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선에 출마하리라는 언론의 예상과는 달리 유임된 남궁석 정보통신부 장관은 벤처기업가 키우는 일에 신명을 바치고 싶어한다. ‘사이버코리아21’이란 기치를 내걸고 정보화시대를 개척하는 남궁 장관이 말하는 한국 정보통신 산업의 미래와 한국형 실리콘밸리 건설 구상.》
청와대와 새천년민주당측에서는 언론을 통해 남궁 장관을 비롯한 몇몇 장관들의 출마를 부추겼지만, 남궁 장관은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측의 설명에 따르면 남궁석 정보통신부장관과 이상용(李相龍) 노동부장관의 경우 “정부에 남아 전공분야에서 대통령을 보좌하겠다”며 출마 고사 의지를 접지 않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이들은 “대통령이 직접 말씀한 것도 아닌데 장관 입장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유임이 결정된 다음날인 14일 오후 남궁석 장관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 유임되리라고 예상했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이번에 그만둔 장관들도 개각 발표 10분 전에 알려줬다고 하지 않습니까.”
― 연초에 대통령에게 계속 일하고 싶다든지,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지는 않았습니까?
“장관이 임명권자인 대통령께 어떻게 그런 의사를 표시합니까? 침착하게 있었습니다.”
― 대통령이 남궁 장관을 유임시킨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이버코리아21 등 지금까지 추진해오던 일을 끝까지 잘 완수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초고속통신망 건설을 앞당기고 국민의 정보화교육도 철저히 시키고 소외계층도 무료나 저렴한 가격으로 정보화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신년사에서 밝히셨는데, 저를 유임시킨 것은 이를 더욱 강화하라는 의지가 실린 것으로 봅니다. 그동안 추진해오던 정책의 속도는 더욱 빨리, 범위는 더욱 넓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 박태준 총리와는 인연이 있습니까?
“큰 인연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정보화에 관심이 많으니까 정통부가 추진하는 일을 잘 이해하고 밀어주시리라 믿습니다.”
대통령의지 속도 덧붙여 정책 추진
남궁 장관은 전화 인터뷰 끝머리에서 앞으로 정보통신부의 정책은 ‘사이버의 속도’에 ‘대통령 의지의 속도’까지 덧붙여 신속하게 추진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남궁 장관은 자신의 유임을 대통령의 격려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김대중 정부가 업계의 미묘한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할 자리인 정보통신부 장관에 기업체 인사를 발탁한 것은 파격이었고 모험이었다. 이런 자리는 기업체의 이해와는 거리를 둔 관료를 발탁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김대중 정부에서 첫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발탁된 배순훈씨도 대우전자 사장 출신이었는데 관료들과의 마찰로 중도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관료들의 텃세에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궁 장관은 달랐다. 삼성SDS 사장으로 있던 98년 12월 김중권 당시 비서실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바로 다음날 정보통신부 장관이 된 그는 ‘사이버코리아21’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이버코리아21이란 정보화시대에 한국이 21세기의 지식강국이 되려면 전국민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정보화 교육을 해야 하고, 이를 위해 ‘국민인터넷PC’를 저렴한 가격에 대량 보급하고 초고속통신망을 설치해야 한다는 것. 이 일을 하는 데 드는 예산은 민관 합쳐서 2000년까지 28조원 정도. 연관 효과는 120조원이며 70만~80만명의 고용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대규모 프로젝트에 이해가 엇갈리는 업계에서는 이런저런 비난도 하고 초고속통신망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투자한다고 비판도 했지만, 남궁 장관은 사이버코리아21을 계속 밀고 나갔다. 이 정책은 마치 산업화 시대에 고속도로를 만들고 자동차의 대량 보급으로 마이카(my car) 시대를 연 것과 비슷하다. 정보화시대에는 초고속통신망이 바로 정보에 이르는 고속도로이고 PC가 사이버공간에서는 자동차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천년 단위의 역사관
정보화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일선에서 진두 지휘를 하는 남궁석 장관은 어떤 인물이며 우리나라 정보통신산업의 비전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1월8일과 11일 두 차례에 걸쳐 서울 광화문에 있는 정보통신부 장관실을 방문했다. ‘독서광’인 남궁 장관은 정보통신 분야 뿐아니라 역사 철학 문학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구체적인 질문 사항을 미리 보내지 않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먼저 남궁 장관의 미래예측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나라 정보통신 산업이 10년 안에 어떻게 변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역사를 되돌아봐야 앞으로 나갈 방향에 대해서 확신이 서고 방향도 정확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작년 이맘 때 정보화에 대해 대통령께 보고드리면서도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가볍게 던진 첫 질문에 대한 답변이 꽤 길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인류사’에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대중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해 먼저 물어보았다. 남궁 장관은 지난해 1월21일 ‘정보화의 길’이란 주제로 장시간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는데, 이 자리에서 ‘사이버코리아21’이 정보통신부의 핵심정책으로 결정됐다.
