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고 한심해. 이게 무슨 창피야. 얘들이 이젠 좀 컸나 싶었더니 머리만 히끗히끗했지 아직 멀었어. 아니, 애비 속을 그렇게들 모르나. 언론들도 그래. 뭐? 대권 승계가 끝났다구? 증권만 쥐면 현대를 다 먹은 거라구? 걔들이 뭘 해보기나 했어? 내가 앞으로 15년은 더 살 텐데 벌써 날 허수아비로 아는 거야?…”
내놓고 치고 받던 두 아들의 주먹다짐을 보다 못해 노구를 끌고 그룹 경영자협의회에 나가 교통정리를 해주고 돌아오던 날, 정주영(鄭周永·85)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스무 살 때인 1935년 서울 신당동에 쌀가게 ‘경일상회’를 내면서 처음 경영자가 된 이래 대한민국 매출 1위 기업집단으로 성장한 오늘의 현대그룹을 일구기까지 상속과 분가(혹은 분배)는 정명예회장이 기업 성장의 고비마다 치러야 했던 통과의례였다. 그 과정에 더러 갈등도 노출되고 구구한 억측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지 못한 적은 없었다.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정주영씨 일가에서 분가란 ‘자기 몫 찾아 떠나기’가 아니라 ‘큰형님(아버님)이 주는 대로 받고 물러나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70년대 무렵부터 시작된 현대 집안의 분가와 승계작업은 지금까지 대략 네 차례의 국면을 거치며 진행됐다. 70년대에 이뤄진 정명예회장 형제들의 독립, 80년대 후반 정세영(鄭世永·72) 회장의 부상, 90년대 중반부터 불거진 정세영·정몽구(鄭夢九·62) 회장의 갈등, 그리고 최근의 몽구·몽헌(夢憲·52) 형제의 세 겨루기 단계가 그것이다.
형제는 ‘황금 콤비’
정명예회장은 “형제들이 힘을 합쳐 기업을 일으키고, 그 후에는 장자가 다른 형제들의 분가를 돕는 것이 현대의 전통”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정주영씨가 거의 맨손으로 사업을 일으켜 갖은 어려움을 겪던 시절, 그의 다섯 남동생 중 요절한 신영(信永)씨를 제외한 인영(仁永·80), 순영(順永·78), 세영, 상영(相永·64)씨는 모두 학업과 생계를 팽개치고 달려가 맏형을 도왔다. 이들 형제들은 사실상 정명예회장의 창업동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현대에 쏟아부었다.
기업 규모가 커지고 그룹이 면모를 갖추면서 형제들은 각 계열사를 떠맡아 자기 책임 아래 경영했고, 이 구도가 훗날 계열 분리의 밑그림이 됐다. 형제 분가의 출발선을 끊은 사람은 인영씨. 그러나 그의 분가는 형과의 의견 충돌과 예기치 않은 외부 상황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매끄럽지 못했다.
강원도 통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정주영씨는 소년기에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네 차례나 가출을 시도했다. 그나마 맏이인 주영씨는 보통학교라도 다녔지만 차남인 인영씨는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그 또한 14살 때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인쇄소에 취직, 낮에는 문선공으로 일하고 밤에는 YMCA에서 운영하는 초등학교 야간과정을 다니며 신학문을 배웠다.
인영씨는 특히 영어공부에 흥미를 느꼈는데, 결혼한 주영씨가 쌀가게 배달원으로 일하며 현저동 산꼭대기 단칸방에서 살 때 형 부부가 덮고 자는 이불 속에서 밤새 영어공부를 하다 형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 형이 “그까짓 꼬부랑 글씨 배워서 뭐 할거냐”고 면박을 주면 아우는 “언젠가는 써먹을 데가 있을 테니 두고보라”며 큰소리를 쳤다. 인영씨의 말마따나 그의 영어실력은 훗날 주영씨의 ‘돈줄’ 노릇을 톡톡히 하게 된다.
인영씨는 일본으로 유학, 다이세이 중학과 미자키 영어학교 고등과, 아오야마 학원 영어과에서 공부를 계속하다 1943년 귀국했다. 47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기자생활을 하던 중 6·25를 맞자 형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인영의 항명
인영씨는 현대자동차의 초석을 닦는 데도 기여한 바 컸다. 66년 미국의 포드자동차가 한국 진출을 겨냥해 시장조사를 하고 돌아갔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신진공업이 일본 도요타와 기술 제휴로 ‘새나라’ 자동차를 조립 생산하고 있었는데, 현대는 포드의 접촉대상에 끼지도 못했다
주영씨는 마침 미국에 머물고 있던 인영씨에게 “포드와 당장 자동차 조립계약을 맺으라”고 지시했다. 인영씨는 형의 명령 한 마디에 아무 안면도 없는 포드사로 무작정 달려가 매달렸다. 그는 형이 유능한 자동차 수리 기술자 출신임을 강조하면서 설득을 거듭한 끝에 67년 2월 마침내 포드와 조립 기술계약을 하게 된다. 국산 부품 21%와 미제 부품 79%를 사용한다는 조건이었다.
현대는 3년은 걸려야 차 생산이 가능하리라는 포드의 예상을 깨고 불과 1년만에 ‘코티나’를 조립 생산, 세계 유수 자동차 메이커로의 첫 걸음을 뗐다.
