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세울 작품 없지만 난 진지하게 연기하는 배우
- 고교시절 ‘애마부인’ 출연제의 받아
- 어릴 땐 몸 약해 이름까지 바꿔
- 다이어트 안 해봤다면 사람 아니다
- 20대 전·후반 연기생활에 회의감
- 국제영화제 賞 욕심? 없다
- 대학시절, 과 선배와 2년8개월 열애
- 사귀는 사람? 있어도 있다 그러겠나
김혜수(34·金?秀). 그녀가 주연한 신작 ‘얼굴 없는 미녀’는 2002년 ‘로드 무비’로 평단의 찬사를 받은 김인식 감독의 미스터리 멜로 영화다. 아내의 자살을 겪은 정신과 전문의 ‘석원’(김태우 분)이 우연히 예전 자신의 환자였던 매력적인 유부녀 ‘지수’(김혜수 분)와 재회한다. 경계선 성격장애를 앓는 지수의 상처를 어루만지던 석원이 치명적인 사랑에 빠져들면서 두 사람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작품에 세간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 중 하나는 데뷔 19년째로 접어든 김혜수의 파격적인 베드신이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은 글래머 스타의 속살은 분명 호기심의 대상이다. 영화 마케팅도 그런 면에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5000만이 다 알면서도 정작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문 ‘여인 김혜수’의 내면세계는 그 이상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8월10일, ‘연기자 김혜수’는 약속한 오후 2시에서 10분쯤 지나 카페 ‘미엘(Miel)’에 나타났다. ‘얼굴 없는 미녀’의 제작사인 (주)아이필름이 입주한 서울 논현동 옐로스튜디오 2층에 자리잡은 이 카페엔 연예인 손님이 많다.
검은빛의 로맨틱한 슬리브리스 톱에 장식이 거의 없는 로라이즈 부츠컷 팬츠, 검정 샌들 차림. 포니 헤어스타일로 묶은 머리. 연예인이라기보다 강남의 여느 멋쟁이 아가씨쯤으로 보인다. ‘파격 노출패션’은 어디 갔을까. 얼굴도 체격도 화면에서보다는 작다. 옅은 화장. 미소 띤 얼굴. 액세서리 하나 걸치지 않은 가늘고 긴 손가락. 단정히 깎은 손톱. 촉촉하고 맑은 두 눈.
‘아, 이 작품은 연기자가 참 힘들겠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 쏟아질 것 같은 두 눈망울이 기자를 빤히 쳐다본다.
‘벗겨보리라, 당신은 영화를 위해 옷을 벗었지만, 나는 독자를 위해 당신의 마음을 벗기리라.’
‘지수’의 육체를 갖고난 후 마음까지 가지려 했던 ‘얼굴 없는 미녀’의 ‘석원’처럼, 인터뷰를 앞두고 마음을 다잡고 있던 기자의 머릿속이 갑자기 띵해진다. 36.2℃로 10년 만에 최고로 치솟은 수은주 탓인가, 그녀 탓인가. 의지와는 무관하게 힐난조의 첫 질문이 불쑥 튀어나갔다. 이런!
-평소엔 그렇게 옷차림에 신경을 안 쓰나요?
“인터뷰할 땐 신경을 더 쓰는 편인데…청바지는 자주 입고요.”
-TV나 스크린에서와 달리 자연스러워 보여서요.
“보통 땐 편하게 입어요. 그냥 티셔츠 같은 거. 예쁜 옷 좋아해요.”
막 개봉한 그녀의 작품 얘기부터 시작하는 게 자연스러울 듯하다.
- ‘얼굴 없는 미녀’ VIP시사회에서 문소리(30)씨와 전도연(31)씨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혜수씨의 연기를 극찬했는데…. 연기자들의 칭찬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연한 건가?
“관객에게 칭찬받는 건 굉장히 기쁘죠. 그런데 (연예) 관계자들 사이엔 칭찬에 인색해요. 워낙 서로를 잘 아는 사이여서 칭찬보다는 오히려 진심어린 충고를 많이 하죠. 잘봤다고, 동료 연기자들이 칭찬해주면 좋죠, 당연히.”
-그런 칭찬을 기대하지 않았나요?
“예, 별로. 그리고 그 소식은 직접 들은 게 아니고 매체를 통해 접했어요.”
-박찬욱·김지운 등 실력파 감독들도 ‘김혜수의 재발견’이라며 “다음 영화에서 김혜수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했다던데….
“하하, 출연 제의 들어온 거 없는데…. 두 분 모두 지금 (새 작품) 준비하고 계세요. 김 감독님은 이미 그저께 고사를 지냈고, 박 감독님은 차기작을 준비중인데 올 가을에 시작할 거예요. ‘얼굴 없는 미녀’ 시사회를 미리할 걸 그랬나?”
겸손한 반응과 달리 김혜수는 이번 영화에서 확실히 진일보한 연기력을 보여줬다.
기자는 인터뷰 전날 서울극장에서 ‘얼굴 없는 미녀’를 조조할인으로 관람했다. 영화의 느낌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강렬했다. 시각적 이미지도 뛰어났다. 내면의 심리 변화를 묘사하는 김혜수의 광기어린 연기가 단연 돋보였다. 그녀의 ‘몸’보다 ‘그녀 전체’가 보였다. 연기 변신엔 확실히 성공한 듯싶었다. 하지만 대중적이기보다 마니아층이 좋아할 만한 작품이어서 흥행은 미지수일 것 같다.
김혜수는 자신의 이번 작품을 세 번 봤다. 7월28일 서울극장에서 열린 기자시사회, 8월2일 서울 삼성동 메가박스에서 열린 VIP시사회에 이어 8월9일 저녁 서울극장에서 관객들 틈에 섞여 또다시 영화를 봤다.
-관객 반응이 어떻던가요?
“무척 진지하게 보시더라고요. 사실 이번 작품은 관객에게 친근한 영화는 아녜요. 능동적으로 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적잖이 괴로운 시간이 될 수도 있죠. 그런데도 성의 있게 보시는 게 참 놀라웠어요. 영화 보는 문화가 많이 달라졌구나 생각했죠.”
-이번 영화에 출연한 게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어선가요?
“지난해 늦여름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는데, 김인식 감독 것이라기에 ‘로드 무비’를 좋게 본 저로선 반가웠죠. 보통 시나리오를 한 번 봐서 감이 딱 오면 좋은데 이건 그렇지 않았어요. 내용이 어렵다기보다 상업영화 소재인 데도 굉장히 상업적이지 않게 시나리오를 풀어갔다는 느낌이 들었죠. 상당히 낯설고 몽환적인 무드에도 매력을 느꼈고. 이런 작품은 어떻게 그려내냐에 따라 영화가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어요. 주인공인 ‘지수’나 ‘석원’의 캐릭터와 관련한 설명도 거의 없었죠. ‘아, 이 작품은 연기자가 참 힘들겠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선뜻 하겠다고 못했는데 감독이 과연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어나갈지 참 궁금해지더라고요.”
“능력껏 베스트(best) 다했다”
-‘지수’의 캐릭터가 극과 극을 오갈 만큼 감정기복이 심하고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잖아요. 연기 부담이 컸을 듯한데요.
