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러니다. ‘개혁’이라는 말은 김종인(金鍾仁·60)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이름 석 자를 비추는 빛이자 어둠을 드리우는 그림자다.
김 전수석은 지난해 5월과 올해 1월 단행된 개각을 앞두고 재정경제부 장관 후보 1순위로 꼽혔다. 지난 8·7 개각 직전에도 진념(陳) 장관과 함께 재경부 장관 물망에 올랐다. 개각 때마다 경제정책의 수장감으로 이름이 오르내린 것은 그의 선명한 개혁성향 때문이었다.
그는 90년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있으면서 토지공개념을 도입, 대기업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조치로 대표되는 강력한 부동산 투기 방지책을 몰아붙였고, 주력업종 선정 및 여신규제 정책 등으로 재벌의 고삐를 죄려 했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극동그룹 녹지해제, 삼성그룹 상용차사업 승인 같은 사안에 대해 특혜시비가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기도 했다. 당시 한 재벌총수는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8·7 개각을 앞두고 김 전수석의 이름이 다시 거론된 것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집권 후반기 경제개혁에 힘을 실어 대미를 장식하는 데 그만한 적임자가 없다는 시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세 차례 개각에서 모두 ‘물’을 먹었다. 낙점을 받지 못한 이유 또한 그의 개혁성향에 있다는 게 많은 이들의 생각이다. 개혁성향이 너무 강한 나머지 대통령에게 부담을 줄 우려 때문에 고배를 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8·7 개각 직전은 현대그룹이 계열분리안을 놓고 정부와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시점이라 재벌개혁론자인 김 전수석이 입각해 소신껏 ‘칼’을 휘두를 경우 퇴로가 막힌 현대측이 이판사판의 저항을 불사하리라는 얘기도 있었다. 증권가에는 재벌그룹들이 그의 입각을 막기 위해 정치권 실세에게 총력 로비를 폈다는 정보지도 나돌았다.
비현실적 개혁엔 반대
이 대목에서 그의 개혁관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개혁논리를 갖고 있기에 그렇듯 상반된 반응을 얻는 것일까. 그는 한국경제의 실상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경제개혁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경제학자 출신인 그의 ‘처방전’은 또 어떤 내용일까.
이러저러한 용건으로 만나 보고 싶다고 했더니 수화기에선 “난 뭐, 할 말도 없는데” 하는 대답이 들려왔다. 인터뷰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굳이 오겠다면 막지는 않겠다는 뜻 같았다. 그래서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그의 연구실을 찾아 갔다.
─이번에는 입각하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만….
“허, 참. 본인은 뜻이 없는데 주변에서 왜들 그렇게 말을 만들어내는지…. 내가 그런 자리에 가야 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합시다.”
─스스로도 개혁성향이 지나치다고 보십니까? 재경부 장관 기용설이 나돌자 대기업들이 바짝 긴장했다고 하더군요.
“경제에 문제가 있고, 개혁으로 그 근본 원인이 제거된다면 개혁을 하는 수밖에요. 하지만 내가 아무리 개혁성향이 강하다 해도 현실에 맞지 않는 개혁엔 찬성하지 않아요. 내가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기 위해 좀 강도높은 정책을 추진했다고 너무 개혁적이라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90년에 금융실명제를 유보시킨 사람도 나예요.
나는 세금 공부를 누구보다 많이 한 사람인데, 금융소득종합과세를 실시하면 금융실명제는 저절로 되게 돼 있어요. 그런데 왜 금융소득종합과세는 놔두고 굳이 시장에 충격을 주면서까지 금융실명제를 도입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현실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해 ‘반개혁적’이라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반대했던 겁니다. 경제정책에도 전략과 전술이 있어요. 전략적 목표는 같아도 전술은 주변 여건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기본원칙이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겁니다.”
─어쨌거나 재벌들과는 별로 좋은 사이가 못되셨죠?
“경제수석 시절 재벌더러 ‘비업무용 부동산 팔아라’ ‘핵심사업 빼놓고는 다 정리해라’고 했으니 그 사람들은 땅 뺏고 집 허무는 걸로 알았겠죠. 재벌들이 자동차, 정유 등 이미 시설과잉 상태인 분야에 또 진출하겠다고 덤벼들기에 그러지 말라고 했더니 ‘자유시장경제에서 왜 마음대로 못하게 하느냐, 당신 공산주의자 아니냐’고 반발하더군요.
