다시 찾아주고 어떻게 제가 생계를 이을 수 있겠어요? 이 비슷한 얘기를 무릎팍도사에 나온 윤여정 선배님의 고백에서 들은 적이 있어요. ‘바람난 가족’이라는 영화에서 어떻게 베드신을 할 결심을 했느냐는 아주 심각한 질문에 윤 선배님이 뭐라 했는지 아세요? ‘그때 마침 돈이 필요했다. 절박해서 한거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절박하면 어떤 기회든 열심히 잡게 되죠. 전 100% 공감해요.”
▼ 노력만으로 빛나기는 사실 쉽지 않은데요. 천성과 재능이 결합되지 않는다면 말이죠.
“드라마에서 보이시한 터프걸이나 코믹한 역을 주로 하다가 영화 ‘사생결단’에 캐스팅될 때가 생각나네요. 황정민 선배와 류승범씨가 나온다는 얘기만 듣고 무조건 해야겠다 생각했죠. 최호 감독님을 만나러 갈 때 저는 이미 캐스팅된 걸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오디션 자리였어요. 전 그때까지 어떤 작품도 오디션을 본 경험이 없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대본을 주면서 읽어보라는 거예요. 속으로는 ‘어? 뭐지?’하면서도 직감적으로 사태파악을 했죠. 그래서 바퀴벌레가 나오는 대목을 즉석에서 골라서 즉흥적으로 저만의 무대를 만들었어요. 아주 더러운 카펫이었는데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털썩 주저앉아 대본도 안 보고 몰입하니까 감독님이 좀 놀라시더군요. 실제 영화 찍을 때도 정말 미친년처럼 연기했어요.(웃음) 감독님이 물으시더군요. 대본 속의 이 여자는 어떤 인물인 것 같으냐고. 전 ‘이년은 정말 의리 있는 년이다’라고 대답했지요. 다음날 함께 하자는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된 거예요.”
▼ 연기생활을 꽤 했는데 영화 ‘사생결단’으로 상복이 터졌죠?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비롯해서 대한민국 영화대상 신인여우상, 여우조연상과 평론가상, 디렉터스 컷상을 휩쓸었잖아요? 마약중독자 역이었는데….
“사실 나를 만들어준 영화죠. 찍는 동안 너무 힘들었어요. 전체 4개월 촬영 중 절반인 두 달 동안 제 역이 있었죠. 정말 마약만 안 했다뿐이지 실제 마약중독에 걸린 듯 몽롱한 채로요.”
▼ 마치 캐릭터에 빙의된 듯….
“맞아요. 정말 그랬어요. 그리고 촬영을 마친 날이 1월20일이었는데 마지막 신 찍고 나자마자 짐 싸들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어요. 바로 공항으로 가서 중국으로 날았죠.(웃음)”
이 대목에서 떠오른 것이 있었다. ‘사생결단’의 촬영을 마쳤다는 1월20일은 추자현의 생일이 아니던가? “생일이었네요?”라고 묻자 “아! 어떻게 아세요? 정말 감사해요” 하고 추자현은 기뻐했다. 기념일을 축하해주는 것이 여인의 마음을 훔치는 지름길임이 또 한번 증명됐다. 나름 뿌듯해하며 “정말 팬이라니까요”라는 강조말도 내뱉었다. 이런 모습이 아주 조금은, 저질 인터뷰어처럼 보였겠지만 기분은 좋았다.
이중생활
당시 추자현은 중국으로 날아가 한 달여를 중국 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놀고, 노래방과 가라오케를 다니며 생활인으로 회포를 풀었단다. 귀국하는 비행기에 올라서야 “편집은 잘 됐을까, 홍보일정은 어떻게 짰나, 흥행이 어떨까” 하는 고민을 했다고.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시 프로 직업인의 마인드로 돌아온 것”이다.
▼ 스트레스가 많은 일이니 일견 이해는 가네요.
“전 일과 생활의 구분이 뚜렷한 편이에요. 일이 없는 날은 일주일에 사흘씩 집에만 있으면서 그날그날 자신의 느낌에 충실하게 살아요.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은 멜랑콜리? 음악도 안 틀고 빗소리 듣는 것을 좋아하죠. 이런 느낌이구나 하면서요. 그 기억을 나중에 연기할 때 써먹을지 모르니 잘 저장해두려고 노력해요. 좀 몽상가적인 성격이랄까, 감성적인 부분이 많죠.”
▼ 그렇다면 생활인 추자현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하. 이런 거까지 밝혀야 하나? 집에 있는데 친구가 놀러오겠다고 연락 왔어요. 전 아무 생각 없이 까먹던 새우깡 들고, 슬리퍼 끌며 아파트 밖 길까지 마중 나갔죠. 친구가 좀 늦는 거예요. 그래서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과자 먹으며 기다렸죠. 행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이런 게 제 모습이죠. 너무 꾸미는 게 없어서 매니저한테 구박도 자주 받는데….”