“정신적 장애를 가진 역할은 연기자로선 부담스럽죠. 하지만 매력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더 부담을 느낀 건 캐릭터 이상으로 영화 자체의 낯선 분위기, 내레티브 위주의 전개방식이 아니라 영화의 여러 이미지가 모여 스토리를 하나하나 완성해가는 방식이었어요. 설명적인 줄거리가 아니라 캐릭터가 있고 소품도 있고 세트도 있는데 시공간과 캐릭터의 모든 것이 맞물려 전체적인 느낌을 완성해가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어긋나도 굉장히 혼란스런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죠.
영화가 완성된 지금에 와서는 ‘아, 그게 참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개봉후 영화내용이 어렵다, 스토리 부분이 빈약하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스토리가 없는 게 아니에요. 그 전개방식이 대사나 상황을 통해 전달되는 게 아니라 이미지나 영상을 통해 총체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 때문에 소수의 관객은 열광하는 반면 다수 관객은 친절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전달방식에 혼란을 겪는 거죠.”
-이번 연기에 어느 정도 만족하세요?
“저는 일을 평가할 때 만족한다 안 한다로 판단하진 않아요. 영화를 하는 동안 사전준비하고 촬영하고 더빙하는 것까지가 제 몫이죠. 저로선 이번 영화에서 능력껏 베스트(best)를 다했다고 봐요. 그러나 평가는 제 몫이 아니죠. 관객의 것이죠.”
-자신의 연기를 100점 만점으로 환산한다면?
“저 그렇게 점수 안 매겨요.”
듣던 대로 당차다. 그리고 다변(多辯)에다 달변(達辯)에 가깝다.
-흥행 여부와 관계없이 이번 작품으로 혜수씨 연기력의 또다른 일면을 보여주는 데 일단 성공한 듯합니다. 다소 낯설면서도 썩 잘 어울리는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잘봐주셨네요.”
-노출신(scene) 얘기를 안 할 수 없는데…촬영중에 어지럼증과 구토 증상을 보였다면서요?
“일단 찍을 만큼 찍어본 뒤 그중 영화에 가장 적절한 부분만 쓰기 때문에 베드신이나 누드신을 100번 찍었다고 100번 다 영화에 나오는 건 아니에요. 그 신도 마찬가진데… 과거 연인과의 러브신은 밤부터 이튿날 해뜰 때까지 찍었거든요. 건강한 편인 데도 체력적으로 부대끼더라고요. 그렇다고 해서 밥 먹어가며 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니까 꿀물을 마셔가며 촬영했어요. 그런데 그걸 사람들이 ‘김혜수가 베드신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구토까지 했다’고 오해한 거죠. 구토라는 말의 느낌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그냥 체력이 달리니까 속에서 신물이 올라온 것뿐이에요.”
-지금은 괜찮나요?
“그때 그랬죠. 그 신뿐만 아니라 체력이 달릴 때가 가끔 있어요.”
“노출패션은 내 취향”
우문(愚問)일지 모르지만, 필요한 질문을 던질 때가 된 것 같다. 김혜수의 이번 노출신을 두고 일각에선 나이 들어 상품성이 떨어지니 이번 영화에 ‘올인’하려 벗은 것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왜… 벗었죠? 노출신을 극구 사양해왔잖아요.
“사실 사양한 게 아니라 그동안 노출신 제의가 없었어요. 제의가 있었던 쪽은 제가 영화적으로 고민할 이유가 없는 영화, 에로영화죠. 영화의 캐릭터를 두고 노출신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만한 영화가 없었어요. 그리고 우리 영화계에서 여성 연기자가 과감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 건 비교적 최근이에요. ‘김혜수 너는 왜 로맨틱 코미디만 하느냐’는 얘기도 여러 번 들었는데 그런 영화를 할 때와 지금은 영화 콘텐츠 면에서 많이 달라졌다고 봐야 해요.”
-그럼 이번 노출신은 작품에 충실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영화를 위해 노출도 불사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어쨌든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고, 같이 작업하고 싶은 연출가도 있고,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하나로 노출신이 있었던 거지 노출신 때문에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거나 출연을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고민거리가 됐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에요.”
-사형폐지 운동을 하는 변호사가 그의 변론을 맡게 됐는데….
“변호사가 구치소에 갔다와서 인터뷰한 것 봤어요.”
-유영철 같은 희대의 연쇄 살인 용의자라도 사형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건 제가 판단하고 싶지 않아요. 인간이 인간을 죽이면 안 되죠. 안 되는데, 그래서 그 인간이 죽어야 하느냐 혹은 살아 있으면 어떤 식으로 살아 있어야 하느냐, 그게 그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사회적으론 어떤 의미가 있느냐, 그걸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를 비롯해서 우리의 정서라는 게 굉장히 순박하잖아요. 쉽게 동화되고 동요되기도 하는데 언론부터 냉정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금 뜬금없는 질문이긴 하지만, 정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요?
“잘 몰라요. 사실 관심 갖기도 싫죠. 신뢰하기도 어렵고. 하지만 성인이고 이 나라 사람이니까 최소한의 관심은 가지려 해요.”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잘한다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표를 그리로 던진 사람으로서….”
‘가식 없는 미녀’
-여가시간엔 어떻게 지내요?
“일 없으면 집에 있는 편이에요.”
-안 좋은 버릇 같은 건 없어요?
“저는 집밖으로 나가야 돼요. 너무 집안에만 있어요. 나가면 상황에 맞게 사람들을 만나 여러 기회를 만들 수 있잖아요.”
-최근에 읽은 책은?
“저는 책을 읽을 때 한 권이 아니라 몇 권씩 섞어서 봐요.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란 책을 어제 읽기 시작했어요. 그전에 읽은 책은 ‘물은 답을 알고 있다’ 그리고 무라카미 류의 ‘식스티 나인’ 등이죠.”
-10년, 20년 후의 혜수씨 모습은 어떨까요?
“10년 후면 중년이고 20년 후면 노년으로 접어드는 여인이겠죠? 연기를 계속할지는 모르겠어요. 연기는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너 이제 그만 해라, 너 도저히 안 되겠다’ 그러면 그만둬야죠. 연기는 기본적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지 저의 어떤 성취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건 아니거든요.”
19년차 여배우와 11년차 기자는 ‘한여름 낮의 데이트’를 끝냈다.
- 손 좀 줘보세요.
잡아보고 싶었다. 의외로 손이 꽤 차다.
“저혈압이에요. 좀 심해요.”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솔직담백하다. 당당하게 한 꺼풀 더 벗겨 자신을 내보일 줄 안다. 우리가 정작 보고팠던 것도 그녀의 알몸보다 이런 꾸밈 없는 내면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김혜수. 그녀는 자기현시 따위와는 거리가 먼 ‘가식(假飾) 없는 미녀’였다.
김혜수는 인터뷰 내내 솔직담백함을 보여줬다.
“개인적으론 쉬운 결정이 아니죠. 하지만 배우로선 특별하달 게 없어요. 누드사진을 찍는 건 아니잖아요. 연기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하나도 특이할 게 없어요. 가까운 일본이나 우리에게 익숙한 할리우드를 보세요. 70대 할머니 배우라도 노출신이 필요하다면 배우 스스로 판단해서 하잖아요. 나이는 관계 없어요. 그러니 굳이 노출신을 안 하던 배우가 왜 30대 중반이 돼서 했는가 하는 편협한 시각은 연기를 오래 해온 저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벗는다’는 데 대한 우리 사회의 선입견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요?”
