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호

인간관계의 달인 김종호 인간적 삶의 등불 이소선

  • 정혜신 < 정신과 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 okopenmind@netsgo.com

    입력2005-04-08 15:2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김종호 국회부의장과 인권·노동운동가인 이소선 여사는 ‘인간적’이라는 삶의 화두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비슷한 연배로 같은 시대를 살아왔지만 전혀 다른 삶의 역정을 걸어온 두 사람에게서 ‘인간적’이라는 가치관의 의미를 살펴본다.
    ‘~적(的)’이라는 접미사는 한자어 뒤에 붙어 ‘그러한 성질, 경향,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적’이 붙은 수많은 말 중의 하나인 ‘인간적’이라는 단어는 무슨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인간적’이란 말을 긍정적인 개념으로 사용한다. ‘인간적이다’는 말은 어떤 사람에 대한 호감의 다른 표현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악마가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 세상살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처럼 ‘인간적’이라는 단어도 이따금 그런 갈등을 유발한다.

    어떤 부모는 아이에게 “넌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니?” 하는 질문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으면서 “공부는 얼마큼 했니?”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묻는다. 아이를 공부기계처럼 여러 학원으로 몰아대는 부모를 ‘비인간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다가도 막상 그 부모를 접하면 자신의 아이가 이 다음에 더 ‘인간적’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잠시 매몰찬 모습을 감수하는 ‘인간적’인 모습에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인간적’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미묘하고 복잡한 의미를 좀더 정밀하게 살펴보기 위해서 30대 후반의 남자가 작년에 경험한 사례 한 가지를 들어보자.

    휴일 늦은 저녁 한적한 거리에서 불법유턴을 한 남자가 이면도로에 들어서니 갑자기 어디선가 교통순경이 나타났다. 현행범이라 거수경례를 붙이는 경찰관에게 할 말을 잃고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는데, 그 남자를 쳐다보던 경찰관이 친근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법적으로 하실래요? 인간적으로 하실래요?”



    대번에 경찰관의 말뜻을 알아들은 그 남자는 교통순경에게 지폐 한 장을 쥐어주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 지금도 그렇게 인간적(?)인 풍경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경우 ‘인간적’이란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또 어떻게 사람들은 이런 순간에 ‘인간적’의 의미를 그렇게 쉽게 알아듣는 것일까. 한 신앙인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저 사람은 참 인간적이야’라고 할 때는 분명히 자신의 가치판단을 근거로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범위와 수준에서 나에게 좋으면 인간적이다. 옳고 그름은 나중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적이며 또 나는 인간적인가?’”

    이렇게 만만치 않은 ‘인간적’ 삶의 화두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두 사람이 있다. 김종호 국회부의장과 인권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인 이소선 여사다. 부연하자면 김부의장은 현재 6선 국회의원이자 자민련 총재대행이고 이여사는 노동자의 살아 있는 ‘불꽃’으로 불리는 전태일의 어머니다.

    이소선 여사가 70대 초반이고 김종호 부의장이 60대 후반이니까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아온 셈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겪은 삶의 역정은 전혀 다르다. 김부의장이 내무관료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외형적인 절차를 꼼꼼히 따지며 법을 만드는 삶을 살았다면 이여사의 삶은 불법과 막무가내식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물리적인 측면에서 김부의장은 줄곧 ‘양지의 삶’을 살아왔다면 이여사의 삶은 ‘음지’ 그 자체였다.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인간적’인 가치관을 중시했다는 정도일 것이다. 물론 공통점은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떻게 그토록 상반된 이력을 가진 두 사람을 ‘인간적’이라는 공통된 잣대로 평가할 수 있을까. ‘인간적인 삶과 비인간적인 삶’의 대칭구도로 설명해야 아귀가 맞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필자는 ‘인간적’인 그리고 ‘더 인간적’인 병렬식 구도로 두 사람의 삶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렇다면 김종호 부의장은 어떻게 ‘인간적’이고 이소선 여사는 왜 ‘더 인간적’인가.

    김종호 가는 곳에 권력 있다

    먼저 김종호 부의장에 관해서 살펴보자. 권력의 고비고비에서 김종호만큼 절묘한 선택을 한 정치인도 흔치 않다. 5공때는 내무장관, 6공 때는 원내총무, 문민정부에서는 당대표 그리고 현재는 자민련 총재직무대행이자 국회부의장이다. 정권은 바뀌어도 그의 행보에는 그늘이 없다. ‘향일성(向日性)’이라고 비난도 받지만 어쨌든 그의 선택은 늘 성공했다. “여권내 힘의 향배와 줄서기에 특출한 후각을 보여왔다”는 언론의 평가나 “김종호 가는 곳에 권력이 있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내무부 주사에서 시작하여 내무장관에 올랐을 만큼 집념이 강하고 대세 판단력이 빠르다는 게 그 첫째고, 또 하나는 은근한 미소에 현악기 선율이 흐르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상징되는 그의 뛰어난 처세술과 인간적 친화력이다. 독특한 사교술과 윗사람에 대한 무한의 충성심은 그의 그늘 없는 인생을 설명하는 두 개의 키워드라 할 만하다.

