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인생은 어차피 한번뿐…도전하며 살겠다”

태극마크 부러웠던 ‘완도 촌놈’ 성공기

  • 안성찬 < 스포츠투데이 골프전문기자 > golfahn@sportstoday.co.kr

    입력2004-09-16 15: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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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5월6일(한국시간) 미국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의 잉글리시턴 골프클럽에서 열린 총상금 450만달러의 컴팩클래식에서 최경주(32·슈페리어)는 ‘기적’을 만들며 한국 남자골프의 역사를 다시 썼다. 한국에서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리더로서의 책임감을 위해” 미국행을 택한 ‘블랙탱크’ 최경주의 모든 것.
    워싱턴타임스는 5월7일자에서 “아시안의 침략이 시작됐다”는 헤드라인을 달았다. 최경주의 미국PGA 정상공략, 중국 야오밍의 미국 프로농구(NBA) 진출, 일본 좌완투수 이시이 가즈히의 메이저리그 선풍 등 아시아계 운동선수들의 활약상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이 신문은 최경주가 우승 트로피를 안고 있는 사진을 게재하고 “아시아인의 침략은 한국의 최경주가 PGA투어 우승컵을 거머쥐면서 이어지고 있다”며 경기내용을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했다. 말미에 한국의 박세리를 비롯해 박지은, 김미현의 활약도 부연해 다뤘다.

    이 대회에서 최경주가 거둔 성적은 4라운드 합계 17언더파 271타(68-65-71-67)로 2위 그룹과 4타차였다. 우승상금 81만달러를 챙김으로써 최경주는 시즌 총상금 100만달러 고지를 넘었다. 특히 그의 우승은 100여 년이 넘는 PGA역사상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동양인으로는 이사오 아오키(1983년 하와이오픈), 천체충(1987년 닛산오픈), 마루야마 시게키(2001년 그레이터 밀워키오픈)에 이어 네번째. 그만큼 미PGA투어그린은 세계 골프의 격전지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전에도 해외에서 우승한 우리 선수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직 우리나라에 골프의 틀이 잡히기 전인 1941년 연적춘(86)옹이 일본으로 건너가 내셔널 타이틀인 일본오픈에서 일본과 대만의 정상급 선수들을 제압하고 우승한 바 있다. 이후 한장상(62)이 1972년 일본오픈선수권대회서 우승 타이틀을 손에 쥐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세계 무대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펼치는 PGA투어 정상은 이와는 격이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바이런넬슨클래식(5월9∼13일)이 열리는 동안 국제전화와 e메일을 통해 최경주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계속되는 일정과 경기에 그는 다소 지친 듯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퍼팅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경기 직후 힘든 경기였다고 우승소감을 밝혔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임을 어떻게 끌고갔는지 모를 정도였으니까요. 한홀 한홀 기도하는 마음으로 샷을 하고 퍼팅을 했습니다.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정상에 오를 수 있도록 인도해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부인 김현정(31)씨도 기도하는 모습이 눈에 띄던데요.

    “사실 호준(아들·6)이와 신영(딸·2개월)이 엄마가 더 힘들었을 겁니다. 어떤 경기를 보더라도 주인공은 힘을 쓰든 악을 쓰든 버티고 이겨냅니다. 정신적인 압박감이야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곁에서 보는 사람이 더욱 초조하고 불안한 법이지요. 아마 집사람은 입안이 바짝 타들어가고 심장박동이 멈출 지경이었을 겁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경기를 마치고 우승하니까 오히려 덤덤하다고 하더군요.”

    -저는 최종일 경기 11번 홀(파5 550야드)에서 최선수의 롱퍼팅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 우승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언제 우승 확신이 들던가요.

    “골프는 장갑을 벗기 전까지는 아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운 좋게도 11번 홀이 까다로운 훅 라인 그린에다 거리가 너무 멀어 걱정했는데, 미끄러지듯 빠져들어 갔습니다. 세컨드 샷을 실패해 파만 잡아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운이 따라줬습니다.

