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인임에도 ‘현대’란 말이 붙은 예술장르는 난해하다. 현대소설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고, 현대미술은 이게 작품인가 싶을 때가 있다. 현대음악도 마찬가지다. 듣는 것 자체가 곤욕일 때도 있다. 모차르트 음악 역시 바흐 음악에 익숙한 사람들로부터 ‘가볍고 과장됐다’는 혹평을 받았다. 위대한 전통을 만들어낸 사람들도 처음엔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왼쪽) 작곡가 에드가 바레즈 (오른쪽) 모차르트
20세기에는 각 악기의 새로운 연주법들이 두각을 나타낸다. 현악기에서 줄을 활로 긋지 않고 활대로 때리는 ‘콜레뇨’ 기법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많이 사용된 건 20세기에 들어선 이후다. 헝가리 작곡가 바르톡은 줄을 아주 세게 잡아 뜯어서 ‘탁’ 소리가 나게 했고, 그것은 결국 ‘바르톡 피치카토’라고 불렸다. 관악기를 혀를 입천장에 대고 호루라기처럼 떨어서 소리를 내기도 한다. 피아노는 건반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있는 줄을 건드려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악기뿐만이 아니다. 사람의 목소리, 즉 성악도 독특한 발음과 발성이 음악에 반영됐다. 이렇게 작곡가들은 전통적인 악기들이 낼 수 있는 소리의 한계를 넘어섰다.
미국의 작곡가 헨리 카웰(Henry Cowell)은 독특한 피아노 주법으로 유명하다. ‘에올리안 하프’라는 곡은 하프곡이 아니라 피아노곡인데, 뚜껑을 열고 줄을 두드리며 연주한다. ‘밴시’라는 작품에서도 피아노줄을 사용하는데, 이번에는 구둣주걱 같은 것으로 문질러 공포영화 분위기를 자아낸다. 밴시(banshee)는 켈트족의 전설에 등장하는 유령의 이름이다. 구슬픈 울음소리로 가족 중 한 명이 곧 죽게 될 것임을 알리는 여자 유령이다.
여자 유령의 구슬픈 울음소리
가전제품회사로 잘 알려진 필립스도 현대음악 발전에 한몫한 적이 있다. 필립스는 미래지향적인 회사 이미지를 위해 전위적인 형태의 건물을 지으려고 했다. 예술 건축을 아무에게나 부탁할 수는 없어 그 유명한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에게 의뢰했다. 마침내 르 코르뷔지에가 파빌리온이라고 명명된 이 건물을 디자인하고 성대한 준공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준공식에서 울려 퍼질 음악을 맡아줄 작곡가를 선정하는 일이 남았다. 미래지향적인 건물의 준공식인 만큼 전위적인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이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에 현대음악 작곡가인 에드가 바레즈에게 의뢰했다.
바레즈의 ‘전자시대의 시(Poeme Electronique)’라는 작품은 이렇게 탄생했다. 400개의 확성기를 통해 종소리와 삑삑대는 고주파소리, 전자음으로 만들어진 삐걱거리는 소리,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 그리고 그레고리안 성가인지 원주민 부족의 노래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이상한 톤으로 중얼거리는 소녀의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음악을 듣고 르 코르뷔지에는 같은 예술가로서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필립스 측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후배들보다 더 전위적이었던 바레즈는 이 일로 더 유명해졌다.
클래식음악의 역사는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가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다 19세기 중반에 러시아가 낭만음악의 바통을 이어받았고, 체코에서 드보르작과 말러 같은 위대한 음악가를 탄생시키기도 했지만 근대음악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끌어간다. 20세기가 되자 훨씬 다양한 나라들이 클래식음악사에 동참한다. 브라질의 에이토르 빌라로보스(Heitor Villa-lobos)는 관악을 포함한 실내악, 관현악, 성악곡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에서 자국의 음악을 현대성의 경지에 올려놓았다. ‘브라질풍의 바흐(Bachianas brasileiras)’는 바흐의 작품을 아름답게 편곡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현대음악가라 다른 작품에서는 매우 전위적이다. 하지만 대중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고 전통과 전위를 잘 혼합한 작품을 내놓았다.
‘헬리콥터 사중주’
작곡가 필립 글래스.
철학의 나라 그리스에서도 작곡가가 탄생했다.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의 주 관심분야는 수학과 물리학이었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이러한 규칙들이 적용된다. 수학적인 그래프에서 돌출된 계산값을 리듬과 음표로 바꾸어 악보를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이러한 정확성은 컴퓨터가 연주하면 편할지 모르지만, 사람이 연주하기에는 매우 까다롭다. 크세나키스는 현대음악의 큰 트렌드이기도 한 우연적인 음악을 반대했다. 어떠한 우연적인 소리도 작곡가가 미리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수학자답다. 헝가리 작곡가 리게티(Gyrgy Ligeti)는 음향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리게티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가 사용한 ‘톤 클러스터’는 음정의 집합체다. ‘도’나 ‘레’같은 특정한 음이 아니라 근처의 음까지 한꺼번에 연주하는 것이다. 이것을 피아노로 연주하면 손가락이 아닌 주먹으로 누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악보에 적힌 음들을 다시 여러 사람이 나누어 연주하면 매우 독특한 음향이 만들어진다. 리게티의 현악사중주 1번 ‘야상적 변용(Metamorphosis Nocturnes)’은 톤 클러스터를 네 명이 나누어 연주하고, 손가락을 줄에 대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우주의 신비 같은 것을 표현하는 멋진 작품이다.