“당시 대통령께 ‘산업화는 서구에 비해서 200년 뒤지고 일본에 비해서 100년 뒤졌지만 천만다행으로 우리는 20세기를 40년 남겨 놓은 시점에서 분발해서 먹고 입고 자는 것을 어느 정도 해결하는 상태가 됐습니다. 그런데 정보화 물결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대처를 해야 되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제 의견을 받아주셨습니다. 의견이 일치했다고 할까, 역사 인식이 같았습니다. 요즘은 대통령께서도 공식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시죠.”
― 정보화에 대해 대통령께 특강을 한 셈이군요. 대통령은 어떤 질문을 많이 했습니까?
“말씀을 많이 하시는 분이 아니니까 몇가지 확인만 하셨어요. 대통령께서는 다방면에 워낙 많이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정보화에 대해서도 많이 공부하셨더군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을 한국에 초청해서 만나보시고, 휴렛 팩커드의 룸필트 회장, 시스코의 챈모리스 회장, 앨빈 토플러 박사 외에 다른 석학들도 만나보시면서 정보화의 개념을 완전히 익히고 계셨기 때문에 제가 브리핑을 한다기보다는 정보통신부 장관 면접시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궁 장관이 ‘면접시험’에서 발표한 ‘천년 단위의 역사관’을 요약하면 이렇다. 제1의 천년은 한민족이 웅대한 나라를 건설했다가 마지막 고비에 백제 고구려 신라 발해 등 4개 국가가 망한 시기였고, 제2의 천년은 고려와 조선왕조가 900년을 버티다가 세계적 조류인 산업화의 물결에 뒤져 마지막 100년간 외세에 수모를 당한 시기라는 것. 따라서 제2의 천년 마지막에 시작된 정보화 물결을 따라잡아 제3의 천년시대를 열자는 것이다.
남궁 장관은 이처럼 수천년의 역사를 한번 조감한 뒤 첫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시작했다.
“저는 향후 10~20년 동안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지나간 40년 동안에 급속하게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일본을 통해 서구기술을 간접적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산업화 기술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었어요. 그러나 정보통신 기술에서는 몇가지 가능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보통신기술을 개발하면서 일본을 거치지 않고 직접 받아들이는 분야가 있습니다. 그 분야에서는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은 것들이 있습니다.”
정보화 기술은 일본 앞서
남궁 장관이 대표적인 예로 든 것은 반도체 분야. 반도체 기술은 부분적으로 일본에서 도입한 것도 있지만 미국에서 공부한 우리나라 엘리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일으킨 산업이라는 것.
“삼성에서 일하고 있는 신대진 박사라든지 현대에서 일하던 오기환 박사 등이 미국에서 연구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일하면서 일본을 이겼습니다.”
남궁 장관은 반도체 기술 외에도 미국으로부터 직접 받은 기술 중에서 일본을 추월하고 있는 분야는 핸드폰에 쓰이는 CDMA(코드분할다중접속방식) 기술이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미국의 기술인데 우리가 상용화해서 세계로 나갔습니다. 작년 한해에 CDMA와 유럽에서 사용하는 GSM(전지구적 이동통신 체계)형 통신단말기를 합쳐서 47억달러를 수출했어요. 이건 대단한 일입니다. 이 분야에서는 호주나 미국보다 우리가 앞서고 있어요.”
― 디지털 TV 분야는 어떻습니까.
