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재학당을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아버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4살 연상의 어머니. 두 분 사이에 금실이란 애초부터 존재하기 어려웠다.
- 어머니는 장남인 나에게 모든 사랑을 쏟아부었다.
- 일본 유학시절 어머니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눈물을 흘렸다.
1956년 부인과 딸 정남양, 아들 동명·동일군 등과 함께 찍은 사진. 안병욱 교수는 전쟁과 월남으로 인해 아버지의 사진을 한 장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유복한 가정에 태어나 좋은 부모를 만나 흡족한 사랑과 교육을 받으면서 순탄하고 행복하게 자랐다. 인간은 자기의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고 부모 역시 자기의 자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부모와 자식의 만남은 운명적인 만남이요, 운명적인 관계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바로 나는 부모의 소중한 유체(遺體)다. 유체란 무엇인가. 부모가 나에게 물려주신 한량없이 귀중한 생명체다. 나의 몸속에는 내 아버지의 고귀(高貴)한 영(寧)이 숨쉬고 있고 내 어머니의 맑은 혼(魂)이 깃들여 있다. 또 나의 조상의 얼이 흐르고 있다.
17살에 나를 낳은 ‘큰형 같은’ 아버지
부모자식의 관계는 이처럼 하나의 핏줄기로 얽힌 운명적이고 천륜적(天倫的) 관계이므로 끊을래야 끊을 수가 없다. 세상에 피처럼 진하고 피처럼 뜨겁고, 피처럼 강하고, 피처럼 신비한 것은 없다. 운명애(運命愛). 우리는 자기의 운명을 사랑해야 한다. 운명은 인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에서 북쪽으로 약 30리쯤 가면 백여 호가 넘는 안씨의 넉넉한 집성촌(集姓村)이 있다. 용강군 삼화면 율상리(龍岡郡 三和面 栗上里)이다. 초가집보다 기와집이 많은 것만 보더라도 부촌(富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아버지 안성원(安性源, 1903년생)은 외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님만이 두 분 계셨다. 그러나 나는 5남3녀의 맏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큰 기대와 큰 희망 속에 성장했다. 나의 아버지는 고독한 외아들의 몸에서 8남매가 태어난 것을 대단히 기뻐하고 흡족하게 생각했다. 8남매를 잘 키워서 번영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 아버지의 가장 큰 소원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열세 살 때 결혼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4년 연상이었다. 왜 그런 부조리(不條理)한 결혼을 했을까. 그것은 그 시대의 한 풍속이었다. 나의 조부와 외조부는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 사는 동리의 큰 어른들이었다. 술좌석에서 서로 혼인하는 게 좋겠다는 얘기가 나와 선도 보지 않고 본인들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약혼을 결정했다.
나의 부모는 결혼식날 처음으로 서로 대면(對面)했다. 양가의 신의(信義)가 서로 두터운 사이니까 그런 결혼이 가능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체격이 작은 편이고 어머니는 체격이 큰 편이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17세, 어머니가 21세에 첫아들인 나를 낳았다. 결국 내 아버지와 나는 연령차가 17살밖에 안 되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부자지간이 아닌 형제지간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 배재(培材)학당에 입학했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에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도쿄의 메이지(明治) 대학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사법고시에도 도전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는 귀국후 고향인 용강에서 수십 년 동안 용강온천 우편국장(郵便局長)을 지내셨다. 이 자리는 일제 치하였던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오르기는 대단히 어려운 직위였다. 한국인이 우편국장 직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상당한 재산과 신용도가 뒷받침되어야만 했다.
이와는 반대로 나의 어머니는 풍요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여자들을 신식학교에 안 보내는 사회적 폐풍(弊風) 때문에 초등학교도 못 마치고 말았다. 오빠들의 어깨너머로 겨우 한글을 깨우쳤을 뿐이었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러 면에서 처음부터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일본 메이지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남편, 4년이나 나이가 많은 데다가 초등학교도 못 나온 아내, 게다가 나의 어머니는 거의 말이 없고 여성다운 아름다움 또한 적었다.
당연히 부부간에 서로 따뜻한 애정과 정다운 대화가 오고갈 수가 없었다. 서로 금실이 좋은 부부가 될래야 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어머니는 모든 사랑을 장남인 나에게만 쏟아부었다. 일본 유학시절, ‘세월은 소리없이 왔다가 흔적없이 가는구나. 네가 동경으로 떠난 지 어느덧 한달이 된다…’로 시작하는 서투른 글씨의 어머니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측은한 어머니를 생각하고 혼자 눈물을 흘리곤 했다.
정직과 청렴을 생명처럼
나의 아버지는 대단히 정직하고 청렴한 분이었다. 매우 부지런하고 예절이 바르고 매사에 자상했다. 아버지가 가장 중요시한 인생의 덕목(德目)은 신용(信用)이었다. 아버지는 인생의 모범생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서재에 ‘낙선당(樂善堂)’이라는 글씨를 써붙여 놓았다. ‘선(善)’을 좋아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집 벽에는 수암(守巖) 선생이 쓴 달필(達筆)의 글씨가 붙어 있었다.
‘일근천하무난사 백인당중유태화(一勤天下無難事 百忍堂中有泰和)’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고 백번 참으면 집안에 큰 평화가 있다’는 뜻이다. 근(勤)과 인(忍). 부지런함과 참을성을 강조한 이 글귀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을 만하다. 이 글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에게 써주었던 글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누군가 나에게 글씨를 부탁하면 나는 이 글귀를 써주곤 한다.