    결국 승부는 16번 홀(파4 442야드)에서 결정됐다고 봅니다. 그린 턱까지 107야드, 핀까지 125야드를 보고 피칭웨지로 샷을 했는데 함성이 들리더군요. 가서보니까 홀에 걸렸어요. 버디를 잡고 나자 ‘이제 경기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날 경기가 매우 힘들어 보였습니다.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히 마지막 날 선두로 편성된 마지막 조는 챔피언 조이기 때문에 부담이 컸죠. 하지만 ‘한국, 일본에서 우승하는 것이나 미국에서 우승하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나’하고 마음을 편하게 먹었습니다. 1m 이내의 짧은 퍼팅도 빙판 같은 그린에서는 쉽지 않았죠.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보자면 이날 스윙템포나 리듬 등 모든 것이 거의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누구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나요.

    “아내가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연애시절부터 고생만 시켰거든요. 이역만리 미국 땅에 와서도 두 아이와 저만 보고 살아준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번 우승도 어쩌면 아내의 눈물겨운 기도로 이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5월8일이 호준이 생일이었죠. 속으로 호준이와 약속을 했습니다. 반드시 우승컵을 생일 축하선물로 내놓겠노라고 말이에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는 최경주의 음성이 태평양을 건너 들려왔다. 필자의 머릿속에도 우승 순간 부인을 안고 눈시울을 적시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최경주는 1992년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말한다. 볼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완도 촌놈’을 애정으로 감싸준 아내가 한없이 고맙고 눈물겹다는 것이다.

    -우승 이후 위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들 합니다. 챔피언에 대한 대접이 어떻던가요.

    “승부의 세계에서는 오직 승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걸 실감하고 있습니다. 풀시드권(자동출전권)을 받지 못한 선수는 본선 출전을 위한 예선(월요일에 하기 때문에 보통 ‘먼데이’라고 한다)을 치러야 합니다. 시드권을 가진 선수가 4라운드 하는 동안 5라운드를 하게 되는 셈이죠. 그렇다고 항상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우승을 하면 3년간 풀시드가 주어지고 각종 메이저대회에 출전할 가능성이 커집니다. 대회 때마다 전용기는 물론 코스 내에서도 전동카를 대여해주고, 티오프 시간도 황금시간대에 편성해주는 등 대우가 확 달라지죠. 우승한 뒤 ABC와 인터뷰를 하는데 한국말로 ‘축하합니다’하는 것을 보고 확실히 절감했습니다. ‘이 맛에 프로들이 기를 쓰고 우승을 하려 애쓰는구나’ 할 정도로 말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대우뿐 아니라 스폰서 및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엄청난 효과가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우선 계약사인 슈페리어에서 우승 보너스가 나옵니다. 이외에도 아직 가시화하지는 않았지만 광고 제의나 여러가지 다른 스폰서십이 생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를 관리하는 IMG가 광고 스폰서를 구하기 위해 물밑작업을 하고 있겠지요.”

    최경주는 올 시즌 슈페리어와 연간 5억원에 3년 동안 스폰서십을 맺었다. 골프용품사인 테일러메이드와도 클럽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계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계약금이나 우승 및 성적에 따른 보너스 내용은 밝혀진 바 없다. 미국과 한국이 나눠서 스폰서를 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

    -라운드 때 신은 골프화에 태극 문양이 들어가 있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미국에서 투어생활을 하고 있지만 한시도 고국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게임이 풀리지 않을 때 태극기를 보면 가슴이 찡하고 힘이 납니다. 국가대표나 상비군이 태극마크가 새겨진 옷이나 캐디백을 갖고 다니는 게 정말 부러웠거든요.”

    최경주는 연습장에서 캐디생활을 하며 실력을 연마했기 때문에 국가대표나 상비군을 해본 일이 없다. 하지만 일본이나 미국 혹은 아시아지역에서 경기를 할 때는 늘 국가를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한다고 했다.



    ‘찬밥신세’ 미국생활


    -1995년 팬텀오픈 우승 이후에는 한국에서도 잘 나가는 프로였는데, 사서 고생해야 하는 미국 진출을 계획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어차피 인생은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시작할 일이라면 차라리 내가 하자고 결심한 거죠. 물론 편안한 생활을 팽개친다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계약금과 상금으로 적지않은 돈을 모았거든요. 1995년 이후 1998년만 빼고 늘 1승 이상을 거두었으니까요. 1997년에는 3개 대회에 나가 모두 우승하기도 했고요.”

