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젖꼭지 꼬집힌 순간 죽고 싶었다”

남성 상대 성희롱 첫 배상판결 받은 J씨

  • 김순희< 자유기고가 >

    입력2004-09-15 17: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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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직원 200명에 남자 7명, 그중 가장 젊어
    • “야, 몸 야한데, 끝내주겠다”
    • 남편과의 성관계도 적나라하게 털어놔
    • 성희롱 빌미 제공자로 몰려 강제 퇴직
    • 증언대 서준 동료 용기에 감사
    • 결혼할 여자 생기면 성희롱 사실 알릴 것
    ”제 휴대전화 번호와 이름은 어떻게 알았나요?”

    남성으로서 성희롱 첫 배상판결을 받은 장모(28)씨. 지난 5월초 법원의 판결이 나온 직후 취재를 위해 전화를 걸자, 그는 마치 숨기고 싶은 비밀을 들켜버린 사람처럼 당황해했다. 거듭 인터뷰를 사양하는 그를 설득해 겨우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다음날 저녁 7시30분, 서울 지하철 5호선 군자역 구내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시간 10분 전 그에게 확인 전화를 했다. “잊지 않고 있어요”라고 짧게 대답한 그는 7시45분이 지나도록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자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요. 미안합니다. 20, 30분만 더 기다려주세요” 하고 끊었다. 8시20분께, 그로부터 군자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을 찾고 있는 듯한 젊은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장○○씨 되시나요?”

    “아닌데요.”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성이 다가와 “접니다”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연한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그는 쌍꺼풀진 큰 눈이 인상적인 미남형이었다. 20대 후반의 나이치고는 조금 앳돼 보였지만 체격은 건장했다.

    -약속시간을 계속 미뤄 안 오나 생각했습니다.

    “안 나오긴요. 약속을 했는데…. 전 한번 한 약속은 꼭 지켜요. 아니, 지키려 최대한 노력한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을 텐데….

    “아, 예…. 많이 힘들었어요. 아주 많이요.”

    늦은 시간이지만 두 사람 모두 저녁식사 전이라 먼저 식당을 찾았다. 손님이 거의 없는 감자탕집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여자(가해자)로부터 그렇게 (성희롱을) 당하고 나서 회사의 담당자에게 하소연을 했지만 제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고요. 반강제적으로 회사에서 쫓겨났죠. 한마디로 황당했어요. 직원들이 쳐다보는데도 몸을 건드리면서 장난치고…. 그렇다고 그들에게 뭐라고 말도 못하겠고. 다행히 증인이 있어서 이길 수 있었어요.”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그동안 맺힌 게 많은 듯 지난 1년 동안 ‘당했던’ 일을 먼저 간략히 설명했다. 그러고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의 앞뒤 경과를 처음부터 정리해보기로 했다.

    -그 회사에는 언제 입사했나요.

    “2000년 5월2일이에요. 편의점에서 일하다 알게 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저녁밥도 주고, 일요일은 다 쉰다고 해서 친구의 소개로 입사했어요.”

    -어떤 회사였습니까.

    “여성 의류 제작·판매 업체였어요.”

    -직원은 몇 명이나 되는지요.

    “생산라인이 A부터 H까지, 한 라인에 스물다섯 명이 근무하고 있었으니까 여직원만 200여 명쯤 되겠네요. 남자는 저를 포함해서 단 7명이었어요. 3명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연장자였고, 나머지 4명은 저와 또래거나 한두 살 정도 많았어요. 남자직원 중에는 제가 가장 어렸지요. 관리직에 있는 직원들까지 합치면 모두 300명쯤 되는 회사였어요.”

    -생산라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쉽게 말해 재단된 천을 재봉틀로 박아 옷을 만드는 거예요.”

    -그럼 재봉사로 일한 건가요.

