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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단전|“그래, 나는 종놈이다” 외친 천재문인

시인 이단전|“그래, 나는 종놈이다” 외친 천재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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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전은 자호를 통해 천민임을 드러낸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유씨집 종이라는 사실도 스스럼없이 밝혔다. 자신의 내력은 물론, 조상의 낮은 출신조차 발설하면 죽일 듯 덤벼드는 것이 우리네 근성임을 생각하면 이단전의 행동과 처신은 파격, 그 자체다. 그래서 지인들은 그를 더욱 높이 평가했다.

그는 신분이 천출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불행을 골고루 갖추었다. 몹시 왜소한 키에 애꾸였고, 얼굴이 심하게 얽어 생김새가 형편이 없었다. 말은 어버버하고 조리가 없었다. 그런 그가 시를 짓겠다고 문사들을 찾아다녔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시(詩)란 양반 사대부의 전유물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시인의 99%는 신분이 높은 남성이었다. 가물에 콩 나듯 승려나 여성, 평민이 시인 행세를 하기도 했으나 모두 예외일 뿐이다.

조선후기에 서민문화가 발달하자 이른바 여항시인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양반 사대부 중심의 문학구조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또 여항시인들이 문학 활동을 활발히 했다 해도 그들 대부분은 일반평민이 아니라 중인(中人)이었다. 더구나 노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신분으로 여가활동을 즐길 만큼 부유했다. 어디에도 노비를 위한 시작(試作)공간은 없었다.

사실 어떤 주인이 시를 짓는답시고 멋 부리고 다니는 노비를 용납하겠는가. 그러나 노비 출신 시인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명종 때 김해의 관노였던 어무적(魚無跡), 전함노(戰艦奴)였던 백대붕, 천민이었으나 양민(良民)으로 신분상승을 한 홍세태 등이 대표적이다. 그중에서도 홍세태는 워낙 시를 잘 짓자 당대 명사들이 돈을 내 노비신분에서 풀려나게 해준 경우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유씨 집안에서는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시를 짓는답시고 떠도는 이단전을 어떻게 대우했을까? 그 점이 몹시 궁금하지만 아쉽게도 주인집과 이단전 사이에 벌어진 갈등이나 인정의 양상을 보여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당시 정황으로 보아 이런 추정이 가능할 것이다. 주인 집안에서는 사대부들 사이에 명성을 얻은 이 하인같지 않은 하인을 법으로 막을 수도 없고 방임할 수도 없어 적당히 인정하고 말았을 것이다. 당대의 명사들과 허교(許交)하는 처지의 종을 학대했다간 주인집의 명예도 동시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의정을 지낸 당대의 명사 유언호 집에서 그렇게 했을 리 없다. 시 쓰는 종을 좋아하지는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묵인하지 않았을까.

이단전은 시를 잘했다. 인간으로나 환경으로나 최악의 조건을 가진 그였지만 시를 짓는 재능 하나는 하늘이 내렸다고 할 수 있다. 사대부들 사이에서 시 잘 짓는 노비라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 스승에 그 제자

그러나 그의 뛰어난 시작솜씨가 타고난 천재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창작을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시를 배우러 유명한 시인들을 두루 찾아 공부했다.

그의 스승은 누구일까. 조수삼은 그의 시선생이 처음에는 초부 남유두였다가 나중에는 형암 이덕무로 바뀌었다고 증언했다. 첫 스승이 남초부라면 남공철의 족숙(族叔)인 남유두(南有斗, 1725~98)임이 분명하다. 남유두는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도 소개될 만큼 당시 이름 있는 시인이었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게으르고 지나칠 정도로 물정에 어두운 것으로도 유명했다.

남공철의 ‘지산초부전(芝山樵夫傳)’에는 남유두의 우스꽝스러운 면모가 묘사되어 있다. 쌀독이 비었다고 하소하는 처자식에게 “편안히 생각하라”고 말하고, 한 달 내내 머리를 빗지 않고 일년 내내 발을 씻지 않아서 딸이 그의 등을 긁고 나면 먼지와 때가 손톱 밑에 가득했다. 현실의 급선무를 묻는 정승 유언호에게 “더욱 독서에 힘쓰고 그런 후에 물으시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중에 스승으로 모신 이덕무(李德懋, 1741~93)는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특히 그는 시를 잘 가르치는 것으로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사대부에서 여항의 비천한 사람까지 두루 찾아왔다. 유득공의 저서 ‘고운당필기’에는 ‘보파시장(補破詩匠)’이란 부분이 있는데, 잘못 쓴 시구를 고쳐주는 시 땜장이 신세를 자조적으로 묘사한 글이다. 한 시대의 사백(詞伯)인 이덕무가 아무리 시를 가르쳐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망건 수선공, 짚신 수선공, 솥 땜질공, 소반 수선공에 빗대어 자신을 시 땜장이라 자조적으로 부른 것이다. 이단전이 사검서(四檢書 : 규장각의 핵심요직인 검서관에 임명됐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를 가리키는 말)를 쫓아 공부했다고 한 심로숭의 말은 사실에 가깝다.

이단전은 항상 닷 되들이 큰 주머니 하나를 차고 다니며 좋은 시구를 얻을 때마다 그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당나라 시인 이장길(李長吉 : 외출할 때마다 등에 금랑을 메고 다니다가 좋은 구절을 얻으면 주머니에 넣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의 행동과 비슷했다. 남공철은 이단전의 시집에 서문을 쓰면서 그의 젊은 시절 공부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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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안대회 영남대 교수·한문교육 ahnhoi@yumail.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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