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개방성·개혁성 과시하는 ‘퇀파이’의 차세대 유력인사 5인

  • 하종대│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전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입력2011-01-21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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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오러지 산시성 서기
    • 왕민 랴오닝성 서기
    • 장바오순 안후이성 서기
    • 선웨웨 당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
    • 쑹슈옌 중화전국부녀연합회 부주석
    지난 7개월간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중국의 차세대 지도부 인물은 모두 2012년 가을 열릴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직후 구성될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상무위원 유력 후보였다. 이들 13명 중 시진핑(習近平·58) 국가부주석과 리커창(李克强·56) 국무원 부총리는 2007년 10월 구성된 제17기 중앙위원회에서 이미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됐다. 또 리위안차오(李源潮·61) 당 중앙조직부장이나 보시라이(薄熙來·62) 충칭(重慶) 시 서기 등 9명은 당 중앙정치국 위원이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의 문턱에까지 이미 다가간 셈이다. 링지화(令計劃·55) 당 중앙판공청 주임이나 왕후닝(王?寧·56) 당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은 모두 당 중앙서기처의 서기로 당 중앙정치국 위원이나 국무위원과 마찬가지로 국가영도자급에 속한다.

    현재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9명으로 모두 국가원수급이다.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당 중앙정치국 위원은 상무위원 9명을 포함해 25명이다.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려면 먼저 중앙정치국 위원이 돼야 한다. 국가영도자로 불리는 중앙정치국 위원은 최소한 부총리급이다. 앞으로 소개할 인물들은 2012년 가을에 열릴 제18차 당 대회에서 중앙정치국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은 유력 후보들이다. 이들은 현재 대부분 중앙 정부의 장관급 직책이나 지방 성의 당 서기 등 최고책임자 자리를 맡고 있다. 중앙 정부의 부장이나 지방 정부의 성장 또는 당 서기는 모두 장관급 직책이다.

    이들 중 이번 호에 소개하는 인물은 차세대 지도부에 진입할 유력 인물 중 ‘퇀파이(團派)’ 소속이거나 퇀파이의 좌장인 후진타오(胡錦濤·69) 국가주석과 개인적 친분을 갖고 있는 인물 5명이다. 퇀파이란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共靑團) 출신의 간부를 일컫는 말로 후 주석이 집권한 2002년 이후 중국 정계에서 가장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정치 계파를 말한다.

    퇀파이의 교주(敎主)는 후야오방(胡耀邦·1915~89) 전 당 총서기다. 1933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항일 투쟁을 거쳐 사회주의 중국이 건설되자 공산주의청년단 업무를 맡았으나 문화대혁명으로 공청단 중앙서기처가 해산되면서 실각했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사망 직전 복권된 덩샤오핑(鄧小平)의 후원으로 다시 정계로 돌아와 1982년 당 중앙서기처 총서기까지 올랐다. 하지만 사상 해방과 언론자유 허용, 개인 자유의 신장, 법치주의, 당내 민주화 등 과감한 정치개혁을 추진하다 1987년 덩샤오핑에 의해 총서기직에서 축출됐다. 1989년 6월4일 발생한 톈안먼(天安門)사태 역시 같은 해 4월15일 사망한 그를 추모하는 열기로 시작돼 민주화 요구운동으로 발전했다. 따라서 퇀파이 인사들은 비교적 개방적인 정치적 태도를 보인다.

    이처럼 후야오방을 교주로, 후진타오를 좌장으로 하는 퇀파이 세력은 줄잡아 수백여 명에 달한다. 하지만 핵심 세력은 이른바 8대 천왕(天王)과 8대 금강(金剛) 등으로 불리는 인사를 포함해 수십여 명 선이다. 퇀파이의 핵심 인물 가운데엔 차세대 지도부의 유력 후보가 많다. 차세대 지도부에서 퇀파이가 더욱 맹위를 떨칠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번에 소개할 인물 5명 중 장바오순(張寶順·61) 안후이(安徽)성 서기와 선웨웨(沈躍躍·54)는 퇀파이의 8대 금강에 꼽히는 인물들이다. 각각 공청단에서 14년4개월과 12년9개월씩 근무한 공청단 핵심 멤버다. 8대 금강에서는 빠졌지만 쑹슈옌(宋秀岩·56) 중화전국부녀연합회 부주석 역시 공청단에서 11년9개월간 일했다. 자오러지(趙樂際·54) 산시(陝西)성 서기 역시 공청단에서 3년4개월간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공청단 서북방 지역의 핵심 멤버다. 학자 출신인 왕민(王珉·61) 랴오닝(遼寧)성 서기는 후 주석이 특별히 후원하는 측근 중 한 명이다.

