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경제전쟁을 이끌 한국군 야전사령관에 45세 ‘청년 장수’ 김현종이 발탁됐다. 非관료·非고시 출신에다 학연도 지연도 받쳐주지 않지만, 공무원 조직에 발 디딘 지 1년 만에 장관 자리를 접수했다.
- 조기 유학→아이비리그 진학→미국 변호사→대학교수→WTO 법률자문관→통상 장관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커리어 하나하나가 눈길을 끈다.
김현종(金鉉宗) 신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이 그 주인공이다. 그의 통상교섭본부장 발탁은 여러모로 강금실 전 장관을 떠올리게 하는 깜짝 인사다. 우선 나이가 그렇다. 세계 경제전쟁의 한국군 야전사령관격인 통상교섭본부장은 위상도 장관급이다. 김 본부장은 올해 45세. 전임 황두연 본부장보다 18세 연하이며, 휘하 국장들도 4∼5세 연상이다. 46세에 장관에 올라 50대 간부들을 거느린 강금실 전 장관과 사정이 비슷하다.
또한 강 전 장관이 외부 영입 케이스로 화제를 모은 것처럼 김 본부장도 직업 관료 출신이 아니다. 미국 변호사, 대학교수, WTO(세계무역기구) 법률자문관 등 다양한 경력을 지닌 김 본부장은 지난해 3월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으로 영입됐다. 그러니 공무원 경력은 고작 1년 2개월에 불과하다.
통상교섭조정관은 외교통상부에서 이른바 ‘G7(차관·차관보·기획관리실장·외교정책실장·의전장·외보안교연구원장·통상교섭조정관 등 1급 7명)’의 하나로 꼽히는 요직. 외교통상부 고위 관료 출신들이 맡아온 이 자리에 그가 임명된 것도 입이 벌어질 일이었는데, 공무원 조직 입성 1년 만에 장관으로 수직 상승했으니 외교통상부 직원들이 받은 충격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 본부장에겐 지연, 학연 등으로 얽힌 두터운 인맥도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외교관인 부친을 따라 성장기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고 사회 경험도 주로 외국에서 쌓았기 때문이다. 물론 외무·행정고시나 사법시험을 치른 적이 없으니 고시 인맥이 뒤를 받쳐줄 리도 만무하다.
“내 ‘에센스’는 국익”
김현종 본부장의 트레이드 마크는 ‘국익’이다. 입만 열면 ‘국익’ ‘국가관’ ‘애국심’ 같은 ‘교과서 용어’가 튀어나온다.
연봉이 절반 이상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고 외교통상부에 들어간 것에 대해서 그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의 에센스(essence)가 있는데, 내게는 국익과 국가관이 에센스다. 국익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돼 행복하다”며 공복(公僕) 의식을 강조했다. 자녀를 조기 유학 보내는 부모들에겐 “아이들이 한국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무역협상을 앞두고 대책회의를 갖는 자리에선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앞만 보고 몰아붙여라”고 주문한다.
초등학교 3, 4학년만 서울에서 다녔을 뿐 중등학교와 대학, 대학원을 모두 미국에서 마치고 직장생활도 미국에서 시작한 김 본부장이 그렇듯 남다른 국가관을 갖고 있다는 게 의아하다. 그는 생각도 영어로 하고 꿈도 영어로 꾸지만 우리말도 잘한다. 그저 불편없이 의사소통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자어가 수두룩한 공문이나 법전을 읽어내는 데 어려움이 없는 수준이다. 필요한 경우에는 육두문자도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세 남매 모두 아이비리그 진학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직과 관련된 얘기뿐 아니라 그의 성장환경과 교육적 배경, 커리어 등 개인사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도 적지 않다. 조기 유학, 미국 명문대(컬럼비아대) 진학, 미국 변호사 자격 취득, 월스트리트 유수의 로펌 근무, 대학교수, 국제기구 활동을 거쳐 모국의 장관직에 오른 과정 하나하나가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그의 두 동생도 명문대를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남동생 현용(鉉容·43)씨는 스탠퍼드대 비즈니스 스쿨 MBA 출신으로 홍콩의 투자금융회사에 근무하다 최근 홍콩에 회사를 공동 창업해 독립했으며, 스탠퍼드대 로스쿨 법학박사 출신의 여동생 미형(美亨·40)씨는 금호아시아나그룹 수석고문변호사 겸 부사장이다.