    국회부의장에 선출된 지 한 달 만인 작년 7월, 김종호는 자민련 교섭단체 구성을 위한 일련의 사건으로 뉴스의 중심인물이 되어 ‘인간적’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자민련과의 밀약설에 항의하기 위해 한나라당 의원 몇 명이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뒤늦게 귀가한 김종호는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로열살루트 21년산’ 술병을 꺼내와 권하면서 정겹게 술잔을 주고받는 것으로 앙금을 털어버렸다.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김부의장에게 항의할 것은 모두 했다”면서 “손님에게 내온 술을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어려운 것 아니냐”고 해명했단다. 인간적 접근이란 그렇게 강력하다.

    그 다음날 본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이 날치기 처리되는 것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수십 명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그의 자택에서 출근저지 투쟁을 벌였다. 이때도 김종호는 ‘감칠맛 나는’ 친화력을 여지없이 발휘한다. 농성중인 한나라당 의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수고가 많다. 제대로 대접을 못 해서 미안하다”며 자장면 130그릇을 대접하는 광경은 정겨움 그 자체다. 그런 와중에 양말을 신은 채 도망갔다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이끌려 다시 자택으로 돌아오면서 웃음을 터뜨리는 김종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성인용 버전의 재미있는 숨바꼭질을 보는 느낌이다.

    정치인 특유(?)의 욕설과 멱살잡이도 안 하고 인간적으로 대처한 것을 두고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적인 정치’를 지향하면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해도 이 정도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김종호는 좌우명을 ‘인자무적(仁者無敵)’으로 삼을 만큼 정치세계에서 인격적인 인간관계를 남달리 강조하는 사람이란다. 그가 요직에 등용될 때마다 신문의 인물평에는 거의 빠짐없이 “지나치게 싹싹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대인관계에 열심”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다. ‘인격적인 인간관계’ 같은 아름다운 행동은 정치세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해야 옳다. 그러나 현관 열쇠 하나로 자동차 문도, 책상서랍도 모두 열려는 듯 ‘인간적’인 면모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드는 부적절함이 문제인 것이다.

    지난해 7월 JP의 지나친 골프나들이로 자민련 원외위원장 간담회에서조차 ‘골프정당’이라는 비판론이 대두되자 김종호는 이렇게 말한다.

    “김종필 명예총재에게 골프는 취미가 아니다. 그분 연세가 75세인데 골프는 건강에 대한 집념이다. 더 권장해야 할 일이다.”

    인간적 측면에서야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는 얘기지만 한 정당의 총재대행의 발언 치고는 너무 원시적이다. 김종호의 인간적인 말이나 행동은 그의 정치생명을 지켜주는 효자노릇을 하기도 한다.

    그는 4·13총선을 앞둔 지난해 설 연휴에 가족들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는 JP를 따라나섰다가 비난받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당시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5선의원이었던 김종호는 선거구 통·폐합으로 공천 여부가 불투명해지자 당초 예정에도 없는 JP의 일본행에 동참하는 기민함을 발휘해 5박6일간 인간적으로 ‘독대’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공천에 탈락하고도 JP의 배려로 자민련 비례대표 3번으로 추천돼 여섯 번째 금배지를 달고 국회부의장에 선출되는 행운을 누린다.

    김종호에게는 정치의 최종 소비자인 국민보다 ‘그들간의’ 일차적 인간관계가 더 중요한 듯하다. 그러나 아이스크림 회사의 제품개발 팀장이 소비자 입맛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장님 입맛에 맞는 아이스크림 만들기에만 여념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김종호는 자신과 연을 맺었던 보스들에게 더할 수 없는 충성심을 발휘한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다. 윗사람과 조직에 대한 충성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겠지만 보스의 입맛만 황홀하게 하는 아이스크림식 충성은 아닌지 따져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김종호는 20여 년은 내무관료로, 20여 년은 정치인으로 활동해 왔다. 그 동안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대통령과 현재의 JP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보스에게 언제나 최고의 인정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다. 그는 그 비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그저 크는 게 아닙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됨과 성실성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김종호는 내무관료 시절 주로 본부 근무를 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내가 원한 게 아니라 장관이 바뀔 때마다 이상하게도 나를 신임해주고 본부에 붙들어 두려고 했어요. 일을 잘 했다기보다는 열심히 했지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목표를 달성해야 잠이 오는 성격이었으니까요.”

    지금도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전하다. 지난 6월 중순 김종호는 ‘JP대망론’의 전도사를 자처하면서 매일 밤 외부인사를 만나는 등 건강을 해칠 만큼 무리하여 과로로 병원에 입원했다.