-그렇지만 혜수씨가 몸에 대해 이중적 사고를 가진 게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노출신은 안 하면서도 시상식이나 쇼프로에선 과감한 의상으로 몸을 노출하니까.
“저는 그 점도 좀 놀라워요. 옷을 입는 건 김혜수 개인의 취향이에요. ‘김혜수의 플러스 유’를 진행하고 시상식 사회를 보는 건 연기와는 다르잖아요. 거기엔 제 취향이 반영될 수 있죠. 반대로 연기할 때는 제 취향을 보여서는 안 되겠죠. 비키니를 입든 청바지를 입든 그건 취향인데 그걸 저의 모든 일에 적용하려는 시각은 납득이 안 돼요.”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다리도 꼰다. 아이스녹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잇는 그녀의 입에선 침까지 튄다. 할말이 많은 게다. 언론도 도마에 오른다.
“노출과 관련한 대중의 태도는 언론이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는 탓도 커요. 대중의 입장에선 언론보도를 믿고 동조할 수밖에요. 그들이 개인적 판단을 갖기도 전에 걸러지지 않은 언론의 보도를 접하고 ‘아, 그래 그러고 보니까 평소 김혜수가 꽤나 과감한 옷을 입는 것 같던데 왜 과감한 연기는 안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성격이 과감하다고 해서 과감한 배우일 순 없는 거예요. 의기소침하고 내성적인 배우가 과감한 연기도 할 수 있듯이.”
-이번 노출신에 대한 반응은 어떤가요?
“아직 반응에 대한 객관적인 리서치를 못 했어요. 일단 여성들이 영화에 큰 관심을 보이는 건 맞아요. 그게 영화의 성격 때문인지 노출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관객의 80% 가량이 여성이에요.”
“럭셔리 추구하진 않는다”
-영화를 보니 무척 탄력 있는 몸매던데요.
갑자기 “쿠쿡”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질문이 너무 직설적이었나? 그래도 눈은 웃고 있다. 싫지 않은 모양이다.
-몸매관리를 어떻게 하세요?
“나이가 나이니만큼 관리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들어요. 사실 20대엔 그냥 내버려뒀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먹고, 배나 옆구리가 좀 나와도 먹는 즐거움이 더 컸어요. 그래도 배꼽티는 입고 싶고. 그런 게 젊다는 이유로 용서가 됐죠.
지금은 여자로서나 배우로서나 좀 철저하게 지켜나가고 노력해야 할 것이 많아진 것 같아요. 그냥 인간적으로 ‘OK, 나 몸 생각 별로 안해’라고 편안해할 포지션이 아니라는 거죠. 정신과 몸이 항상 긴장하게끔 저 자신을 환기시키려 하고 주위에서도 그런 자극을 줘요. 그런데 노력을 더해야 해요. 저장된 에너지만 쓰는 데는 한계가 있더라고요. 일을 시작하면 사실 체력전이거든요. 체력이 떨어지면 집중도도 떨어져서 놓치는 게 많아요.”
‘건강미인’이란 수식어가 떠나지 않는 그녀가 운동을 별로 하지 않는다는 건 의외다.
제작사인 (주)아이필름으로선 ‘얼굴 없는 미녀’가 전지현·장혁 주연의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여친소)’에 이은 두 번째 영화다. 8월6일 개봉 이후 10일까지 든 관객은 32만명. 흥행순위는 5위다.
(주)아이필름 마케팅실 관계자는 “목표 관객이 손익분기점인 110만∼120만명인데 그 정도는 가능할 것”이라며 “기대 이상으로 관객이 들고 있다”고 전했다. 제작비는 30억원이 들었다.
-흥행에 성공할 것 같나요?
“개봉한 지 며칠 안 됐는데, 누가 봐도 빅히트할 영화는 아닐 거예요. 대중적이지 않은 소재를 대중적인 방식으로 풀어내지 않았으니까.”
-영화에서 ‘석원’역을 맡은 파트너 김태우(33)씨를 어떻게 보세요?
“연기자든 연출자든 스태프든 어떤 자세와 태도로 영화를 하느냐는 점이 중요해요. 그런 면에서 태우씨는 꽤 진지하고도 도전적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죠. 그리고 양질의 사람인 것 같아요. 양질의 사람만이 양질의 배우가 될 수 있죠.”
-한 작품을 끝냈으니 휴식이 필요할 텐데 계획이 있나요?
“아무것도. 여행을 갈까 했는데 계획을 잡을 여력도 없어요. 가벼운 마음이 들질 않아요. 모르겠어요. 왜 그런지.”
-다음 연기 스케줄은?
“아직 못 정하겠어요. 툭 털어내고 다른 것을 결정할 만큼 마음에 여유가 없어요. 조금 내버려둬 보려고요.”
-실제로도 영화속 ‘지수’처럼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나요?
“그렇게 보이죠. 화려한 걸 좋아할 때도 있죠. 하지만 늘 화려하게 보이고 싶다면 그건 이상하죠. 시상식 때 화려한 옷을 입는 건 배우로서 멋지게 보이고 싶다, 뭐 그런 측면이고. 그러나 럭셔리(luxury)를 추구하는 편은 절대 아녜요. 그건 확실해요. 우리 집에 와보면 금방 알겠지만.”
“그렇죠. 아무나 못 오죠. 하하.”
-스르르 침잠할 때도 있나요?
“그럴 때도 있는데 사람들이 저를 브라이트(bright)하게 보죠. 하지만 제겐 냉소적인 면이 있어요. 문학 작품이나 음악에선 시니컬한 것에 매료돼요. 그런 정서를 좋아하고 즐기죠. 그런 정서가 없는 사람에게도 매력을 못 느껴요.”
-남자?
“남자건 여자건. 물론 그 사람의 전반적 정서가 시니컬하다면 그건 문제죠. 염세적인 느낌이 나는 것도 싫어해요.”
‘깜보’와 ‘돌고래’
-복잡하네요. 별명이 있죠? ‘돌고래’라고.
“그거 연예계 데뷔할 때 별명이에요. 열다섯 살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애였죠. 지금은 뭐 네댓살배기 애들도 CF가 뭔지 알지만 저는 열다섯인 데도 뭔지 몰랐어요. ‘그게 뭔데요’ 했더니 ‘선전’이래요. 선전이란 말은 알아들었죠. 그냥 ‘웃어주세요’ 하면 웃고 ‘손 흔드세요’하면 그렇게 했죠. 당시 CF 감독님이 CF 처음 하는 애치곤 그나마 말귀를 빨리 알아듣는다고 ‘돌고래’라 그랬어요. 돌이켜보면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는 자체가 좀 민망하죠. 자의식이 없다는 얘기니까.”
-요즘은 별명 없어요?
“없는데요.”
-‘간식의 여왕’이란 소문도 있던데….
“간식 안 좋아해요. 주식을 좀 다량으로 섭취하죠.”
우리는 이쯤에서 폭염 속 때아닌 시간여행을 떠났다.