    ▼ 자·오·러 ·지

    개방성·개혁성 과시하는 ‘퇀파이’의 차세대 유력인사 5인
    영원한 칭하이(靑海)맨

    자오러지 산시성 당 서기는 1980년대 초 칭하이(靑海)성 상업청에서 공청단 서기로 일하는 등 공청단에서 3년4개월 근무한 바 있다. 후진타오 주석의 공청단 직계로 서북방 공청단의 핵심(骨幹·골간) 인물로 불린다. 현재는 산시성 서기를 맡고 있지만 실은 ‘영원한 칭하이 맨’이다. 칭하이의 성도 시닝(西寧)에서 태어나 베이징(北京)대를 다닌 3년을 제외하고는 지난해 3월 산시성 당 서기로 전보되기 전까지 47년을 칭하이성에서 살았다. 그는 2007년 3월 산시성 서기로 부임하기 위해 칭하이성을 떠나면서 “오늘 이후 내가 어디 있든지 나는 항상 칭하이와 꿈에서도 연결돼 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칭하이성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사회경력 역시 칭하이 일색이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4년 9월 칭하이성 구이더(貴德) 현 허둥(河東) 향 궁바(貢巴)대대(大隊)에서 지식청년으로 일하기 시작한 그는 1975년 7월 칭하이성 상업청 통신원을 거쳐 1977년 2월 베이징대에 입학하기 전까지 칭하이성에서 지냈다. 대학 졸업 뒤에는 또다시 칭하이성 시닝으로 돌아와 1980년 1월 성 상업청 정치처 간사, 1984년 12월 칭하이성 우진자오뎬(五金交電) 화공공사 당위 서기, 1986년 4월 성 상업청 부청장, 1991년 2월 상업청 청장 등 줄기차게 칭하이성에서 경력을 쌓았다. 1993년 2월 성장 조리(助理)로 승진한 그는 1994년 7월 부성장, 1999년 8월 대리성장을 거쳐 2000년 1월 마침내 칭하이성의 최고 행정직인 성장을 거머쥐었다.

    당시 그는 만 42세10개월로 전국 성장 가운데 최연소였다. 1987년 1월 랴오닝성장에 임명된 리창춘(李長春) 정치국 상무위원은 만 42년11개월로 그보다 1개월 늦다. 리커창 부총리는 만 43세 때 대리성장을, 만 44세에 성장을 달았다. 40대의 나이로 중국 공산당 최고정치권력기구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이 된 것도 개혁개방 이후 후 주석이 처음이다.

    칭하이성의 대리성장과 성장, 당 서기를 거치는 8년간 그는 칭하이성의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성장 및 당 서기로 재직하던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칭하이성의 지역총생산(GRDP)은 263억위안(약 4조4439억원)에서 784억 위안(약 13조2472억원)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하지만 그가 성장만을 중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급속한 성장보다 지속적인 발전을 더 원했다. “동부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반복하지 마라.” 그는 칭하이성 간부들을 모아놓고 자주 이렇게 강조했다. 그가 원한 것은 초고속 성장보다 환경과 성장의 조화였다. 그는 소득증대에 도움이 되더라도 공해산업은 최대한 억제했다. 대신 칭하이성의 천연지형을 이용한 수력발전과 소금, 관광업에 치중했다. 그는 2005년 7월 한국의 이수성 전 총리가 칭하이성을 방문했을 때 “환경을 보호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킨 한국의 경험을 배우고 싶다”고 말할 만큼 환경과 성장의 조화에 애착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2000년 전국 31개 성 가운데 21위였던 1인당 GDP는 2006년 23위로 되레 떨어졌다. 인구의 20%가량은 여전히 절대빈곤선 아래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 정협) 회의가 열리던 2006년 3월 그는 기자들과 만났을 때 갑자기 ‘쾌락지수’ 얘기를 꺼냈다. “칭하이성은 소득도 적고 여러 가지 조건도 안 좋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항상 즐겁게 하려 합니다. 높은 고원에서 마음까지 유쾌하지 못하면 병을 얻기 쉽지요.” 그는 기자들에게 “칭하이성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못 살지만 각 소수민족과 촌락, 가정이 모두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고 소개했다.