    맡은 일에 헌신하는 열성적인 추진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김종호처럼 윗사람으로부터 공개적인 칭찬을 많이 들은 공인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그 원인을 김종호의 지나친 ‘향일성’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윗사람의 공개적인 칭찬은 그가 충북도지사로 있던 1980년 7월, 충북지역 수해 현장 시찰을 나온 당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정성을 다한 보고와 대처 때문이었는지 전두환 위원장은 “잘 대처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얼마 후 그는 내무부차관에서 민정당 창당멤버가 되어 정계에 입문한다. 그때까지 정치인을 ‘건달’로 보고 있었던 김종호는 울면서 차관직 사표를 썼다는데, 전두환 전대통령은 김종호를 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차출(?)하는 각별한 배려로 슬픔을 달래준다. 물론 그 후 김종호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국회 날치기 처리의 중심 인물

    1991년 김종호 민자당 원내총무는 당 간부들에게 쟁점 안건의 강행 처리를 지시하면서 자신의 소중한 경험담을 들려준다.

    “나는 1986년 정기국회에서 1987년도 예산안을 야당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면서 처리했다. 그 결과 고위층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내무장관이 됐다. 그러니 여러분도 알아서 하라.”

    실제로 김종호는 1986년 국회예결위원장으로서 예산안을 날치기 처리해 전두환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가 20년간의 내무행정 관료 시절부터 꿈꾸어오던 내무부장관 자리를 부상으로 받았기 때문에 더 자부심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에 대한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칭찬과 보상에 대한 조건반사라고 해야 할지, 이후 김종호는 걸핏하면 ‘날치기’ 정국의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그래서 김종호에 대한 윗사람의 칭찬은 대부분 날치기 처리와 관련이 있다. 1991년 5월 한 중앙일간지에 보도된 칭찬 릴레이의 한 사례다.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후 김종호 원내총무는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날치기해서 공식적으로 칭찬받은 기록은 아마도 김총무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뒷부분은 잘못된 보도다. 그는 이미 예결위원장 시절 전두환 전대통령으로부터 날치기에 대한 공식적인 칭찬과 충분한 보상을 받은 바 있다. 1991년 11월의 한 신문기사도 점점 노련해지는 김종호의 날치기 처리 솜씨를 우회적으로 시사한다.

    “민자당은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각종 법안을 무더기로 날치기 통과시킨 후 원내 대책위를 열었다. 거사의 사령탑인 김종호 원내총무는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먼발치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특유한 표정으로 위엄을 부렸다.”

    그러나 칼로 흥한 사람은 칼로 망하듯 또다시 추곡수매동의안 등의 예산안 날치기를 지휘했던 김종호 민자당 총무는 융단폭격처럼 쏟아지는 여론의 질타를 견디지 못해 날치기 처리를 사과하고 정기국회를 10여 일 앞두고 전격 경질된다. 당인이라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인데 너무 일방적으로 김종호를 매도하는 것일까.

    지난해 7월 국회 본회의 날치기통과 저지를 위해 한나라당 의원들이 김종호의 자택을 봉쇄하고 있을 때 극적인 탈출에 성공한 김종호는 몇 시간 동안 부근 복덕방에 숨어 있었다. 이때 김종호의 심정을 한 칼럼니스트는 이렇게 추정하고 있다.

    “복덕방에서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5공 시절 예산안을 날치기했던 무용담을 떠올리며 또 하나의 전공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어쩌다가 한나라당에서 자민련으로, 자민련에서 총재대행에 국회부의장까지 해 여전히 ‘날치기’를 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처량하게 곱씹어봤을 것으로 믿고 싶다.”

    날치기 처리란 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무리하게 이루려 할 때 쓰는 방법이다. 그의 삶에 유난히 ‘날치기 처리’ 경력이 많은 것은 다수의 의견에는 아랑곳없이 궁극적으로 보스의 뜻을 중심으로 살아온 그의 일관된 충성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정치평론가는 김종호가 유달리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윗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는 게 천성처럼 몸게 배게 된 이유를 뿌리깊은 유교의식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김종호는 유학자인 조부와 교육자인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뿌리깊은 유교적 가풍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내무부에 있을 때는 전국 향교 보수작업에 앞장서기도 했고, 자신의 여러 직책 중에서 1983년 12월에 취임한 성균관 이사장 자리에 개인적으로 대단한 애정을 보이고 있단다.

    정신분석 용어 중에 ‘페르소나(persona)’가 있다. 인간이 집단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본래의 자기 얼굴 위에 덧씌우는 일종의 ‘사회적 가면’을 뜻하는 말이다. 페르소나의 본래 뜻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假面)을 말한다. 우리나라 탈춤에서 어떤 사람이 각시탈을 쓰면 각시 노릇을 하고 왕의 탈을 쓰면 왕이 되는 것처럼, 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탈을 썼다 벗었다 하게 된다.

    우리말 가운데 페르소나에 해당하는 말로는 ‘체면’ ‘얼굴’ ‘도리’가 있다. ‘가장 체면에…’ ‘선배 얼굴에…’ ‘아랫(또는 윗)사람 된 도리로…’ 등은 모두 페르소나를 강조하는 말들이다. 그러나 페르소나는 위선(僞善)과 같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말은 아니다.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가지는 ‘외적 인격’을 뜻하는 말이다. 다만 페르소나에 대한 맹목적인 동일시는 심리적 문제를 낳는다. 페르소나는 본질적으로 가상(假相)이며 진정한 자기(self)는 아니기 때문이다. 김종호의 삶은 ‘아랫사람으로서’의 페르소나로 일관한 느낌이다.