김 본부장의 부친은 정통 외교관료로 우루과이, 노르웨이 대사를 지낸 김병연(金炳連·74) 전 코리아헤럴드·내외경제신문 회장. 김 전 회장은 맏아들의 유별난 ‘민족 정체성’이 어린 날의 ‘상처’에서 비롯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일본대사관에 근무할 때 아들이 취학연령이 됐다. 당시만 해도 외교관 자녀에 대한 학자금 보조가 미미해 국제학교는 엄두도 못 내고 동네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런데 일본 아이들이 ‘조센징’ 어쩌고 하면서 놀려댄 모양이었다. 제딴은 큰 상처를 받았는지 학교엘 안 가겠다고 했다. 집에서도 설득하고 학교측도 신경을 많이 써줘서 겨우 마음을 돌려놓긴 했는데, 그 무렵부터 ‘나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니다’고 의식한 것 같다. 그 후에도 쭉 외국에서 공부했지만 어딜 가도 ‘나는 한국인이다’ ‘아버지가 일을 마치면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가 산다’고 생각했다.”
우리말을 잘하는 데는 부모의 힘이 컸다. 집에서는 한국어만 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을 익힐 수 있었고, 주말과 방학에는 어머니가 국어, 국사 등 한국 교과서를 펴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해서 한국의 고교과정까지 모두 마쳤다고 한다.
한국에서 보내오는 소년일간지와 소년월간지도 유용한 텍스트였다. 만화, 교양물, 학습물, 소설, 시 등 다양한 장르의 읽을 거리가 담겨 있어 총체적인 언어학습교재로 활용했다는 것. 특히 만화는 ‘실용 언어의 보고(寶庫)’였다. 그래서 김 본부장은 대학원에 다닐 때도 한국에서 새로 나온 만화책을 열심히 구해 읽었고, 미국 로펌에서 일할 때는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인기 만화 시리즈를 빠짐없이 읽었다고 한다. 훗날 자신의 아들에게도 미국 만화책으로 영어를 가르쳤다.
14세부터 홀로 미국 생활
김 본부장은 14세부터 혼자 미국에서 생활했다. 미 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던 부친이 외무부로 복귀하게 되자 잦은 환경 변화로 부담을 줄 것 같아 그를 미국에 남겨두기로 하고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있는 기숙학교에 입학시킨 것. 기숙사를 나와본들 갈 곳도 없는 ‘산골짜기’ 학교라 탈선의 여지도 적었다.
김병연 전 회장은 “어떤 어려움도 스스로 이겨내며 살아가야 한다는 의지가 그때 길러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매주 편지를 보내 격려하고 ‘감시’했다. 다만 공부 잔소리는 필요없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남에게 지는 걸 지독히도 싫어해 “미국 아이들이 2시간 공부하면 나는 4~5시간은 공부해야 이길 수 있다”며 책상에서 내려오질 않았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그 시절부터 몸에 배 지금도 잠이 적다. 자립심과 경쟁심이 강해 ‘내가 아니면 아무도 못한다’는 독불장군 기질도 지녔다.
