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미국보다 한반도의 운명에 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현실은 분명 아이러니다. 과연 북한과 미국의 교착상태는 4년 더 계속될 것인가. 현재의 난관을 타개할 방법은 있는가.
- 아니면 더 심각한 위기가 기다리는 것일까. 노무현 정부에겐 6자회담의 재가동뿐 아니라 지난 4년간 이뤄내지 못한, ‘의미있는 진전’을 만들어야 할 숙제가 놓여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국제위기감시기구(International Crisis Group)는 북한과 6자회담의 미래에 대한 최근 보고서에서 이와 관련된 로드맵을 제안한 바 있다(www.icg.org에 게재된 보고서 참조). 미국이 진지하고 성실한 제안을 꺼내놓아야만 다른 6자회담 참가국들이 북한을 압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2기 부시 행정부가 기존의 대외정책 기조, 특히 한반도 정책에서의 일방주의와 강경노선을 벗어날 확률은 현재로는 거의 없어 보인다. 대선 레이스가 진행되는 동안 부시 대통령과 참모들은 미국이 무력침공을 포함한 대외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아무에게도 ‘허가장’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누차 언급해왔다. 국민 투표를 거쳐 재선에 성공하고 의회 의석수를 추가로 획득함으로써 부시 대통령은 그러한 자신감을 더욱 강화하게 됐다. 이제 부시 행정부는 자신의 정책을 대중이 ‘위임’했다고 공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2기 부시 행정부의 새 외교안보팀은 동맹국들과의 협의를 필수적인 의무로 여기지 않을 공산이 크다. 오히려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만 이러한 절차를 거치게 될 수도 있다. 동맹국과 적국을 모두 정적을 상대하듯 대하며 “우리 팀에 끼든지 아니면 우리 도움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2기 행정부가 대북정책 혹은 한반도 정책에 있어 1기 행정부와 크게 다른 변화를 보여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가 북한에 대해 이전보다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당분간 ‘무시전략’ 택할 가능성 높아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부시 대통령의 의사결정 과정이 갖고 있는 특성 때문이다. 정밀한 현실분석이나 상황파악 보다는 본능적인 직감에 의존하는 듯 보이는 이 특성은 그간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 결정과정에 끊임없이 확인된 바 있다. ‘뉴욕타임스’가 10월17일자 커버스토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부시 대통령은 핵심적인 의사결정 단계에서 ‘사실’보다는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나 믿음을 근거로 삼는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듯 부시 행정부가 전세계 곳곳을 향해 펼친 ‘신앙에 기초한 대외정책’의 가장 참혹하고도 극명한 결과가 바로 이라크였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미국과 다른 나라의 관계가 그 나라의 정부 지도자들과 부시 대통령의 개인적인 친소(親疏)관계에 좌우된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부시 행정부가 영국이나 일본, 러시아 등과 유지하고 있는 이른바 ‘대단히 긴밀한 파트너십’의 근거가 무엇인지 설명해준다.
반대로 지난 4년간 워싱턴과 평양 사이에 오간 험담과 모욕은, 아시아 내의 미국 협조자들이 북한을 설득해 협상 테이블에 앉게 만드는 작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 정부는 부시 행정부 외교안보팀과 직접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부시 행정부가 북한문제를 대외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놓게끔 만드는 일이다. 야심만만한 국내 의제가 산적한 데다 대외적으로는 이라크 안정화 작업이 현재 최고의 관심사이고 보면, 부시행정부는 새로운 외교안보팀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동안 단기적으로 북한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방안을 정책기조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 11월초 선거가 끝난 이후 현재까지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한 일이 거의 없다는 의외의 사실은 이를 방증하는 포인트다.
부시 대통령은 당면한 최우선 과제로 중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대다수 대외정책 분석가들도 이란의 핵 잠재력 보유문제를 북한 문제보다 우선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이 이미 핵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매우 아이러니컬하다.