“컬러 TV는 우리가 일본보다 싸게 파는 수모를 오랫동안 겪어왔는데 디지털 TV에서는 일본과 동등하게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 있어요.”
― 인터넷 성장 속도에서도 일본에 앞서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산업화 시대에는 일본에 뒤졌지만 정보화시대에는 일본을 앞설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았습니다. 앞으로 20년 동안은 디지털 TV, 통신 단말기, 인공위성수신기 등의 새로운 정보통신 분야에서 일본보다 앞서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2000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런 발전도상에서 경제적 여유와 정신문화적 여유가 조화를 이루며 균형발전을 해나가면 21세기 초반에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앞선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우리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 앞으로 우리 사회의 산업구조를 뒤바꿔놓을 핵심 산업은 디지털 TV와 IMT-2000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까?
“그것보다 더 많죠. 옛날에 흑백 TV에서 컬러 TV로 넘어올 때 부품수가 3배쯤 늘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산업이 많이 발전했죠. 디지털 TV는 컬러 TV보다 부품수가 3배가 넘으니까 관련 부품산업이 많이 발전할 겁니다. 지금 전세계에 컬러 TV가 14억대 있는데 2010년까지 5억대 정도가 디지털 TV로 바뀔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런데 그 5억대 중에서 20%, 즉 1억대 정도는 우리가 보급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따르는 부품산업이 굉장히 성장할 겁니다.”
― IMT-2000사업 전망은 어떻습니까?
“IMT-2000도 CDMA처럼 우리가 앞서갈 수 있습니다. IMT-2000 단말기는 손에 들고 다니는 컴퓨터입니다. 통신은 물론이고 인터넷도 됩니다. 이 단말기를 가지고 세계 어디서나 자기 번호 하나만 갖고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 시장은 무궁무진합니다. 이 시장에서 우리가 교두보를 잡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다섯번째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일본의 기업들, 선진국의 노키아 에릭슨 등도 있지만 한국이 굉장한 힘을 발휘할 겁니다.”
정보화시대에는 우리가 일본보다 앞서갈 수 있다는 낙관의 이면에는 그늘도 있다. 컴퓨터나 인터넷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이야 얼마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만, 산업화 시대의 역군이었던 40대 이상 세대들은 젊은 세대들에 밀려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남궁 장관은 어떤 해법을 가지고 있을까.
“산업 현장에서 밀려나는 구세대의 취업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세대들의 취업문제입니다. 지금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오는 신규 인력은 60만명 정도 됩니다. 지금부터 25년 전인 70년대에 연간 65만명 정도 인구가 태어났는데 그 인력들이 지금 산업현장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이 신규 인력 60만명을 소화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산업이 정보화되면서 인력이 감축되기 때문에 산업현장에서 빠져나오는 인력 10만명의 재취업 문제도 배려해야 합니다.”
― 결국 매년 7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만….
“정보화 사회라는 벌판을 개척해서 신규인력 60만명을 그쪽으로 보내고 10만명씩 나오는 인력은 재교육시켜 그 주변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어요? 이제는 농경사회로 돌아갈 수도 없고, 산업사회로 돌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남궁 장관이 가장 강조한 정보화시대 핵심사업은 인터넷 산업이었다. 인터넷 이용자수는 1999년도 초에 300만명이었는데 작년 한해에 400만명이 더 늘어나 연말에 700만명이 됐다는 것.
“작년 연초부터 우리가 사이버코리아21이라는 사업을 시작했지만 하반기에 와서야 불이 붙었어요. 하반기의 속도로 계속 나간다면 올해 600만명이 더 느는 건 간단합니다. 그러면 올해 인터넷 이용자수가 1300만명이 되고, 내년 말까지는 2000만명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거대한 시장이 형성됩니다. 인터넷 이용자가 구매력이 없는 청소년에서 40대 가장이나 주부 등 구매력이 있는 사람들로 확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전자 상거래가 활성화될 겁니다. 일반적으로 인터넷 이용자수가 2000만명이 넘는 시점에서부터 급속도로 인터넷산업이 발전해서 대혁명이 일어나는 거죠. 특히 인터넷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거래할 수 있기 때문에 유통산업에서 대변화가 생깁니다.”