김 본부장은 1977년 컬럼비아대학에 진학, 국제정치학 학부과정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법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대학교 1학년. 당시 네덜란드 대사관에 근무하던 부친을 방문했다가 사적인 모임에서 우루과이 출신의 국제사법재판소장과 일본 출신 재판관을 만나 대화하면서 법학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국제기구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바람도 이 무렵 가진 듯하다. 그들에게 “나도 열심히 법률공부를 하면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가 “한국은 아직 유엔에 가입하지 않아 당장은 어렵겠다”는 답을 듣자 크게 실망하면서 한동안 심각하게 ‘나라 걱정’을 했다고 한다. 그는 1982년 컬럼비아대 로스쿨에 들어가 3년간 국제상거래와 통상법을 공부하고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가 컬럼비아대에 머문 8년은 한국에 대한 이해의 폭을 크게 넓힌 시간이기도 했다. 틈만 나면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토론을 벌였다. 덕분에 ‘세련된 한국어’를 생생하게 익혔고, 혼자 신문만 봐서는 종잡기 어려웠던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의 어수선한 한국 사정에 대해서도 나름의 지식체계를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변호사가 된 1985년부터는 기업 인수합병 업무를 전문으로 다루는 뉴욕 월스트리트의 로펌에서 4년간 일했다. 그는 외교통상부 부인회 소식지 ‘외교등(燈)’에서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고등학교에서 고전을 많이 읽고 비평을 쓰는 훈련을 통해 글쓰기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나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기에 월스트리트의 법률회사에 바로 취직할 수 있었다. ‘포천’지 선정 500대 기업에 속하는 대기업 고객의 일을 맡으려면 영어 회화와 문장력을 갖춰야 할 뿐 아니라 미국의 기업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영어가 능통하지 못한 변호사들은 영어 의사소통이나 고객과의 접촉을 요구하지 않는 세법 분야를 주로 담당하는데, 이런 경우 법률회사에서 주류에 들지 못한다.”
고객의 首長이 되다
미국 로펌에서 근무하던 중 단기 석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김 본부장은 1989년 귀국해 김·신&유 법률사무소에서 일했다. 국제 상사 중재와 국내 기업의 해외투자 관련 법률상담, 지적 재산권 업무 등을 주로 맡았다. 그중 하나가 노드롭 항공기 비자금 사건.
1984년 미국 노드롭사(社)는 한국에 F-20 전투기를 판매할 목적으로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에게 625만달러의 비자금을 건넸다. 그러나 1986년 F-20기가 연습비행 중 추락하는 등 결함이 드러나 판매에 실패하자 노드롭사는 박 전 실장의 유가족을 상대로 국제중재재판소에 제소하고 국내 법원에도 소송을 냈다. 김 본부장은 박 전 실장측 변호를 맡아 모두 승소했다.
1993년에는 홍익대 교수 공채에 응모해 무역학과 조교수로 채용됐다. 한국이 국제통상 분야에 취약한 것은 노하우도 없거니와 리서치도 안 돼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이와 관련한 연구·조사활동에 주력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교수 노릇은 그리 즐겁지 않았던 듯하다. 당시 함께 근무한 교수는 “연구활동 여건이 기대보다 못한데다, 과제물을 많이 내주고 영어로 수업을 하는 등 미국식으로 터프하게 가르쳐 학생들이 따라오기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동료교수들이 보다못해 “학생들이 그렇게 어려워하면 수준을 좀 낮춰서 가르치라”고 조언했지만 고집을 꺾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22일 한·일 FTA 체결을 위한 양국 정부간 첫 협상에서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조정관(왼쪽)이 일본측 수석대표인 후지사키 이치로 외무성 심의관을 만나고 있다.
승소율이 높았기에 우리 정부가 그에게 의뢰하는 소송건수는 계속 늘어갔고, 덕분에 그는 한국의 통상현안을 꿰뚫게 됐다. 이처럼 한국 정부를 고객으로 모시던 변호사가 결국엔 한국 정부에 들어가 고객의 수장(首長)이 된 셈이니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당시 ‘김현종 변호사’가 주요 고객으로 보좌하던 외교통상부 통상과장이 지금은 통상교섭본부 지역통상국장이 되어 ‘김현종 본부장’을 상관으로 보좌하고 있다.
