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하게 감자를 먹은 후엔 그를 큰 아빠라고 부르는 옆집 아기 예진과 장난치며 놀았다. 호박같이 생긴 길쭉한 오줌통에 예진이 몰래 오줌을 누느라 그는 내내 숨바꼭질하는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오아볼로의 집을 슬프고 소외된 장애인의 집이라고 여긴다면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동정해서 모여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왠지 편하고 좋아서 사람들은 자꾸만 이 집에 모여든다. 와서는 제 삶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절로 배워간다. 오아볼로씨가 따로 무슨 말을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늘 하던 대로 벙싯벙싯 웃기만 한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도 빼놓지 않고 기도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로 얻지 못하는 깨달음을 얻어서 돌아간다. 그리고는 그 깨달음을 제 생활에서 실천한다.
그래서 응암동 골목 안은 여느 골목과 다르다. 땀 흘리는 남을 위해 부채질 해주는 일이 자연스럽고, 내 발로 땅을 디딜 수 있다는 사실을 문득 축복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 세상에 이런 큰 스승이 또 어디 있으랴.
그는 혼자가 아니다. 아내가 있다. 얼굴이 해맑고 마음씨 곱고 웃음이 수줍고 키가 남보다 조금 작은 윤선자씨는 남편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리다. 그 어린 아내는 얼굴을 씻겨주고 밥을 차려주고 물을 떠주고 편지를 부쳐주면서 그를 돌본다.
어느 날 문득 그의 배필이 되려 시골에서 찾아온 하느님의 현현(顯現) 같은 그 아내를 맞아 둘은 15년 동안 한 번도 다툰 일 없이 살아왔다. 도무지 의견이 대립될 일이 없다. 고맙고 안타깝고 소중하고 장하고 그런 눈으로만 서로를 바라본다. 지금 곁에 있어주는 것, 그 외엔 다른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서로를 아무 끈으로도 묶지 않는다. 눈을 마주치면 둘은 자꾸 웃는다. 햇살 같은 웃음이다. 보는 사람을 눈부시게 만든다. 말없이 서로 눈동자를 마주보는 부부를 난 참 오랜만에 만났다. 수많은 부부가 눈을 맞바라보기는커녕 상대를 향해 이를 가는 경우가 흔한데, 꼼짝 못하고 자리보전한 남편과 구루병 걸려 키가 나지막해진 아내는 서로 물결같이 은은하게 마주 웃는다. 이게 도대체 무슨 희한한 수수께끼냐.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부정탄 아이
그와 종일 이야기하고 돌아와 나는 아블로씨에게 전화를 했다. 아까는 차마 묻기가 민망했던 질문이다. “병원에 가 봤어요?” “아니요….” “한 번도 안 가봤단 말이에요?” “서울 올라오고 나서. 딱 한 번. 그냥 병명이라도 알고 싶어서.” “뭐라고 해요?” “여기 ○○병원에 갔는데. 그냥 희귀난치병이라고 하데요…. 고치는 방법을 모르는 게 희귀병이라고….” 그는 자기병을 지금도 희귀병이라고만 알고 있다. 어디서도 정확한 병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서울 온 게 서른여덟 살 때인데 그때서야 처음 병원에 갔다니 아픔에 대처하는 방식이 어땠는지 알 만하다. 뼈가 부러지면 놀라고 통증이 오면 참고 뼈가 붙기를 마냥 기다리고, 그것의 반복을 그저 신화화한 운명으로 묵묵히 받아들였으리라. 그런 방식을 나무라는 건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 1950∼60년대 농촌에서, 끼닛거리 마련하는 것이 오로지 문제였던 가난 속에서, 언감생심 병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사람은 고통 속에서 단련되는 신비한 존재이다. 통증과 불구가 그의 심신을 지지고 바쉈지만 아블로씨는 결코 주저앉지 않았다. 병은 그의 키를 납작하게 줄이는 대신 정신의 키를 까마득하게 키웠다. 모조리 다 잃는 계산법은 이 세상에 없다. 잃어버리는 자리에 반드시 뭔가가 채워지는 신비가 작동한다. 그게 우주의 법칙이다. 그래서 아블로씨는 자꾸만 ‘불가사의한 웃음’을 벙싯벙싯 웃는다.
그는 전쟁이 한창일 때 태어났다.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홍원리. 아버지는 남의 논을 부쳐 먹고 사는 농부였고 그는 5남2녀 중 셋째였다. 가난이야 불 보듯 뻔했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이웃집에 초상이 났다. 그래 그랬을까. 그는 지금도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리송하다. 초상집에 갔다 온 동네아이가 금줄 쳐놓은 그의 집안에 들어왔다. 산방의 문을 열고 산모와 아이를 빤히 쳐다봤다. 찬바람이 들어왔겠지. 놀라기도 했겠지. 신생아는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산모가 아기를 안자 아기의 물같이 여린 몸에서 자그맣게 뚜둑거리며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더욱 맹렬하게 울었다. 그리고 내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뼈 부러지는 인생이 그때부터 시작된 거지요. 하하.”
가난과 통증. 그게 그의 삶의 조건이었다. ‘뼈를 깎는 고통’이라고 사람들은 곧잘 최대치의 아픔을 비유하지만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뼈가 이유 없이 부러지는 병을 그는 달고 태어났다. 고통은 사흘째부터 시작되었다. 울었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아팠지만 아무도 그 고통을 대신할 수가 없었다. 죽고 싶었다. 그러나 죽는 방법을 몰랐다. 방법을 알았으면 죽었을 것, 이라고 그는 느긋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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