-‘깜보’를 봤을 때 혜수씨를 내 또래쯤이려니 생각했다가 중3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고 무척 놀랐어요.
“어머, 보셨어요? ‘깜보’ 관객이 2만여명쯤 되니 그중 한 분이네요. 제가 만나는 사람들 중엔 이상하게 ‘깜보’를 보신 분이 많아요.”
기자가 ‘깜보’를 본 건 대학교 1학년 때인 1986년이다. 이 영화는 김혜수뿐 아니라 박중훈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지금은 내용이 어렴풋하지만, 막 출감해 복수심에 불타던 깜보(장두이 분)가 우여곡절 끝에 아내를 찾지만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것을 알고는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이 이문열의 소설 ‘젊은날의 초상’ 중 ‘그해 겨울’편에서 ‘칼갈이 사내’가 병든 배신자에 대한 복수를 단념하고 칼을 바다로 던지는 결말과 비슷하다는 기억은 남아 있다.
-당시 역할이….
“밤무대 여가수였어요. 영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김혜수가 ‘깜보’에 캐스팅될 때의 에피소드는 이렇다. 그녀는 태권도 어린이 시범단으로 활동하다 눈에 띄어 ‘마일로’ 음료광고 모델을 했다. 그 다음 광고는 ‘암바사’ ‘허쉬초콜릿’이었다. 해태제과 전속모델을 3년 정도 했다.
당시 ‘암바사’ 광고를 눈여겨본 ‘깜보’의 감독은 광고회사에 전화를 걸어 그녀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공교롭게도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바로 김혜수. 외할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다쳐 부모님은 시골에 내려가고 없었다. CF 분장담당의 손에 이끌려 그녀가 간 곳은 합동영화사. 그녀는 거기서 가죽점퍼를 입고 시나리오를 읽었다. 요즘으로 치면 멋모르고 오디션을 본 것이다.
그녀의 집은 발칵 뒤집혔다. 뒤늦게 귀가한 김혜수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안 뒤 영화사로 찾아가 ‘미성년자를 부모 동의없이 데려가면 어떡하냐’며 강력히 항의해 사과를 받아냈다. 그때만 해도 영화 하는 사람들을 나쁜 집단쯤으로 백안시하던 시기라는 게 김혜수의 얘기다.
그러나 영화사측도 만만치 않았다. 김혜수의 아버지를 2개월 동안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마침내 출연 허락을 얻어내고는 시나리오에서 쳐낼 것 쳐내가며 촬영을 마쳤다. 원래 대본에 여가수는 미성년자가 맡을 역할은 아니었다고 한다. 김혜수를 캐스팅하기 위해 시나리오를 꽤 수정했던 셈이다.
“우리 혜수가 미성년자예요”
“요즘은 가수·배우 등 연예인이 선망의 대상이잖아요. 제가 어릴 땐 우리 영화 그러면 ‘훔친 사과가 맛있다’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뭐, 한창 그럴 때니까 영화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고 배우도 눈총맞는 직업이었어요. 특히 우리 집안이 보수적인 편이어서 광고모델을 한다는 것만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어요.”
-‘깜보’의 원래 시나리오엔 노출신도 있었나요?
“있었죠. 밤무대 여가수 역할이고 이 여자가 상징하는 게 빨랫줄에 빨간 팬티가 걸려 있으면 항상 이 여자가 있다, 뭐 이런 거였는데 그런 부분을 다 뺐죠. 제가 여주인공으로 홍보되고 나중에 신인상(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까지 받았어요. 그런데 실제론 제가 나오는 부분이 10여분밖에 안 돼요. 엄청나게 찍었는데 편집에서 많이 잘렸어요. 왜 잘렸는진 모르겠어요.”
-당시에도 혹시 에로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왔나요?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 ‘애마부인’ 시리즈. 그때 엄마 말이 그랬어요. ‘죄송합니다. 우리 혜수가 미성년자예요’. 당시 ‘파리 애마’ ‘스페인 애마’ 같은 영화들이 막 나왔죠.”
-미성년자한테 에로영화 출연을 제의했다?
“그땐 배우라고 하면 대부분 성인이었어요. 게다가 배우에 대한 정보가 많지도 않았고. 그러니까 제가 미성년자일 거라곤 미처 생각 못한 거죠.”
-체형이 부모님 중 누구를 닮았나요?
“아빠 쪽. 팔다리 길고 상체 짧고. 고모들은 서양 여자 같은 몸매예요. 엄마는 키가 작아요, 허리는 날씬하지만. 아빠 키는 178cm, 엄마는 156, 7cm쯤?”
-어릴 때도 건강했나요?
“약했어요.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요. 인큐베이터에도 있었고. 체중은 우량아 수준인데, 잔병치레를 했죠. 태어난 직후 장이 좀 안 좋았고, 네 살 때까지도 못 걸었대요. 코피가 한번 나면 안 멈췄는데 제가 처음 드라마할 때까지 그랬어요. ‘사모곡’ 녹화할 때 코피가 났는데 너무 많이 나오는 데다 멈추지 않아서 녹화하다 말고 코 혈관 막는 수술을 받고 다시 녹화한 일도 있어요.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했죠. 한약도 꽤 먹었어요. 몸이 약하다고 이름도 몇 번 바꿨죠. 그랬던 제가 지금은 이러니 가족이나 친척들은 놀랄 수밖에요.”
-본래 이름은 뭐였죠?
“정임이었다가 혜진이었다가 혜수가 됐죠.”
-기사에 공개해도 되나요?
“안하는 게 나아요. 촌스러우니까. 어릴 땐 혜수라는 이름에도 불만이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여자 이름에 ‘수’자는 잘 안 넣었잖아요. 여덟 살인가 아홉 살 때 엄마 심부름으로 조미료를 사러 나갔다가 길 잃은 아이를 발견해 경찰서에 데려다준 일이 있어요. 경찰 아저씨가 표창장을 준다며 이름을 물어보는데도 안 가르쳐줬어요. 콤플렉스가 있었던 거죠.”
-표창장은 받았나요?
“못 받았죠. 이름을 안 알려줬으니. 또 나중에 알고보니 아이가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엄마와 조금 떨어져서 울고 있는 걸 제가 미처 모르고 데려간 거였어요. 어쨌든 그 아이 엄마가 고맙다고 쵸코파이를 두 박스 갖고 왔죠.”
“네 살 때까지 걷지도 못했대요”
-태권도 몇 단이죠?
“3단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1년2개월 동안 배웠어요. 이후 승단심사 때마다 미리 연습해서 3단까지 딴 거죠. 4단까지 따볼 생각이에요.”
-수영은 잘해요? 수영이나 태권도 같은 운동을 많이 해서 건강해진 것 아닌가요?
“사실 수영 잘 못해요. 그냥 기본 정도. 25m 왕복도 못하니까. 기를 쓰고 운동하는 편이 아녜요. 운동으로 몸이 단련된 게 아니라 그냥 자라면서 몸이 건강해졌어요. 연예계 데뷔한 후 더 건강해진 것 같아요. 키도 쑥쑥 크고. 중학교 1, 2학년 때만 해도 초등학생 차비를 내면 아무도 뭐라 안할 만큼 체구도 자그마했어요. 반에서 가장 앞줄에 앉아야 하는데 어릴 땐 그런 게 싫잖아요. 그래서 두 번째 줄에 앉았어요.”