남궁 장관은 그 실례로 우체국에서 이포스트(e-post)를 통해 특산물을 팔고 있는 예를 들었다. 지난해 입시철에는 엿만 8000만원어치를 팔았다는 것.
남궁 장관은 앞으로 국가의 흥망은 인터넷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
“전세계적으로 보면 1998년말 현재 인터넷 이용자수는 1억5000만명으로 추정됐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1억명이 늘어나 1999년도 말에 약 2억5000만명이 됐고, 이 속도로 나가면 2005년 안에 인터넷을 이용하는 전세계 네티즌이 7억명 이상이 될 것입니다. 인터넷 나라에서는 여권이 필요없기 때문에 어느 국가에도 갈 수 있습니다. 종교나 이념, 그리고 인종과 관계없이 누구나 갈 수 있는 열린 사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상품, 문화, 정보도 거기에 경쟁력있게 진열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처럼 인터넷 나라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개인, 기업, 국가는 앞으로 계속 번영할 것이고 자기 상품, 정보, 문화를 진열할 수 없는 개인, 기업, 국가는 소멸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대하게 탄생하는 인터넷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인지하고 교역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 교육분야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측되는데… .
“대학 교육에서 입학 정원의 벽은 깨질 겁니다. 인터넷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많은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지요. 지역적 한계도 무너집니다. 서울에 앉아서 미국 MIT 교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수강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의 연령도 파괴될 겁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스템의 교육이 시작되는 거죠.”
― 일각에서는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교육이 교수와 학생간의 스킨십 부족이라는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미국에 ITU라는 사이버대학이 있습니다. 이 대학 총장과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했는데 그걸 보완하는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ITU에서는 한 학기가 끝날 때 테네시 계곡이나 하와이 리조트에 모여서 3주정도 워크샵을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3주정도 스킨십을 가지면 상당히 보완이 된다고 합니다.”
― 인터넷에서는 영어가 공용어처럼 됐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
“영어는 인터넷 나라에서는 거의 필수가 돼 있고, 두 번째로 떠오르는 언어가 중국어입니다. 그래서 MIT의 네그로폰테 교수는 저와 얘기를 나누다가 ‘너희 나라는 지정학적인 조건이 그러니까 영어외에도 중국어를 마스터하라’고 해요. 현재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10만명이고 중국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1만명 정도되는데 앞으로 중국에도 한 10만명 정도 가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인터넷으로 인해 사라지는 직종과 뜨는 직종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앞으로 대리점은 사라지고 택배업이 급속도로 발전합니다. 미국에서 없어지는 직종 중 하나는 보험 세일즈맨입니다. 인터넷에 자신과 관련된 자료을 입력하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줍니다. 보험 세일즈맨이 더 이상 필요없죠. 인터넷으로 뜨는 업종은 사이버 증권입니다. 우리나라가 이 분야에서는 세계 1등입니다. 전체 거래량의 45% 이상이 사이버 시장에서 거래가 됩니다. 직접 뛰어다니면 전장에 한번 후장에 한번 밖에 거래를 못하지만 인터넷에서는 하루에 10번도 거래할 수 있습니다.”
말은 잘해도 돈은 못 벌어
주식 이야기가 나온 김에 즉흥적인 질문을 던져 보았다.
― 투자가에게 어떤 종목의 주식을 추천하겠습니까?
“제가 벤처기업에 투자하라고 했다가 손해를 보면 남궁 장관의 말을 듣고 주식을 샀다가 망했다고 할 것 아닙니까. 잘 선정해서 투자해야죠. 우선 그 벤처기업에 기술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장가치가 함께 상승해야죠. 자본금은 10억인데 기술이 뛰어나 시장 가치가 한 100배쯤 된다면 안전한 기업이죠.”
― 직접 투자를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나이가 많으니까 모험은 못하겠죠. 반은 전자나 반도체쪽으로 투자하고 반은 벤처 기업쪽에 투자할 겁니다. 이것도 잘 알아서 해야 되죠. 수학 교수가 계란값을 잘못 치를 수 있듯이 정보통신장관이니까 말은 잘하지만 돈은 못벌어요. 그래서 주식 투자는 하지 않습니다.”