    “아뇨. 생산부 소속으로 기계실 기사 보조였어요. 부서 이름만 기계실이지 하는 일은 고장난 재봉틀을 고치는 게 대부분이예요. 저는 기술자를 보조하면서 일을 배웠죠.”

    이야기가 자신의 장래 꿈에 맞춰지자 말이 빨라졌다. 긴 설명이 이어졌다.

    “고등학교 때 전자과를 선택한 후 인정받는 기술자가 되고 싶었어요. 집에서는 대학교에 가라고 성화였지만 돈도 벌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대학진학을 포기했죠. 후회는 없어요. 단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 즐거웠어요. 제대 후에는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 가전부문 A/S기사로 3년 정도 근무했어요. 그곳을 그만두고 편의점에서 잠깐 일하다가 문제의 회사에 입사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성희롱을 당한 거죠. 성희롱을.”

    그는 ‘성희롱’이란 말을 내뱉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건장한 20대 남성인 그는 과연 어떤 일을 당한 것일까. 그리고 가해자는 어떤 여성들이었을까.

    -가해자인 박씨와 김씨 두 사람은 어떤 일을 했습니까.

    “두 사람 모두 A라인에서 근무했어요. 박씨(40)는 재봉보조였고, 김씨(35)는 재봉사였어요. 둘 다 유부녀이고요. 지금도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김씨는 아이가 있고 박씨는 결혼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어요.”

    -서로 부서가 다른데 두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입사한 지 한달 보름쯤 지나 생산부 직원들의 야유회가 있었어요. 기계실의 우리도 같이 갔죠. 남자직원들이 몇 명 안되니까 A라인, B라인 등을 옮겨다니면서 각 라인 사람들과 공놀이 등 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먼저 김씨를 알게 됐죠. 얘기를 하다 집이 같은 방향이란 걸 알게 됐어요. 갓 입사한지라 ‘이 사람들과 알고 지내면 회사 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죠. 김씨를 통해서 그의 맞은편에서 일하는 박씨도 알게 됐어요. 원래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였어요. 우리 세 사람은 처음에는 직장 선후배로 친하게 지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해서는 안될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해서는 안될 행동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죠.

    “그때의 기억들은 떠올리기조차 싫은데…. (한숨을 내쉬며) 현장(A라인)에서 박씨는 엉덩이를 손으로 툭툭 치기도 하고, 뒤에서 슬그머니 껴안기도 하고 팔짱을 끼는 등의 행동을 서슴지 않았어요. 그리고 김씨는 주로 성적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야한 농담을 자주 하는 편이었죠. 그럴 때마다 몹시 불쾌했지만, 그냥 친하니까 장난을 친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참고 견뎠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횟수도 잦아지고 정도가 더 심해졌어요. 어느날은 박씨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가슴을 툭툭 치면서 ‘어, 근육질이 좋은데’라고 말하니까,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본 김씨는 한술 더 떠서 ‘너 덩치가 있어서 좋다’느니 ‘영계 같아서 좋다’느니 하더라고요.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현장을 빠져 나왔어요. 박씨와는 띠 동갑이에요. 그사람이 열두 살이나 많죠. 난 두 사람을 누나처럼 따르며 회사 선배로 생각했는데….”

    -두 사람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나요.

    “노력했죠. 야유회에 다녀온 직후에는 재봉틀 수리를 하고 오가는 길에 A라인에 들러 인사를 하곤 했어요. 그러나 그런 일(성희롱)을 당한 후에는 그곳에 가기 싫었어요. 하지만 A라인의 재봉틀이 고장나면 어쩔 수 없이 고치러 가야 했고, 다른 라인의 재봉틀을 수리하러 갈 때도 마주칠 수밖에 없었어요.”

    -정확히 언제부터 두 사람이 성희롱을 하기 시작했는지….

    “야유회 다녀온 지 열흘쯤 지난 후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하면서부터요. 2000년 7월께였어요.”

