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정치관에서 다음으로 고찰해야 할 것은 칼리파제에 기초한 국가체제다. 이슬람사에서 정교합일의 국가체제로 출발한 것이 바로 칼리파제다. 교조 무함마드가 별세한 후 슈라(협의제)에 의해 4명의 칼리파(계위자)가 계승적으로 선출되어 이슬람공동체의 최고권력자가 됨으로써 그들을 정점으로 한 칼리파제가 출현했다.
따라서 칼리파제는 계위에 의한 정교합일의 국가체제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동서고금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수한 국가체제다. 이 제도에서 이슬람 국가의 계위자(칼리파)들은 최선임자인 무함마드가 그러했던 것처럼 종교를 수호하고 현세 정치도 올바르게 펴는 이슬람 본연의 정교합일체로 국가를 운영했어야 했다.
그러나 칼리파제는 30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에만 그 빛을 발하다가 우마위야조부터 세습제가 도입되면서 점차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후 칼리파제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기복무상한 역사의 길을 걸어왔다. 적지 않은 위정자들은 칼리파란 이름으로 이슬람 국가의 최고 통치지위에 오른 후에는 종교적 사명감은 뒷전으로 하고 비이슬람적인 강권과 술수로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함으로써 이상적인 칼리파제는 점차 변질되었다.
그 결과 중앙집권적인 칼리파제는 통치력을 상실하고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판국은 1258년 몽골의 침입으로 압바스조 이슬람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후 이집트인 맘루크조(1250~1517)가 전통 칼리파제를 복구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이름뿐인 칼리파는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맘루크조를 정복하고 이슬람국가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한 오스만 터키는 애당초 약 300년간은 칼리파란 명칭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구 열강의 내침에 대처하고 이슬람세계의 종주국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근세에 와서야 술탄제와 함께 칼리파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패한 터키는 1924년 잔명이나마 가까스로 유지해오던 칼리파제를 아예 폐기하고 정교분리의 공화제를 선포했다. 이로써 1400여 년의 이슬람 정치사에서 이상으로 꿈꿔오던 칼리파제는 영영 막을 내리고 말았다.
칼리파제에서는 원칙적으로 3권(입법, 사법, 행정) 분립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권력이 칼리파 한 사람의 수중에 집중된다. 이것은 현대국가의 권력구조에서는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제도다. 이것이 오늘 정교합일의 이슬람적 국가체제에서 극복할 수 없는 한계다. 그리하여 이슬람 법학자들은 칼리파제만이 능사가 아니라, 이슬람은 여러가지 형태의 국가체제를 수용한다고 변을 토한다. 그래서 오늘날 이슬람 국가들 중에는 왕정제가 엄존하는가 하면 공화제나 술탄제 같은 다양한 국가체제가 존재하게 된다고 한다.
사막에서 물가로 인도하는 ‘샤리아’
현대 이슬람국가가 수행해야 할 책무는 크게 종교업무와 국민권익업무의 두 가지로 대별된다. 그 내용을 세분하면, 종교의 보호, 재판의 시행, 영토의 보존, 범법자의 처벌, 국경의 수비와 강화, 지하드의 수행, 세금의 징수, 예산의 집행, 관료의 임명, 공공업무의 감사 등 10가지다. 세부내용에서 보다시피 아직은 정교합일적인 국가체제 성격이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지만, 현대적인 국가체제 성격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슬람의 정치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국가체제나 그 체제의 지배에 있는 국민의 활동을 규제하는 샤리아, 즉 이슬람법이다. 원래 아랍어의 ‘샤리아(sharia)’는 ‘물가에 이르는 길’이란 뜻이다. 건조한 사막지대에서 물은 생명이며, 물가로 가는 길은 생명의 길이고 구원의 길이 아닐 수 없다. 경전 ‘꾸르안’에서도 이 단어는 ‘길’이라는 보통명사로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어원으로부터 인간에게 생활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알라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법, 즉 이슬람법을 ‘샤리아’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슬람에서의 법의 개념은 현대법의 일반개념과 사뭇 다르다. 현대법은 주로 인간의 사회생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의 체계로서 공사(公私)의 사회관계만을 규제한다. 그러나 이슬람법은 사회관계뿐 아니라, 인간의 신앙적 관계마저도 규제한다.
그리하여 이슬람법은 예배, 종교부금, 금식, 순례, 장례, 세정(洗淨) 등 종교적 신행(信行)에 대한 규범(이바다)과 혼인, 상속, 징세, 친자관계, 노예와 자유인, 계약, 매매, 종교기금, 소송, 재판, 비무슬림의 권리와 의무, 범죄, 전쟁 등 사회적 관계(무아말라)에 대한 규범의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이슬람법은 신과 인간과의 관계(전자)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후자)를 규제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현대법이 ‘인간의 지혜와 이성의 산물로 변화하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슬람법은 ‘신성한 신의 계시에 의한 불변의 것’으로 ‘예언자를 통해 계시된 신의 의지’다. 이러한 천계법(天啓法)에서 공동체의 주권자나 입법자는 국가나 인간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이다.
그래서 법을 어기는 행위는 사회조직과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불신과 불경의 죄행인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사회에서는 시종 법학(피끄흐)을 신학보다 우위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중시한다. 그것은 이슬람이 ‘신앙과 실천의 체계’로서 현세의 삶을 중시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슬람법의 4가지 근거
무슬림들은 철두철미 샤리아에 따라 생활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받는다. 샤리아는 종교와 사회윤리도덕을 기준으로 하여 무슬림들의 행위를 5대 부류로 규범화하고 있다. 5대 부류의 행위는 다음과 같다.
