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7년 34명의 학생을 고려대에 합격시키며 편입교육을 시작한 이래 한국 편입교육의 정상을 지켜온 전국김영학원 김영택 회장. 그가 최근 제주도 개발에 나서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제주도에 대학도시를 세우는 것이 평생의 꿈”이라는 그의 20여 년 교육 인생과 신랄하게 비판한 한국 교육의 문제점.
그는 학생 중심의 교육 방식이 김영학원의 신화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학생에게 의지만 있다면 계속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즉 강의만 하는 게 아니라 학생의 학업성취도에 따라 끊임없이 피드백을 해주는 거죠. 저희는 분원마다 조교가 100명씩 있습니다. 다소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들에게는 조교들이 1대1로 붙어서 지도해줍니다.”
전국김영학원의 김영택(52) 회장은 김영학원 성공신화의 비결을 수요자, 즉 학생 중심의 교육 방식에 있다고 강조했다. 또 학원 역사상 처음으로 토론식 수업을 도입해, 학생들이 직접 그룹을 만들고 그 안에서 발표와 토론을 진행하게 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7만명 이상의 선배들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입니다. 지난해 선배들의 성적을 기준으로 내 점수면 어느 대학에 갈 수 있는지,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하는지 알 수 있죠. 그래서 학생들은 학원에서 치러지는 시험을 무척 진지하게 봅니다. 그 성적이 진학의 나침반 역할을 하거든요.”
김회장은 편입이 지방대학의 몰락과 학벌경쟁을 부추긴다는 일련의 주장에 대해서 “실체는 파악하지 못하고 겉만 보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지난 8월 한 해 두 차례씩 실시했던 편입학 전형 횟수를 한 차례로 줄이고 편입학 정원 규모도 감축한다는 내용의 편입학제도 개선안을 발표했다. 김회장은 편입을 줄이면 오히려 지방대의 부실은 심해지고 대학간 서열화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편입이 어려워지면 역설적으로 편입학원은 운영이 잘 됩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전문가의 조언이 더욱 필요해질 테니까요. 또 편입 기회마저 사라지면 대학입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겁니다. 부실한 지방대학이라면 지원자가 사라지겠죠. 학원이 필요 없을 정도로 편입이 쉬워지게 하는 대신 졸업을 어렵게 해서 학생들이 공부에 매진하게 해야 합니다.”
또 그는 우리 교육이 학생들에게 기회를 많이 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편입은 한번 입시에 실패한 학생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외국과 한국의 고속도로를 비교해보세요. 외국의 경우 한번 빠져나갈 길을 놓쳐도 다음 갓길을 통해 곧바로 돌아올 수 있어요. 한번 실수해도 쉽게 만회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한국의 고속도로는 길을 잘못 들어서면 부산까지 가버려요. 우리의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편입이라는 재기의 기회를 노리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교육이지만 당당할 수 있어요.”
김영택 회장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특히 편입교육에 20년 이상 헌신한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니 김영학원 외에도 이얼싼중국체험어학원, 영어영재어학원 EnTop, 도서출판사 학사, 미술학원 창조 등의 대표를 겸하고 있었다. 직함이 말해주듯 다양한 교육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그에게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사교육 열풍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 역시 사교육 열풍을 이끄는 주역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립학교를 육성하면 된다”고 간단히 대답했다.
“왜 사립학교에 교육부 예산을 지급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돈을 모두 공립학교에 지원하면 그만큼 공교육의 수준이 높아지죠. 사립학교는 말 그대로 자율화시켜 경쟁하게 만들어 정말 실력 있는 곳만 살아남고 부실한 학교는 없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중고교는 물론 대학에도 해당되는 말이에요. 공교육의 수준이 높아진다면 누가 일부러 사교육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1951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김회장은 초등학교 시절 미와 양이 수두룩한 성적표를 받았다고 한다. 일곱 살에 입학한 데다가 워낙 장난꾸러기라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 그러던 중 6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며 2년여를 보낸 후 어느 정도 집안 사정이 나아지자 뒤늦게 중학생이 됐다. 중학교 성적표는 모두 수였다. 학교를 다닌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깨닫고 학업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만 하겠다는 작은 소망은 산산이 부서졌다.
“중학교 3학년을 마칠 무렵 갑작스레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이후 숙부네 가서 살았는데, 어느 날인가 숙부가 저를 고무신 도매상의 점원으로 보내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집을 나와 무작정 상경했어요.”