아니, 그러는 자기들은 ‘자유시장경제’라서 그렇게 몸집을 키울 수 있었습니까? 과거 우리가 자본이 부족한 후진국이었을 때 정부가 투자효율을 높이기 위해 재벌에 계획경제체제 식으로 자본을 배분하고 시장진입을 자유롭지 못하게 해서 그들에게 독점적 지위를 준 것 아닙니까.
그처럼 비정상적인 경제구조에서 안주했기에 재벌은 어느 업종에서라도 영원히 시장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이윤과는 무관하게, 오직 시장에서 자기 영역을 넓힐 목적으로 무턱대고 과잉투자를 계속했어요. 97년에 외환위기가 왜 왔습니까. 이런 과잉시설, 과잉부채 때문에 온 것 아닙니까.
그들은 그런 논리로 기업을 경영해온 탓에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시장의 룰도 무시합니다. 룰을 지키라고 하면 다들 싫어해요. 룰 밖에서 룰과 무관하게 행동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입니다. 국가권력이 그것도 통제하지 못한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죠. 정부는 심판입니다. 축구경기에서 라인 밖으로 뛰쳐나가 골을 집어넣는 선수를 심판이 그대로 둔다면 관중은 무슨 재미로 경기를 봅니까. 룰만 철저하게 지키면 간섭하지 말자는 게 내 주장이에요.”
화제가 재벌개혁으로 옮겨지자 톤이 점점 높아졌다. 학자답게 미국 경제사까지 ‘실증사례’로 끌어들였다.
“미국이 자본주의체제의 본산이라고 해서 자본가들이 멋대로 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물론 건국 초기에는 다들 자유롭게 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경제세력이란 게 형성되고, 이것이 국가경제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되자 T.루스벨트 대통령 때부터 F.루스벨트 대통령 시절까지 독점규제 같은 룰이 매우 타이트하게 짜였어요. 그래서 기업들이 엄청나게 반발했지만, 정부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밀어붙이니까 나중엔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게 결국 옳다는 사회적 인식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스탠더드 오일이나 AT·T 같은 초거대 기업의 독점이 해체된 것 보세요. 마이크로소프트는 또 어떻습니까. 빌 게이츠가 한국이나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신성 불가침의 국가적 영웅이 됐을 겁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의 룰에 안 맞으니까 저렇게 제재를 하잖아요. 자유경제체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이 정도 제약은 감내해야 됩니다. 이런 것도 못 참아내면 자유경제 질서가 무너져요.”
외환위기는 극복, 그러나…
─요즘은 어떻습니까. 재벌들이 이젠 좀 정신 차리고 방향을 제대로 잡아나가는 것 같습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요. 가령 기업지배구조를 통제하기 위해 너도나도 사외이사제를 도입했지만, 과연 사외이사들이 대주주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있습니까? 사외이사가 실제로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제도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지난 2년 반 동안 정부와 경제주체들이 나름대로 개혁 드라이브를 지속한 덕분에 비교적 빨리 외환위기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사실이에요. 외환보유고가 900억 달러나 된다니까 97년 말처럼 국제금융시장에서 구제금융을 애걸할 일은 이제 없겠죠. 이건 높이 평가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 것은 외환위기를 가져온 근본 원인이 제거됐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데도 우리의 금융여건은 외환위기 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어요.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자금이 순환되지 않고 있고, 그때 부실했던 금융기관들은 지금도 부실해요. 공적자금이니 워크아웃이니 해서 100조 원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는데도 금융기관들이 정상화될 기미가 없잖아요. 이런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금융기관들의 주가예요. IMF체제로 들어가면서 폭락한 주가가 아직도 그대로거든요.
금융기관의 부실은 결국 실물경제 사이드의 부실에서 온 것인데, 이 부문도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했기는 마찬가집니다. 이것도 주가를 보면 알아요. 몇몇 블루칩을 빼놓고는 상장기업 가운데 주가가 외환위기 때보다 오히려 떨어진 곳이 많아요.”