①의무(와집): 예배, 금식, 효도 등과 같이 행하면 보상되고 행하지 않으면 처벌되는 행위 ②금기(하람): 음주, 절도, 이자놀이, 뇌물 등과 같이 행하지 않으면 보상되고 행하면 처벌되는 행위 ③권유(만둡): 친우나 이웃 방문, 외모 단정 등과 같이 행하면 보상되고 행하지 않아도 처벌 안 되는 행위 ④비난(마크루흐): 흡연, 해뜰 때까지의 늦잠 등과 같이 행하지 않으면 보상되고 행하면 처벌은 없으나 비난을 받는 행위 ⑤허용(무바흐): 직업이나 음식, 주택의 선택 등과 같이 행해도 보상이 없고 행하지 않아도 처벌이 없는, 즉 법과 무관하여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행위.
이슬람법에는 4가지 법원(法源)이 있다. 가장 근본적인 법원은 경전 ‘꾸르안’이다. 총 114장으로 구성된 이 경전은 현세와 내세에서의 인간에 관한 알라의 모든 계시를 집대성한 대법전이다.
법학자 압둘 와합의 통계에 의하면, 경전 속에 있는 부분별 관련 구절의 수는 대략 신분법이 70개, 채권이나 물산권 등 민사법이 70개, 형사법이 30개, 형사소송법이 13개, 집단이나 개인의 권리에 관한 법이 10개, 국제법이 25개, 재정법이 10개 정도로서 샤리아의 사회적 관계법 영역을 거의 다 포함하고 있다.
그밖에 종교적 신행법에 관한 내용은 경전의 전편에 널리 깔려 있다. 법원의 견지에서 볼 때 경전 내용은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법적 원칙만 제시했을 뿐이며, 초기 이슬람시대의 사회환경을 반영한 것으로 그 적용에서는 시대적 한계성을 면할 수가 없다.
샤리아의 두번째 법원은 무함마드의 언행을 수록한 준경전격의 ‘하디스(일명 쑨나)’다. 이 언행록에는 무함마드가 생전에 한 말과 행동,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해 묵인한 것 등 3가지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법적 준거로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경전과 언행록의 두 법원에서 판결의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그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 이른바 유추(類推, 끼야스)와 합의(合議, 이즈마아)의 두 가지 법원이다.
이미 발효된 법적 범례에서 유사한 사항을 찾아내어 비교 유추하거나 관행에 비추어 결정하는 것이 법원으로서의 유추다. 이와는 달리 종종 유추해서도 판단이 불가능한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주로 법학자들이 집단적으로 협의해 결정을 도출한다. 이것이 법원으로서의 합의다. 이러한 법원, 특히 유추와 합의에 의한 법원의 당위성이나 효력성에 관해 많은 논란이 계속되어오다가 8세기 말엽에 이르러 법학자 샤피이가 최종적으로 정리해냄으로써 마침내 4대 법원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일단 확정된 법원일지라도 그 해석이나 적용범위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발생하여 결국 법학파가 생겨나고, 법학파들간의 논쟁 속에서 이슬람법학(피끄흐)이 정립되었다. 그 결과 8~9세기에 정통 이슬람사회에는 4대 법학파가 출현했다.
가장 이른 법학파는 8세기 초 이맘 아부 하니파(699~ 767)가 이라크에서 세운 하나피야파(일명 이라크파)다. 이 파는 이성과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경전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개인적인 견해(라어이)에 따라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유추를 법원으로 인정하여 법적 판단에 가장 많이 적용했다.
다음으로 이맘 말리크 븐 아나스(714~795)가 메디나에서 결성한 말리키야파(일명 메디나파)다. 당시 메디나는 이슬람공동체의 발원이자 중심지로서 이슬람의 전통과 관행이 잘 보존되어온 고장이었으며, 이맘 말리크는 하디스 수집의 대가였다. 그리하여 이 법학파는 메디나의 전통과 구전되어온 하디스에 준하여 법이론을 발전시켰다.
세번째 법학파는 이맘 말리크의 수제자인 무함마드 븐 이드리스 알 샤피이(767~820)가 이끈 샤피이야파다. 말리키야파뿐 아니라, 하나피야파의 법학까지도 정통한 샤피이는 815년 이집트 카이로에 옮겨가 전승을 위주로 하는 말리키야파와 이성을 중시하는 하나피야파의 법학을 절충하여 독자적인 새 법학체계를 세웠다. 그는 하나피야파가 즐겨 적용하던 유추를 최소화하고 말리키야파의 중심체계를 이루고 있는 메디나 전통과 관행 중에서 오직 하디스만을 골라 법원으로 채택했다.
마지막 법학파는 샤피이의 제자인 아흐마드 븐 한발리(780~855)에 의해 출현한 한발리야파다. 한발리는 앞 3파가 유추와 합의를 법원으로 채택한 것을 반대하면서 오직 경전과 하디스만을 법원으로 인정하고 독자적인 법학체계를 세웠다. 그는 이성의 적용으로 인해 인위적인 것이 출현하면 그만큼 순수한 진리에서 멀어지는 위험성이 있다고 역설하면서 비록 확실성 검증에서 판시(判示)된 약한 하디스일지라도 이성에 의한 법원보다는 진리에 더 가깝고 옳은 법원이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한발리야파는 유추나 합의의 법원을 부정하고 보수적이며 경직된 법학을 고집했다. 한발리는 얼마나 보수적이고 경직적인 사고를 했는지 무함마드가 수박을 먹어도 좋다고 한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평생 수박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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