11월 초에 이란이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과 맺은 합의가 유지되는지도 꾸준히 지켜봐야 할 문제다. 네오콘들은 시리아가 테러세력과 연계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의 사망은 워싱턴이 중동문제에 몰두하게 만들 공산이 크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당분간 미국이 적극적이고도 주의 깊은 대북정책을 추진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부시 대통령의 2기 내각구상을 살펴보면 낙관적인 전망을 갖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첫 번째 임기 동안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딕 체니 부통령은 두 번째 임기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부통령 한 사람이 갖는 부정적인 세계전망이 다른 내각 구성원이 모두 합의하는 전망보다 대외정책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더욱 크다.
더욱이 1기 행정부에서 유일하게 신중하고 온건한 목소리를 내온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2기 행정부에서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내각을 떠나기 전에는 그도 장관직을 그만두지 않으려 한다는 정가 루머에서 알 수 있듯 남아 있는 것은 정확한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것뿐이다.
현재 파월 장관의 후임자로 거론되는 인물들은 그의 위상에 턱없이 못 미치는 데다 백악관의 강경파에 대항할 의지도 거의 없어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1기 외교안보팀의 큰 특징이었던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분열과 대립’은 이제 막을 내릴지도 모른다.
만일 폴 월포위츠 현 국방부 부장관이 2기 행정부 출범과 동시에 승진한다면 이는 외교안보라인에서 네오콘 진영이 앞으로도 우세하리라는 것을 시사하는 징표다. 같은 의미에서 존 볼튼 국무차관이 새로운 직책을 얻는다면 이도 강경파가 지속적으로 대외정책을 진두지휘할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이렇듯 행정부 내에서 파월과 같은 유능한 온건파 인사가 사라지게 되면 2기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당연히 보수적인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관심이 가는 또 한 가지 대목은 한국 국민에게도 낯익은 미국 정부 관계자들의 장래다. 현재 대아시아 정책을 담당하는 실무전문가나 외교관의 경우 대폭적인 인사조치가 예상된다. 가장 먼저 세간의 교체 예상자 리스트에 오른 인물은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다. 그 밖에 다른 관료들도 학계로 돌아가거나 싱크탱크로 이동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이러한 실무 전문가들의 변동은 정책변화와는 큰 관련이 없다. 새롭게 실무진으로 등장할 사람들의 성향도 정책변화와 관련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대부분 상관의 강력한 통제에 놓여 있는 실무자 그룹은 정책에 대해 실질적인 영향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그간의 6자회담 과정에 켈리 차관보가 북한과 실질적으로 협상할 권한 없이 단순히 전달자 노릇을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껏 부시 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당혹감 때문이든 정기적인 인사이동의 일환이든 적잖은 아시아 관련 정책 담당자와 실무 전문가가 교체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부시 행정부의 고위관료들이 아시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이들을 실무자로 발탁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한 인사는 필자에게 “이미 정책방향이 결정돼 있다면 정보나 사실관계를 많이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말했다.
감정을 넘어 실용주의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2기 부시행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해 필자는 사실 대단히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런데도 남아있는 가능성은,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 북한 문제를 접근하는 데 이데올로기나 감정보다는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우선할 경우의 수가 여전히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우선 중국과 파키스탄의 경우를 상기해보자. 부시 행정부 외교안보팀은 두 나라에 대해 실용주의적 접근법을 고수해왔다. 각각 독재국가 혹은 미국에 대항하는 잠재적인 적국이지만 미국은 이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 문제에서는 양자간의 무역과 투자이익이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중요했고, 파키스탄의 경우에는 테러와의 전쟁에 충실한 동맹관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둘째 근거는 아무리 경직된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도 현실의 영향을 아예 안 받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설령 부시 대통령이 자신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수긍하지 않는다 해도 외교안보팀은 비공식적으로나마 자신들의 대북정책이 애초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인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비축하고 잠재적으로 핵물질과 대량살상무기를 확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 그간 부시 행정부가 취한 정책의 실패에 기인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셋째 근거는 2기 외교안보팀의 학습과정이 1기에 비해 훨씬 짧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클린턴 대통령도 대외정책 결정과정에서 험난한 출발을 겪었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이른바 1차 북핵 위기를 가까스로 해소할 수 있었다. 부시 대통령도 현재의 교착상태로 인해 북한의 벼랑 끝 외교에 관해 그간 톡톡히 배웠다고 볼 수 있다.
