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25일 일본 해상자위대(해자대)의 기지인 요코스카(橫須賀)·구레(吳)·사세보(佐世保)항에서는 각각 소해모함(掃海母艦, 기뢰를 제거하는 모함) 우라가(5650t)와 보급함(한국식 표현으로는 군수지원함) 도와다(8100t), 호위함(구축함) 사와기리(3550t)의 출항식이 열렸다. 세 함정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전투수역으로 파견하는 최초의 함정들이다. 2001년 9·11 미국 테러가 있은 후 일본 조야는 ‘테러대책 특별조치법’ 제정에 들어갔는데, 세 함정은 이 법을 근거로 전투수역(인도양)으로 향하게 된 것이다.
해자대의 본부인 해상막료감부(海上幕僚監部)는 도쿄(東京)에 있다. 그러나 작전과 관련된 주요 사령부는 요코스카에 모여 있다. 요코스카는, 해군작전사령부를 비롯한 한국 해군의 핵심 부대가 모여 있는 진해와 비슷하다. 요코스카에는 3성 제독이 지휘하는 요코스카지방대 사령부와 역시 3성 제독이 지휘하는 자위함대 사령부, 그리고 자위함대 사령부 예하이긴 하나 역시 3성 제독이 이끄는 호위함대 사령부와 잠수함대 사령부가 있다. 중장이 사령관인 미 해군 7함대도 요코스카를 모항으로 한다. 때문에 요코스카에서는 해상막료감부보다 더 많은 해군 ‘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요코스카에, 더구나 역사적인 행사가 벌어진 만큼 방위청장관이 참석하지 않을 리 없다. 출항식에 참석한 나카타니 겐(中谷元) 방위청장관은 “일본은 계속해서 미국의 테러 근절 활동을 지원할 것이다. 인도양으로 파견되는 해상자위대원들은 일본 국민의 대표로서 확실히 임무수행을 하고 전원 무사히 귀항할 것으로 믿는다”고 연설했다. 이날 이 행사를 보도한 한국 언론은 일제히,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염려한다’는 논평을 내놓았다. 이러한 염려를 의식한 듯 같은 날짜의 ‘아사히(朝日)신분’은 흥미로운 코멘트를 붙였다. ‘해자대의 인도양 출항에 대해 한국은 우려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전략적인 시각으로 자위대 분석
그러나 이 날 일본은 인도양으로 함정을 처음 보낸 것이 아니다. 11월7일 이미 해자대는 사세보항에서 호위함 구라마(5200t)와 기리사메, 보급함 하마나를 ‘사전 조사’ 명목으로 인도양으로 출항시켰다. 그러니까 11월7일 출항한 것은 선발대고, 11월25일 떠난 것은 본대가 되는 셈이다. 애초 일본은 7250t의 공고(金剛)급 이지스함도 인도양으로 보낼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일부에서 반대 의견이 나와, 파견을 취소했다. 이지스함마저 파견했다면, 한국과 중국에서는 일본의 재무장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더욱 크게 터져나왔을 것이다.
9·11 미국 테러를 핑계로 일본은 재무장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그렇다면 일본의 ‘펀치력’은 어느 정도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은 공포심을 유발시키는데, 이러한 의문과 공포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막연한 공포와 무지로는 이미 군사대국이 된 일본을 슬기롭게 상대하는 방안을 찾아낼 수가 없다. 일본을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자위대에 대한 무지부터 떨쳐 버려야 한다.
결론부터 밝히면 일본은 세계 2위의 ‘왕주먹’을 가졌으나, 한국 또한 매우 ‘매운 주먹’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자신감을 갖고, 자위대를 세부적으로 분석하는 전략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국방백서’와 ‘한국군 장비연감’, 일본의 ‘방위백서’와 ‘방위핸드북’ 등을 근거로 일본 자위대를 한국군과 비교해 조목조목 살펴보기로 한다.