    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하던 말을 멈춘 장씨는 밥 두어 숟가락에 감자탕 국물을 몇 번 떠먹는가 싶더니 이내 숟가락을 놨다. “배고플 텐데 천천히 먹으면서 이야기하세요”라고 하자 그는 “소송이 진행되던 지난 1년여 동안 ‘입맛이 없어서 밥알이 모래알 같다’는 말뜻을 절감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야한 농담이라면 구체적으로….

    “A라인에서 셋(장씨와 김씨, 박씨)이 있을 때 그런 행동과 야한 농담을 많이 했어요. 어떤 때는 주위에 있는 여직원 몇 명이 동석할 때도 있었고요. ‘어젯밤에 야한 비디오를 봤는데 그거 진짜 끝내주더라’ 뭐 그런 얘기였어요. 비디오에서 본 (섹스)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하면서 옆에 있는 나를 슬쩍 쳐다봐요. 내 반응을 떠보기 위해 듣기조차 민망한 음담패설을 일부러 더하는 것 같았어요. 그런 적이 여러 차례 있었죠. 야한 얘기 끝에 김씨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야, 몸 야한데. 너 몸매 진짜 괜찮다. 끝내주겠다’는 등의 얘기를 했어요. 그 말 속에는 ‘너와 같이 자보고 싶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 같았어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어가던 그는 버릇처럼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간간이 얼굴을 들었다가도 다시 숙이기를 여러 차례. “비디오에서 본 행위라면 구체적으로 섹스에 관한 이야기였냐”고 직접적으로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여성인 필자 앞에서 ‘섹스’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스럽다는 듯. 그러고는 “결혼하고 나면 여자들은 부끄러움이 사라진다던데 그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내뱉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그랬나요.

    “어떻게 남자인 제 앞에서 자기 남편과의 일(섹스)을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털어놓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됐어요. ‘우리 신랑은 뭐, 밤에 잘해, 못해’ 그런 말도 스스럼없이 하고…. 남편과의 일(섹스)을 마치 전날밤 본 드라마에 대해 얘기하는 것처럼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얘기하대요.”

    -그들의 야한 농담에 맞장구를 치지는 않았나요.

    “대부분 아무말도 못하고 듣고만 있었어요. 이렇게 얘기한 적은 있어요. ‘어떻게 그런(부부관계) 얘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할 수가 있느냐, 창피하지도 않느냐’고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야한 농담이 오가는 자리가 싫었다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처음부터 야한 얘기로 시작하는 건 아니었어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서서히 이상한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갔죠. 야한 얘기를 한다고 얼굴 붉히며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가 없었어요. 한참 어린 후배가 정색하고 ‘왜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따지기도 뭣하고요.”

    이 사건의 원고측 변호사인 조숙현씨는 “이 회사의 경우 대다수가 여직원인데다 박씨 등이 연상이어서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며 “성희롱은 단순한 남녀간의 성적문제가 아니라 우월한 지위에 있는 쪽이 다른 쪽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온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 장씨는 “그날의 수치스럽고 치욕스런 기억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요. 아니 죽을 때까지 기억 속에서 지우지 못할 것 같고요”라고 말한 뒤 갑자기 입을 닫았다. 뭔가 망설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날, 그러니까 야유회를 다녀온 지 다섯 달이 지난 11월 초였어요. A라인의 기계가 고장이 나서 수리를 하고 나가는 길에 박씨가 손짓을 하더니 ‘잠깐만 와보라’고 하더라고요. 다가갔더니 느닷없이 제 양쪽 젖꼭지를 ‘톡’ 꼬집는 겁니다. 놀란 것은 둘째치고 무척 아팠어요. ‘악’하고 소리를 질렀지요. 아무 생각 없이 무방비 상태로 서 있다가 꼬집힘을 당하니까 굉장히 아프대요. 주위의 다른 직원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창피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좌우를 봐도 다 여자고, 앞뒤를 둘러봐도 다 여자뿐인데….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때의 그 불쾌했던 심정이나 더러운 기분을 모를 겁니다. 김씨에게 ‘어, 왜 그러세요?’라는 말만 몇 번 반복하고 얼굴만 붉힌 채 밖으로 나왔어요.”