― 남궁 장관께서 정부의 벤처사업으로 구상한 것이 국민 인터넷 PC사업인데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 사업은 저소득층에게 PC를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겁니다. 이 정책은 주효했고 고가로 팔리던 대기업 PC의 가격도 50만원씩 다운시켰어요. 1년에 200만대가 팔렸다고 하면 1조원 정도는 국민들이 절약한 셈입니다. 금년에 400만대 가까이 보급될텐데 그렇다면 2조원 정도를 국민들이 절약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업계 입장에서는 박리다매가 되겠지만 이것이 확대됨으로써 소프트웨어 산업도 확대되고 전자 상거래도 확대되어서 연관 효과가 큽니다. 이 사업을 보고 일본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이런 정책을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 이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었습니까?
“실무진들이 안을 냈고, 저도 아주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현장에서 자란 사람이니까 동물적인 감각이 있죠.”
― 업계에 있다가 정부에 들어와서 보니 공무원들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공무원이 기업에 있는 사람보다 일을 못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와서 보니까 기본적으로는 유능합니다. 그런데 기업체만큼 속도가 나지 않는 것은 법테두리 내에서 일을 해야 하니까 재량권이 없고 다른 부처와 협의하는 과정에서 기업체보다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 요즘 정보통신부에 유능한 인재들이 많이 몰린다고 하는데… .
“상위권에서 많이 옵니다. 이것도 유행이라고 봐야 되겠죠. 일거리가 많은 부서에 오고 싶어하니까….”
연봉 2억은 받을 수 있어
― 장관께서는 스스로 평가한다면 연봉을 얼마나 받아야 된다고 보십니까?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이것 저것 합치면 연봉이 2억원 정도 됐으니까 그 정도면 지금 내 나이에는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벤처기업을 하는 사람은 1년에 몇십억을 벌 수 있지만 그건 다음 세대들의 얘기고 우리들 세대는 일에 만족하면서 살았어요.”
―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된 배후에는 ‘박정희식 리더십’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앞으로 정보화 사회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할 터인데 민주화 투쟁을 오랫동안 한 김대중 대통령의 리더십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지금 대통령께서 가지고 계신 정보화에 대한 정열이라면 마치 40년전에 산업사회로 진군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보화 사회로 진군을 시작한 대통령으로 기억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금년도 대통령의 신년사를 보면 정보화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다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상당 부분을 대통령께서 직접 쓰셨다고 합니다.”
남궁 장관은 정보통신분야에서 세계적인 두각을 나타나고 있는 인물들과도 친분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 물어보았다.
“우선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여러번 만났는데 한국에 오면 꼭 저를 만납니다. 빌 게이츠 회장이 초청을 해서 집에도 두 번이나 갔어요. 세계 최고의 부자가 5000만달러짜리 집을 지었잖습니까. 1997년도 5월달, 아직 집이 완성되기 전입니다. 시애틀에서 배를 타고 두 개의 호수를 건너서 빌 게이츠 회장댁에 갔는데 배를 타는 포트에 있는 식당의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 일행을 보고 박수를 치더라고요. 마침 일행중 시애틀 출신이 있었는데 그 여자한테 시애틀 사람들이 빌 게이츠를 그렇게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빌 게이츠는 시애틀의 귀염둥이다(He is a son of Seatle)’라고 해요. 누구한테든 사랑을 받는다는 거죠.”
―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빌 게이츠 회장은 분배의 윤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와 함께 일한 사람은 모두 부자가 됐어요. 미국의 10대 거부중에 1등 빌 게이츠, 2등 폴 앨런, 3등 스티브 발머가 모두 빌 게이츠와 함께 사업을 시작한 동료예요.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 캠퍼스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1만5000명인데 이중 7000명이 백만장자입니다. 빌게이츠는 돈도 많이 벌었지만 돈 번 것을 자기 직원들한테 나눠줘서 다 같이 부자가 된 거예요. 아주 멋있는 거죠.