    그가 이처럼 고속성장보다 환경보호를 더 중시한 것은 칭하이성은 자원의 보고로 환경을 훼손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아도 발전 잠재력이 무한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칭하이성은 ‘중국의 물탱크’로 불릴 만큼 수자원이 많고 매장 석유 2억2000만t, 천연가스는 1575억㎥에 달한다.

    하지만 그는 이제 산시성의 발전을 책임지고 있다. 산시성 시안(西安)은 그의 조적(祖籍)이 있는 곳이다. 출생지가 칭하이성이라면 출신지는 산시성인 셈이다. 그는 지난해 3월 산시성 당 서기로 부임한 직후 가진 직원과의 상견례에서 “앞으로 전력을 다하겠다”며 출신지 발전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지방 당 서기 중에서 표준 중국어인 푸퉁화(普通話)에 약한 유일한 사람이다. 사회 경력 역시 칭하이성을 제외하고는 산시성 서기가 전부다. 후 주석과 같은 퇀파이지만 중앙 무대로 진출하기가 쉽지 않고 중앙으로 진출하더라도 역할이 크게 제한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인구 560여만명의 칭하이성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그지만 인구가 6.8배 많은 산시성에 가서는 별다른 정치적 업적을 쌓지 못하고 있는 점도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자오 서기는 2002년 10월에 열린 제17차 당 대회 당시에도 중국 정계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후보로 집중 거론됐지만 끝내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1년 뒤로 다가온 제18차 당 대회에서는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중앙정치국 진입이 가능할 것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 왕·민

    ‘지린 속도’ 신조어 만든 학자 출신

    개방성·개혁성 과시하는 ‘퇀파이’의 차세대 유력인사 5인
    왕민 랴오닝성 서기는 공청단 출신은 아니다. 하지만 후 주석의 고향인 안후이(安徽)성 출신으로 공청단 출신 못지않게 후 주석의 배려를 받고 있다. 후 주석의 고향 지시(績溪)현과 그의 출신지 화이난(淮南)시는 약 400~500㎞ 떨어져 있다.지린(吉林)성 당 서기에 임명된 2006년 12월 그는 당 중앙위원은커녕 후보위원도 아니었다. 당의 후보위원도 아닌 사람이 지방 제후인 당 서기에 임명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중국 정치에 정통한 전문가에 따르면 장쩌민 주석 시절 총리를 지낸 주룽지(朱鎔基·83)가 1987년 국무원 소속 국가경제무역위원회(國家經委) 당조(黨組)부서기에서 상하이(上海)시장으로 옮긴 외에는 이처럼 발탁한 전례가 거의 없다고 한다.

    2004년 10월 지린성의 부서기 겸 대리성장으로 임명된 왕 서기는 2009년 11월 랴오닝성 서기로 전보되기 전까지 5년여 간 지린성에서 성장과 당 서기, 인민대표대회(인대·人大) 상무위원회 주임 등으로 재직하면서 ‘지린(吉林) 속도’라는 말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2005년 9월2일 지린성은 성도 창춘(長春)에서 제1회 지린동북아투자무역박람회를 개최했다. 중앙 정부가 이를 정식 허가한 것은 같은 해 4월로 그는 단 5개월의 준비로 국제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국제박람회를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최소 1년인 점을 감안하면 ‘지린 속도’라는 말이 나올 만하다.