그 후 김회장은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다고 한다. 중졸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명 노가다(현장 막노동), 식당 직원, 가게 점원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가 좋고 행동도 민첩했던 그는 어떤 일이든 척척 해냈고 돈도 꽤 모았다. 22세가 되던 해 그는 군대에 갔다.
“군대에 갔더니 행정병을 시키더군요. 아마 제가 중졸 출신 행정병 1호일 겁니다(웃음).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행정병들이 저를 무시했죠. 하지만 제가 글씨도 더 잘 쓰고 기획안도 잘 만들었거든요. 다른 행정병들이 제게 아이디어를 부탁했을 정도였죠.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 대접받고 살려면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대 후 그는 대입 검정고시와 대입시험에 차례로 합격해 고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가르치던 학생은 대입 시험을 망쳐 원하는 대학보다 훨씬 수준이 떨어지는 대학에 진학했다. 괴로워하는 학생에게 그는 “편입 시험을 준비해보자”고 제안했고 당시 편입시험 과목이었던 국어와 영어를 성심성의껏 가르쳤다. 그 학생은 편입시험에 합격,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그 후로 입소문이 난 거죠. 특히 편입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저를 많이 찾아왔어요. 그래서 10명 정도 모아놓고 그룹과외를 했죠. 그러다가 1977년 처음으로 ‘김영선생 대학편입’이라는 간판을 걸고 학생 40명을 가르쳤어요. 그 중 34명이 고려대에, 나머지 6명도 다른 대학에 합격했죠.”
이후 그를 찾는 학생 수는 해마다 늘어났다. 40명에서 100명, 1000명까지 늘었고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1981년 졸업정원제가 실시되면서 서울대에 처음으로 결원이 생겼어요. 그러자 당시 문교부 장관이 서울대 결원을 편입으로 채우겠다고 발표했죠. 사상 처음으로 서울대 편입시험이 치러지게 된 거였어요. 저는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투자해서 학원을 새로 지은 후 서울대 편입 준비반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죠. 그런데 그 해 9월 갑자기 서울대 편입 계획이 무산됐고 일반편입제도마저 없어졌어요. 투자한 것 다 날리고 알거지가 되고 말았죠.”
부자와 거지 오갔던 7년 외도 생활
그 후 한동안 편입학원 시장은 쇠락의 길을 걸었고 김회장 역시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다. 여러 회사를 전전하던 그는 명성콘도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게 됐다. 영업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금방 회사의 주역으로 떠올랐고 짧은 기간에 많은 돈을 모았다. 하지만 보증을 선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또다시 재산을 모두 날렸다.
“아내가 임신중이었는데 돈이 없어서 보건소에서 지원하는 산부인과에 가서 아이를 낳아야 했어요. 경기도의 한 단칸방으로 이사했는데, 매일 무슨 돈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나를 고민할 정도로 가난했죠. 당장 돈이 필요했던 저는 봉급이 아닌 일당을 주는 곳으로 위장취업을 했어요. 이력서에 초등학교 졸업이라고만 적고 일당 1만원을 받고 한 우산업체에 취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김회장과 경리를 맡고 있는 여직원만 사무실에 남게 됐을 때 갑자기 독일에서 온 바이어가 들이닥쳤다. 그 바이어는 일본과 한국의 업체들 중 한 곳에서 우산을 수입하려고 했다. 영어를 못하는 여직원이 우왕좌왕하자 그는 능숙한 영어로 바이어를 상대했고 가계약까지 체결했다. 여직원의 어안이 벙벙했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사장에게 ‘이력서를 거짓으로 작성한 데다 월권행위까지 했다’고 사과한 후 사직서를 냈어요. 하지만 사장이 극구 말리면서 오히려 국제수출 및 영업 업무를 맡기더군요. 순식간에 신분이 상승한 거죠. 하지만 3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제가 그 업무를 맡으면서 기존 사람들이 그만두게 됐거든요. 당시 저는 ‘이런 작은 우물에 갇혀 있는 게 아닌데, 괜히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펌프 부속회사, 학습지 회사 등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다. 학습지 회사에서는 경영국장까지 맡았다.