-초등학교 시절엔 어떤 타입의 아이였나요?
“그냥 전형적인 여자애.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고요. 선생님이 귀여워하고 약간 새초롬한 애였어요. 원피스 입고 학교 다니고….”
-‘건강미인’이란 수식어가 떠나지 않는데, 실제로도 건강한가요?
“지금은 건강한 편이죠. 특별히 나쁜 데는 없으니까.”
-그런 닉네임이 줄곧 따라다니면 좀 부담스럽지 않나요?
“건강이라는 게 꼭 몸이 건강하다는 것만 의미하진 않잖아요. 저는 멘탈릭(mentalic)한 건강도 매우 중요시해요. 그래서 오히려 더 건강해지고 싶은 쪽이죠.”
-식성은 어때요?
“크게 안 가리는 편인데요. 20대에는 육류 위주로 먹고 곡물 섭취를 거의 안했던 것 같아요. 육류, 채소류, 해물, 과일 등을 좋아했죠.”
-뭐, 다 좋아했네요.
“다 좋아했죠. 그런데 지금은 육류보다 채소류와 곡류를 많이 먹으려 해요.”
그녀의 식성과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SBS 제작본부 드라마총괄 CP로 있는 운군일(52) 국장이 몇 년 전 어느 월간지에 쓴 글에 김혜수의 어릴 적 식성이 나온다. 운 국장은 ‘고교생 일기’ ‘사랑이 꽃피는 나무’ ‘순심이’ ‘꿈의 궁전’ 등을 연출했다.
‘김혜수. 그렇다. 그녀는 좋은 말로 하면 글래머고 조금 짓궂게 말하면 한 몸집 하는 여자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름답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일부러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 지금 막 잡아올린 등푸른 생선의 파드닥거림 같은 싱싱함에 있다. 필자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배화여고 1학년이던 1988년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집 인근에 있는 고깃집에서 만났다. 이미 중3때 영화 ‘깜보’로 성인역을 해냈던 그녀인지라 필자 또한 조금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필자의 긴장은 몇 분 지나지 않아 사그라졌다. 등심구이 3인분을 아주 맛있게 먹어치우는 그녀의 소탈한(?) 먹성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쁘고 친근하게 느껴졌는지…(하략)….’
등푸른 생선의 파드닥거림 같은 싱싱함
-많이 먹으면 살이 팍팍 찌는 체질인가요?
“음, 잘 찌지 않고 잘 안 빠지는 스타일이에요. 어릴 땐 나이들면 찔 거라 염려했는데 다행히 많이 찌진 않았죠. 지금은 예전보다 좀 빠졌죠.”
-그런데 외부에 알려진 키와 체중이 맞긴 맞나요?
“얼마로 알고 계시죠?”
-169cm에 50kg.
밝은 이미지의 김혜수지만 그동안 두 차례 슬럼프에 빠졌었다고 한다.
-60kg?
“하하하, 절대 아녜요. 이번 영화 찍을 때 50, 51kg, 지금은 52kg쯤 돼요.”
-신체 사이즈 좀 물어봐도 됩니까?
날씨가 덥다보니 별 질문을 다한다.
“물어보는 사람 없었는데…정확히 몰라요, 저도. 매일 재보는 게 아니니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스트레스 없이 먹는 스타일이죠?
“스트레스는 안 받는 편인데요. 어릴 때 너무 무분별하게 먹었다 치면 지금은 그렇지 않죠. 이왕이면 기름지거나 당분이 많은 건 피하죠. 제 좋은 식습관 하나가 패스트푸드 안 먹고 군것질 안 하는 거예요. 끼니마다 참 잘 먹는 편이에요. 라면, 탄산음료 등은 좋아하지 않고….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굳이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요.”
-다이어트 해본 적 있어요?
“당연히 해봤죠. 다이어트 안해봤다면 사람이 아니죠. 몇 번이라 셀 순 없는데, 고등학교 땐 여학생들이 한창 통통해질 때잖아요. 과자도 많이 먹었어요. 그땐 주위에서 ‘적당히 먹어라’ 하면 강요에 의한 형식적 다이어트를 했죠. 20대엔 다이어트를 거의 안했어요. 진짜 마음껏 먹었죠.
최근엔 다이어트를 하죠. 영화나 화보, CF 촬영을 할 때 이왕이면 가장 좋은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죠. 내일 창백한 모습을 촬영해야 하는데 오늘 고기를 3인분 먹는 일은 없죠. 이젠 필요에 의한 다이어트를 하는 거죠.”
-자신보다 몸매나 체형이 좋다고 생각하는 연예인이 있나요?
“있죠. 많죠. 몸만 얘기하자면 이소라씨 몸매가 멋있죠. 좀 서구적이지만 상당히 이상적이죠. 마르거나 빈약하다는 느낌은 없지만 군살 없고 팔다리 길고 어깨 넓고…. 저는 어깨가 좀 넓은 여자가 좋아요.”
-‘건강미인’ 이미지가 혜수씨의 연기 변신이나 관객의 영화적 상상력을 끌어내는 데 제약이 된다는 생각은 해봤나요?
“그럼요. 이번 영화를 예로 들어 보죠. ‘지수’가 참 화려하잖아요, 비정상적으로. ‘지수’의 외적인 이미지를 결정할 때 처음에 제가 꽤 반대했죠. ‘김혜수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평소에도 참 화려한 여자다’는 모든 이의 선입견, 그런데 이런 선입견이 참 크더라고요. 또 ‘김혜수는 돌출행동을 즐긴다’는 것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실은 저는 상식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이미지가 굳어져 있는데 캐릭터가 화려하면 캐릭터를 보여주는 데 있어 오히려 김혜수이기 때문에 방해가 될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 문제를 놓고 감독님과 참 오래 얘기했는데 그럼에도 결국 제가 수긍했던 건 영화 전체적인 비주얼의 컨셉트 안에서 감독이 원한 ‘지수’의 이미지는 공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돌출돼 있는 여자, 그리고 거기 나오는 모든 인물들과 충돌하는 인물이란 점 때문이에요. 영화 개봉 때까지 조마조마했어요. 저는 영화를 위해 연기를 한 건데 관객들 중엔 분명 ‘지수’의 이미지가 김혜수의 취향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요.”
“이소라 몸매 멋있다”
-닮고 싶거나 존경하는 연기자는요?
“모델은 없어요. 어릴 땐 만들어보려 했는데 지금까지 없는 걸 보면 모델이라는 게 중요한 것 같진 않아요. 좋아하는 배우들은 있는데 그들이 곧 저의 모델은 아니죠.”
-스스로 연기파 배우라고 생각하나요?
“연기파를 강조한 적도 없고 연기파라고 내세울 만한 작품도 없죠. 그렇지만 저는 꽤 진지하고 성실하게 연기하는 배우인 것만은 맞아요. 남들이 인정해주건 아니건 저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해요.”
-친하게 지내는 연기자는 누구누구죠?
“영화배우 황정민, 송강호. 그러곤 없는 것 같은데요, 하하.
-다른 연기자들이 기사 보면 섭섭해할 텐데….
“개인적으로 친분관계는 없지만 호감을 가지는 사람이 몇 있긴 하죠.”