    최경주는 1999년 한국오픈에서 우승했고, 미국 진출 이후인 2000년에도 스폰서 회사가 주최하는 슈페리어오픈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해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프론티어를 하고 싶었다는 얘긴가요.

    “리더는 궁극적으로 자신이 모든 책임을 져야합니다. 선택이 잘됐든 잘못됐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더욱 완벽한 책임을 질 필요가 있습니다. 프론티어라는 거창한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골프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늘 가슴속에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늦기 전에 미국투어에서 뛰어보자고 결심했던 것이죠. 하다가 잘못되면 그때 가서 후회해도 늦지 않을 거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최경주는 1999년 미PGA투어 프로테스트(Q스쿨)에 응시했다. 이미 일본투어에서 2승을 거둬 자신감도 있었다. Q스쿨을 통과했으나 35위를 차지해 풀시드는 받지 못했고, 다만 조건부로 출전하는 대기선수나 마찬가지였다. ‘땜질용 선수’로서의 고달픈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2000년에는 상금랭킹 134위로 다시 Q스쿨을 받아야 했다.

    -미국진출에 장애요인이 많았을 텐데요.

    “무엇보다 언어장벽과 생활문화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컸습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지만 별 수 없었죠. 다른 프로 선수들과 눈인사를 하고, 아는 영어단어를 최대한 끌어내 말을 붙여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우월의식이 강한 데다 저는 무명선수이다보니 아는 척도 해주지 않더군요.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서면 죽도 밥도 안된다고 여겼습니다. 스스로 채찍질을 해가며 고된 연습으로 이국생활의 고달픔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어려웠던 점은 투어에 따른 유랑생활이었죠. 모텔을 전전하며 새우잠을 자야 했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아 많이 굶었습니다. 아무리 아껴서 쓰더라도 연간 투어생활비가 20만달러는 족히 들어갔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쳤죠. 무엇보다도 마음을 짓누른 것은 수시로 엄습해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습니다. 혼자 있는 것보다 가족과 함께하면 좋겠다고 판단해 집사람과 아이를 데려왔지요.”

    숨은 이야기 한 가지. 최경주는 미국진출을 앞두고 하루에 영어단어 4개와 문장 1개를 외워야만 잠자리에 들었다. 이런 습관은 미국에서도 계속됐다. 늦게 배우는 만큼 고통이 따랐지만 집사람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영어공부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기선수를 하려면 비용이나 체력이 그만큼 더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말이 Q스쿨 통과지 풀시드가 없는 대기선수는 찬밥신세죠. 티오프 시간을 새벽이 아니면 맨 뒤쪽에 배정하기 일쑤거든요. 정말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져간 1억원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차디찬 햄버거도 꿀맛일 정도였으니까요.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가난에 장사 없다’고 하던가요. 투어를 쫓아다니는 것에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경험이라고 생각하자고 스스로 달랬지만 자꾸만 깊은 나락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자존심으로 버텼습니다. ‘만일 이대로 주저앉으면 내 인생은 끝’이라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각오를 새롭게 했습니다. 특히 한 가정을 책임질 남자가 할 일은 딱 한가지였습니다. 좋은 성적을 내서 차기년도에 풀시드를 얻는 것이었죠. 만일 여기서 더 무너지면 집을 팔아야 하고 아마도 미국생활을 접어야 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던 거나 다름없었죠.”

    이런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일까. 최경주는 지난해 크라이슬러클래식 4위 등 톱10 이내에 다섯 번이나 들어 80여만달러를 획득, 상금랭킹 65위로 올 시즌 풀시드를 얻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힘겨웠던 미국생활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보자. 최경주는 어떻게 골프를 시작했을까. 박세리, 박지은은 부친이 골프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최경주는 또래에 비해 아주 어렵게 골프에 입문했다. 당시 다른 선수들은 캐디보다는 체계적인 골프를 터득하며 국가대표나 상비군을 대부분 지냈고, 일부 여유 있는 선수들은 미국이나 호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완도의 연습장에서 볼 줍는 일을 하면서 골프를 배웠다면 체계적인 골프교육을 받지 못했을 텐데….

