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근은 자신의 부정적 이미지의 대부분이 안기부 근무 경력 때문일 거라고 짐작한다. 검사 출신인 그는 83년 안기부 법률담당관을 시작으로 대공수사국장, 기획판단국장, 수사차장보, 제1국장, 제1차장 등의 핵심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검사 신분으로 안기부에 파견된 경위도 그의 엘리트주의를 부추길 만하다. 83년 초, 안기부에서 처리한 간첩사건이 대법원에서 무죄로 판결받은 일이 있었다. 노신영 당시 안기부장이 제일 유능한 검사를 뽑아오라고 지시해 안기부, 검찰, 법무부에서 각기 1등에서 10등까지의 엘리트 검사 리스트를 만들었는데 그 세 군데 모두에서 1등으로 추천된 사람이 정형근이었다. 출발부터가 화려했던 그는 엘리티즘이 뼛속 깊이 각인된 사람이다.v 그가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으로 재직시 박노해에게 했다는 말은 워낙 유명해 전설처럼 인구에 회자된다.
“너 같은 공돌이가 어떻게 서울대 출신 부하들을 거느릴 수 있냐. 너의 시나 글들은 모두 서울대 출신이 써준 것 아니냐.”
‘민족해방노동당 사건’으로 연행된 심진구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한다. 정형근이 마도로스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채 다가와서는 비꼬는 말투로 물었다는 것이다.
“‘선진적 노동자의 임무’ 이것 네가 썼다며?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놈이 이걸 써? 네 뒤에 있는 놈을 대.”
정형근은 운동권이라도 서울대 등 명문대 출신이어야 어느 정도 인정했다고 한다. 어느 여고에서 서울대와 명문대를 진학할 만한 학생들의 반은 장미, 백합 등의 이름을 붙여 주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의 반은 기타반 또는 들꽃반이라 불렀다던가. 그 학교에도 정형근 같은 엘리트주의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엘리트주의 신봉자 정형근은 13년간 안기부에 근무하면서 서경원·임수경 방북사건, 김낙중·이선실 간첩사건, 사노맹사건 등 대형 공안 사건을 직접 수사하거나 지휘했다.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던지 이 기간에 보국훈장 천수장, 보국훈장 국선장 등 훈장을 세 번이나 받기도 한다.
그러나 정형근이 보낸 절정의 40대는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는 원죄의 기간이 되어버린다. 바로 이 시기의 활동에 대해서 끊임없는 고문 의혹 시비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고문 국회의원 정형근을 심판하는 모임’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단체와 내로라하는 논객들이 그의 고문 전력을 문제 삼았지만 정형근은 명예훼손 소송도 불사하겠다며 펄쩍 뛴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혹’이나 ‘시비’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다.
당시 현역의원이던 서경원은 정형근에게 고문을 당해 피를 세 그릇이나 받아냈다고 증언하고, 고문의 현장에서 그와 몸서리쳐지는 대면을 했다는 증언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정형근은 당당하게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99년 4월, 서경원 전의원의 비서관 방양균씨는 유엔인권위원회가 열리는 제네바까지 따라와 내가 고문했다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내가 참다참다 고소를 했더니, 그 뒤로는 방씨가 내 주변에 얼씬거리지도 않습니다. 이것만 봐도 내가 고문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다 알 겁니다.”
그의 억울한 사연(?)은 계속된다.
“안기부 조사실에는 비디오 카메라가 다 설치돼 있습니다. 다 찍히는데 어떻게 고문을 합니까?”
슬쩍 한 발 양보하는 여유까지 보여준다.
“수사를 하다보면 손으로 푸싱을 하거나 뺨을 한 대 때리거나 한 적은 혹시 있을지 몰라도 고문을 했다면 내가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정형근이 생각하는 고문의 수준은 어떤 것일까. 37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수사관들로부터 돌아가면서 계속 맞아 피오줌을 흘리고, 잘 때는 팬티가 붙어 야전침대에 누울 수조차 없는 정도가 되어야 고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한 사내가 늘 뒷짐을 지고 파이프 담배를 문 채 고문 현장에 나타났는데 그때마다 수사관들은 일동 기립하여 그의 지시에 귀기울였다고 한다. 그 사내가 “이제 불 때가 되지 않았어?”라며 고문을 ‘예고’하고 돌아간 다음에는 어김없이 더 강도 높은 고문이 가해졌다. 그래서 고문 현장에서 파이프 담배의 사내를 마주쳤던 사람들은 그가 다녀가고 나면 늘 공포에 떨곤 했단다. 그런 의혹을 받고 있는 사내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모두 심신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라서 헛것을 보았거나 다른 사람과 착각했던 것일까.
정형근 ‘나름의’ 소신
92년 이선실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된 적이 있는 장기표 전 신문명문화원장은 정형근과 서울법대 동문이다. 그는 올해 1월 한 잡지를 통해 정형근에게 공개적으로 편지를 보낸다.