이 대목에서 매니저가 인터뷰에 슬며시 끼어들었다. “자현이 넌 너무 안 꾸며! 스타의식을 좀 가져야 된다니까. 우리 집 애들(매니지먼트하고 있는 배우들)은 왜 다 이럴까.”
▼ 철저한 이중생활, 그러니까 다중인격이시네요?
“네, 인정해요. 그런 면에서 복잡한 성격인 것 같아요.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죠. 평상시의 저는 굉장히 털털하고 평범하고 싶어 해요. 특별함 속의 평범함, 평범함 속의 특별함이랄까? 이게 제 인생 나름의 생각이고 목표지요. 작품 속에서는 배우이고 모델이지만 일상에서는 그냥 인간 추자현. 친구들과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며 즐거워 할 수 있는, 이런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저도 알게 된 거죠. 서른이 넘어가니까. 이 두 경계를 잘 넘나들고 싶어요. 한쪽만 알면 다른 쪽의 행복을 모르니까요.”
그녀는 이런 철저한 이중성의 신념과 관련해 중요한 사례를 하나 들었다. 그녀의 얘기를 그대로 옮긴다.
“예를 들어, 여배우의 노출 같은 것은 몽상가적인 성격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죠. 내 남편, 내 남자친구가 아닌 남자와 격렬한 사랑을 표현하는 연기가 현실적인 성격에서 나오겠어요? 하지만 그런 성격만 있다면, 그래서 빨리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얼마나 힘들까요? 그걸 조절하지 못하면 우울하게 되요. 실제로 그런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여배우가 많고요.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제는 자신을 컨트롤하는 법을 좀 배웠다고 할 수 있죠.”(웃음)
미래의 키워드
▼ 끝으로 추자현을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를 하나 들어주세요.
“오늘 인터뷰 중 가장 고민스러운 질문이네요. 사실 요즘 그것 때문에 고민이에요. 지금까지는 명확했어요. 믿음과 의리. 이것만 있으면 나는 이겨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다양한 인간관계를 경험하다보니 흔들려요. 과연 믿음과 의리가 지켜질 수 있을까? 사람들이 변해가고 세상이 변해가고 나도 따라서 변해가는데 말이죠. 그래서 요즘엔 다 내려놓으려 해요. 굳이 어떤 신조를 붙들지 않고 그냥 기대해요. 미래를 기대합니다. 내게 다가올 도전들과 내가 부딪쳐나갈 상황들이 정말 기다려져요. 미래에 대한 기대, 이것이 지금의 키워드예요.”
▼ 여배우로서의 비전, 어떤 걸 기대해요?
“그것조차 알 수 없어요. 훗날 제가 여배우로 경력을 이어나갈지 어느 날 훌쩍 떠날지, 혹은 어디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할 지, 공부를 할지 지금은 단정 짓고 싶지 않아요. 그냥 아까 말한 직업배우로서 주어진 일들에 충실할 뿐이죠.”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추자현이 점점 무르익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여고시절 트렌드잡지의 표지모델로 길거리 캐스팅되어 그저 평일 조퇴할 수 있는 것이 좋아서 시작한 배우생활. 교복차림에 쭈쭈바를 쭉쭉 빨며 스튜디오로 향하던 소녀, 열여섯 나이에 이미 방송에 데뷔했음에도 일반 대학생으로 돌아가 학교에 다니다가 2002년 드라마 ‘카이스트’에 전격 투입되어 불시에 시청자를 사로잡았던 그녀. 미소년 이미지를 풍기며 잠깐의 등장에도 강한 인상을 남긴 연기파 배우. ‘미인도’에서 기생연기를 위해 조선풍속사를 뒤지고 기생의 삶을 연구해 한 장면에 내면을 담아나가던 성숙한 여배우의 모습 등이 시간을 거스르듯, 파노라마가 돌아가듯 하나의 장면처럼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추자현과의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저녁식사로 이어졌다. 고픈 배를 채우고 생맥주의 시원함을 즐기며 지면에는 다 담을 수 없는 친밀한 대화가 한참동안 오갔다. 대화 도중 추자현은 “모두 즐겁고 행복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그래서일까요? 다음날 아침이면 공허해요”라고 토로했다. 그래서 약속을 하나 했다. ‘내일 아침엔 공허하지 말자’고. 6시간의 데이트는 그렇게 끝이 났다.
기자는 봄날의 밤길을 걸으며 스타 추자현보다 더 아름다운 인간 추자현을 발견한 즐거움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그녀의 미래는 그녀 자신보다 팬들에게 더 기대된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