    왕 서기가 2005년 1월 지린성 성장으로 취임한 뒤 내건 슬로건은 ‘콰이쩌우(快走·빨리 걷기)에서 콰이파오(快?·빨리 뛰기)로’였다. 실제로 왕 서기가 성장과 당 서기로 재직하던 5년간 지린성의 지역총생산은 2004년 3122억위안(약 52조7524억원)에서 2009년 7200억위안(약 122조1336억원)으로 2배 이상 늘었다.

    왕 서기는 이전부터 ‘속도 왕’이었다. 중국 정부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최첨단기술단지 쑤저우(蘇州)공업원구는 그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장쑤(江蘇)성은 1994년 7월 쑤저우 공업원구를 개발하기 위해 당초 난징(南京)항공우주대학 부(副)교장이던 그를 성장 조리(助理·차관보급 직위)로 전격 스카우트했다. 그가 장쑤성 부성장과 쑤저우시 서기로 재직한 2004년 10월까지 쑤저우 공업원구의 연간 성장률은 무려 40%에 달했다. 이 지역 연간 무역액은 500억달러를 넘고 쑤저우 시민 소득은 2006년 1만달러를 넘어섰다. 그가 낙후된 노(老)공업기지인 지린에 이어 랴오닝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도 바로 쑤저우의 이런 실적 때문이다.

    하지만 왕 서기는 지린성 서기로 재직할 당시 지역 발전을 위해 백두산을 개발하면서 주변 국가와 적잖은 마찰을 빚었다. 그는 당초 옌볜(延邊)조선족 자치주가 갖고 있던 백두산의 관할권을 백두산의 본격적인 개발을 위해 2005년 8월 발족시킨 지린성 직속의 백두산(중국명 창바이산·長白山)보호개발관리위원회로 옮기게 했다.

    또 백두산에 관광객을 유치하고 공항과 철도, 도로를 건설하면서 당초 백두산 지역에서 사용하던 한자와 한글 병용 간판을 모두 떼고 한자와 영문 간판으로 바꾸게 했다. 그는 이와 함께 백두산 인삼은 중국명인 ‘창바이산 인삼’으로 모두 통일하고 2006년 7월엔 백두산보호개발관리위 산하 18개 초중고교의 이름에 모두 ‘창바이산’을 넣어 짓도록 했다. 한마디로 백두산 지역의 한민족 흔적 지우기에 나선 것이다.

    실제로 왕 서기는 2006년 초 지린성 동쪽 끝에 위치한 훈춘(琿春)시로 하여금 북한 경제특구인 나선시와 항만 개발 및 항구 50년 사용권 협정을 체결하도록 해 지린성의 동해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지린성의 기업들은 2005년 10월 후 주석의 북한 방문을 전후해 북한의 광산 개발권을 대거 따냈다. 지린성이 북한과 인접한 지린성 내 도로망 건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것도 왕 서기가 지린성으로 온 뒤부터다.

    왕 서기는 ‘안후이방(安徽幇)’으로 불린다. 현재 안후이성 출신은 후 주석을 비롯해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과 리커창 상무위원 등 중국 정치권력의 심장부인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만 3명이나 포진해 있다. 9명의 상무위원 중 3분의 1이 안후이성 출신이다. 또 2012년 가을 열릴 제18차 당 대회에서 상무위원 0순위인 왕양(汪洋) 광둥(廣東)성 당 서기도 안후이방이다.

    왕 서기는 관리로 발탁되기 전 오랫동안 대학교수로 지냈다. 난징항공학원(현 난징항공우주대학) 기계제조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난징항공우주대에서 기계제조과 주임과 난징항공학원 비서장과 부원장을 거쳐 부교장까지 지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학문에 조예가 깊고 빈틈이 없으면서 매우 엄격하지만 성격은 활달하고 시야가 넓으며 포용력이 매우 크다고 평가한다. 강의 때는 아주 엄격했지만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과는 매우 친근하게 어울렸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언론과의 만남에서 “관리를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교수를 하고 있을 것”이라며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감추지 않았다.

    후 주석의 직계로 정치적 업적 또한 만만치 않은 그가 1년여 뒤 중국 정치권력의 심장부인 중앙정치국에 진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다.