우리나라 기업가와는 좀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40년동안에 기업은 크게 발전했지만 기업체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퇴직을 하면 그날부터 버스 타고 다녀야 되거든요. 그래서 벤처기업으로 성공한 후배들한테 제가 그런 얘기를 해줍니다. 비트컴퓨터의 조현정 사장같은 사람은 20억원을 내서 장학재단을 만들었어요. 한글과 컴퓨터의 전하진 사장도 한 10억원 정도를 내서 전국 고아원에 PC를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1세기로 들어가는 벤처기업가들이 우리들의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남궁 장관은 학계에서 좋아하는 인물로는 1987년도에 노벨물리학상을 탄 펜지아스 교수를 들었다.
“그분은 AT·T에서 오랫동안 이사를 했는데, 제가 그분을 만난 건 한 10년전쯤 됩니다. 저는 미국에 가면 꼭 그 분을 찾아가서 뵈었어요. 21세기를 보는 눈이 아주 탁월한 분입니다. 10년 전에 21세기의 변화에 대해서 미리 예측을 해주었습니다.
첫째 하드웨어는 가치가 떨어지고 소프트웨어가 승부를 낼 것이다. 둘째 노하우, 즉 기술을 갖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만 내가 필요한 기술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를 아는 노-웨어(know-where)가 더 중요하다. 이미 도태된 기술이 있는데 자기가 돈을 들여서 또 개발하면 낙오한다 이거죠. 자기가 필요한 기술이 어디 있는가 알아서 찾아쓰는 게 좋다는 겁니다. 세째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이 어디인가를 알아서 여러군데 흩어져 있는 관련정보들을 시스템화하는 업종이 앞으로 승부를 낼 것이다는 거예요. 삼성SDS, LGEDS가 전부 그런 업종인데 저는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쪽에 그물을 친 거죠.”
남궁 장관은 이외에도 여러 명의 외국인들의 이름을 거명했지만 ‘인터넷 황제’로 통하는 손정의 회장의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다.
― 손정의 회장과는 인연이 없습니까.
“사실 손정의씨는 소프트웨어 맨은 아닙니다. 투자의 귀재죠. 빌 게이츠는 자기의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승부를 낸 사람이지만 손정의씨는 다른 사람이 개발한 것을 발견하고 투자해서 돈 번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조금 다르죠. 만나긴 몇번 만났습니다. 그러나 정말 소프트웨어에 정열을 바치는 영웅들에 대해서는 칭찬을 해야 하지만 투자가들은 좀 달라요.”
예상과는 달리 남궁 장관은 손정의 회장에 대해서는 인색해보였다. 그가 평가하는 사람들은 투자가보다는 기술 개발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내에서는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인 안철수씨를 높이 평가했다.
“안철수씨는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안철수씨는 98년 3월 쯤 한글과 컴퓨터와 똑같이 부도날 운명에 있었습니다. 자본금이 5억원인데 안철수씨는 이 자본금을 다 까먹었어요. 미국 사람들이 와서 안철수 솔루션이 좋으니까 1000만달러를 주겠다고 했어요. 5억원짜리 회사를 120억원 사겠다면 회사 경영도 어려웠는데 팔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미국에 넘기기는 싫으니까 저한테 왔어요. ‘1년 버티는데 얼마 필요하냐’ 했더니 ‘한 3억원 필요하다’ 그래요. 그래서 삼성SDS 돈으로 3억원을 투자해줬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 그 회사 가치가 한 100배쯤 올라갔습니다. 완전히 살았어요. 아직은 예측치인데 작년에 180억정도 팔아서 100억 가까운 흑자가 났거든요.”
남궁 장관은 앞으로 그런 실력이 있는 벤처기업가들을 발굴해 키우고 싶다고 강조했다.
― 남궁 장관께서는 기업과 정부에서 모두 일한 경험을 갖고 계신데 여기서 터득한 행정력과 경영 마인드를 가지고 실리콘밸리와 같은 첨단도시를 만들어 볼 생각은 없습니까?
