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치밀한 사전 조사와 두 차례의 대대적인 압수 수색으로 검찰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고 정확한 증거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성과는 대단했다. 지난 3월11일, 수사를 담당한 서울지검 형사9부 이인규 부장검사는 ‘SK그룹 부당내부거래 및 분식회계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최태원 SK(주) 회장, 김창근 구조조정추진본부장이 구속 기소되고, 손길승 SK회장 등 8명이 불구속 기소됐다. 수사팀은 애초 목표였던 JP모건 옵션이면거래, 워커힐 주식 부당거래 외에, 1조5000억원에 달하는 분식회계를 적발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로써 재계 순위 3위 SK는 그룹 해체의 위기에 봉착하게 됐다.
어느 모로 보나 ‘본분을 다한 검찰의 완벽한 승리’로 기록될 SK 수사는,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도, 명쾌하지도 않다. 수사 시기 및 배경에 대해 온갖 설이 난무했고, 정부와 청와대는 ‘중단 없는 재벌 개혁’부터 ‘사정 속도 조절론’ ‘외압 시비’에 이르기까지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검사들은 헌정 사상 초유의 ‘평검사-대통령 공개토론’ 자리에서 ‘SK 수사 외압’을 폭로하는 것으로 대통령을 공격했다. 이 사안은 김진표 부총리, 이근영 전 금감위원장의 “수사 결과 발표를 늦춰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라는 해명에 대해, 검찰 고위관계자가 “사실상 분식회계 건을 덮어달라는 요구였다”며 정면 반박하고 나섬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수사를 누구보다 환영해야 할 시민단체의 의외로 신중하고 냉정한 반응은 또 어떤가. 관료 중심의 초대 경제팀 인선에 강한 불만을 표시해온 참여연대, 경실련 등은 “SK 수사 그 이후를 주목한다”는 뜻을 거듭 밝히고 있다. 이번 수사가 ‘돌출성 단발’이 아닌 재벌 개혁과 그들의 불법·탈법 행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의 시발점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민단체의 기본적 시각은 “정부건 검찰이건 아직 못 믿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판단을 유보한 데는 나름의 설득력 있는 ‘정황 증거’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SK 수사를 기점으로 재벌 등 보수세력의 ‘규제 완화’ 요구는 높아진 반면, 정부의 개혁 의지는 후퇴한 모습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검찰의 SK 수사는 참여정부와 검찰의 대립, 노정권의 재벌 개혁 의지, 그에 대한 시민단체의 우려와 요구, 재계의 미묘한 손익 계산 등 다각도의 관점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이제 SK 수사, 그 시작으로 돌아가 보자.
2003년 1월, ‘개혁대상’ 검찰의 상황
서울지검 형사9부가 SK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해 12월 중순이다. 이인규 부장은 “정확히 말해 12월13일이다. 사무실에서 TV 뉴스를 보다 최태원 회장의 워커힐 주식 스왑거래 관련 보도를 접했다. 이거 이상하다 싶어 바로 그 방송사 사회부장에게 자료 협조를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형사9부는 2001년 6월 금융·증권 사범 전담수사부로 신설됐다. 주로 금감원 고발 사건 수사에 진력해 오다, 지난해 8월 이부장검사가 부임하면서 인지·기획 수사로까지 그 외연을 확장했다. 이후 ‘새롬기술 분식회계’ ‘3조원대 주식대금 가장납입’ ‘유명 애널리스트 주가조작’ 등 20여 건의 굵직굵직한 경제사건을 파헤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수사 욕심이 큰 만큼 ‘보다 큰 물건’에 관심을 가졌을 법도 하다. 이부장 역시 “(재벌은) 공룡인데 검사로서 왜 욕심이 없었겠느냐”는 말로 그러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25일이 지난 올 1월8일, 참여연대가 JP모건과의 이면계약 건을 들어 서울지검에 SK증권에 대한 고발장을 접수했다. 9부는 애초 TV 보도를 통해 인지한 주식 내부거래 건과 참여연대 고발 건을 동시에 조사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이부장검사가 소개하는 SK 수사 착수 경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