    ▼ 장·바·오·순

    잘나가다 뒤처진 공청단 8대 금강

    개방성·개혁성 과시하는 ‘퇀파이’의 차세대 유력인사 5인
    장바오순 안후이 성 서기는 공청단 출신 지도자 가운데 최근에 크게 밀린 인물 중 한 명이다. 장 서기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부부장급인 공청단 서기를 지냈다. 그가 공청단 중앙서기처의 후보서기 및 서기를 지낸 시기는 1982년 12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9년. 이 시기에 공청단 중앙서기처 후보서기 및 서기를 지낸 사람은 리커창 상무위원과 리위안차오 당 중앙조직부장, 류옌둥(劉延東·66) 중앙정치국 위원 겸 전국 정협 부주석 등이다.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모두 국가영도자 급인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했다.

    그와 경력이 가장 비슷해 중국의 정치분석가 사이에 곧잘 비교되는 사람은 공청단에서 똑같이 10년 이상씩 근무해 퇀파이의 핵심인물이 된 리 중앙조직부장이다. 장 서기는 1978년 12월 공청단 중앙청년공작부 간사를 시작으로 1993년 4월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 겸 전국청년 주석을 끝으로 공청단을 떠날 때까지 무려 14년4개월을 공청단에서 근무했다. 리 중앙조직부장도 1978년 푸단(復旦)대 수학과 지부 부서기를 시작으로 1990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까지 12년을 공청단에서 일했다.

    이들 두 사람은 1990년대 초반 똑같이 공청단에서 빠져나와 ‘전업(轉業)’한 것도, 심지어 성의 부서기 및 서기로 나가기 전에 8~10년씩 오랜 기간 실권 없는 부(副)부장급 직책을 떠돌았다는 점도 흡사하다. 한때 잘나가던 그는 그러나 1993년 4월부터 2001년 9월 산시성 부서기로 옮길 때까지 8년5개월을 자신의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언론 분야의 한직을 맴돌아야 했다.

    젊은 시절 그를 주목했던 정치 분석가들은 이 기간 그를 백안시했다. 하지만 그는 2001년 9월 산시성 부서기 겸 산시성 당교 교장으로 전보됐다. 2년 반 뒤에는 산시성의 대리성장에 당선됐다. 부부장 또는 부성장급 자리에서 13년 만에 부장급 또는 성장급에 오른 것이다. 2005년 7월엔 산시성 서기로, 나아가 2006년 1월엔 산시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자리까지 꿰찼다. 같은 해 10월엔 당 서기 연임에 성공했고 2010년 1월엔 인대 주임까지 연임에 성공했다. 이어 6월엔 후 주석의 고향인 안후이성의 최고책임자가 됐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철저한 실력 덕분이다. 2001년 9월 그가 산시성에 부임한 뒤 2002년 전국 31개 성 가운데 21위였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06년 15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2005년 성급 지도자 평가에서 그는 왕치산(王岐山) 베이징시장과 한정(韓正) 상하이 시장, 리위안차오 장쑤성 서기 등과 함께 우수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전도가 그리 밝은 것은 아니다. 중국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에너지인 석탄의 4분의 1은 ‘석탄의 보고(寶庫)’로 불리는 산시성에서 채굴된다. 문제는 석탄을 캐는 광부들의 안전이다. 중국 전역에서 매년 탄광 사고로 사망하는 광부는 4000여 명에 달한다. 산시성에서만 매년 500명 안팎의 광부가 숨진다. 그가 산시성 서기로 근무하던 2006년 5월엔 탄광에 물이 새 56명이 숨졌고 2009년 2월엔 탄광에서 폭발사고로 무려 74명이 숨지고 114명이 부상하는 등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장 서기 하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약법삼장(約法三章)’‘삼불(三不)’‘삼계(三戒)’를 떠올린다. 약법삼장이란 중대 사업이나 중요 자원, 투자비가 많이 들어가는 사업은 절대 혼자 심사 허가하지 않으며, 친구건 친척이건 근무지에서 장사, 투자 등 경제활동에 종사하지 못하게 하며, 절대로 권력을 이용해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삼불이란 작게 열 수 있는 모임은 크게 열지 말고, 짧게 할 수 있는 대회는 길게 하지 않으며, 간편한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모임은 회의를 열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삼계란 감독한답시고 주민 괴롭히지 않으며, 심사 허가한답시고 뇌물 받고자 하지 않으며, 협력한답시고 남의 일 훼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중국엔 예로부터 ‘관리가 새로 부임하면 새롭게 3가지를 시도한다(新官上任三把火)’는 말이 있다. 이후 이 말은 새 관리가 부임하면 ‘티’를 내기 위해 새로운 것 몇 가지는 반드시 시도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대부분 그냥 공염불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언제 시작했느냐는 듯 사라지는 경우도 많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도 바로 그가 ‘허튼 소리’를 하지 않고 한번 내뱉으면 반드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다.

