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국가안보와 국제 갈등의 핵심 변수
물의 3가지 특징, 대체 불가능·제한적 저장성·즉시성
물은 국제 안보 지형 재편하는 구조적 리스크
핵전쟁이 ‘1회성 충격’이라면 물 전쟁은 ‘장기 소모전’

인더스강은 파키스탄에 생존의 젖줄이자 ‘아킬레스건’이다. 뉴시스
세계적인 수자원 전문가인 피터 H 글릭은 물을 단순한 경제적 자원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국제 갈등의 핵심 변수이며, ‘물 전쟁(water war)’이 결코 과장된 개념이 아님을 강조했다. 인도의 지정학 전략가 브라흐마 첼라네는 저서 ‘물, 평화, 그리고 전쟁’(2013)에서 물을 “21세기 석유”라 규정하고, 초국경적 수자원을 둘러싼 갈등이 향후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핵심 변수로 부상할 것임을 경고했다. 유네스코의 2023년 보고서는 전 세계 인구의 26%가 안전한 식수에 접근하지 못하며, 절반 가까이가 위생 서비스 부족에 직면해 있다는 실태를 제시함으로써, 물 위기가 이미 진행형임을 지적했다.
물은 21세기 석유
전통적으로 물은 농업 생산, 생활 유지, 산업 활동에 필요한 경제 자원으로 이해됐다. 그러나 글릭이 지적했듯, 물은 단순한 경제적 투입 요소가 아니라 국가 생존과 직결되는 안보 변수다. 석유나 가스는 대체 에너지원이나 국제시장의 완충장치가 존재하지만, 물은 대체재를 찾을 수 없다. 또한 물은 지역적 자원으로서 분배 불균형이 심화하면 경제적 불평등을 넘어 정치적 긴장과 직접적 갈등으로 이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물이 특히 초국경 하천을 중심으로 갈등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전 세계적으로 약 286개의 국제하천이 존재하며, 150여 개국이 이들 하천에 의존하고 있다. 초국경 하천에서 상류국은 수자원 통제력으로 하류국을 압박할 수 있고, 하류국은 생존권적 차원에서 이런 압박에 강력히 반발한다. 글릭은 역사적 사례를 통해 단순히 물을 직접 무기화하는 경우뿐 아니라 협상 실패와 관리 부재가 갈등을 심화시킨다고 지적했다. 즉 물은 구조적 리스크(structural risk)로서 국제 안보 지형을 재편하는 장기적 변수로 작용한다.
인더스강은 티베트고원에서 발원해 인도령 카슈미르를 거쳐 파키스탄 중앙으로 흘러간다. Gettyimage
파키스탄은 이미 세계 최악의 물 부족 국가 중 하나다. 독립 직후에는 1인당 연간 수자원 공급량은 5600㎥였으나 현재는 1000㎥ 미만으로 줄었으며, 이는 국제기준으로 ‘절대적 물 부족’ 상태에 해당한다. 파키스탄의 국내총생산(GDP) 23%, 농업 90%, 노동력 38%가 인더스강 수계에 의존하고 있다. 즉 인더스강은 국가 생존의 젖줄이자 ‘아킬레스건’이다. 이런 조건에서 물 공급 차단은 농업 붕괴, 대규모 정전, 식량난, 실업, 극단주의 확산으로 직결되는 국가 시스템의 총체적 마비를 야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물 전쟁은 ‘느린 인종학살(slow genocide)’에 비유된다. 핵무기가 드라마틱한 폭발로 대규모 파괴를 불러온다면, 물 전쟁은 느릿느릿한 속도로 매일의 삶을 질식시키는 장기적 재앙이다.
많은 전문가는 물 전쟁이 핵전쟁보다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핵전쟁은 단 한 번만 발생해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이지만, 동시에 이런 전쟁을 막는 억제 메커니즘이 촘촘히 짜여 있어 발생 확률이 낮다. 반면 물 전쟁은 일상적 운영과 계절적 변동성 속에서 끊임없이 불거질 수 있다. 피해는 일회적 재앙이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되는 누적적 파괴로 나타난다. 일례로 식수 부족은 질병으로, 농업 타격은 기근으로, 정전은 경제 붕괴와 사회불안으로 이어진다. 즉 핵전쟁이 ‘1회성 충격’이라면 물 전쟁은 ‘장기 소모전’인 셈이다.
그럼에도 물 갈등의 억제 규범은 미약하다. 핵무기 사용은 국제적 금기가 됐고, 군축·군비통제 협정이 제도적 억제 장치로 기능한다. 그러나 물의 ‘무기화’에 대해서는 국제법적 구속력이 미약하다. 제네바협약은 ‘민간 생존의 필수품’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고 있지만, 댐 운영을 통한 시간적 압박이나 수문 데이터 차단 같은 행위는 회색지대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규범적 공백 속에서 물은 갈등을 증폭시키는 무기가 된다.