-탤런트 이나영(25)씨가 ‘김혜수 언니를 좋아한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나영이는 제가 정말 예뻐하고 아끼는 후배죠. 걔는 제 나이 또래답지 않게 자기 인생을 고민하며 연기자로서 진지하게 살아가는 태도가 돋보여요.”
-토크쇼인 ‘김혜수의 플러스 유’를 100회 진행한 소감은?
“가장 소중한 경험은, 저도 꽤나 타인에 대해 선입견을 안 가지려 노력하는 편인 데도 그런 선입견을 스스로 발견해가면서 결국 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는 거죠. 연기자들은 사실 서로 잘 몰라요. 같이 작업해보지 않으면 인간 대 인간으로 알 기회가 드물죠. 하지만 토크쇼를 진행하면서 역시 인정받는 사람들에겐 분명한 어떤 이유가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런 사람들과 얘기할 기회가 주어진 것에 럭키(lucky)했어요.”
-지금까지 한 드라마와 영화, CF가 모두 몇 편인지 기억하세요?
“모르죠. 영화는 특별출연이나 카메오 출연을 제외하면 15∼16편이고 드라마는 미니시리즈 10편, 연속극 10편, 단막극 10편쯤 되는 것 같은데요. 연극은 1편. 연기한 햇수로 보면 많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담배는 안 피우나요?”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불쑥 기자에게 담배를 권한다. ‘LARK’다. 불도 붙여준다. 1회용 라이터. 라이터에 ‘선녀와 나무꾼’이란 업소명이 적혀 있는데 업태(業態)는 알 길이 없다. ‘얼굴 없는 미녀’의 ‘지수’는 담배를 끊임없이 피워댄다. 김혜수는 “평소 하루 2개비 정돈데 이번 영화 하면서 좀 많이 피운 것 같다”고 했다. 흡연을 시작한 건 대학시절. 술은 마시지 않는다.
스타와의 ‘동반 끽연’이라…기분이 삼삼하다.
-데뷔 이후 한 번도 스타덤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데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저는 특히 스타를 동경하거나 목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부담스럽지도 않고 자부심이 있지도 않아요. 그런데 연기자로서 분명히 벗어나야 할 건 있는 거죠. 연기할 땐 스타라기보다는 연예인으로서의 느낌이 커야 하는데 스타라는 게 방해가 되기도 하죠.”
토크쇼 진행, 선입견 허무는 계기
올해로 연기생활 19년째. 김혜수에게도 문득문득 허망한 감정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연기자로서 회의를 가진 적이 있나요?
“20대 초반, 빅 슬럼프가 있었죠. 철들어 자의식이 생기면서 연기자로서 제 나름의 방향이나 취향이 생겼는데, 어릴 때부터 연기생활을 해와선지 일에 대해 저와 다이렉트(direct)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없는 거예요. 연기 일은 좋았어요. 그렇지만 지금 내 인생이 대체 어떻게 굴러가는 건가, 지금 내가 내 인생을 주도하고 있는 건가 하는 회의가 들었던 거죠. 굉장히 회의적이었어요.”
-어머니가 매니저 역할도 했었죠?
“연기생활 처음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요. 매니저라기보다 보호자였죠. 어릴 땐 당연히 엄마가 보호자로서 동행했던 거고 엄마는 어른이고 나는 어리니까 일을 딜(deal)하는 사람들은 엄마와 얘기하는 거죠. 엄마가 전문매니저가 아니다보니 일의 성향보다는 그냥 아는 사람이 누가 일을 부탁하면 ‘저렇게까지 부탁하는데’ 하며 OK하는 데서 갈등이 조금씩 생기기도 했죠.”
-그런 어머니에게 불만도 있었겠네요.
“피크(peak)였던 때가 있었죠. 그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벌어진 상황이었는 데도 당시엔 저 개인적으론 벅차고 불만족스러웠어요.”
김혜수의 두 번째 회의는 20대 후반에 몰려왔다.
“우연한 기회에 연기를 시작해 그대로 성장하다보니 저의 사고나 취향이나 살아가는 방식을 일과 분리하기가 지극히 어렵더라고요. 저는 분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일은 일이고 나는 나라는 생각이었죠. 제가 연기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모습도 다르고 생각도 달랐을 거예요.
그러다 문득 제가 그 두 가지를 너무 엄격히 분리하려 한 것은 아닌가, 사실 따로 떼놓고는 얘기가 안 되는 건데…그런 고민을 했죠. 또 하나는, 일을 좀더 진지하게 해보고 싶은데 저를 바라보는 관계자들의 태도에 선입견이 있더라고요. 연기는 좋지만, 연기자 본인이 그냥 좋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연기를 원론적으로 배운 제가 과연 자질이 있는 건가 하는 직접적인 고민도 했죠.”
-지금도 그런 고민상태의 연장선인가요? 그 무엇이 결핍된 상태?
“그렇죠. 결핍도 있고 과잉도 있고. 해야 할 것도 있고 제가 아직 못한 것도 있고, 이미 해버렸지만 굳이 하지 않았어야 할 것도 있는 거죠.”
‘건강미인’에게 ‘결핍’이라…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확인받지 못해 괴로워하는 ‘지수’의 내면이 김혜수에게서도 느껴지는 듯하다면 과장일까.
그녀는 한때 집에서 나와 5년 정도 혼자 생활한 적이 있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했다. 동생들한테도 결혼하기 전에 혼자서 지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몸만 떨어져나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케어(care)할 수 있는 정신적 무장이 된 독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독립한 이유는 뭐죠?
“여러 가지죠. 일단 일과 생활을 분리하고 싶었고. 또 혼자 있을 때 제가 어떤 존재일지 궁금했어요. 얼마나 부실한가 혹은 강한가 혹은 얼마나 강해져야 하나, 제가 제 또래의 다른 여자들에 비해 일상적으로 어떤 점이 결여돼 있나, 그런 것들에 대해 많이 배웠죠.”
-직접 요리할 때도 있나요?
“잘 하죠. 별것 다해요. 혼자 살 때 취미가 된 건데 동생들이나 친구들, 일하는 동료들이 뭐 해달라 그러면 뭘 막 해요. 요리책 보고 정교하게 하는 스타일은 못 되는데 그럴싸하게 나와요.”
-그렇게 막 하는 요리의 제목은 대체 뭡니까?
“제목은 딱히 없죠. 그렇다고 라면에 달걀 푸는 수준은 아녜요. 요리가 꽤나 창의적인 아이템이잖아요. 밖에서 먹어봐서 맛있으면 대충 감으로 어떤 재료들이 들어가는지 선별해요. 그러곤 그걸 비슷하게 만들어보고 약간 업그레이드하는 거죠. 녹찻가루가 몸에 좋다고 하면 그걸 요리에 활용해보기도 하고….”
김혜수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동안의 배역이 대부분 밝고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캐릭터다. 그렇다보니 비슷한 이미지의 반복이란 평도 나오고, 김혜수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별로 없다는 말도 회자된다. 그녀의 생각은 어떨까.