“잠시나마 교정에서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적이 있는 나도 당신으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할 정도였으니 당신이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근무하는 동안 저지른 반인간적인 일은 세인의 지탄을 받기에 충분하오.”
만일 고문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면 정형근 자신도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강준만 교수의 말처럼, 모두가 억울하다니 하루 빨리 ‘고문조작 의혹 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모든 진상을 규명해 이 나라를 영원히 고문이 없는 나라로 만들어야 옳다.
이런 의혹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안기부 재직시절에 대한 자부심은 남다른 데가 있다. 그는 안기부에서 부장도 하지 않았고 예산을 만지는 일도 하지 않고 오직 수사 전문가로만 일했다는 자부심이 있다고 말한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일도 했겠지만 나름대로 기준과 잣대를 갖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안기부 근무시 사회가 좌파 이념으로 물결칠 때였던만큼 나라도 몸으로 막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내가 자랑스럽다.”
주로 대공수사 업무에 종사하면서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 때문에 부정적 오해를 많이 받고 있다고 말한다. 운동권은 운동권대로 자신은 자신대로 소신을 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름의 소신’은 몰가치적인 현상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필자는 작년 10월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 전 경감이 구속될 당시 그의 아내가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미장원을 경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그의 부인은 평생을 국가를 위해 봉사한 죄밖에 없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짐승처럼 매도되고 처벌을 받아야 하느냐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에게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해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파괴된 피해자들이 들으면 억장이 무너질 얘기겠지만, 이근안과 그의 가족들로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겠는가. 국가 공무원으로서 소신을 가지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왜들 그러느냐고 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보면, 백백교 같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광신도의 믿음이나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다 죽어가는 독립투사의 신념은 다르지 않다. 소신이란 객관성이나 공동선(共同善)을 가져야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정의를 지키는 부산의 아들’
확고한 소신을 가진데다 지역구에서 두 번이나 당선된 정형근 의원에겐 아직도 음습한 공작정치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본인의 정치 행태가 그런 측면도 있지만 안기부 출신이라는, 특히나 5·6공 때 굵직한 시국사건의 핵심에서 구설수에 올랐던 전력이 아직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동시에 정치인 정형근의 피해의식이 발동하는 기점이기도 하다.
미래산업 정문술 사장은 수십년간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다가 지금은 존경받는 기업인이 된 사람이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으로 전직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꼽는다. 중정 과장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되는 일도 없었고 사업상 보이지 않게 불이익이 따랐다는 것이다. 직원들조차 자신을 잘 믿지 못했단다.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고까지 표현할 정도니 그 고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기업가로 변신하는 게 그 정도였으니 대중정치인으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정형근은 지금도 자신이 폭로정치의 피해자고 공작정치의 희생양이라고 누누이 주장한다.
95년 2월 당시 권노갑 의원이 안기부가 작성한 ‘지자제 연기’문건을 폭로해 하루아침에 안기부 2인자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DJ저격수’라고까지 불리는 자신의 위치 때문에 ‘정의를 지키는 부산의 아들’인 자신이 부당하게 공작정치의 희생양이 됐는데도 오히려 공작정치의 주도자로 몰린다고도 항변한다. 정치나 역사는 결국 이긴 자의 기록이라는 정치 메커니즘을 감안한다면 정형근의 말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형근은 국회의원에게 부여된 면책특권과 언론의 메커니즘을 적절히 활용해 폭로 효과를 극대화하는 정치 행태를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정치인이다. 99년 10월의 언론대책 문건 파동을 비롯해 폭로전의 앞뒤에는 언제나 정형근이 있었다. ‘오늘도 폭로의 외길을 걷는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물론 본인은 이런 표현에 심한 불쾌감을 나타낸다. 성실하고 치열한 의정활동을 폄하는 발언이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표현을 달리 해보자. 정형근 의원은 정치권을 긴장시킬 만한 소재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 최고의 전략정보통이다.
‘동아금고 불법대출 및 로비의혹사건’과 관련한 지난 10월26일자의 동아희평은 그의 명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의기양양하게 ‘폭로용 뻥튀기’ 기계를 돌리는 정형근 의원에게 ‘정치권’이란 이름의 사내가 난감한 표정으로 ‘꼭 이럴때 뻥 해야겠어?’라고 묻는다. 이럴 때 그가 폭로하는 내용의 실체적 진실은 둘째 문제다. ‘뻥’이라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그는 상대방의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뻥 하는 요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수집하고 적절하게 가공해서 적시에 활용하는 능력 면에서 단연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다. 그는 안기부의 핵심정보를 접하는 기획판단국장과 대공수사국장을 거쳤으며 정계입문 후에는 ‘탁월한 정보력’을 인정받아 당의 주요 전략, 전술 수립을 총괄하는 기획위원장과 정세분석위원장을 역임했다. ‘정의원의 폭로에는 실수가 없다’는 이회창 총재의 믿음에 근거가 없지 않다. 게다가 그의 ‘정보공개’는 최종적으론 늘 정치권을 겨냥하기 때문에 파괴력면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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