김 본부장은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 WTO 법률자문관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1999년 세계에서 모여든 140여 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WTO 법률국 수석법률자문관(Senior Legal Advisor)으로 최종 선발돼 4년간 일했다. 직급도 법률국 변호사 15명 가운데 가장 높은 P-5급이었다. 무역분쟁의 1심 판정 내용을 검토한 뒤 의견을 붙여 상소 재판부에 제출하고, 재판부의 결정이 내려지면 최종 판결문을 작성하는 것 등이 주업무였다.
그는 “WTO에 들어가기 위해 통상법률 분야의 핵심 인사들과 교류하고, 시사에 뒤떨어지지 않게끔 50여 종의 통상법률 국제학술지를 구독했으며, WTO 분쟁해결 절차에 직접 관여해 내 지식을 활용해보는 등 꼬박 5년을 준비했다”고 한다.
‘공격적 개방주의자’
지난해 5월 통상교섭본부 조정관으로 영입된 이래 그는 “개혁과 개방을 미루고 기존 시장에만 안주할 경우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개혁·개방이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 국민소득 2만달러에 다다르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며 시장개방의 불가피성을 일관되게 주창해왔다. 그래서 ‘FTA(자유무역협정)의 전도사’ ‘공격적 개방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지난해 4월 칠레와의 FTA 발효 이후 일본, 싱가포르 등과 잇달아 FTA 논의가 불붙고 있는 것도 그의 개방론이 촉발시킨 것이다. 그의 지론은 이른바 ‘큰 그림의 국익론’이다.
“한·일 FTA가 체결되면 단기적으로 적자가 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선진 기술을 습득하고 투자를 유치해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면 중국 등 다른 나라와의 무역량은 그보다 훨씬 늘어난다. 큰 그림을 봐야 한다. 1996년 유통시장을 개방할 때 다들 우리 유통업계가 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망하기는커녕 국내 기업인 이마트가 유통시장을 장악한 것은 물론 중국에 진출할 정도로 경쟁력을 키웠다. 이게 바로 시장개방의 효과다.”
이렇듯 적극적인 통상관은 노무현 대통령의 ‘코드’와도 일치한다. 정찬용 청와대 인사수석은 7월28일 개각을 발표하면서 김 본부장을 “한국 관료의 미래”라며 “아주 멋지게 일할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본부장 취임과 함께 그의 개방 드라이브에는 더욱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이미 아세안 10개국과의 FTA 공동연구가 막바지에 들어섰고, 노르웨이·스위스·아이슬란드·캐나다 등과도 곧 공동연구에 들어갈 계획이다.
‘가장 늦게 퇴근하는 직원’
황두연 전 통상교섭본부장은 “통상업무의 지속성과 전문성을 감안할 때 김 본부장의 발탁은 매우 적절한 인사”라고 평가했다. “통상교섭본부장에겐 협상장에서의 상황판단력과 직결되는 통상전문지식, 그리고 토론·설득·끼어들기·화제전환 등을 능란하게 주도하는 어학능력이 무엇보다 요긴한데, 김 본부장은 둘 다 출중한 인물”이라는 것.
통상교섭본부 비상근 자문관으로 한·일 FTA 협상에 참가했던 인하대 정인교 교수(경제통상학부)는 “김 본부장은 명확한 논리, 두둑한 배짱, 해박한 법률지식, 치밀한 분석자료를 바탕으로 협상에서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다”고 했다. 그래서 ‘터프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직업관료 출신은 아무래도 협상 테이블에서 융통성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은 데 비해 외부 영입 인사는 실적을 내서 평가를 받고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도 있어서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김 본부장도 그런 경우다. 관료 출신들은 협상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표단에게 ‘수위조절’을 당부하는 게 보통인데, 그는 ‘타당한 근거가 있으면 소신있게 밀어붙여라’며 오히려 전의(戰意)를 자극한다.”