“아니 뭐, 객관적 사실을 아니라고 하면 안 되겠죠. 10대에 데뷔해서 주로 20대에 연기를 많이 했는데 대표작을 염두에 두고 하진 않았어요. 그래서 대표작이 없는 게 배우로서 초라하다거나 핸디캡이라 생각지도 않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때는 창의적인 사람들 틈에서 창의적 사고로 자극받는 게 제겐 가장 큰 의미였어요.
그러나 최근들어 다른 고민이 생겼죠. ‘좋다, 그때는 나의 가장 아름다운 청춘기였다. 내가 외적으로 가장 빛나고 뇌세포가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가장 많은 자극을 받고 또 영향을 줄 수 있을 때였다. 그런데 나는 과연 창의적인 사람들 틈에서 창의적 자극을 받은 것에만 만족할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든거죠. 그게 제 황금기의 전부라 생각하면 나중에 나이들어 약간은 저 스스로 억울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가장 애착이 가는 출연작은 뭡니까?
“특별히 애착 가는 작품은 없어요. 다 그래요. 남들이 ‘너 이 영화 왜 했니’ 해도 제겐 다 소중해요. 왜냐면 분명히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이 있으니까.”
-관객 반응이 가장 좋았던 영화는요?
“모르겠는데요. 글쎄, ‘닥터봉’? ‘신라의 달밤’ 같은 편안하고 재밌는 영화?”
-최악의 출연작은요?
“최악의 작품? ‘마포무지개’란 드라마가 있었어요. 1992년에 방송된 드라마인데 물론 제가 출연을 결정한 건 아니죠. 엄마랑 MBC랑 얘기해서 결정했죠. 정말 하기 싫었어요. 그리고 그 작가를 되게 싫어해요.”
-왜요?
“취향이죠. 세태풍자 코믹극을 쓰는 작가였는데 개인적으로 코믹극에 끌리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세태풍자라는 단서를 달았으면 분명히 세태를 풍자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한 거죠. 그런 게 너무 싫었어요.”
-연기를 참 잘한다고 생각하는 국내 여자 연기자를 들라면?
“많죠. 그런데 같은 배우가 늘 잘하는 건 아녜요. 왜냐면 작품에선 배우가 감독과 캐릭터와 일으키는 화학반응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런 것들이 잘 매치돼야 연기가 돋보여요. ‘장화홍련’에서의 염정아씨, ‘해피엔드’에서의 전도연씨 연기가 좋았어요. 전도연씨는 작품마다 열연하는 연기파로 알려져 있지만 가장 빛나는 연기를 한 작품은 ‘해피엔드’인 것 같고, 염정아씨는 과거 드라마를 같이할 때부터 ‘연기를 잘하는구나’ 했었는데 ‘장화홍련’에서는 정말 잘하더라고요.”
김혜수의 목소리는 참 곱다. 대학시절 기자는 그녀가 불렀던 ‘아름다운 세상’이란 노래를 녹음한 뒤 거듭 들었던 적이 있다. ‘아름다운 세상’은 그녀가 출연한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에 삽입된 곡이다. 지금 가사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무척 맑고 깨끗했던 느낌만은 생생하다.
-노래한 적 있죠? ‘아름다운 세상’
그녀가 잠시 아연해진다.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아세요?”
-가사를 잊었는데 한 소절만 불러주세요.
“어머, 제가 왜 노래까지 해야 돼요?”
-하기 싫어요?
“그럼요.”
-그러지 말고 조금만 해줘요.
“하하하, 싫어요.”
출출한 모양이다. 김혜수가 치즈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주)아이필름 관계자는 난감한 눈치다. 약속한 2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할 건 마저 해야지. 초조함을 눈치챘음인지 김혜수는 친절하게도 다음 스케줄을 1시간 미루라고 매니저에게 말한다.
‘바람난 가족’과 ‘장희빈’
김혜수는 2002년 11월 영화 ‘바람난 가족’과 KBS 2TV 특별기획드라마 ‘장희빈’의 겹치기 출연 문제로 적잖이 마음고생을 했다. 제작사인 명필름의 제안으로 ‘바람난 가족’에 먼저 캐스팅된 그녀가 ‘장희빈’에도 출연하겠다고 밝히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 그녀는 “장희빈은 꼭 해보고 싶은 배역”이라며 두 작품 모두에 출연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명필름측은 영화와 대하사극을 겹치기로 촬영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김혜수 포기’ 의사를 밝히고 5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이 문제는 김혜수가 ‘바람난 가족’의 계약금을 반환하고 명필름측이 소송을 취하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난을 감수해가면서 그녀가 선택한 ‘장희빈’은 1986년 ‘사모곡’ 이후 16년 만에 출연한 사극임에도 시청률이 저조했다. 게다가 당시 네티즌들은 그녀가 장희빈역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요부가 아니라 아기돼지 같다’ ‘장희빈 얼굴이 달덩이 같다’는 등 직설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바람난 가족’ 대신 ‘장희빈’을 택한 데 대해 후회는 없어요?
“후회할 이유가 없죠.”
-전혀?
“후회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어요. 왜 ‘바람난 가족’을 포기하고 ‘장희빈’을 택했냐고 묻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저는 ‘바람난 가족’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엄밀히 따지면 ‘바람난 가족’은 제가 선택한 영화이고, ‘장희빈’은 제가 선택한 드라마죠. 두 작품이 같은 시점에 온 거죠. 그런데 문제가 생기자 명필름측이 제가 둘다 하긴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김혜수가 계약을 위반하고 드라마를 선택했다’는 보도자료를 돌렸죠. 황당했어요. 게다가 명필름측은 젊은 영화감독들의 이름으로 또다시 언론플레이를 했어요. 영화에 캐스팅한 배우를 빼가는 방송사에 분개한다는 비난성명을 낸 거죠. 지금도 생각하면…화가 나요.”
김혜수의 목소리 톤이 최고조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 대신 ‘바람난 가족’의 주연을 맡은 문소리는 이 영화로 2003년 스톡홀름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과 2004년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대타가 홈런 친 격이니 국내에서 1993년(영화 ‘첫사랑’)과 1995년(영화 ‘닥터봉’)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데 그쳤던 김혜수로선 아쉬울 법도 하다. 그녀라고 욕심이 없을까.
-국제영화제에서 상 받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즉각적으로.
“없어요. 주면 고맙죠. 저는 상을 목표로 삼은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물론 상을 받는 건 또다른 감동이죠. 제대로 일하고 다수에게 객관적으로 인정받는 건 좋죠. 그럼에도 상을 받고 안 받고가 제 인생을 좌우할 순 없어요.”
답변이 단호했다고 느꼈는지 한마디 덧붙인다. “뭐, 상에 초연하다, 이건 아니고요.”
“외교관 되고 싶었다”
-인기라는 게 뭐라 생각합니까?
“음, 시대나 상황에 부응하는 호감도?”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그냥 달콤한 허상. 누릴 때의 달콤함은 모든 이성과 감각을 마비시키죠. 인기를 얻는 사람이나 보태주는 사람들 모두 달콤한 나락으로 빠지는 경향이 있어요.”
선문답 같은 질문과 답변이 한동안 이어지는데, 김혜수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앗 뜨거!” 두 개째 치즈샌드위치를 무심코 집어들다 손을 살짝 데인 모양이다. “…죄송해요.”