    하지만 뛰어난 실천력에도 불구하고 장 서기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다. 산시성 서기에서 안후이성 서기로 옮긴 것도 전보이지 승진이라고 할 수 없다. 2012년 가을에 열릴 제18차 당 대회 직후 중앙정치국 위원에 선출될지도 그리 확실치 않다. 퇀파이의 핵심인사이면서도 동갑인 리 부장이나 후배인 리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게 밀린 그가 앞으로 어디까지 다시 만회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 선·웨·웨

    후진타오의 홍안지기?

    개방성·개혁성 과시하는 ‘퇀파이’의 차세대 유력인사 5인
    차세대 최고지도자로 확실시되는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집권하는 2012년 가을 ‘중국 정치권력의 심장부’인 당 중앙정치국(현재 정원 25명)에 진입할 5세대 여성 지도자를 꼽으라면 단연 선웨웨 당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과 쑹슈옌 중화전국부녀연합회(약칭 全國婦聯·전국부련) 부주석 겸 서기처 제1서기다. 이들은 현재 중국 공산당 제17기 여성 중앙위원 13명 가운데 선두주자다.

    경력상 부부장(차관)급과 부장(장관)급까지는 2~3년씩 쑹 부주석이 빨랐다. 쑹 부주석은 1998년 차관급에, 2005년 장관급에 올랐지만 선 부부장은 2001년 차관급에, 2007년 장관급(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에 올랐다. 하지만 현재 직위는 쑹 부주석이 일선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난 반면 선 부부장은 8000만 중국 공산당원 가운데 640만 간부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중앙조직부의 상무부부장이다. 경력에서는 쑹 부주석이 다소 앞서지만 당 간부 인사의 총 실무책임자라는 현 직책을 고려할 때 선 부부장이 앞서는 셈이다.

    선 부부장은 특별히 재능이나 정치적 업적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용모 역시 쑹 부주석이 ‘세련된 도시 미녀’라면 선 부부장은 ‘소박한 시골 부녀’ 티가 난다. 하지만 그는 이제 성부급 바로 밑 중간관리의 임면 및 승진을 위한 조사와 평가를 담당하고 있다. 또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임명을 결정하면 당사자가 현지에 순조롭게 부임하도록 모든 일을 그가 도맡아 처리한다. 중국의 모든 정치 계파가 주목하는 정계 요인이 된 셈이다.

    1957년 1월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 시에서 출생한 그는 닝보(寧波)사범전문대 수학과를 졸업한 뒤 닝보제7중학교 공청단 부서기를 시작으로 무려 12년9개월간 공청단에서 지방 간부로 일했다. 이어 1993년 3월 항저우 부서기와 사오싱(紹興) 서기, 저장성 조직부장을 거쳐 2001년 6월엔 안후이성 부서기까지 올랐다. 2002년 11월 후진타오 당 총서기가 집권하자마자 중앙정계로 진출해 요직인 중앙조직부 부부장을 맡은 데 이어 2007년 7월엔 장관급인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까지 거머쥐었다.

    이 때문에 정치분석가들은 그가 퇀파이의 좌장인 후 주석의 든든한 후원을 등에 업고 최근 승승장구하고 있다고 믿는다. 심지어 그를 ‘후 주석의 홍안지기(紅顔知己)’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홍안지기란 중국에서 ‘부인’은 아니지만 ‘친구’보다는 좀 더 관계가 끈끈한 여자친구를 말한다. 중국의 종합검색사이트인 바이두(百度)엔 ‘온갖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밖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 귀소본능을 일으키는 사람’으로 해석돼 있다.