    -젖꼭지를 꼬집혔는데 아무런 대항도 하지 않았다는 건 납득이 안되는데요.

    “차라리 내가 그때 대판 싸웠으면 이렇게까지(소송)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 순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는 기계가 고장났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저기를 어떻게 들어가나’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죠. 젖꼭지를 꼬집은 이후에도 박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엉덩이 등 몸을 툭툭 건드렸고, 김씨는 기계실 동료이자 친구인 ○○가 결혼을 하자 대놓고 ‘이제부터 너는 내 거야’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내 거’라니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급기야는 회사 내에서 ‘김씨와 박씨가 저를 가지고 놀았다’는 소문이 퍼졌어요. 심지어 ‘박씨, 김씨와 잤다’는 소문까지 떠돌았죠.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직원들과도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돌았구요. 한마디로 바람둥이에 파렴치범 취급을 당한 거예요. 젖꼭지를 꼬집힌 이후 서너 달 동안은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어요.”

    그는 연거푸 물 두 잔을 들이키더니 자신은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처음 만난 사람과는 쑥스러워 말을 주고받기도 주저해요. 지금은 제가 경험한 것을 얘기하기 때문에 이 정도의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거죠”라고 설명했다. 그 때문인지 장씨는 인터뷰 중간중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런 소문을 듣고 어떻게 했나요.

    “소문 때문에 회사를 다녀야하나 말아야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참다못해 2001년 3월26일 생산부장(이하 부장)을 찾아가 성희롱을 당한 전후 사정을 설명했더니 부장은 다짜고짜 ‘남자새끼가 그런 일이 뭐 대단한 거라고 신경 써. 여자가 젖꼭지 좀 만지고 장난친 걸 가지고 뭘 그러냐’고 도리어 면박을 주더라고요. 부장은 ‘세상 살다가 별 꼴 다 본다’는 투로 무시하고 나아가 저를 이상한 놈으로 취급했어요.”

    그는 회사측에도 맺힌 게 많은 듯했다. 무엇보다도 가해자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부장, 총무이사 등 상급자들이 자신의 이야기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아 울분을 삭이기 힘들었다고 했다.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데려와 진위 여부를 밝혀보자”고 부장에게 따져 묻기도 했단다.

    “부장에게 성희롱 사실을 알린 날 오후, 부장은 기계실로 박씨, 김씨, 그리고 A라인 사람들 몇 명을 불러 사실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발뺌을 하는 거예요. 하긴, 성희롱을 한 사람이 ‘나 성희롱했다’고 시인할 리 만무하지만…. 가해자들이 오히려 저를 성희롱 빌미를 제공한 사람으로 내몰더라고요. 저만 더 이상한 놈이 되고 말았죠. 참 답답했어요.”

    -그래서요.

    “제가 꼬리를 쳤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식이었어요. 여성 성희롱 피해자가 이의를 제기하면 흔히들 ‘네가 그런 빌미를 제공하고 자신을 방치했으니까 당한 것 아니냐’고 한다면서요.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어요.”

    1990년대 중반, 남성을 상대로 한 성희롱을 다룬 영화 ‘폭로’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데미 무어와 마이클 더글러스가 주연한 이 영화는 남성 성희롱 사건의 전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과거 연인 사이였던 데미 무어(여성)가 마이클 더글러스의 상사로 온 뒤 노골적으로 유혹하며 섹스를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오히려 마이클 더글러스에게 성희롱당했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씨 사건과 비슷한 부분이 적지 않다. “‘폭로’라는 영화를 봤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회사를 당장 때려치우고 싶어도 파렴치범으로, 그것도 성희롱의 빌미를 제공한 사람으로 낙인 찍힌 상태에서는 그만두고 싶지 않았어요. 회사를 사직하면 ‘난무하는 소문들’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것 같아 진실을 밝히기로 맘먹으며 꾹 참고 회사에 다녀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런데 회사에 성희롱 사실을 알린 지 이틀 후인 3월28일 아침이었어요. 기계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회사에 경찰차가 들어오더니 저를 연행해 파출소로 데리고 가는 거예요. 전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죠. 파출소에는 부장이 동행했고요. 알고보니 부장이 112에 신고를 했더라고요.”