    지난해 자민련이 당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한 기자가 JP의 총재 복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자 김종호는 “원로는 원로대로 국가를 이끌어나가는 데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당의 일선으로 돌아오신다면 제가 먼저 만류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김종호의 캐릭터를 감안한다면 좀 의외의 대답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들어보면 “역시 김종호” 하는 소리가 나올 것이다. “당을 안정되게 살려 놓고 지도자로 모시는 것이 합당한 일인데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는 것이다. 한겨울 부모님의 신발을 가슴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 드리는 효자가 따로 없다.

    윗사람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나 존경심은 끝간데 없이 계속된다. “지금까지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을 제일 존경했는데 이젠 김종필 명예총재님과 이한동 총리(자민련총재)가 이 시대 최고의 지도자”라는 말은 총재대행이 하기엔 좀 낯뜨겁지 않을까. 정치적 이념이나 신의보다 ‘인간적’인 관계에만 몰두해서 생기는 부작용이 아닐까 싶다.

    그의 잦은 말 바꾸기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초 한 신문사에서 현역의원 273명을 대상으로 정치인의 구태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김종호에 대해서는 많은 의원들이 습관적인 말 바꾸기를 지적했다.

    그의 허언(虛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97년 4월 그는 여야를 통틀어 대통령후보 추대위 1호를 기록하면서 호기롭게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일부에서 ‘자가 발전’의 성격이 강하다며 차기 정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포석이라고 분석하자 김종호는 “두고 봐라. 김종호가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라고 호언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종호는 너무도 ‘간단하게’ 대선출마 의사를 없었던 일로 돌린다.

    한나라당에서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기는 과정에서도 말의 성찬은 계속된다. 자민련 입당을 1개월 정도 앞둔 시점에 한 기자가 그의 거취에 대해서 묻자 “항간에 내가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하지 않겠나 하는 의혹이 있는가 본데 나는 끝까지 야당인 한나라당에 남는다”고 말한다. 정치라는 게 다 그렇게 눙치고 연막 치는 일인데 무슨 호들갑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지난해 중반 개각설을 앞두고 김종호는 총재대행 자격으로 자민련 당내 인사의 입각을 거부하겠다고 공언한다. 그러나 8·7개각에서 자민련 몫으로 두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김종호는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우리 당이 장관 자리를 탐하는 정당이 아니라는 의지를 보여주려던 것이었다. 총재와 명예총재가 결정한 일은 흔쾌히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만의 인간관계’에 집착

    원래부터 김종호가 그렇게 ‘간단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가 서울대 법대 2학년에 재학중일 때 이승만 박사의 양아들이 무시험으로 입학했는데, 김종호는 옳지 못한 일이라고 여겨 동료 4명과 스트라이크를 주도하여 이박사 양아들로 하여금 자퇴하게 했다고 한다.

    충북도지사 재임 기간은 6개월에 지나지 않았지만 “국민을 하늘과 같이 두려워하면서 일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고향에서 펼치고자 했던 위민행정은 당시 충북도내에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12대 총선 때 괴산에서 처음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해 전국 최다득표율인 67%를 기록한 것이나,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에서 두 번째 높은 득표율을 올리고, 14대 때도 53%의 득표율을 올릴 수 있었던 근본적 바탕은 충북도지사 시절의 활약 때문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음성 ‘꽃동네’를 만드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도 도지사 시절이었다고 한다. 꽃동네라는 이름도 김종호가 지었다. 도지사 김종호가 아니라 인간 김종호로서 도와야겠다고 생각해 부지를 구입할 때도 예산을 지원하는 등 열과 성을 다해서, 오웅진 신부가 새벽미사 때마다 김종호를 위해 기도했을 정도였단다. ‘인간적’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단어가 아닌가.

    그러나 김종호는 근래 들어 점점 더 ‘그들만의 인간관계’에 함몰되어 영화 ‘신라의 달밤’에 나오는 대사처럼 완전히 ‘감’을 잊은 모양이다. 그의 상황인식은 너무나 인간적이고 일방적이다.

    지난 1월 초 헌정사상 초유의 의원임대 방식으로 자민련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 직후의 일이다. “그에 따른 민심이 어떻다고 보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김종호의 대답은 동대문 가는 길을 묻는 데 남대문 가는 길을 일러주는 사람을 볼 때처럼 답답함 그 자체다.

    “전국에서 참 잘했다, 잘됐다는 격려 전화가 쇄도했다. 국민들은 자민련이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하지 못해 온갖 수모와 설움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이나 안타까워한 것 같았다. 용기를 갖게 됐다.”

    그가 과로로 쓰러질 만큼 신명을 바쳐 부르짖는 ‘JP대망론’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JP가 대권을 잡으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김종호의 상황인식이 그렇다는 것이다. 근자에 김종호는 기자들을 만나면 전국에서 ‘JP대망론’에 대한 호응이 생각 이상으로 높다면서 ‘JP순서론’을 거듭 강조하고 있단다. 아마 김종호는 그 기자들이 만나는 자민련 실무 책임자들의 한숨섞인 발언은 바람결에라도 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당의 한 관계자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자.