    하지만 그는 공청단에서 근무할 당시 후 주석과 개인적 교분을 나눌 처지가 아니었다. 후 주석보다 15세 아래인 그는 후 주석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와 제1서기로 재직하던 1982년 12월부터 1985년 11월까지 겨우 한 중학교와 닝보(寧波) 시의 부서기와 서기를 지냈을 뿐이다. 지위 격차가 너무 커 업무상 직접 만날 기회는 아예 없었던 셈이다.

    성장까지 지낸 부친의 덕을 톡톡히 본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부친 선쭈룬(沈祖倫·80)은 중국 공산당 제12, 13기 중앙위원으로 저장성성장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의 부친이 중국의 전·현직 정계실력자인 장쩌민 전 주석이나 후 주석, 심지어 쩡칭훙(曾慶紅·72) 전 국가부주석과 친분이 두텁다는 얘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당 간부 인사를 거머쥐는 요직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계파 색채가 옅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공청단에서 오래 근무했으면서도 황태자 출신인 그를 다른 계파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총명하고 조직 능력이 뛰어나며 사람 됨됨이가 바른 데다 신중하고 떠벌이기 싫어하는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후 주석의 집권 2기 이후 여성을 조직 사법 감찰 등 주요 보직에 보임하는 새로운 경향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17차 당 대회 이후 류옌둥(劉延東) 중앙정치국 위원은 물론이고 사법부장에 우아이잉(吳愛英·60), 중앙기율검사위원회 부서기 겸 감찰부장, 국가예방부패국 초대국장에 마원(馬?·63) 등을 임명한 것도 이런 경향과 무관치 않다. 이전엔 여성은 대부분 교육이나 위생부문을 담당하거나 최고책임자가 아닌 부책임자 자리로 옮기는 게 관행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중앙위원회를 구성할 때마다 대부분 중앙정치국원 중 1명은 여성을 배치했다. 2002년 11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있었던 제16기 당 중앙정치국에서는 우이(吳儀·73) 부총리가 중앙정치국 위원이었다. 반면 현재 전국부녀연합 주석인 천즈리(陳至立·69)는 2003년 3월부터 5년간 국무위원을 맡았다. 국무위원 역시 부총리급으로 국가영도자로 불리지만 후 총서기 등 국가영도자가 모두 참석하는 중앙정치국 전체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적잖은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은 정치국 위원, 다른 한 사람은 국무위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선 부부장이 쑹 부주석을 제치고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는 1957년생이어서 설령 2012년 가을에 중앙정치국에 진출하지 못하고 2017년에 진출하더라도 무려 10년간 중앙정치국원으로 일할 수 있다. 그만큼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여걸이다.

    ▼ 쑹·슈·옌

    지방 제후 경력 가진 유일한 차세대 여성 지도자

    개방성·개혁성 과시하는 ‘퇀파이’의 차세대 유력인사 5인
    쑹슈옌 중화전국부녀연합회 당조(黨組)서기 겸 부주석, 서기처 제1서기는 1년여 전까지만 해도 칭하이 성장으로서 중국의 지방 지도자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2009년 11월 쑨춘란(孫春蘭·61) 전국총공회 당조서기 겸 부주석, 서기처 제1서기가 푸젠(福建)성의 서기로 오면서 성장과 당 서기를 포함한 지방 제후 가운데 유일한 홍일점 자리는 5세 많은 쑨 서기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제15, 16기 당 중앙위원회에서 후보위원이었다가 제17기 중앙위원회에선 아예 중앙위원 대열에서 탈락한 쑨 서기를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앞서 말했듯 여전히 중국 정계에서 주목을 받는 여성지도자는 공청단에서 잔뼈가 굵은 선웨웨 당 중앙조직부 상무부부장과 쑹 부주석이다.