영업사원으로 능력을 인정받으며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의 편입교육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언젠가는 일반편입이 가능해져 편입시장이 살아날 거라고 생각한 그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편입관련 자료들을 쭉 모아왔다. 그러던 중 1987년 입학정원제가 부활하면서 일반편입이 가능해지자 그는 다시 편입 교육을 시작했다.
“‘김영편입학원’이라는 간판을 단 학원에서 강의를 다시 시작한 순간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정말 ‘이것이 내 길이구나’ 싶었습니다.”
김회장은 이제 편입교육뿐 아니라 영어, 미술, 중국어 교육 및 출판 관련 사업도 펼치고 있다. 특히 1999년부터는 제주도지사 개발정책 고문으로 활약하고 있다. 사실 요즘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도 제주도 개발 관련 사업이다. 교육과 제주도 개발. 선뜻 매치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꿈이 “고향 제주도에 국제 대학도시를 세우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IMF 직후 뜻 있는 분들과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해보자’는 생각에 조그만 단체를 만들고 외자유치를 해줄 만한 다국적 기업 관계자들을 만나고 다녔죠.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제주도 관련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외자 유치 활동을 하고 있던 어느날 우근민 제주도지사가 그를 찾아왔다. 당시는 도지사 후보 시절이었다. “당신이 제주도 사람인데, 다국적 기업 회장들과 어울리며 외자 유치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말을 건넨 우지사는 “제주도 정책에 대해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향 제주도를 오갈 때마다 ‘이런 면을 개발하면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 텐데’ 하면서 아쉬웠던 적이 많았어요. 중구난방이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도지사님이 당선된 후 저를 불러 ‘제주도지사 개발정책 고문’이 돼달라고 하시더군요.”
김회장이 현재 제주도 개발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홍보다. 그는 일본인이나 중국인 중 제주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고작 3%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국제자유도시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 그는 홍보를 위해서 한류(韓流)스타를 동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명함에 ‘초록뱀 미디어그룹 명예회장’이라고 적혀 있다. 초록뱀 미디어그룹은 올해 초 큰 인기를 끈 SBS 드라마 ‘올인’의 제작사. ‘올인’은 제주도를 배경으로 촬영됐다.
“드라마 ‘올인’팀과 함께 제주도 내 촬영지에 미리 답사를 가곤 했어요. 저는 그동안 제주도에 영상위원회를 만들어 제주도를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왔거든요. 그래서 ‘올인’ 제작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죠. 실제로 드라마는 대박이 났고 섭지코지나 제주도 내 몇몇 호텔은 관광명소로 떠올랐어요. ‘올인’의 경우 대만이나 중국, 일본 등지로 수출되고 있기 때문에 해외 관광객 유치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제주에 국제 대학도시 조성하겠다
그는 이외에도 제주도에서 연예인들을 총동원한 공연 또는 이벤트를 펼치면서 무대 뒤나 팜플렛 등에 ‘JEJU’라는 로고를 적어넣는다거나 한류스타들을 홍보대사로 임명한다면 아시아권에서 큰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내년부터 로또 복권 수익금 800억원 가량이 매해 제주도에 지원되는데, 이 돈으로 제주도 관광유인상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제주도는 자연이 유일한 관광유인상품이었어요. 그러다가 중문단지를 개발해 신혼부부들을, 요즘은 골프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죠. 하지만 이젠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라스베이거스 쇼를 압도할 만한 세계 일류 예술공연물을 제주도에 유치한다면 가족관광객을 불러올 수 있겠죠.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문화 예술, 레저 상품을 특화시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가 제주도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은 교육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제주도에 대학도시를 조성하는 게 그의 가장 큰 꿈이라고 했다.
“중국은 칭다오(靑島)에 국제 대학도시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의 연세대, 고려대 등에도 분교를 내달라는 요청을 했어요. 저는 제주도를 칭다오 못지않은 국제 대학도시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혜의 자연 속에 세계 일류 대학들의 분교가 모두 모여 있는 대학도시를 만든다면 우리 학생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외국의 유학생들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조지 워싱턴대와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김회장은 아들만 둘이다. 첫째 선우(22)씨는 중국 상하이에서 유학중이고 늦둥이 둘째 진우(10)군은 초등학교 4학년이다. 김회장은 둘째가 대학 갈 때쯤에는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교육환경이 조성되면 좋겠다면서 자신도 그런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앞으로 할 일이 지금까지 해온 일보다 더욱 어려울 것 같다”며 환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