    “JP에 대한 지지도가 4∼5%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민련 홈페이지에도 ‘늘 재미있는 농담으로 국민을 웃겨주는 자민련’ 등 비아냥과 욕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김종호는 올해 초 정당대표 신년사에서 “힘없이 흔들리는 정치나 기고만장하는 정치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먼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너무나 인간적이라서 짜증이 나기까지 하는 ‘그들만의 정치’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양기를 돕는 효과가 있어 주요한 한약재료로 쓰인다는 ‘부자(附子)’도 지나치거나 맞지 않는 곳에 쓰면 극약이 되는 법이다. ‘인간적인 정치인’이라는 멋드러진 의미에도 ‘부자’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김종호는 요즘 총재대행직 사의를 표명할 만큼 건강이 안 좋은 모양이다. 요양차 미국에 다녀왔다는 소식도 들린다. 필자는 진심으로 이 노정객의 건강이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그들만의 정치인’을 대표한다는 이유로 필요 이상(?) 난타를 당한 대한민국 국회부의장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가 아닐까 싶다. 쾌유를 기원한다.

    이번에는 이소선 여사의 삶을 살펴보자.

    이소선의 삶은 전혀 우아하지 않았다. 장남 전태일이 분신자결한 1970년 이후 그녀의 삶은 투쟁 그 자체였다. 아마도 전태일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소선이란 인물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 중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한번쯤 우연하게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노동자 가두시위로 꽉 막힌 퇴근길 자동차 안에서 그들의 집단이기주의를 탓하고 있을 때,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른 나이든 여인이 지나간 적은 없는가. 신성한 법원 건물 앞에서 경찰에 끌려가다가 길길이 악을 쓰며 속치마가 드러나도록 땅바닥에서 나뒹구는 여인을 보며 합법적인 절차의 정당성을 떠올려본 기억은 없는가. 국회의사당 앞에 텐트를 치고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그 안에서 1년이 넘도록 농성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면서 “저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며 냉소한 적은 없는가.

    만약 있다면 당신이 본 그중의 한 사람이 이소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난 30년간 웬만한 농성현장에는 늘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계피복노조와 동일방직, YH노조활동,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크레인 단식농성 현장,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국회 앞 농성현장,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철야 농성장, 양심수석방 촉구성명 발표, 의문사 진상규명 촉구대회 등 노동자들과 학생, 재야운동가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현장에는 언제나 이소선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소선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다. 먼저 한 영화평론가의 글을 읽어보자.

    “비오는 날, 아이에게 택시를 양보하고, 사슴이 물 먹으라고 한겨울 얼음판을 깨는 마음.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휴머니즘의 모습이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본성이 마냥 선한 것만은 아니라면? 버스에서 노인이 타면 자는 체하며 최소한 내 옆에 오지 말았으면 독백하는 사람들. 지하철에서 아이를 업은 장애인 아주머니가 내미는 쪽지를 행여 닿을세라 외면하는 시선들. 그들이 어쩌면 더 흔히 마주치는 ‘인간적인’ 모습은 아닐까?”

    단편적이고 소박한 질문이지만 왜 이소선이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지 그 단초는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놀이동산에서 아이의 환한 웃음을 보고 있을 때 혹은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정치인들의 육탄전을 보며 혀를 차고 있을 때, 이소선은 늘 어느 현장에선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구호를 외치거나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얼마나 전투적으로 살았는지 지난 30년 동안 이소선은 180번이나 법을 어겼다고 ‘문서에 올라 있고’ 또 세 차례에 걸쳐 3년여간의 옥살이를 했다. 모두 아들 전태일의 분신자결 이후에 생긴 일이다.

    아들과의 약속

    그러나 이 글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아니라 ‘인간 이소선’을 살펴보기 위한 글이다. 장기표씨의 말처럼 이소선이 그녀의 아들 전태일보다 훨씬 많은 노동운동을 했다는 물리적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소선의 삶은 우리에게 ‘인간적으로 산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 대부분이 노동운동과 관련되어 있는 까닭에 짧게나마 전태일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은 한국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10년 이상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 책인데 이렇게 시작된다.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 1948년 8월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어머니 이소선이 일수 3200원을 얻어서 사준 근로기준법 책을 가슴에 껴안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분신자결한 사건은 질식해 있었던 한국 노동운동을 소생시키는 불꽃이었다고 한다. 당시 동아일보는 1971년 신년호를 통해 6·25가 1950년대를 상징하듯, 4·19가 1960년대를 상징하듯, 전태일의 죽음은 1970년대의 한국 문제를 상징하는 뜻깊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전태일은 화상의 고통에 신음하며 어머니 이소선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한다.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해요. 엄마가 나를 그렇게 키웠으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한 거야. 나는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하고 도와줘야 한다는 엄마 말을 따라 자라서 그대로 실천했으니까 엄마도 내 부탁을 들어주세요. 엄마가 내 친구들하고 노력해서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에게 이익을 준다면 많은 아들 딸과 함께 살게 될거야.”