    “골프와의 인연은 내게 아주 각별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밑으로 동생이 셋이나 있었는데 운동부에 들면 경제적 혜택을 받을 수 있어 중학교 때 역도부에 들어간 것이죠. 이때 아마 ‘통뼈’가 되지 않았나 해요. 처음부터 골프를 한 건 아니었고요.”

    이런 것을 보고 운명의 힘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어느 날 섬마을 완도에 8타석의 연습장이 들어섰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인연으로 결국 골프클럽을 잡게 된 것이다.

    -연습장 시절 얘기를 좀 해주시죠.

    “학교 갔다가 가방을 멘 채로 친구들끼리 어울려 놀러다니는 학생들이 가장 부러웠습니다. 어린 나이에 속도 많이 상하고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골프를 배운다는 핑계로 수업에 빠졌지만 실은 학비를 벌 욕심이 더 컸죠. 손님의 연습이 끝난 뒤 별을 보면서 볼을 치는 것으로 이런 응어리를 풀었습니다. 손에 굳은살이 배기면서 점점 샷이 좋아졌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두번째 인연이 이때 생긴다. 한서고등학교 최재천 재단이사장이 우연히 연습장에 들른 것. 이곳에서 최이사장은 최경주에게 ‘이왕이면 서울에서 연습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제의했고, 최경주는 무조건 서울행 기차를 탔다. 이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옮기는 과정에서 몇 개월 허송하기도 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고향으로 다시 내려온 적도 있었지만 끝내 한서고등학교 편입에 성공한 그는 이후 골프만이 유일한 살길인 듯 혹독한 훈련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 잊지 못할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서울에 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한번은 아버지(최병선·59)가 서울에 올라오셨는데, 제가 냉방에서 자는 것을 보고 무척 마음 아파하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언젠가는 너무 많은 연습량으로 손바닥이 마치 거북등처럼 변해 있는 것을 보신 어머니(서실례·53)와 아버지가 눈시울을 적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힘든 미국투어 생활의 버팀목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한 후 세미프로 생활을 하며 최경주는 친구집에 얹혀사는 밑바닥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언제 정식프로가 될지 몰라 안절부절하는 시절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아내가 된 김현정씨를 만나는 일이었다.

    -아내를 처음 보고 ‘이 사람이 평생 반려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던가요.

    “솔직히 말해 과분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둘째 문제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이나 서로 생각하는 것에 공통분모가 얼마나 있을까가 가장 큰 문제였죠. 그런데 만날수록 정이 가고 나를 이해해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어찌 보면 김현정씨와 최경주 커플은 밸런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최경주는 섬에서 태어나 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운동선수. 하지만 아내는 단국대 법대를 졸업한 재원이다. 교회 목사님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처음에는 어색했다고 한다. 최경주가 독실한 신자도 아닌데다 오로지 운동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명시절이었으니 오죽했으랴.

    결혼 후에도 김현정씨는 계속 직장에 다니며 최선수의 뒷바라지를 했다. 아내가 월급을 타면 회식을 했다. 그러나 호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을 때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당시 골프를 직업으로 삼을 생각이었나요? 프로선수의 미래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였을 텐데….