육자대의 전신, 경찰예비대
먼저 일본의 육상자위대(육자대)부터 살펴보자. 육자대는 5개 방면대(군단과 비슷)-11개 사단-2여단(2개 혼성단 포함하면 4개 여단이 된다)으로 편성돼 있고, 총병력은 16만 4000여 명이다. 과거 육자대는 1부터 13까지의 13개 사단으로 편성돼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미 육군이 안보위협 요인이 줄어들었다며 12개 사단을 10개 사단으로 줄이자 육자대 역시 12·13사단을 여단으로 개편했다.
한국 육군은 3개 야전군-11개 군단-47개 사단-19개 여단이고, 총병력은 56만여 명이다. 사단 수에서 한국은 4.3대1, 총병력 수로는 3.4대1로 일본을 앞서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방위백서는 한국육군의 사단 수를 22개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25개 사단은 어디로 간 것일까.
사단에는 평시에도 사단 운용에 필요한 인원을 거의 갖추고 있는 완편(完編)사단과, 평시에는 최소인력으로 운용하다 전시가 선포돼 예비군이 들어와 완편하는 간편(簡編) 사단이 있다. 이러한 간편 사단을 한국 육군에서는 동원사단과 향토사단으로 부르고 있다. 일본 방위백서는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한국 육군은 22개 완편 사단과 25개 간편 사단을 갖고 있다. 그러나 완편 사단 수 비교에서도 한국은 2대1(22대11)로 일본을 앞서고 있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육자대의 사단 역시 완편 사단이 아니다. 따라서 병력이나 부대 수에서 한국은 일본을 월등히 앞선다고 자부해도 좋다.
주지하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에서 패한 일본은, 맥아더 원수를 사령관으로 한 미군의 군정을 받을 때 ‘평화헌법(일명 맥아더 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 9조는 ‘일본은 전쟁을 포기하며 군대를 보유하지 않으며, 교전권을 부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 일본에 주둔한 미 육군 부대는 4개 사단을 거느린 8군이었다. 1950년 한국에서 6·25전쟁이 일어나자 8군 전체가 한국으로 이동했다. 이로써 일본을 지킬 육군이 없자, 맥아더는 4개 사단 규모의 경찰예비대를 만들게 했는데 1954년 이것이 지금의 육자대로 바뀌었다.
자위대는 헌법에 근거한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일상적인 군사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병을 ‘보통과’, 포병을 ‘특과’, 방공포병을 ‘고사특과’, 공병을 ‘시설’로 부르고 있다. 5개 방면대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홋카이도(北海道)에 있는 북부방면대다. 북부방면대에는 2사단·5사단·7사단·11사단의 4개 사단이 배속돼 있다. 북부방면대는 홋카이도로 상륙하려는 적 함정을 격퇴하는 것이 주임무다. 따라서 주로 지대함 미사일로 무장한 제1 특과단(포병여단), 제1고사특과단(방공포여단), 제1전차군(전차여단) 등이 직속돼 있다.
최강의 7사단과 北部方面隊
자위대에는 원스타(준장)가 없고 장성은 별 두 개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육자대의 여단장(혼성단장도 마찬가지)은 소장이고, 사단장은 방면대 사령관과 같은 중장이다. 육자대의 투 스타는 ‘육장보(陸將補)’로 불린다(해자대에서는 ‘해장보’, 항자대에서는 공장보’로 불린다). 육자대의 스리스타와 포스타는 전부 ‘육장(陸將)’으로 불린다(해자대와 항자대에서는 ‘해장’ ‘공장’으로 불린다). 자위대는 참모총장을 ‘막료장(幕僚長)’으로 부르는데 별 넷을 단 육장·해장·공장은 각각 육상막료장·해상막료장·항공막료장을 맡는다. 합참본부는 ‘통합막료회의’라고 하고 합참의장은 ‘통막의장’이라고 한다.
육자대의 사단은 대개 4개 보통과(보병)연대를 중심으로 1개 특과(포병)연대·1개 전차연대 등으로 편성된다. 그러나 치도세(千歲)에 포진한 제7사단만은 전차연대 3개·특과연대 1개·고사특과(방공포)연대 1개·그리고 보통과연대 1개로 편성된다. 7사단은 육자대 유일의 전차사단이다. 한국 육군에는 전차사단이 없고, 수도기계화보병사단(맹호사단) 등 기계화사단만 ○개 있다.