주영·인영씨 형제의 ‘찰떡 궁합’은 두 사람의 성격이 정반대였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주영씨가 이것저것 재지 않고 저돌적으로 몰아붙이고 보는 성미라면 인영씨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판단이 내려진 다음에야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이었다. 사업 규모가 작고 창업 초기에 있는 성장 일변도 기업에서라면 이처럼 대조적인 성격의 두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가면서 서로 모자란 부분을 메워주는 순기능을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기업이 어지간히 성장해 투자규모가 커지고 여러 방향의 목표를 놓고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사령탑의 혼선과 마찰을 초래할 수도 있다. 75년, 중동 진출 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에 실제로 그런 상황이 빚어졌다.
당시 오일 달러를 바탕으로 중동 특수가 한껏 달아오르자 주영씨는 이를 도약의 계기로 삼으려 했다. 1억달러 규모의 바레인 조선소 공사를 따내기 위해 현대건설의 해외건설 담당 부사장이던 인영씨를 현지에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영씨는 중동 진출에 소극적이었다. “계약을 따내는 데 급급해 입찰가를 무리하게 낮출 경우 회사의 경영부실을 야기한다”며 신중론을 폈다.
그는 휴전 직후 현대건설이 사상 최대 규모의 정부 발주공사인 고령교 복구공사를 맡았다가 빚더미에 올랐던 때를 떠올렸다. 형제들이 집을 팔고 다리 밑 판잣집을 전전하며 빚쟁이들에게 쫓기던 기억이 새로웠다. 더욱이 기후와 풍습이 다른 만리 이역에서 수지가 맞을지조차 불투명한 사업에 뛰어든다는 것은 무모한 모험으로 여겨졌다.
주영씨는 인영씨가 기어이 고집을 꺾지 않자 현대양행 군포공장으로 전보시키고 만다. 현대양행은 62년 설립된 후 인영씨가 실질적으로 이끌던 종합기계업체. 주영씨는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회사에서는 아우 인영을 비롯해서 나의 중동 진출 결심이 회사를 망하게 만드는 욕심 아니냐고 근심하는 반대파도 꽤 있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오늘 못하면 내일 한다는 식으로는 발전이 있을 수 없고, 어려운 일을 피하다 보면 쉬운 일은 아무 것도 없는 법이다. 나는 중동 진출에 대비해 아랍어 강좌를 열게 했고 아랍말로 영화도 만들게 했다. 그러나 인영은 끝내 나의 결정에 따라주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해외 대형 공사 계약 관련자는 파면한다’는 위협을 가하며 중동 진출을 막으려는 아우를 전보 발령하고 내가 중동 공사를 총지휘하기로 하면서 사내의 반대론자들을 일소했다.”
그후 인영씨가 현대로부터 분가해 나간 사정에 대해서는 양론이 있다. 75년 말 주영씨가 인영씨를 불러 “너도 이젠 독립해야겠다”며 일방적으로 분가를 통보했다는 설도 있고, 인영씨가 먼저 떠나겠다고 하자 주영씨가 “형제가 모두 재벌이 되긴 어렵다”며 만류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그해에 열린 현대그룹 체육대회에 현대양행의 7개 계열사는 모두 불참해 분위기가 냉각됐고, 2년 뒤 인영씨는 마침내 분가 절차를 밟기에 이른다. 주영씨는 아우가 떠난 후에도 1년간 현대건설 사장 자리를 비워놓고 그의 복귀를 기다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별, 10년간의 외면
인영씨는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76년 경남 창원에 3억2000만달러를 투자, 세계 굴지의 종합기계공장을 설립하려 했다. 창원공장 설립 당시만 해도 정부는 발전설비 부문을 현대양행으로 일원화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대기업들이 적극적인 로비를 펼친 끝에 현대중공업과 대우중공업, 삼성중공업이 잇따라 이 부문에 참여하면서 독점 발주를 기대하고 막대한 투자를 했던 현대양행은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그룹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다른 기업들과는 달리 현대그룹의 지붕을 벗어난 현대양행은 혼자 힘으로 하루하루 빚 틀어막기에 급급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2차 오일 파동까지 터졌다. 막판까지 몰린 인영씨는 하는 수 없이 주영씨에게 SOS를 보냈지만 형은 차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던 중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79년 5월 중화학 부문에 대한 투자조정조치를 단행, 발전설비의 경우 현대중공업이 현대양행을 흡수하게 하고 삼성중공업과 대우중공업을 하나로 묶어 업체를 2원화했다. 인영씨는 이 조치가 현대의 입김 때문에 나온 것으로 이해, 가뜩이나 소원했던 형과 더 멀어졌다.
뒤이어 80년 초 신군부의 집권과 함께 출범한 국보위도 중화학 투자조정에 착수했는데, 현대에겐 승용차 생산을 전담케 하는 대신 발전설비는 대우로 일원화했다. 이에 따라 현대양행은 대우로 넘어갔다가 석 달 만에 대우가 경영을 포기하자 다시 한국중공업으로 간판을 바꿔 달고 국영화의 길을 걸었다. 인영씨로선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기업을 고스란히 국가에 헌납한 셈. 더욱이 그는 이 조치에 저항하다 신군부의 미움을 사 81년 업무상 횡령과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되는 불운까지 겪었다.
사무실 한 칸 남은 게 없던 인영씨는 그후 압구정동 배나무밭 사이에 있는 자택을 베이스 캠프로 삼아 이를 악물고 재기에 나선 끝에 마침내 한라그룹을 일으킨다. 82년 만도기계 안양공장을 증설했고 84년엔 한라시멘트 옥계공장 증설을 재개했으며, 89년엔 그룹 매출액이 1조원에 육박했다. 그 10년 동안 주영·인영 형제는 얼굴을 맞닥뜨린 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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