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3월3일 청와대에서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수단과 가진 오찬에서 모태범 선수에게서 선물로 받은 고글을 쓰고 스케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다.
모든 올림픽 금메달은 인간 육체성의 최고 발현으로서 가치가 있지만 김연아의 그것은 ‘여제(女帝)의 등극’으로 차별화된다. ‘여자 피겨스케이팅’이 단순히 ‘체력의 경쟁’ 차원을 넘어 예술적 가치, 몸과 정신의 미학을 구현하는 상류 문화의 속성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가 추가된다. 바로 전세계 매스컴의 압도적 주목이다. 이는 사건을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어낸다.
경기 전에는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의 경쟁구도와 한·일 관계가, 경기 중에는 김연아의 세계 최고기록 연기가, 경기 후에는 그에 대한 평가가 24개로 나눠진 각 시간대의 수백 개 국가에 전파됐다. 국적이 다른 수많은 사람이 시간과 공간의 압축으로 일시에 ‘김연아 스토리텔링’을 공유했다. 김연아가 쇼트프로그램의 마지막에 보여준 총을 겨누는 장면, 지구촌 시민들은 그 장면의 문화적 맥락에 공명되어 깊이 각인하게 된다.
스포츠는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다. ‘국가대표의 경연장’인 올림픽은 국가주의를 강화한다. 국가는 스포츠를 육성하고 스포츠는 국가의 안위와 발전을 돕는다. 이 때문에 “올림픽의 땀방울이 정권홍보의 소모품으로 전락했다”(미디어오늘 3월11일자 보도)는 비판도 있다. 귀담아들을 의견이지만 스포츠와 정치의 공생은 활용 여하에 따라선 꼭 나쁘게 볼 일은 아니다.
‘동아일보’가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린 건 스포츠를 정치의 영역으로 가져온 일이지만 식민지 한반도에 정의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 캐나다 총리가 “이 나라가 건국된 이래 국민이 이렇게 한마음이 되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 건 빈말이 아닐 것이다. 3월3일 이명박 대통령은 올림픽 전사(戰士)들을 청와대에 불러 그들 앞에서 고글을 쓰고 스케이팅 포즈를 취했다. 이 사진은 ‘이명박다움의 긍정성’을 여실히 보여준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남북한 월드컵 공동개최
국내 몇몇 경제연구소는 김연아의 금메달이 한국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며 그 경제적 효과를 계량화해 발표했다. 그러나 중계방송사의 광고수입까지 포함한 그러한 양적 접근은 부질없는 일로 보인다. 이는 냉전시대의 태동 등 인류의 운명을 바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출간될 때 그 책의 경제적 효과를 측정하는 것과 같다. 대신 나는 ‘국가심리’라는 질적 개념을 써보고 싶다. 김연아의 금메달과 같은 특별한 사건은 대다수 국민의 정서와 의지에 영향을 미치고 국가의 진로와 관련된 국가심리에 긍정적 효과를 준다고 본다.
한국의 정치가 해결해야 하는 최대의 과제는 한반도에 ‘한민족 공동체’를 구축하는 일이다. 스포츠가 그 일의 계기가 되어준다면 더없는 행운이다. 그런데 행운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대한축구협회는 FIFA에 2022년 월드컵 유치를 신청할 예정이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 ‘남북한 월드컵 공동개최’를 합의했으면 한다. 2022년 월드컵이 아니면 2026년 월드컵이 되어도 좋다. 이미 21세기 들어 한 차례 월드컵을 개최한 바 있는 한국으로선 무척 명분이 있는 일이고 유치 가능성도 높아진다. 세계인이 궁금해 하는 미지의 국가인 북한에서 열리는 월드컵은 이 대회의 흥행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12년 뒤는 멀다면 멀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스포츠는 한반도의 통합이라는 원대한 결실을 위한 맹아가 될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