수많은 현대음악가 중 이름이 독특해 기억하기 쉬운 사람이 있다. 노노(Luigi Nono)도 그중 한 사람인데, 그는 음악이 점점 더 소수를 위한 것으로 변질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음악에 시장에서 나는 소음과 공장에서 들리는 둔탁한 음향을 사용해 대중의식을 대변했다. 문제는 이 또한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음악이라는 것이지만, 아무튼 그는 엘리트주의를 반대했다. 그는 위대한 현대음악의 아버지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hon-berg)의 딸과 결혼했다.
이번엔 정말 충격적인 작품이다.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이 작곡한 ‘헬리콥터 사중주’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곡은 네 명의 현악기 연주자가 헬기 안에 들어가서 연주한다. 그 커다란 첼로 연주가 가능할까? 헬기 한 대당 연주자 한 명이 들어간다. 모두 네 대의 헬기가 필요하다.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연주해야 한다. 헬기가 멈춘 상태에서 프로펠러만 돌리는 게 아니라 비행 중인 헬기에서 연주해야 한다! 상공을 날아다니며 연주해야 하니 연주자는 헤드폰을 착용하고 다른 연주자의 소리를 듣는다. 그렇다면 관람자는? 근처에 마련된 극장에서 영상으로 연주자들의 모습을 본다. 실제로 이 공연을 보기는 정말 어렵다. 제작비가 엄청나게 들고, 관객으로서는 매우 번거롭다. 하지만 요즘은 시대가 좋아졌다. ‘유튜브’에서 이 공연의 동영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현대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귀중한 자료다.
세계대전의 영향
두 번의 세계대전은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 중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작곡을 했다. 클라리넷주자와 바이올린, 줄이 끊어진 첼로, 조율이 안 된 피아노가 전부인 상황이었지만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가 수용소에서 연주됐을 때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폴란드 작곡가 크시슈토프펜데레츠키(Krzysztof Penderecki)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히로시마의 희생자를 위한 애가’를 작곡했다. 원자폭탄 투하로 가장 비인간적인 전쟁의 종결을 가져온 역사로 기록된 당시 히로시마의 사진들을 보면, 섬뜩한 비명 같은 현대음악이 그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느낌이 든다.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곳곳의 공연장이 무너졌다. 음악감상이라는 행위는 전후(戰後)의 재건 분위기에서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하지만 라디오방송이 남아 있었다. 국가가 운영하는 라디오방송은 전위적인 현대음악가들의 음악을 틀어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수많은 작곡가가 자신의 곡을 알리는 데 이를 활용했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유럽의 전통음악에 대항해 예술적인 가치를 높이기 위해 현대음악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기술과 새로운 아이디어의 집약체인 현대음악은 미국에서 크게 발전했다.
전자공학과 현대음악의 발전
1947년 커다란 방 안을 꽉 채운 기계들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의 가로등이 깜빡일 정도로 많은 전력을 소비한 이 괴물 같은 기계의 기능은 ‘계산’이었다. 전쟁에 사용될 대포의 탄도를 계산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나중엔 수학 연구나 일기예보를 위해서도 사용됐다. 최초의 컴퓨터라고 알려진 에니악(ENIAC)이다. ‘아타나소프 베리’라는 컴퓨터가 에니악보다 먼저 개발됐다고 밝혀졌지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에니악이 최초라고 각인되어 있다. 에니악이 작동을 시작한 지 1년 후, 기존의 레코드판보다 재생시간이 더 길어진 ‘LP’가 등장한다. 마침내 30분 정도 되는 클래식음악을 한쪽 면에 담을 수 있어 사람들은 음악을 더 편리하고 쉽게 접하게 된다. 최초로 LP에 녹음된 곡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멕시코의 한 술집에 기타 케이스를 든 사람이 들어간다. 갱단이 지배하고 있는 이 마을 분위기답게 식당 안에 있던 손님과 주인 모두 긴장한다. 이방인이 주인에게 술을 시키며 묻는다. “연주자가 필요하십니까? 저는 마리아치(악사)입니다. 전 친구들도 있고 밴드를 연주할 수 있습니다. 저를 채용하세요.” 주인이 대답한다. “밴드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한 명의 마리아치가 있고, 그가 밴드요 오케스트라입니다.” 주인이 신호하자 산초 모자를 쓴 사람이 뭔가 커다란 것을 들고 나온다. 신시사이저다. 그는 쿵짝거리는 반주를 틀더니 유치한 음악을 연주하며 좋아한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처녀작 ‘엘 마리아치’는 이렇게 스릴러 액션 영화에서 코미디로 분위기를 바꾼다. 영화에서처럼 연주자들의 밥줄을 끊어놓은 것이 신시사이저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곡가들에게는 큰 기회였다.