‘외교통상부에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직원’으로 알려질 만큼 성실성도 인정받았다. 한·일 FTA 준비과정엔 굵직굵직한 회의는 물론 갖가지 분임회의와 실무 모임이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데, 김 본부장은 간부급 회의뿐 아니라 이런 자잘한 회의에도 꼬박꼬박 참석해 뒷자리에서 옵서버 자격으로 논의 내용을 경청한다고 한다. 기업 관계자들과의 면담도 업종별, 규모별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이는 통상정책 입안에 부족한 경험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 본부장과 통상교섭본부에서 함께 근무하던 한 변호사는 “시장개방은 해나가되 국내 업계의 성숙에 따라 개방의 폭과 속도를 조절하고, 그 과정에 산업간, 부처간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게 본부장의 ‘본업’인데, 김 본부장은 국내법과 국내 산업, 통상정책에 대한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적임자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김 본부장은 소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내 생각에 반대하면 문제가 있다’는 식의 독선적인 면모를 종종 드러낸다”며 “기업인이나 다른 부처 공무원들과 ‘계급장’을 떼놓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면서 합의점을 찾아가는 원만한 리더십이 아쉽다”고도 했다.
조직 장악은 ‘상황 끝’?
통상교섭본부는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여러 부처로 흩어져 있던 통상업무를 외교통상부로 일원화해 발족한 조직이다. 그렇다 보니 옛 외무부, 재정경제원, 통상산업부, 농림부 등에 뿌리를 둔 직원들이 복잡한 인적 구성을 취하고 있어 내부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다. 이 때문에 관료 출신도 아니고 나이도 젊은 김 본부장이 과연 조직을 제대로 장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외교통상부의 한 관계자는 “통상교섭본부의 최근 역학구도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김 본부장은 조정관 시절에 이미 인사권을 행사했다는 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통상교섭본부의 인사권은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있다. 같은 장관급이지만 통상교섭본부장은 ‘G7’이 참석하는 인사위원회에 조정관을 보내 인사를 협의 할 뿐이다. 그런데도 조정관 뜻대로 인사를 했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일이다. 김 본부장은 취임 직후 간부들에게 ‘지금까지는 일을 잘한 사람도, 못한 사람도 좋은 곳으로 보내줬다. 하지만 앞으로는 잘 가려서 보내겠다’고 말해 조정관 때 인사를 주도했음을 자인했다.
외교통상부 직원에겐 인사가 ‘승진+임지(재외공관) 확보’라는 복합적 의미를 갖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만사(萬事)’나 다름없다. 그러기에 인사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사람이 조직을 장악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처럼 이례적으로 인사를 좌우하던 조정관이 이번엔 일약 본부장으로 파격 발탁됐으니 청와대가 그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얘기가 나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사례가 두 가지 더 있다.
하나. 줄을 이을 FTA 협상에 대비하기 위해 전문인력을 증원하는 것은 통상교섭본부의 ‘숙원’이었지만 추진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나 김 본부장 취임 직후 FTA 전문인력을 현재의 3배 이상으로 늘리는 방안이 확정됐다. 김 본부장에게서 조직확대를 건의받은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자치부와 협의하라”고 하자 그는 “늦어질수록 국가적 손실이 커진다”며 거듭 요청해 결국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
둘. 정부혁신위원회는 통상교섭본부를 미국 무역대표부(USTR)처럼 독립기관으로 설립하는 방안, 대통령직속기구인 통상교섭위원회를 신설한 후 통상교섭본부는 위원회의 지침을 받아 실무를 담당하는 사무국 형태로 개편하는 방안 등을 검토해왔다.
그러나 8월8일 정부 고위 관계자는 “급변하는 세계 경제질서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현행 체제를 유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김 본부장이 조직 개편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힌 지 열흘 만에 나온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