“제가 한가지 꿈이 있습니다. 작년에 만들어놓은 프로젝트 중에 실리콘 로드 프로젝트라는 게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 벤처기업을 쉽게 창업할 수 있는 지역, 즉 서울 대구 부산 광주 전주 등 대도시와 중소도시 등 전국의 24개 도시에 개인이 사기에는 어려운 고가 장비를 갖춘 소프트체인점을 만들어 싸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주변에다가 창업준비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0평짜리 인큐베이터인데 젊은이들이 여기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회사를 만들기 직전 단계에서 스타들이 탄생할 거란 말이죠.”
― 벤처기업들이 몰려 있는 서울의 테헤란로 같은 곳입니까.
“그렇죠. 서울의 서초동과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약 4만명이 모여 있습니다. 그곳에서 한 10만명의 젊은이들이 일할 수 있게 만들어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테헤란로 밸리, 디지털 밸리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영웅들을 키워서 미국 실리콘밸리에 옮겨주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센터를 하나 샀습니다. 그래서 금년 3월까지 이 센터에 80개 회사를 입주시키려고 해요. 거기서 미국의 자본을 받아들여 세계를 향해서 일하고 그 경험을 살려 실리콘밸리에 먹히는 시스템을 서울에다 만들어보자는 겁니다. 앞으로 테헤란로 밸리는 아시아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 되지 않겠느냐는 구체적인 꿈을 가지고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소설가 꿈 포기한 전문경영인
무명의 젊은 인재들을 세계적인 벤처기업가로 키우고 싶은 남궁 장관의 꿈은 자신이 걸어온 인생역정과도 무관하지 않다.
1938년 경기도 용인의 평범한 농부의 2남1녀중 막내로 태어난 남궁 장관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선린상고 야간부에 입학했다. 한때 문학에 심취해 습작도 해보는 등 소설가의 꿈을 키웠으나 군에 있을 때 소설가의 꿈을 포기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군 제대후 고려대 경영학과로 편입해서 졸업한 그는 중앙일보에 입사, 기획실에서 근무하다가 그때 막 귀국한 이건희 회장을 만났다.
“1968년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IBM이 들어와 기업체 직원들에게 컴퓨터 교육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듬해인 69년에 이건희 회장이 저를 불러 앞으로 이 분야가 유망할 터이니 컴퓨터 교육을 받으라고 해요. 그래서 2기생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KIST에 대형컴퓨터가 한 대 있었는데 밤에는 민간인이 이용할 수 있어서 밤마다 KIST가 있는 홍릉에서 살았습니다. 그후 어느 부서에 가든지 업무를 컴퓨터로 처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1975년에 삼성전자 기획조정실장을 맡아 일하던 남궁 장관은 82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도미, 미국 일리노이대와 하버드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86년에는 현대전자산업의 부사장으로 스카웃됐다.
“당시 삼성전자 내부에서 갈등이 있어 떠났는데 이건희 회장에게 이야기했더니 양해를 해줬어요. 그후 93년에 이건희 회장이 다시 불러 삼성데이타시스템에서 일하게 됐어요.”
남궁 장관은 현대와 삼성 양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PCS 사업자 선정 때 삼성과 현대가 함께 손을 잡고 ‘에버넷’이란 컨소시엄을 만들었다. 남궁 장관은 이미 한국하이텔 창업과 유니텔 창업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석채 정보통신부 장관이 주도한 독특한 채점 방식 때문에 에버넷은 사업자 선정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만약 그때 사업자로 선정됐으면 제가 사장이 됐을 터인데 그렇게 됐으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르죠.”
남궁 장관은 이제 정보통신부 장관이 되어 IMT-2000사업자 선정을 관장하게 되었다. 선정 작업과 관련,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삼성그룹 출신인 남궁 장관은 한쪽으로부터 비난이나 섭섭한 감정 표시를 받을 터인데 부담이 되지 않을까.
“제가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있는 한 나라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순리대로 투명하게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내일 일을 모르기 때문에 남궁 장관의 앞길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이번에는 유임됐지만 얼마 안 있어 4·13 총선에 대통령이 출마할 것을 권유해도 남궁 장관은 고사할 것인가?
“이제 제 나이에 낯선 정치세계에 뛰어들어 무엇을 하겠습니까. 제가 30여년동안 해오고 잘하던 일을 계속 해야죠. 벤처기업 키우는 일이 더 보람됩니다.”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