    죽어가는 아들 앞에서 자기 몸이 가루가 된다고 하더라도 아들이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큰 소리로 약속한 이소선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고, 그 혼절 상태에서 깨어난 이후 지금까지 30년 동안 그녀는 아들과의 약속을 한 번도 저버리지 않고 살아왔다.

    이소선은 아들이 죽은 후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로 아들의 죽음에 대해 당국이 주겠다고 했던 거액의 보상금과 이권 등을 단호히 거부한 것을 꼽는다. 당시 노동청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근로자 한 사람이 죽어서 이만한 액수의 위자료를 지급한 적이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를 제시하면서 이소선을 회유했다. 당시 그 돈이면 빌딩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하층빈민에서 벼락부자가 될 수 있는 제안이었다.

    사망 위자료라고 마음먹으면 큰 갈등 없이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었고 또 실제로 부정한 돈이 아닐 수도 있었는데 이소선은 독하게 마음먹고 그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 갖은 험한 꼴을 다 겪으며 불가능해 보이던 일을 수도 없이 이루어낸 그녀가 ‘가장 잘한 일’로 그 일을 꼽는 건 좀 의외일 수도 있다.

    아직도 가끔씩 그 얘기를 하는 걸 보면 그때 인간적 갈등이 무척 심했었다는 한 반증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전태일이 이승에서 마지막 남긴 말은 “배가 고프다”는 한마디였다. 이소선 일가는 가난하게 살았다. 이소선은 어린 시절부터 “간 날은 가고 바쁜 날은 못 가고” 그렇게 1년 정도 학교를 다닌 게 전부인 삶을 살았다. 출가 후에도 말로 다할 수 없이 어려운 살림, 남편의 횡포, 아들의 가출, 무작정 상경, 화재, 실명 등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런 이소선에게 당국이 제시한 위자료는 거부하기 힘든 인간적 유혹이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녀의 표현대로 “첫 단추를 잘 끼우고 난 후” 이소선은 마치 ‘준비된 투사’처럼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일개 촌부에 불과했던 이소선이 아들이 죽은 후부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처음부터 아무런 의심이나 거부반응 없이 학생을 비롯한 민주세력과 결합하여 ‘투사’의 길을 걸어온 사실에 대해서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별한 사상적 지식이나 사회적 경력이 전혀 없었는데도 그럴 수 있었다는 게 놀랍다는 것이다. 투박한 해석이지만 아마도 이것은 이소선이 가지고 있었던 본능적인 성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전태일의 분신소식을 라디오에서 듣고난 후 아들 친구가 집으로 찾아오자 그녀는 그 얼굴을 보고 태일이 죽게 됐다는 걸 직감했다고 한다. 그 친구가 택시를 타고 빨리 가자고 했지만 이소선은 태일이랑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자고 말한다. 냉정한 엄마라서가 아니라 그게 그녀의 성향인 것이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갑자기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후에 의외의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있다.

    영국작가 조앤 롤링은 남편과 이혼한 후 생후 4개월 된 딸의 양육과 생계가 막막하여 쓰기 시작한 ‘해리포터’ 시리즈로 30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한국 최고의 드라마 작가로 불리는 김수현씨도 비슷한 상황에서 시작한 일이 현재의 그녀를 만들었다고 한다. 극한의 좌절이 그 사람의 잠재능력을 외부적으로 극대화한 것이다. 이소선의 변신도 그런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준비된 투사’ 이소선의 진가는 아들이 죽은 직후부터 드러나기 시작한다. 노동조합 결성과 근로조건 개선 등 8개항의 요구조건을 내밀면서 아들의 시신 인수를 거부한 것이다. “그까짓 장례식은 죽은 고깃덩어리 끌어 묻는 건데 뭐가 중요하냐”며 버텼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고 여론이 진정되자 노동청은 청계노조 사무실을 폐쇄하는 등 노골적인 탄압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소선은 노동청 계단에서 뒹굴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서 노동청장에게 만일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들의 시체를 다시 파 갖고 오겠다고 악을 썼다. 이렇게 해서 전태일이 죽은 지 14일 만인 1970년 11월27일 청계피복 노동조합이 문을 열게 된다.

    청계노조는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한 상징이다. 노조가 결성된 후에도 당국의 탄압이 계속되자 이소선을 비롯한 전태일의 친구들은 노조 사무실에 석유통을 가져다 놓고 집단자살을 기도하는 등 극한 방법으로 노조를 지켰다. 이후 20여 년 동안 청계노조는 군부독재에 의한 강제 해산과 노조원들에 의한 원상복구가 반복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소선과 노조원들이 경찰과 벌인 투쟁은 차마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전쟁 그 자체였다.

    이소선은 청계노조를 명실상부한 노동조합으로 만들기 위해 1986년까지 낮엔 중앙시장에서 가서 중고 옷장수를 하고 밤에는 창동 자신의 집에 근로자들을 모아놓고 교육과 토론을 이끌었다.