빅터레코드사로 알려진 RCA에서 개발한 신시사이저는 방 하나를 가득 채울 만큼 큰 기계였다. 주파수를 조절해 소리를 냈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휴대할 수 있을 정도로 크기로 작아지고, 직접 무대에서 공연할 수도 있게 됐다. 미리 준비된 음악은 기존에 사용되던 커다란 릴 테이프가 아니라, 그것의 축소판 격인 카세트라는 작은 상자에 담을 수 있었다. 전통악기들과 함께 연주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한 진보였다. 에드가 바레즈는 “음악을 한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전자공학을 기다려왔다”고 말했다.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 해마다 열리는 현대음악제는 수많은 전위음악가의 데뷔무대다.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도 이 음악제를 통해 데뷔했다. 그는 요제프 보이스나 존 케이지, 백남준 같은 전위예술가들과 만나기도 했는데, 그들과 다른 방향을 택했다. 다른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12음 음렬기법을 사용했지만 동양적인 철학과 사상을 접목시키고, 그것을 서양악기로 표현했다. 현대음악제에서 연주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세계인의 주목을 끌면서 윤이상은 최고의 음악가로 성장했다.
“쉼표도 음악이다”
한편 존 케이지(John Cage)는 ‘4분33초’ 같은 새로운 음악을 발표했다. ‘4분33초’를 음악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이 곡은 사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피아노 연주자가 무대에 등장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퇴장한다. 이 곡의 초연 당시 4분33초를 연주(?)했기 때문에 이 같은 제목이 붙었다. 어릴 때 음악선생님이 노래를 급하게 부르는 아이들에게 “쉼표도 음악이야”라고 지적하셨는데, 존 케이지의 작품을 보면 그 말뜻이 이해가 간다.
살아 있는 현대음악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는 음악교과서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작곡가이지만 지금은 지휘자로 더 유명하다. 활동이 왕성해 그가 지휘한 공연 DVD가 아주 많다. 수많은 현대음악가에게 사사한 경력 때문에 그는 현대음악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쇤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에서부터 현재 살아 있는 작곡가들의 수많은 스타일이 그의 작품들에 녹아 있다.
국내에서도 공연한 적이 있는 필립 글래스(Philip Glass)는 단순한 음을 반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거창하게 얘기하면 ‘미니멀리즘’을 구사한다. ‘해변의 아인슈타인’이라는 곡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음을 배경으로 여러 명의 내레이터가 아인슈타인의 복잡한 공식들을 읊는다. 이 곡을 듣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의문이 있는데, 과연 저 공식들이 음악과 관계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공식으로 음악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참 잘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현대음악은 참 괴상한 음악이다. 공포영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기분 나쁜 소리, 이상한 간격의 화음, 악기를 때리는 듯한 음향…. 어떤 이들은 “이런 걸 듣고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을까?” 하고 묻는다. 물론 모든 음악이 반드시 듣고 기분이 좋아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기분전환을 위해 음악을 듣는 건 사실이다.
어떤 음악을 듣고 ‘기분이 좋아진다’ 혹은 ‘듣기 좋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정도 경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특정 화음과 선율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건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를 예로 들어보자. 이것은 누가 들어도 좋은 음악일 것 같지만, 이 곡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너무 유명한 곡이고 많이 듣다보니 뭔가 예상을 빗나가는 새로움이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질리기 쉬운 곡이라는 얘기다. 반복해서 들어온 경험, 그리고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의 신선함 등이 이 곡을 싫어하게 만드는 이유다. 하지만 완벽한 구조로 짜인 명곡을 단순히 ‘쉽게 지루해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익숙한 음악의 지배를 거부한다”
그렇다면 이 곡을 처음 들을 때 누구나 그것을 좋게 느낄까? 그것도 절대적이지 않다. 바흐의 음악을 듣고 자란 바로크 시대 사람들이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가볍고 과장된 음악”이라고 거부한 것을 보면 분명 경험적인 요소가 작용한다. 바흐의 초기음악과 후기음악의 격차도 심하다. ‘G선상의 아리아’ 같은 젊은 바흐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의 헌정’같은 후기의 작품을 이해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볼 때 음악청취는 두 종류로 나뉜다. 익숙한 음악과 그렇지 않은 새로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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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대하는 사람도 두 종류로 나뉜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과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 후자는 전통적인 것의 위대함을 알고 그것에 위배되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우다. 그러나 위대한 전통을 만들어낸 사람들도 처음엔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개혁을 하면서 역사를 만든 선배들의 예술을 대하는 방법도 다르다. 에드가 바레즈는 “나는 익숙한 음악에 지배당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바레즈 같은 사람들은 두 가지 사명감을 갖고 있다. 더 발전된 문화 그리고 더 다양해진 문화를 남기려는 것이다. 그들은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사용하는 사람들과 반목할 때가 많다.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안주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고, 그것은 개혁적인 작업과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군대로 방어를 하듯, 익숙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대음악은 더욱 새로운 것을 개척할 것이고, 우리는 곧, 머지않아 그것에 익숙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