넷째로는 다른 답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아무리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을 ‘증오’한다손치더라도, 아예 협상을 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될 상황은 더욱 끔찍할 수밖에 없다. 긴장과 전쟁위협이 지속적으로 증대하고 북한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핵무기 대형할인점이 되는 상황을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라크전이 이렇게 악화되지 않았다 해도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은 현실적으로 결코 선택할 수 있는 답안이 아니었다.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도 서울, 베이징, 모스크바, 도쿄가 동참할 의사가 전혀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실행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공화당 출신 대통령인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위상을 감안할 때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협상에 착수하는 경우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의회가 그러한 합의를 받아들이게끔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껄끄러운 선택
단기 혹은 중기적인 시점만 놓고 보자면, 부시 행정부는 6자회담과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을 통한 압박이라는 두 가지 수단을 조합해 대북정책을 이어나갈 가능성이 높다. 6자회담은 북한과의 협상을 유지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수단이기는 하지만, 워싱턴과 평양이 열의를 갖고 진전을 이끌어내지 않는 한 얼마나 많은 나라가 참가하느냐 혹은 얼마나 자주 만나느냐는 별 의미가 없다.
반면 10월에 열린 PSI 훈련은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의심스러운 핵물질 거래를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일종의 경고였다. 미 행정부의 네오콘 관계자들이 불법적인 핵 거래가 워싱턴이 설정한 ‘레드 라인’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것을 감안하면 차기 부시 행정부 대외정책의 중대한 시발점은 이른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수단을 강화하는 작업이 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외교적 수단이나 압박책은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협상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지 않는 한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난 6월 열린 3차 6자회담에서 부시 행정부가 보여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유연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과연 정책이 근본적으로 변했음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외교관련 이슈가 대선에서 불거지는 것을 막고 별다른 결실이 없는 북핵 회담에 대해 실망한 나머지 4개 참가국을 회유하기 위한 전술적 움직임에 불과한 것일까.
재미있는 것은 이를 통해 미국이 전에 비해 합리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비치자 평양은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존재로 보였다는 점이다. 특히 북한이 9월에 열릴 예정이던 4차 회담을 거부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만약 북한을 더욱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방안이 다른 6자회담 참가국들에게 조금이라도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면 아마도 미국이 회담을 거부할 상황이었다.
어쨌든 6월에 미국이 다소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는 사실은 4개 주변국의 압력이 부시 대통령의 북한 문제 접근법에 다소나마 영향을 주었음을 의미한다. 부시 대통령은 6자회담을 다시 가동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동아시아 동맹국들의 지지를 고대할 것이다.
이제 우리 앞에는 다시 부시 대통령과 함께해야 할 4년이 놓여있고 노무현 정부는 다음과 같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해 있다. 지난 2년 동안 그러했듯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문제해결 가능성을 높여줄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과 좀 더 친밀하게 협조하는 방안을 택할 것인지.
‘친밀함’을 가볍게 보지 말아야
최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해 대북경제협력정책에 관해 동의를 얻은 일이나, 한국 국방부가 펜타곤과 기타 정부 관계자들을 설득해 주한미군 재배치 일정을 연기할 수 있었던 일 등은 의미심장하다. 북핵 문제에 신중한 행보를 취하는 한국 정부가 미국의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긍정적인 전망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부는 부시 대통령과 또 다른 4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체념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 정부가 부시 행정부와 긴밀히 협조해 북한문제 등 다양한 숙제를 공동으로 풀어나가는 방법을 모색 중이라는 징조는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미국 대선에서 누가 승리하기를 원하는지 명확히 밝힌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와 달리 노무현 대통령과 그의 외교안보팀은 현명하게도 선거기간 동안 침묵을 지켰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이틀 뒤 한반도 안정을 위한 양국의 노력에 관해 공감대를 확인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 대통령은 개인적인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11월 하순 칠레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담에서, 재선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며 새로운 내각을 구상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과 북핵 문제에 관한 강력하고도 새로운 제안에 합의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이번 회담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성과는 두 정상이 긴밀한 개인적 우정을 구축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만일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에게 별명을 붙여주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일이다. 