물 전쟁은 핵전쟁보다 위험할 뿐 아니라, 핵전쟁의 촉매가 될 수 있다. 일례로 파키스탄의 핵 독트린은 ‘선제 불사용(no-first-use)’ 원칙을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오히려 파키스탄은 군사적 침투나 경제적 봉쇄뿐 아니라 물 공급 중단까지도 ‘핵 사용 임계치’로 설정했다. 2011년부터 도입된 ‘풀 스펙트럼 억제’ 개념은 공간적·군사적·정치적·경제적 조건 전반을 핵 사용 가능성의 기준으로 포함한다. 인도의 IWT 중단은 곧바로 이러한 ‘임계치’를 건드려, 파키스탄이 핵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한 명분을 제공했다. 요컨대 물의 무기화는 핵 억제를 약화시키고, 핵전쟁 위험을 증폭시키는 가속장치로 작동한다.
나선형 수문(水文) 갈등의 8단계 모델
수문정치(water politics) 전문가 셰합 알무크다디는 2022년 국제학술지 ‘워터’에 국제 수자원 분쟁에 초점을 맞춰, 초국경 하천에서 상류국·하류국 관계가 어떻게 ‘협력 → 갈등 → 전쟁 → 재협상’으로 이행하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8단계 모델을 제시했다.① ‘수문 조화’ 단계는 상류국-하류국이 호혜적 이익과 제도적 신뢰를 기반으로 협력하는 상태다. 데이터 공유와 조기경보체계가 작동해 예측 가능성이 유지되며, 합리적 이용과 ‘무해 원칙’이 준수된다. ② ‘수문 통제’ 단계에서는 상류국이 댐이나 저수 건설을 통해 수문 인프라를 주도한다. 상류국은 국가 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하류국은 농업·관개의 불안정 우려에 직면한다. 사전 통지와 정보 제공이 부족할 경우에는 잠재적 갈등이 확대된다. ③ ‘수문 분쟁’ 단계에서 상류국의 하천 운영이 하류국의 식수·농업에 피해를 주며 분쟁이 공개적으로 불거진다. 협상·중재에도 불구하고 데이터 해석과 운영 규칙을 둘러싼 정치적 프레임이 충돌한다.
④ ‘수문 갈등’ 단계가 되면 단기적 분쟁이 장기적 및 비타협적 대결로 고착된다. 하류국은 식수난·농업위기·환경악화를 겪는 반면, 상류국은 전력 생산의 수익과 전략적 이득을 우선시한다. ⑤ ‘수문 갈취’ 단계는 하류국이 상류국의 하천 운영을 강압적 도구로 인식하는 단계다. 그 결과 농업 붕괴, 물가 급등, 사회 불만이 국가안보 담론과 결합된다. 상류국은 시간을 끌며 기정사실화 수법을 구사하고, 하류국은 국제여론전과 군사·경제적 연계에 나선다. ⑥ ‘수문 패권’ 단계는 상류국이 완성된 인프라와 운영 규칙을 통해 하천 사용과 관련된 사실상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상황이다. 하류국은 종속적 협상자로 전락하며, 국제 소송과 대체 수자원 확보 등으로 저항한다.
⑦ ‘수문 전쟁’ 단계에 이르면 물 분쟁은 무력 충돌로 비화한다. 댐·송전망·취수장 등이 전략적 표적이 되며, 국가들은 냉정한 현실주의적 계산 속에서 전쟁을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와 환경적 재앙이 확대되고, 국제인도법 위반 여부가 국제사회의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한다. ⑧ ‘수문 협상’ 단계는 전쟁 직전 혹은 직후에도 협력의 가능성을 다시 모색하는 국면이다. 이 단계에서는 데이터 공유, 분쟁 해결 절차, 보상 메커니즘을 아우르는 포괄적 합의가 추진된다. 이로써 국제 중재와 신뢰 재구축을 통해 수문 질서의 균형을 재설계하고, 다시금 조화 단계로 복귀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위 8단계 모델은 물 분쟁이 어떻게 점진적으로 악화하는지를 보여준다. 초기의 협력과 통제가 실패하면 분쟁이 공개적으로 불거지고, 갈등이 장기화하면서 권력 비대칭은 더욱 심화한다. 하류국의 불만과 위기 인식은 상류국의 고압적 행보와 충돌하며, 갈취와 패권 단계로 이어진다. 결국 누적된 긴장이 군사적 충돌로 폭발하면서 전쟁이 벌어진다.
‘지정학적 뇌관’ 가능성 큰 중국 메가댐

중국은 올해 1월 티베트 얄룽창포강(브라마푸트라강) 하류에 60GW급 초대형 수력발전소 건설을 승인했다. 위키피디아
특히 브라마푸트라강이 인도 동북부와 방글라데시에 거주하는 수억 명 인구의 생존 기반이라는 점에서, 수문 통제는 핵 억제 임계선을 건드리는 위험한 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 즉 인도가 중국의 ‘수문 패권’에 저항하며 핵 억제 논리와 결부할 경우, 물 분쟁은 지역 전체의 전략적 균형을 뒤흔드는 폭발적 변수로 전환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메가댐은 개발사업을 넘어 물 전쟁이 핵전쟁보다 더 위험하거나 심지어 핵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지정학적 뇌관이다. 결국 21세기의 진짜 위협은 핵탄두가 아니라, 수문(水文)이 무기화된 강물 위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신동아 만평 ‘안마봉’] ‘두 손’ 든 대한민국 청년의 절망](https://dimg.donga.com/a/380/211/95/1/ugc/CDB/SHINDONGA/Article/69/26/5d/d5/69265dd520b5a0a0a0a.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