    이소선은 청계노조뿐 아니라 어지간한 노동시위 현장에는 어디든 마다않고 쫓아가 선봉에서 싸웠다. 그녀는 자연 경찰의 표적이 되어 그들의 주먹질, 군화, 곤봉에 숱하게 두들겨 맞았다. 매에 못 이겨 실신한 적도 여러 번 있다고 한다. 물론 그녀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그악스럽게’ 싸웠다. ‘있는 힘을 다해 경찰의 다리를 물어뜯기’도 하고 교도소나 정보부에 끌려가서도 ‘머리로 그들의 가슴팍을 들이받으면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불법 플래카드를 제거하라고 윽박지르는 경찰에 맞서는 그녀의 대응방법은 이렇다.

    “나는 전신주에서 내려오자 걷어낸 플래카드를 형사의 모가지에 감아서 나뒹굴었다. 그리곤 플래카드로 있는 힘을 다해서 형사의 목을 졸랐다.”

    얼핏 보아 ‘우아하다’거나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소선의 그런 ‘우아하지도 않고 인간적으로 보이지도 않는’ 삶을 바라보면서 그녀에게 무슨 ‘인간적인 빚’이 있는 것처럼 불편함이 느껴지는 건 무슨 이유일까. ‘인간적’이라거나 ‘우아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저절로 해답이 떠오를 것이다.

    전태일이 사망한 다음해인 1971년 초 그녀는 동화상가에 있는 후생식당에서 노동자들을 위해 국수 삶는 일에 종사한다. 마치 자식들에게 먹일 음식을 마련하듯 정성을 다해 노동자들을 거둬 먹였다. 배고픔에 대한 그녀의 한 맺힌 경험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

    본격적인 노조활동을 시작한 후 그녀의 창동집에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노동자들이 몰려왔는데 돈이 없어서 라면 8개를 사다가 스물여덟 명을 먹인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럴 땐 “라면가닥이 안 보이도록 푹 고아야 된다”는 그녀의 요리비법을 듣고 있으면 목이 멘다. 어떤 때는 장바닥에서 주워온 무와 우거지를 넣고 비지하고 보리쌀로 죽을 끓이기도 했는데, 노동자들이 그것을 맛있게 먹는 걸 보면서 “참말로 사는 맛을 느꼈다”는 게 그녀의 즐거운 고백이다.

    ‘무식이 무기인 우리의 어머니’

    왜 이소선보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도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는지 알 듯하다. 이소선의 활동이 없었더라면 ‘전태일의 외침’은 과거 한 번의 일로 끝났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녀의 끝없는 희생과 정열에서 나온 절규가 한국 노동자 모두의 외침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소선은 살아 생전에 남들처럼 잘 먹이지도 못하고 하고 싶어하던 공부도 못 시킨 태일이에 대한 ‘에미 노릇’을 다하고자 노력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나는 배운 게 없어서 어려운 사상도 수준 높은 이론도 잘 모릅니다. 다만 어머니의 길을 걸어왔을 뿐입니다. 고난에 찬 노동자들과 함께 분노하고, 투쟁하고, 동병상련하면서 30여 년을 살다 보니 그것이 노동운동이요, 민주화운동이 됐습니다.”

    전태일 문학상 수상자 이행자씨는 그녀를 가리켜 ‘무식이 무기인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인간차별’에는 치를 떨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싸우는 사람이 이소선이니 그 말에 일리가 있다.

    그녀가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하는 건 지극히 ‘인간적’인 이유다. 그녀가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회(유가협)를 창립하여 국회 앞에서 텐트를 치고 회원들과 함께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422일간이나 농성을 한 것도 이유는 단순하다.

    강제징집을 피해 다니는 아들에게 군대 안 가면 안 된다고 설득해서 군대에 보낸 어머니가 있었단다. 병역기피자가 되면 사람답게 살 수가 없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 아들이 부대 쓰레기장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으로 불에 탄 채 발견되자 그 어머니는 자기가 아들을 죽였다며 정신이 돌아버려 물에 빠져 죽는다.

    “우리는 지가 죽었든 누가 죽였든 죽은 것은 알잖아. 의문사 아버지 엄마들을 보면 너무나 불쌍해 집에 가야겠다 싶다가도 저 사람들을 놔두고 어떻게 발길이 떨어져 집으로 가겠나….”

    결국 이소선을 비롯한 유가협 회원들은 1999년 12월28일 관련법률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장기표씨는 이소선을 보면서 “인간의 명석함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했는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간의 사랑에 대한 그녀의 신념이나 실천력은 무서울 정도다. 한글도 읽을 줄만 알지 쓸 줄은 모른다면서 “나는 무식하다”고 하지만, 대학 강연시에 그녀가 했다는 얘기는 지식인의 삶의 핵심을 관통하는 화두가 될 만하다.

    “우리 아들이 대학생 친구 하나 갖는 기 한(恨)을 했는데, 배왔는 지식 갖고 모른 척 외면하는 건 옳은 일이 아이다.”

    1980년대 중반 한 기자가 노동쟁의도 적법한 절차를 밟아서 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요지의 질문을 던졌더니 그녀의 대답은 극단적일 만큼 직설적이고 구체적이다.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대화, 대화 하는데 그건 말짱 개소리라. 파업 안 하면 누가 치다보기나 하나? 상대를 안 한다고.”