혼슈(本州, 일본 본토) 북쪽에 있는 동북방면대에는 6사단과 9사단이 배속돼 있다. 도쿄(東京)가 포함된 혼슈 중앙 지역을 담당한 동부방면대에는 1사단과 12여단, 그리고 일본 유일의 특수전 부대인 제1공정단이 배속돼 있다. 중부방면대는 혼슈 남쪽에 3사단·10사단·13여단을, 시고쿠(四國)섬에는 제2혼성단을 배치해 놓고 있다. 서부방면대는 규슈(九州)섬에 4사단·8사단을, 오키나와(沖繩)에는 제1 혼성단을 두고 있다.
한국과 가까운 쓰시마(對馬島)에는 어떤 부대가 배치돼 있을까. 서부방면대 예하의 제4사단은 쓰시마에 대대 규모로 추정되는 ‘쓰시마 경비대’를 두고 있다. 해자대는 육자대의 서부방면대와 방어수역이 비슷한 사세보(佐世保)지방대가 쓰시마방비대(防備隊)를 배치해놓고 있다. 쓰시마는 두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어, 해자대의 쓰시마방비대는 다시 상(上)쓰시마경비소와 하(下)쓰시마경비소로 나누어진다.
배치된 부대 수를 근거로 방면대를 규모가 큰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북부(4개 사단)-중부(2개 사단, 1개 여단, 1개 혼성단)-서부(2개 사단, 1개 혼성단)-동북(2개 사단)-동부(1개 사단, 1개 여단, 1개 공정단)방면대가 된다. 육자대는 도쿄가 있는 일본 중심부에는 가장 규모가 작은 동부방면대를 배치하고 국토 끝으로 갈수록 전력이 큰 부대를 배치해놓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홋카이도에 있는 북부방면대다. 북부방면대는 최강의 7사단을 포함한 육자대 전력의 3분의 1에 가까운 4개 사단을 끌어안고 있다. 북부방면대의 전력은 왜 이렇게 강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개화 이후 최근까지 일본은 러시아를 제1의 가상적국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홋카이도는 소야(宗谷)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 땅인 사할린을 마주 보고 있다. 일본은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러시아와 두 차례 전쟁을 치러 1승1패를 주고 받았다. 1904년 일본의 선공으로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중장이 이끄는 일본 육군 제3군(군단급)은 만주 요동반도에 포진한 러시아 육군을 6개월 동안 공격해, 1905년 1월1일 마침내 항복을 받아냈다.
러일전쟁과 2차 대전
1905년 5월27일부터 28일 사이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대장이 이끄는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가 쓰시마와 울릉도 사이의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켰다. 그리고 로제스트벤스키 제독까지 생포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러일전쟁을 승리로 마무리지었다. 러일전쟁은 일본이 세계 강국으로 등장하는 계기였다.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 남쪽을 양도받았다.
일본은 남부 사할린을 ‘가라후도(樺太)’로 이름지었다. 일본은 가라후도에서 석탄을 캐내기 위해 조선인을 징용했다. 그러나 2차 대전에서 패전함으로써 가라후도는 다시 러시아 땅 사할린이 되었다. 이때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철수했으나, 징용된 한국인들은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해, ‘비극의 사할린 동포’가 되었다. 한국 진해의 해군작전사령부는 러시아풍의 붉은 벽돌 건물에 들어 있는데, 이 건물은 러시아가 패전한 대가로 일본 해군에게 지어준 것이다. 이처럼 러일전쟁은 한반도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로부터 40년 후인 1945년, 이번에는 일본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한다. 1941년 진주만을 공격하기 6개월 전 일본은, 소련과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일·소 중립조약’을 맺었다.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내내 소련과 일본은 싸움을 하지 않았다. 1944년 독일을 항복시킨 미국은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해 소련에게 “일본과 맺은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일본과 싸우라”고 요구했으나, 소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미국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려 일본의 패배가 완연해진 1945년 8월11일, 소련은 ‘중립조약’ 파기를 선언하고, 만주와 남사할린 등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리고 8월15일 히로히토(裕仁)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자, 만주와 가라후도, 38선 이북의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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