    그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파출소에 끌려갔던 억울함이 아직까지 가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파출소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소상히 털어놓았다.

    “참 황당했어요. 부장은 파출소에서 ‘내가 잘못했다’는 자술서를 쓰라고 했어요. 거기에서 성희롱 진위 여부에 대해 부장과 3시간 동안 승강이를 벌였죠. 부장은 ‘그 사람들이 성희롱했다는 증거가 있느냐. 여기서 네가 잘못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으면 무고죄로 고소하겠다. 구치소에 처넣어 버리겠다’는 식의 협박을 했어요.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아예 ‘사직서를 쓰라’고 종용하기 시작했어요. 그 순간 어머니 생각이 나대요. 어머니는 10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건설현장 허드렛일 등을 하며 4남매(3남 1녀 중 장씨는 막내다)를 어렵게 어렵게 키우신 분이거든요. 아들이 구치소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가 받을 상처가 얼마나 크겠어요.”

    그는 어머니 얘기를 하다말고 문득 “오늘이 어버이날인가요” 하고 물었다. “내일”이라고 답하자 “다행이네요. 집에 카네이션이나 사가야겠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2001년 3월28일, 파출소에서의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전후 사정을 파악한 경찰은 자신들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며 회사로 가서 두 사람이 좋게 해결하라고 했어요. 회사로 돌아온 즉시 부장의 압력에 못 이겨 그가 불러주는 대로 ‘개인 사정으로 인하여 사직서를 제출합니다’라고 써내려 갔죠.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니 억울해서 잠이 오지 않대요. 사직서를 제 손으로 쓸 때의 억울함이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사직서 한 장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돼버렸잖아요.”

    -사직서를 제출한 다음은 어떻게 됐나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거짓말은 하지 말자’, 그렇게 맘먹고 살아왔거든요. 누가 뭐라 해도 그 사람들(회사 직원) 앞에서 떳떳하고 싶었어요. 결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결심했죠.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 혹시라도 회사로부터 무고죄로 고소를 당하게 된다면…. 그래, 구속돼도 좋다. 진실이 무엇인지 밝혀보자. 마지막으로 용기 있게 끝까지 싸워보자.’ 그렇게 맘먹었어요. 사직한 다음달(2001년 4월) 먼저 노동사무소로 찾아가 ‘사직할 의사가 없었음에도 회사측의 강요와 협박에 의해 회사를 그만뒀으니 퇴직금을 청구한다’는 신청서를 작성해 제출했어요.”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상담을 한 게 아니라 퇴직금 청구와 관련한 상담을 한 겁니까.

    “예. 전 사직할 의사가 없었고 회사측의 협박과 강요로 사직서를 냈으니 입사한 지 1년이 안됐지만 퇴직금을 달라고 한 겁니다. 퇴직금이 중요했던 게 아니라 강요와 협박에 의해 사직했음을 증명하는 데 의미를 부여했죠. 당시에는 성희롱은 여자가 남자에게 당한 경우에만 보호 받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노동사무소 직원이 ‘그것은 성희롱에 해당된다’고 조언을 해줘서 그제서야 노동사무소에 비치된 성희롱 관련 홍보물을 뒤적거렸어요. 성희롱의 피해자는 남·녀 모두 가능하다고 명시돼 있더군요. 노동사무소에서는 지난해 5월초 ‘직장내 성희롱’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실제로 직장내 성희롱은 더이상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이루어진 1340건의 성희롱 상담 중 10%가 남성이 피해자인 경우였다.