연기자는 늘 불안한 위치에 있게 마련이다. 김혜수에게도 더 젊고 더 예쁘고 더 연기 잘하는 후배들이 자신의 뒤를 쫓는다는 부담감이 있을 법하다.
“제가 예민하지 않은 건지, 현실감각이 없는 건지…어쨌든 지금은 어쩔 수 없잖아요. 중요한 건 제가 제 자리에서 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한다는 거죠.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는 더욱 그럴 거고.”
연예인이 되지 않았다면 ‘평균인(平均人)’ 김혜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실 우리는 누구나 비슷하게 인생을 시작하지 않던가.
“저도 그 생각 하거든요. 최근에도 한 적 있어요. 저 원래 외교관이 되고 싶었어요. 고교시절 외무고시도 알아보곤 했어요. 그런데 평범하게 살았어도 외교관은 안 되거나 못 됐을 것 같고, 그냥 직장생활 하다 결혼하면서 사표 쓰고 주부가 되어 아기 셋 낳고 육아와 가사에 전념하고 있을 것 같아요. 제겐 그런 성향이 다분해요.”
-연기자가 된 걸 후회해본 적 있나요?
“이미 돼버린 걸 후회하기보다는 제가 연기하면서 놓치지 않고 해야 할 것들을 꾸준히 한다는 게 중요하죠. 연기가 저의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전부라곤 생각지 않아요. 그러면 제가 힘들어져요.”
신중한 면모를 지닌 현실주의자의 대답이다.
-자신이 싫어질 때는 어떤 때인가요?
“제 능력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그것을 뛰어넘을 가능성 또한 알면서도 방법을 찾지 못할 때.”
-그럴 땐 어떻게 합니까?
“내버려둬요.”
김혜수는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89학번. “대학시절을 아주 잘 보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녀는 대학 3학년 때 첫사랑을 했다. 과 선배였다. 2년8개월간 사귀다 결국은 헤어졌다.
그녀는 모범생은 아니었다. 강의도 많이 빠졌고 과제물을 안 한 적도 있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고 관심 있는 것들, 이를테면 시나리오 작업, 편집, 영화 실습은 맘껏 해봤다고 한다.
김혜수는 대학원도 졸업했다. 성균관대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학을 전공했다. 우연찮게도 기자 역시 같은 대학원을 나와 그녀와는 동문인 셈이다.
2002년에 졸업한 그녀의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매체변화 발전에 따른 연기자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변화.’ 난해한 제목이다. 스크린, TV, 연극무대, 인터넷 등 각 매체별로 연기자의 역할이 달라진다는 내용이란다.
그녀는 2001년 한 학기 동안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에서 3학점짜리 과목을 강의하기도 했다.
-출석 제대로 안 했죠?
“제가 늦게 졸업한 이유 중 하나가 결석 때문이에요. 한 교수님이 세 번 이상 결석하면 무조건 F학점을 줬는데 강의시간이 2년 내내 녹홧날과 겹쳤어요. 결국 F 받고 교수님께 빌고 다시 강의 듣고 그랬죠.”
-5학기짜리 특수대학원이어서 다양한 경력을 지닌 사람들을 접했겠네요.
“연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닌 일반인을 만나는 좋은 창구가 됐죠. 그들로부터 새로운 에너지를 받는 게 좋았어요.”
-같이 강의 들은 학생들이 무척 행복했을 것 같은데…
“꼭 그래보이진 않던데요.”
계속 치즈샌드위치를 먹던 그녀가 별안간 캑캑거린다. 사레가 들린 것이다. 아까는 ‘간식의 여왕’이 아니라더니…. 잠시 후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툭 던진다. “말씀하세요.”
-공부를 더하고 싶은 생각이 있나요?
“평생 학생이고 싶어요. 학구파라서 그런 건 아니고. 학위가 탐나지도 않고. 그냥 학교 가는 게 좋아 평생 학교 언저리를 돌까 해요. 마케팅과 사진을 배우고 싶어요.”
“평생 학교 언저리 돌고 싶어”
김혜수는 3남2녀 중 둘째다. 알려져 있듯 네 살 아래 남동생 동현씨도 탤런트로 활동중이다.
-동생한테 가끔 연기 코치도 해주나요?
“본인이 원하면요. 가끔 물어볼 때가 있어요.”
-동생이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하세요?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편이죠. 처음엔 ‘끼’에 의존하더니 최근엔 연기를 진지하게 하려는 태도로 바뀐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태도를 가졌다고 해서 갑자기 연기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시간이 필요하겠죠.”
-스캔들이 거의 없는 비결이 궁금한데요.
“스캔들이 없죠. 저는 스캔들이란 말을 싫어해요. 추문이란 뜻인데 제가 뭐 범법자도 아니고…. 가십은 가끔 있었죠. 상대가 포커스를 받을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다뤄지지 않거나 비껴가거나.”
누드촬영 제의, “받은 적 없다”
-결혼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나요?
“일부러 생각 안 하는 건 아니고요. 별 생각이 없어서 내버려두고 있어요.”
-독신도 고려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건 아닌데 지금은 철이 안 들어서 그런지….”
-사귀는 사람이 있나요?
“있어도 있다 그러겠어요? 얘기 안하죠.”
민감한 질문에 슬금슬금 빠져나가는 것도 수준급이다.
-첫사랑과는 왜 헤어졌나요?
“헤어질 만하니까 헤어졌겠죠.”
-그 선배가 연예인은 아니죠?
“연예인 사귄 적 없는데요.”
-어떤 남성이 마음에 들죠?
“정해진 유형은 없어요. 그냥 정서적으로 통해야죠. 개성이나 스타일은 달라도 상관 없지만 제게 자극을 줄 순 있어야겠죠.”
여자들에겐 결혼을 하지 않고도 아이는 길러보고 싶어하는 성정(性情)이 종종 있다.
-아이를 길러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그런 생각은 하죠. 결혼에 대해선 구체적인 생각이 안 드는데 아이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에선 모순이죠.”
김혜수는 네티즌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누드집을 내면 가장 잘 팔릴 것 같은 연예인으로 꼽힌 바 있다.
-누드 촬영 제의를 받아본 적이 있나요?
“없어요.”
-제의가 온다면?
“그래도 누드 사진은 찍고 싶지 않아요.”
-본인이 간직하기 위해 찍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나요?
“그건 그럴 수 있겠죠.”
화제를 시사쪽으로 돌렸다.
-TV뉴스나 신문을 자주 봅니까?
“보죠. 뉴스를 거의 다 봐요. 하하하, 그런데 우리집 TV 안 나온 지 지금 열흘째예요.”
-집이 섬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요?
“TV 화면이 중첩돼서 불분명하게 나오더라고요. 우리 집에 기계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수리를 의뢰했는데, 오래된 TV인 데다 휴가철이라 부속품 도착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네요. 오늘 고쳐요. 그래도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뉴스를 볼 수 있으니까.”
-유영철 사건을 어떻게 생각해요?
“국민정서에 쇼크를 준 충격적인 사건이죠. 국민을 생각한다면 정말 공개할 내용만 빼고 언론의 취재경쟁에서 파생되는 뉴스들은 공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궁금해서 뉴스를 보긴 하지만 볼 때마다 쇼크를 받으니까 보기 전부터 마음을 다잡아야 할 정도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