경제개혁의 핵심인 구조조정이 실속없이 겉돌았다는 얘기다. 김 전수석의 진단은 이렇다. 우리는 후진국 상태에서 경제개발을 본격화했기 때문에 일정 기간은 계획경제체제가 효율성을 발휘했다. 하지만 75년 3차 경제개발계획 5개년 계획이 끝난 뒤로는 우리 경제가 더 이상 이런 시스템으로는 운영될 수 없다는 게 누차 입증됐다. 당연히 경제정책의 기조도 변해야 했다. 자원집중 상태를 해소하고 군살을 빼 효율을 높여야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구조조정 정책을 시행해본 경험이 없다. 정부가 어정쩡하게 팔짱을 끼고 있는 사이에 재벌은 계속 확장했고, 금융기관은 돈을 ‘수집’하기만 했지, 들어온 돈을 운용해 수익을 내는 본업은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 있었다. 정부가 금융기관의 돈을 정책적으로 임의 배분하는 관치금융 메커니즘이 잔존했기 때문이었다. 외환위기 이후에도 구조조정이란 말은 봇물을 이뤘지만, 대개는 엇비슷한 업종끼리 적당히 뭉뚱그린 뒤 이것저것 떼내 한 회사에다 덜렁 붙여주는 식이었다는 것.
거시지표의 실체
─첫 술에 배부를 수야 있겠습니까. 아무튼 맨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2년 여 만에 외환위기를 극복한 것은 빠른 회복세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거시경제지표도 많이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거시경제지표는 단기적으로는 얼마든지 좋을 수도, 또 좋게 만들 수도 있어요. 외환위기 얼마 전까지도 거시지표는 좋았고, 그래서 ‘펀더멘털에는 이상없다’고들 한 것 아닙니까.
은행에서 계속 돈을 끌어와서 투자를 많이 하면 성장률도 높아지고 고용문제도 개선돼 거시지표가 좋아집니다. 부채는 거시지표에 잡히지 않으니까. 우리가 99년 이후 두자리수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지만, 성장률 대비시점인 98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을 감안하면 큰 의미가 없어요. 게다가 그간 벤처니 뭐니해서 잔뜩 투자를 해댔으니 성장률은 오르게 돼 있어요. 명심해야 될 것은 과잉부채, 과잉시설 구조에선 아무리 거시지표가 좋아도 장기적인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수출도 마찬가집니다. 수익은 생각 않고 무작정 수출만 늘린다면 국제수지야 좋아지겠지만, ‘수익없는 수출’로 뚫린 구멍은 결국 은행에서 돈을 빌려다 메우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구조를 탄탄하게 하면서 거시지표를 유지하는 데 신경써야 해요.”
외환위기가 없어도 경제는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본은 외환위기를 겪은 적이 없지만, 10년 가까이 경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91년부터 지난해까지 1조2000억 달러를 투입해 수요를 창출하려고 애썼지만, 그 기간의 연평균 성장률은 1.4%에 불과했다. 구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경기 부양으로만 경제를 정상화하려다 보니 비용효과가 극히 낮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래도 일본은 경기부양책을 쓸 수 있는 재정 여력이라도 있었지만, 우리 형편은 그렇지가 못하다.
─지난 2/4분기부터 GDP 성장률이 한 풀 꺾이자 1/4분기에 경기가 정점을 지난 게 아니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만일 경기가 정말 정점을 쳤고 거시지표가 믿을 게 못된다면 우리 경제가 연착륙할 것이라고 장담할 상황도 못된다는 뜻입니까?
“지금의 거시지표가 안정된 기반 위에서 좋아진 것이냐, 아니면 불안정한 구조 속의 일시적인 호전이냐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겠죠.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경제를 연착륙시킬 수 있는 정책도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경제를 연착륙시키려면 과잉투자, 과잉소비를 못하게 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세금을 많이 걷거나 금리를 올려야 합니다. 미국은 경기 과열을 막고 경제를 연착륙으로 끌고 가기 위해 지난해 6월 이후 일곱 차례에 걸쳐 금리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업 부실이 워낙 많은데다 구조조정까지 앞두고 있어 금리를 올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에요. 자동차가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는데도 브레이크가 없어 속도조절이 안 된다는 얘깁니다. 구조가 불안정한 상황에 소프트 랜딩으로 이끌 툴(tool)도 없고, 행여 요즘 외신에서 자꾸 떠들어대는 것처럼 하드 랜딩으로 갈 경우 이를 쳐올릴 수 있는 툴도 없다면 정책결정자로선 신중한 판단이 요구되는 시점이 아닐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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