    -노동사무소의 결정 이후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는데.

    “직장내 성희롱을 당한 피해자의 구체적인 구제 방법 등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노동부와 중앙노동사무소 등을 방문했는데 절차가 복잡하고 힘들었어요. 혼자서는 아무래도 벅차 변호사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변호사 사무실이 많은 구의역(서울 지하철 2호선)을 빠져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데 ‘조숙현’이라는 이름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이 사건은 남자보다 여자변호사가 더 낫겠구나 싶었죠. 가지고 있는 돈이 없어서 적금을 해약해서 변호사 선임비를 마련했어요. 전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진실을 밝히고 싶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명예를 회복한다면 그까짓 돈쯤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해서 지난해 5월부터 지리한 소송이 시작됐지요.”

    그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잠시만요. 엄만가 봐요.” 살짝 돌아앉은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늦을 것 같아요. 걱정 마시고 먼저 주무세요.” 그리고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는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소송한다는 사실을 일절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여러 번 들었어요. 무척 힘들었죠. 성희롱 사건은 증거나 증인이 있냐 없냐에 따라 승소 여부가 판가름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직원들에게 증인을 서달라고 부탁도 해봤죠. 하지만 말 한마디에 자신들의 앞날이 걸려 있는데 증인을 서줄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마음은 있지만 도와줄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들을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론 야속했어요. 증인도 없고, 그래서 좌절하기도 했죠. ‘역시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구나. 이제 무고죄로 구속되는 일밖에 남지 않았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가해자 박씨 바로 옆에서 일하던 박모씨가 뜻밖에도 증인을 서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예상치 않은 일이었어요. 그분의 증언이 재판에서 가장 큰 힘이 되었죠. 세상에 태어나서 그때처럼 고마운 적은 없었어요.”

    -그분이 증인을 서주게 된 구체적 계기와 과정을 좀 설명해주시죠.

    “증인 박씨는 두 여자가 나에게 하는 것을 곁에서 줄곧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그만하라’고 충고한 적도 있으니까요. 기계실로 불려간 A라인 사람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하니까, 속으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하지만 그때는 용기가 없어 직접 부장을 찾아가 진실을 밝히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제가 사직한 후에도 계속 회사에서 논란이 일자 그분이 김씨를 불러 ‘너, ○○한테 영계 같아서 좋다, 덩치가 있어서 좋다, 넌 내 거’ 등의 말을 하지 않았냐고 따져 물었답니다. 김씨도 ‘그래, 그런 말 했어. 그럼 좀 안되냐. 그게 뭐 잘못됐냐’고 대답하더래요. 그래서 ‘네가 잘못했다 시인하고 이쯤에서 해결하라’며 제 편을 들었는데 그 사실이 회사에 알려져 저처럼 사직하라는 무언의 압력을 받았다고 해요.”

    -증인은 지금도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까.

    “아니죠.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나서 한 달 후쯤 결국 사표를 내고 말았답니다. 결론적으로 저 때문에 직장을 잃게 된 거죠. 말 몇 마디 한 것 가지고도 그 정도였으니, 누가 증언대에 서려 했겠습니까.”

    -지난 5월3일 1년여를 끌어오던 재판에서 승소했는데 현재 심정은.

    “솔직히 가해자와 회사로부터 ‘얼마 얼마를 받게 되었다’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더라고요. 그저 ‘아, 내가 이겼구나. 이제야 진실이 밝혀졌구나’ 싶은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평소 좋게 봤는데 알고보니 나쁜 놈’이라는 몹쓸 소리를 들으며 회사에서 쫓겨나듯 나오던 때가 생각나더군요. 그런 오해가 풀린 것이 가장 큰 소득이죠. 그런데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요.”