이는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을 진정한 친구로 생각한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미국측 인사들을 만나 한반도 상황의 민감성에 대해 종종 상기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한 작업이다. 북한인권법이 별 무리 없이 통과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듯 미 의회는 대북정책에 점점 강경노선으로 기울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한국 정부가 북한 문제와 관련해 2기 부시행정부와 공감대를 넓혀나가는 작업은 단순히 한국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이 누적되면 워싱턴이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이 벌이는 다각적인 대북접근 노력도 계속해서 용인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노무현 정부가 앞으로도 북한에 대해 외교적·경제적 개입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북한은 남한의 경제적 인센티브에 대해 미국의 강경정책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호의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를 준비하는 자세
한국 정부는 앞으로도 자신의 접근방식이 가진 의미에 대해 부시 행정부를 계속 설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양국 정부가 북한에 대해 사용할 당근과 채찍을 함께 조율하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 워싱턴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북한에 제공할 준비를 해야 하고, 서울은 북한이 그러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좀더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앞으로 올 4년도 계속 교착상태로 흘려보내지 않으려면 한국은 주변국들과 협력을 유지하며 부시 행정부를 좀더 유용하다고 생각되는(한국 정부가 그간 북한을 상대하며 터득한) 대북정책방향으로 이끄는 신중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팀이 중동문제에 몰두한 현재 상황을 감안할 때 주의가 분산된 미국에 건설적인 자극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관료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미국에게 핵심적인 정책방향을 교체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정책틀 안에서 건설적이고 유용한 수단을 찾아나가는 것이 한국 정부에게도 긍정적인 결과물을 가져다줄 것이다.
2기 부시 행정부의 북한문제 접근법이 1기에 비해 유화적으로 변할 가능성은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북한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미국의 안보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요소로 생각한다. 이러한 국내상황은 부시행정부 외교안보팀이 북한을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게끔 요구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8년 임기를 보낸 뒤에도 부시 대통령이 북한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미국의 유권자들이 지난 11월2일 부시에게 보여준 친절함은 사라져버릴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언제가 되든 이러한 변화가 나타날 경우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한반도정책 조정과정에 적극 개입할 수 있도록 사전에 준비할 필요가 있다. 서울이 일본과 중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다면 이러한 노력은 더욱 큰 효과를 거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주변국과의 긴밀한 협조는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의 관심을 자극할 만한 제안을 마련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과연 북한의 구미를 당길 만한 제안이란 무엇일까. 국제위기감시기구에서는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공개하고 폐기하면서 동시에 경제지원과 에너지, 안보적 이득을 순차적으로 제공받는 8단계 로드맵을 제안한 바 있다. 처음에는 일단 협상의 초점을 북한의 제반 핵 활동에 맞추고 인권문제와 같은 민감한 이슈는 차후에 논의하기로 한 것도 생각해볼 만한 방법이다.
실제로 협상이 진행되면 구체적인 진행단계는 그때그때 변하겠지만, 일단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유도할 수 있는 첫 단계로는 영변 핵시설의 검증 가능한 동결을 조건으로 다자안전보장을 제공하는 방안이 있을 것이다. 에너지 패키지를 제공하는 문제는 북한의 과거와 현재 핵 활동이 완전히 공개된 뒤에야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각 단계별로 사전에 충분히 논의해야 추후 상황이 악화되어도 어느 쪽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물론 상호 불신이 깊은 만큼 이러한 협상 과정은 강력한 검증체제가 필요하다.
프로세스의 마지막 단계에서 북한은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포기해야 한다. 대신 북한은 일본과 수교를 맺고 미국과 연락사무소를 교환 설치하며 상당분량의 에너지 지원을 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북한이 실제로 느끼는 경제적·군사적 불안은 매우 줄어들 것이다. 만약 북한이 개혁과 대외경제개방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면, 현재 상황에서는 핵 협상을 유리하게 활용하는 것이 유일한 살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시 행정부가 아무리 매력적인 제안을 던진다 해도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는 협상내용에 동의할 리 없다는 의견에도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 북한이 흔히 말하듯 ‘기회를 놓칠 기회를 놓치지 않는’ 행보를 거듭해온 까닭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면 북한이 핵 억제력을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체제 교체(Regime Change)’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협상을 위한 진지한 노력이 시도되지 않는다면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