    쑹 부주석의 걸출한 실력은 어릴 적부터 발휘됐다. 랴오닝성 선양(瀋陽)시 철로국 랴오양(遼陽) 분국의 조리 역장을 하던 부친이 칭하이성의 란저우(蘭州) 철도국 시닝 분국에 소속된 한 역의 역장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시닝 철로1중으로 옮긴 그는 6개 반의 반장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문화대혁명 시절이던 1971년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닝철로분국 신호통신구 업무보고원으로 배치됐다. 그는 6명의 보고원 가운데 업무 성적이 가장 뛰어나 곧바로 업무 보고 영도반에 진입한 뒤 얼마 안 돼 신호 통신구 지부 서기가 됐다. 1976년 6월 시닝철로분국의 선전부 간사로 임명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저 어린 여성동지 어디 소속이야?” 어느 날 칭하이성 당위 부서기까지 참가한 회의에서 그의 조리 있고 당찬 발언은 당시 칭하이성 상무 부서기인 마완리(馬万里)를 감동시켰다. 마 부서기의 도움으로 1983년 1월 28세의 어린 나이에 그는 칭하이성의 공청단 부서기로 임명됐다. 지위가 부과장급에서 부청장급으로 수직 상승한 것. 게다가 당시 공청단 서기 자리마저 공석이어서 그는 곧바로 성 공청단 서기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녀의 벼슬길은 곧 파란을 겪게 된다. 1989년 초 공청단 서기 겸 대회주석단 주석인 그는 공청단 칭하이성 제8차 대회에서 공청단 서기에 낙선했다. 이때가 쑹 부주석에게는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다. 어린 나이에 너무 잘나간 게 화근이었다.

    공청단 서기 선거에서 떨어진 뒤 그는 하이둥(海東) 지(地·중국 행정단위 가운데 하나로 시(市) 중의 하나) 공청단 부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자연재해로 울부짖는 농민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호주머니 돈까지 털어서 나눠준 사실과 곧바로 30만위안(약 4073만원)의 구조자금을 조달해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준 것을 계기로 전화위복돼 칭하이성의 상무부서기로 승진해 되돌아왔다.

    뒤늦게 청장급으로 올라와 돌아왔지만 그는 청장급 중에서 여전히 어린 편이었다. 그가 맡은 노동인사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도 손을 못 대던 노동청의 대대적인 인사개혁에 착수했다. 반발이 거셌지만 계획경제 시대의 ‘철밥통’ 인사를 깨버렸다. 인사 개혁 이후 그는 칭하이성 통계국을 거쳐 성위의 통일전선공작부와 조직부로 옮기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인사와 조직, 선전과 통일전선 부문에서 두루 경험을 쌓은 것이다.

    이처럼 그가 다양한 분야에서 골고루 경력을 쌓게 된 데는 공청단에서 알게 된 후진타오 주석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28세의 젊은 나이로 공청단 칭하이성 부부장으로 승진했을 때 후 주석은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였다. 후 주석이 부장급(장관급)인 공청단 제1서기로 있을 때 그는 공청단 산하 간부훈련학교인 청년정치학원에서 2년간 공부했다. 후 주석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당교 교장을 하고 있을 때 그는 중앙당교에서 대학과정을 이수했다.

    쑹 부주석은 1998년 4월 칭하이성의 부서기로 당선됐다. 2004년 12월엔 칭하이성 대리성장에 임명된 데 이어 이듬해 1월 칭하이 성장으로 정식 선출됐다. 2004년 466억위안(약 7조9048억원)에 불과했던 칭하이의 지역총생산(GRDP)은 그가 성장으로 마지막으로 재임했던 2009년 무려 1170억위안(약 19조8467억원)으로 급상승했다. 5년 만에 무려 2.5배 늘어난 것이다.

    남편 리징롄(李景連)은 당초 신호 통신구에서 일하는 신호공이었다. 2005년 당시 남편은 시닝철로 운전기사 학교의 당위 서기였다. 2011년 현재 직책은 중국의 종합검색사이트인 바이두에서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은 부부가 한 번도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쑹 부주석은 성장이 된 뒤에도 보모를 두지 않고 직접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을 다니며 반찬거리를 사고 직접 식구들의 식사를 챙긴다.

    지방 제후를 거쳐 중국 최대의 여성단체인 중화전국부녀연합회 부주석까지 오른 그가 앞으로 국가영도자의 지위에까지 오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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