    -가해자와 회사 쪽에서 항소 여부를 밝혔습니까.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가해자 김씨와 박씨, 그리고 회사는 5월13일 현재까지 항소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항소 여부는 법원으로부터 판결문을 송달받은 날(5월10일)로부터 2주 이내에 결정해야 한다. 생산부장은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1차적인 잘잘못에 대한 결정(판결)이 내려진 상태에서 뭐라 할 말은 없다. 항소 여부는 회사가 결정할 일이다. 개인적으로 기회가 된다면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항소가 남아있어) 아직 진행중인 사건이니 끝까지 지켜봐달라”고 말하며 “개인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했다.

    박씨와 김씨는 장씨가 승소판결을 받은 다음날(5월4일) 출근해 생산부장을 만나 “우리는 판결문에 나와 있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 법원의 판결에 충격을 받았다. 서로의 집을 오가기도 하고 회식 후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 등에 같이 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렇게 ‘사적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성희롱으로 고소하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씨와 박씨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고 집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상태다. 두 사람은 5월13일 오후 생산부장에게 전화를 걸어와 사직의사를 밝혔다.

    -남성으로서 성희롱 첫 배상 판결을 받아내자 언론의 반응이 뜨거웠는데 그런 결과를 예상했나요.

    “전혀 예상치 못했어요. 남성으로서 성희롱 배상판결을 받아낸 게 처음이라는 사실도 보도를 통해서야 알았으니까요. 변론을 맡은 조변호사 사무실로 수십 군데 잡지사와 여러 방송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다고 들었어요. 솔직히 지금 전 인터뷰를 한다는 생각보다 그저 아는 누나를 만나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이 사건이 TV뉴스로 보도되고 각 신문의 사회면에 기사가 실린 것을 보니까 의아하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대요. 저 같은 사람이 ‘뉴스거리’가 된다는 게 이상할 뿐이에요. 그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에 다닌 지 3개월 정도 됐는데 지금 직장에서는 성희롱 배상 판결을 받은 당사자가 전 줄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직원들 사이에서 이 사건이 화제에 오르면 옆에서 그저 듣고 있으면서 속으로만 ‘그게 나야’ 하고 되뇌었죠. 성희롱을 당했다는 사실이 내놓고 자랑할 일은 아니잖아요.”

    -남성 성희롱 피해자로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제 말에 무게가 실리지 않을 때는 참 힘들었어요. 오히려 ‘성희롱의 빌미를 제공한 건 저쪽’이라는 가해자들의 주장이 먹혀 들어가는 듯했으니까요. 여성 근로자가 많아 수적으로 열세이다보니 할 말도 더 못하게 되고…. 길을 걷다가도 사람들이 ‘얼마나 지지리 못났으면 여자한테 그런 일을 당했냐’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고통스러웠습니다.”

    -복직 판결도 받아냈는데 복귀할 의사는 없는지요.

    “전혀 없어요. ‘내가 피해자’라는 진실을 밝히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요.”

    -성희롱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직도 성희롱 하면 남자가 피해자이기보다 가해자인 경우가 많잖아요. 성희롱은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당하고 나니까 여자들의 억울한 심정을 알겠더라고요. 남자든 여자든 일단 성희롱을 당했다면 두려워 말고 맞서 싸우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번 판결이 직장내 성희롱을 줄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여자친구는 있나요.

    “아직, 없어요.”

    -결혼할 여성이 생긴다면 성희롱 사건에 대해 털어놓을 생각인지요.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봐요. 평생을 같이 살 여잔데 당연히 얘기해야죠. 어느 정도 사귄 후 얘기할 거예요. 이런 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그와 함께 군자역 구내로 내려갔다. 지하철역 내 꽃집 앞에는 어버이날 대목을 앞두고 카네이션이 그득했다.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말을 건넨 그는 꽃집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돌아보니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카네이션 꽃바구니가 들려 있었다.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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