    “프로가 되면 파라다이스가 열릴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었죠. 프로가 된 후에도 ‘모셔가는’ 곳이 한 군데도 없었으니까요. 오히려 정식 프로자격을 받은 것이 짐처럼 느껴진 적도 있었습니다. 세미프로처럼 아무 연습장이나 가서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이 무렵 그는 잠시 딴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털어놓는다. 프로를 포기하고 취직을 할까 고민했던 것이다. 그러다 결국 인천의 한 연습장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자신 때문에 다른 한 선배 프로가 그곳 연습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최경주는 필자에게 ‘지금까지도 그 선배가 마음에 걸린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미국PGA투어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뛰어난 기량과 정신력입니다. 여기에 샷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제가 처음에 고생을 하고 성적을 내지 못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과 달리 미국 그린은 딱딱하고 빠릅니다. 따라서 어프로치나 짧은 아이언이 들어오면 그린에 세울 수 있는 기술 샷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스핀이 걸리지 않으면 그린에 맞아도 튀어나가기 쉽기 때문이죠. 미국 진출 후 2년 동안 이것을 터득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번은 최경주가 필자에게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다. ‘미국 그린에 적응하기 어렵다.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역마다 잔디종류가 다른데다가 그린 빠르기도 차이가 난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기술 샷을 구사하지 못하면 미국투어에서 살아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것. 편지는 ‘이제야 5번 아이언 정도까지 스핀을 걸 수 있게 됐다. 욕심을 내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는 다짐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최경주가 미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두둑한 배짱과 자존심, 정신력, 그리고 누구 못지 않은 연습량이다. 언제나 연습장에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던 그는 미국투어에서 연습벌레로 통한다. 최경주는 이전에 누구에게서 특별레슨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는 ‘독학파’다. 타이거 우즈가 잭 니클로스나 톰 왓슨, 아널드 파머 등 유명 프로들의 장점만을 골라내 그대로 흉내내보고 연습한 것처럼, 최경주는 자신과 체형이 많이 닮은 웨일즈의 스타 이안 우스넘을 모델로 스윙연구를 했다. 우스넘이 샷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반복해서 보면서 훈련했던 것.

    -비거리 때문에 기량에서 밀린다는 생각, 애초에 싸움이 안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데뷔 첫해에는 연습장에서 드라이버를 때릴 때 창피해서 얼굴을 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타이거 우즈나 필 미켈슨 등이 옆에서 치는 것을 보면 마치 대포알이 날아가는 것 같았으니까요. 이제는 드라이버 거리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습니다. 저도 제법 나가거든요. 많이 나가면 300야드 이상 날아가고, 아무리 못 나가도 275야드 이상은 되니까요.”

    에피소드 한 가지. 필자와 그는 남서울CC에서 골프를 함께한 적이 있다. 12번 홀(파4). 레귤러에서 치면 조금 가까운 거리다. 그린까지 평탄하고 31cm가 조금 넘으니까. 앞 팀은 퍼팅을 하고 있었다. 최경주의 티샷. 그린 앞쪽에 떨어진 볼은 굴러서 퍼팅중인 사람들 쪽으로 갔다. 놀란 사람들이 뒤를 돌아봤지만 모두 티잉 그라운드에 있지 않은가. 퍼팅을 끝낸 사람들은 가지 않고 기다렸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글을 보기 위해서. 그러나 최경주는 홀에 붙여 버디로 끝내면서 앞 팀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본인이 느끼기에 가장 나아진 점은 무엇인가요.

    “전체적으로 샷에 안정감이 붙었습니다. 2000년에 비해 지난해에는 드라이버 평균거리가 274.9야드에서 283.70야드로 늘었고, 올 시즌도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363야드를 날린 것이 최고의 장타였습니다. 성적에 큰 영향을 미치는 퍼팅수도 2000년 29.29타에서 지난해는 28.85타, 올해는 27.88타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나이키가 우즈 효과를 보듯, 한국에서는 ‘최경주 마케팅’이 붐을 이룰 것 같은데요. 실제로 업체에서 우승세일을 하는 등 여러가지 행사를 열고 있는 걸 아는지요.

    “집사람이 인터넷에서 뽑아준 한국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미국 언론에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인터뷰 기사를 써주는 등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문이나 방송은 한수 위던데요. 우승이 이렇게 대단한 것인 줄 언론을 보고 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앞으로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할 자신이 있습니까.

    “없다고 말하면 안되겠죠. 투어에서 우승을 했으니 이제 목표는 반드시 메이저대회 우승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단번에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메이저대회는 그야말로 전 세계 별들이 모여 벌이는 잔치판이니까요. 어쨌든 우리 국민이 성원해주고 아끼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프로가 되겠다는 다짐을 남기고 싶습니다.”

    -끝으로 후학들에게 미국진출에 대한 조언을 해주시겠습니까.

    “미국투어에서 버텨내려면 체력과 기량이 우선입니다. 가능한 한 영어를 공부하고 오는 것도 중요하고요. 국내에서 충분히 경험을 쌓고 과감하게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최경주는 이번 인터뷰를 무척 부담스러워했다. 아직 경기중이어서 다른 데 신경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터뷰에 임한 최경주는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었다. 그리고 신동아 독자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기도하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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