    지금 우리는 이소선의 이런 말을 전투적인 논리라고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 그게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녀는 텔레비전 뉴스도 어떻게 하면 노동 삼권이 보장돼서 노동자가 잘살게 될까 해서 본다. 한번은 친척집에서 자다가 “우찌됐던 노동삼권이 보장돼야 돼!”라고 잠꼬대를 해서 그 집 식구들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소선의 손녀가 초등학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이 “느이집 뭘하니?” 하고 물으니까 “우리집은 노동운동해요”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신앙이나 다름없다.

    말이 나온 김에 그녀의 가족 얘기를 잠깐 하자. 이소선은 2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전태일이 죽은 후 온 가족은 개인적인 생활을 거의 포기한 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막내 전순덕씨의 말에 따르면 국민학교 때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손님들이 들이닥쳐서 비좁은 방에서 공부할 장소도 마땅치 않고 잠잘 곳도 마땅치 않았다고 한다. 삼남매는 그런 환경에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때로는 시위현장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경찰에 끌려가기도 하면서 수십년을 살아왔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족에게는 인간적으로 못할 일을 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립운동은 자식들이 불우하게 살 수밖에 없는 물리적·심리적 빌미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독립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건 자신이 하는 일이 ‘더 많은 사람들을 더 오랫동안 더 인간적으로’ 살 수 있게 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독립운동가는 가장 ‘인간적인’ 사람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얼마 전 이소선의 딸 전순옥씨가 40대 중반의 나이로 영국 워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화제가 되었다. ‘학기 최우수논문’에 선정된 그녀의 논문제목은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을 위한 한국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다. 전태일 사망 당시 열여섯 살 소녀 전순옥씨가 결혼도 미룬 채 격동하는 노동현장에서 투쟁하다가 35세에 거의 맨손으로 영국으로 유학 가서 이루어낸 결실이라고 한다. 그녀는 현재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실태분석’ 연구를 위해 한 영세사업장에서 미싱시다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전순옥씨를 인터뷰한 한 일간지에 “이젠 결혼하고 싶다”는 잘못된 기사가 나가자 이소선은 딸을 심하게 꾸중하면서 “10년 공부하고 돌아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시집간다는 말이냐?” 하고 역정을 냈단다. 인간적으로 100% 동감할 수 있는 꾸중은 아니지만 이소선다운 말이다.

    1976년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의 머리말에서 이소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태일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속으로 되돌아가 그 안에 살아 있다. 5년여의 세월을 하루같이 병약한 체구를 이끌고 노동자들의 선두에 서서, 모든 잔학한 탄압에 맞서 투쟁하고 있는 그의 어머니 이소선씨, 이분은 후일 역사에 반드시 기록될 것이다.”

    그렇다. 필자는 그 영광스러운 역사적 기록의 한 귀퉁이에 ‘더 인간적인 사람 이소선’이라는 문구 하나를 보탠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녀가 열세 살 때의 기억 하나를 들어보자. 밤에 구구단을 적은 쪽지를 외우고 싶은데 그녀의 집에선 일하지 않을 때는 등잔불을 못 쓰게 했다. 그러자 소녀 이소선은 꾀를 내 산으로 올라간다.

    “산에 올라가서 동네를 내려다봄서 누구네 집이 젤 훤한가 보니까 서울 가서 전문학교 다니는 상포네 집이 젤 환해요. 그래서 그 집 가서 환한 봉창 밖에 그 쪽지를 디리대니까 잘 보이능기라.”

    이소선은 그녀의 수많은 아들 딸들에게 ‘환한 봉창’과 같은 사람이다. 인간을 비춰주는 거울 같은 사람이다.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게 가장 인간적인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생겨 산에 올라갔는데 어디에도 ‘환한’ 등불이 보이지 않는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 것인가. 분노에 못 이겨 분신으로 저항한 투사들의 머리맡에 달려가 “내가 전태일의 어머니다”라고 말하면 꺼져가는 생명들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모아 노동해방을 외치곤 했다지 않은가. “이제 농성장 지키는 것도 몸이 안 따르니 이렇게 살아서 무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말하지만 꼭 농성장에 있지 않으면 어떤가.

    단지 그녀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필자는 굳게 믿는다. 그래서 전태일의 홈페이지를 찾은 한 네티즌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노동자의 영원한 어머니이신 이소선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 바로 우리 아들이요, 당신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금상첨화(錦上添花)’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좋은 일만 겹친다는 뜻이다. 주부들 사이에서는 돈도 잘 벌고 밤일도 잘하는 남편을 일컫는 말이란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은 그 반대의 뜻이다. ‘금상첨화’의 법칙이 통용되는 사회도 나쁠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쪽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설상가상’의 법칙에 한숨 짓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금상첨화’의 법칙에 희희낙락한다면 그건 인간적이지도 정당하지도 않다. 내가 차지할 10개의 행운 중 한 개만 포기하면 최소한 10개의 불행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다시 또 10개의 불행이 겹치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인간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