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신성일 의원실’ 벽에는 조각 같은 얼굴을 한 자신의 젊은 날 흑백사진과 엄앵란씨의 나무 부조가 붙어 있다. 부조와 사진, 즉 입체와 평면이라는 그 묘한 대조를 느끼며, 대뜸 헤어진 옛 애인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도 그는 선선히 이야기에 응해주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허심탄회하게 껄껄 웃고 있는 이 사람이, 젊은 시절 강렬한 하이에나의 눈빛에 나르시스를 연상시키던 그 젊은이였단 말인가.
고백하자면 필자는 어릴 때부터 숱한 영화를 봐왔지만 한번도 신성일이라는 배우를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워낙 많이 보아온 배우인 까닭에 스크린에서 ‘영접’의 느낌을 받을 수 없는 데 대한 반감이었다고 할까. 그러나 막상 ‘인간 신성일’을 직접 만나보니, 영화평론가 이효인씨가 “삶의 스산한 구석을 여전히 감내하고 있거나 세속적 욕망과 결벽증적 도덕률이 복잡하게 뒤엉켜서 발현되는 어떤 느낌,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바람’이다”라고 평한 그 ‘바람’을 필자 역시 가슴에서부터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솔직하게 자신의 연애담이며 과거 행적에 대해 들려주었다. 사랑했던 감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들떴고, 함께 공연한 여배우 이야기를 할 때는 여전히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렇게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것 같은 신성일은 요즘 보기 드문 호탕한 남자, 남자다운 남자였다.
‘비어 있음’의 미학
흔히 해보는 상상. ‘만일 제임스 딘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신성일은 그 상상을 한국 영화계라는 틀 안에서 보여주는 ‘자그만 역사’라 해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영화계를 이끌어간 시대는 한국 영화의 황금기였다. 그렇기에 그의 변신은 한국 영화의 변신이었고 그의 진부함은 한국 영화의 진부함이 되었다.
1960년대 한국 영화에 신성으로 떠오른 청춘 스타 신성일. 귀공자의 이미지를 가졌음에도 그는 남궁원이나 신영균 같은 배우와 달리 깡패나 위폐범, 자동차 세차공, 가난한 고학생 등 사회 주변부 인물을 맡았을 때 더 빛을 발하는 배우였다. 출세욕과 사랑에 대한 갈망으로 절망과 희망을 함께 연기했을 때 그는 대중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어쩌면 본인의 젊은 시절 어떤 부분을 그대로 투영했을 것 같은 이러한 이미지는 6·25 직후라는 시대배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떠오르는 신흥 자본주의 계급에 대한 묘한 반감과 그 대열에 끼이고 싶다는 이중적인 열망을 신성일과 대중이 함께 나눠 가진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만추’와 ‘안개’ 같은 1960년대 대표작을 거쳐 1970년대 신성일은 점차 청춘 스타의 이미지를 벗고 문예 영화와 멜로 배우로 안착했다. ‘결혼교실’(1970) ‘춘향전’(1971)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왕십리’(1976) ‘산불’(1977) ‘야행’(1977) 등 코미디에서부터 전쟁영화까지 많은 영화를 찍었지만, 이 시기 신성일은 뭐니뭐니 해도 ‘별들의 고향’과 ‘겨울 여자’라는 전무후무한 흥행 기록을 세운 두 영화의 남자 주인공으로 기억된다.
‘별들의 고향’에서 신성일은 여대생에서 호스티스로 전락한 여주인공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다소 개방적인 중년 사내로 나온다. 이 역시 반항적인 그의 이미지에서 어딘가 허한 구석이 있는 자유분방함, 그러면서도 한 여자를 사랑하는 순수함을 뒤섞은 그의 스타 아이콘이 대중들에게 여전히 통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사례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연기자 신성일’로 자리잡은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였다. ‘길소뜸’(1985)과 ‘달빛 사냥꾼’(1986)에서 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더욱더 물오른 연기감각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신성일은 막노동꾼이나 쇠락한 형사 역할을 통해 ‘나르시스의 얼굴’이라는 예전의 신화적 카리스마에 기대기보다 세상살이에 피로한 기색이 짙은 페이소스를 자신의 배역에 첨가하였다. ‘위기의 여자’나 ‘레테의 연가’ 같은 멜로물에서는 여전히 성적 매력이 있는 중년의 사내로 등장했지만 이 역시 황량하고 스산한 페이소스가 깃들여 있기는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