克己自制의 미덕
내가 아버지를 높이 우러러 보는 이유는 부부간에 애정이 없었는 데도 불구하고 바람을 피우지 않고, 자식들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끝까지 극기자제(克己自制)의 미덕을 지켜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행동이나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그것은 얼핏 생각하기는 쉬운 것 같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아버지를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우리집은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이다. 내 아버지가 특히 강조한 것은 수신(修身)과 제가(齊家) 두 가지였다. 그 중에서도 수신이 으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내 인격을 갈고 닦아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기본사업이요, 우리가 힘써야 할 근본 목표라고 말씀하시면서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을 늘 강조하셨다.
‘위로는 임금님에서부터 밑으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자기의 몸을 갈고 닦는 것을 인생의 근본으로 삼아라. 무엇이 인생의 근본이냐. 수신위본(修身爲本) 자아완성(自我完成)이요, 내가 나를 바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요, 건전한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다.’
제가(齊家)는 요즘 말로 표현하면 가정관리요, 행복한 가정의 건설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영원한 것은 가족이요, 가정이다. 가정은 세 가지의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첫째, 가정은 인간의 양육처(養育處), 즉 생명을 낳아서 기르는 곳이다. 서양의 어느 철학자는 ‘평화로운 가정을 건설하는 것은 신성(神聖)한 의무’라고 말했다. 가정은 인생의 안식처요, 평화의 보금자리이다.
둘째, 가정은 인간의 교육처(敎育處)다. 가정은 도덕의 학교다. 우리는 가정에서 질서를 배우고 협동을 배우고 예절을 배우고 희생을 배우고 겸손을 배우고 봉사를 배우고 권위를 배운다. 가정은 인간 최초의 학교다. 부모는 인간 최초의 스승인 동시에 최대의 스승이다. 세상에 가정교육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부모는 가정에서 자녀를 가르치는 최대의 스승이요, 최고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
끝으로 가정은 사랑의 학교다. 우리는 사랑을 어디에서 배우는가. 가정에서 배운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동물이 아니다.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밥은 육체의 양식이요, 사랑은 정신의 양식이다. 인간은 사랑이라는 정신적 양식을 먹지 못하면 마음에 병이 생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충만이다. 불행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고갈(枯渴)이다. 우리는 사랑의 가정, 사랑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이 지상에 광명(光明)과 사랑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원대한 꿈이요, 높은 이상이다.
인생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선택이 있다. 첫째는 직업의 선택이요, 둘째는 배우자의 선택이요, 셋째는 인생관(人生觀)의 선택이다.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누구와 살 것인가.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처럼 중요한 선택은 없다. 나는 아버지와 나의 가족사(家族史)를 떠올릴 때마다 이 세 가지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배우자의 선택이라고 강조하곤 한다. 러시아의 유명한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전쟁터로 나아갈 때에는 한 번 기도하여라. 바다로 나아갈 때에는 두 번 기도하여라. 그러나 결혼식장으로 나아갈 때에는 세 번 기도하여라.’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백만대군을 얻은 것처럼 마음이 든든하고 기쁘다. 중국에는 이런 우스개도 있다.
‘현처(賢妻)는 일생의 풍작(豊作)이요, 악처(惡妻)는 일생의 흉작(凶作)이다.’
또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이다.
‘가빈사양처 국난사양상(家貧思良妻 國亂思良相) - 집안이 가난하면 좋은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훌륭한 재상(宰相)이 그리워진다.’
나는 올해로 84세가 되었다. 이제 나의 여생은 얼마 남지 않았다. 곧이어 아버지를 따라갈 날도 머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언제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알길이 없어 답답할 뿐이다. 나의 가족 중 절반은 해방 직후 북에 남았고 나머지 절반은 남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북에 남은 절반 중의 한 명이었다. 그것이 나와 아버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러다 보니 20대 후반부터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가물가물한 그리움일 뿐이다.
해방, 그리고 이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깊으면 깊을수록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인생에 대한 사색도 깊어만 간다. 한문에서는 80세를 ‘망구(望九)’라고 한다. 90세를 바라보면서 산다는 뜻이다. 유일명 유일생(唯一命 唯一生). 천상천하에 오직 하나밖에 없고 오직 한번밖에 없는 이 소중하고 고귀한 인생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생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엄숙한 경기다. 인생은 연습이 불가능하다. 남이 나의 인생을 살아줄 수 없고 내가 남의 인생을 살아줄 수 없다. 인생은 독생독사(獨生獨死), 태어날 때 혼자 태어나고 죽을 때 혼자 죽는다. 인생은 독립독행(獨立獨行), 나는 내 발로 서서 내 힘으로 살아야 한다.
나는 인생에서 감격성의 가치를 가장 높이 평가한다. 우리는 감격성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나 다 감격하는 것은 아니다. 맑고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가 감격한다. 정신이 죽은 사람, 인격이 부패한 타락한 사람은 감격할 능력이 없다. 감격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 재산이다. 감격성이 강하고 왕성한 사람이 되어라. 감격의 고갈(枯渴)은 정신의 죽음이요,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다. 감격은 정신의 강렬한 감동이요, 깊은 감명(感銘)이다.
감격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충격적 진동이 일어난다. 감격은 정신의 커다란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이다. 사람은 감격할 때 마음이 뜨거워지는 새로운 정열과 용기와 분발심(奮發心)이 솟구친다. 감격은 삶의 환희요, 정신의 혁명이요, 인격의 신생(新生)이다. 나는 비록 지금 제사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감격을 느끼곤 한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정직, 신용, 청렴의 정신이 내 인생의 원천, 내 감격의 터전이기 때문이다.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