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디자이너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업체를 운영하며, 책을 집필한다. 분초를 쪼개 써야 하는 바쁜 일상 속에도 이카트리나뉴욕의 디자인 디렉터로 매일 핸드백과 액세서리를 디자인한다. 디자이너여야만, 디자이너의 창조성과 열정을 가져야만 그 외의 다른 모든 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씨는 7월1일부터 홍익대가 운영하는 국제디자인트렌드센터(IDTC)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도 맡았다. 디자인 관련 연구 사업과 외부 컨설팅 등을 책임지는 자리다. 대외적으로 활동할 일이 더 많아지겠지만, 그는 “역시 디자이너로서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교수, 기업인, 작가 등 여러 직함을 갖고 있지만 이 캐시 연주씨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건 ‘디자이너’로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일을 할수록 지루했어요.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싶다’는 바람이 점점 커져갔지요.”
스물다섯 살의 혈기 방장한 젊은이는 안정 대신 도전을 택했다. IBM을 나와 단돈 600달러를 들고 뉴욕으로 떠난 것이다. 이씨는 아직도 뉴욕행 비행기에 오르던 날을 선명히 기억한다고 했다. 대학 시절 MIT와 하버드대에서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수료한 경력, 각종 인턴십 활동 등으로 빼곡히 채운 이력서와 정성들여 준비한 포트폴리오를 보며 “뉴욕도 나의 재능을 알아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출신 지역으로 보나 전공으로 보나 ‘디자인의 변방에서 온 동양 여성’에 불과하던 그는 패션업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생계를 위해 그림 한 장에 20달러씩 받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티다 마침내 입사한 글로벌 의류 브랜드 갭(Gap Inc.)에서 그에게 맡긴 일은 강아지 용품 디자인이었다.
“강아지끈, 강아지옷, 강아지밥그릇 같은 걸 만들었지요(웃음). 창의적인 작업도 아니었어요. 갭의 의류 라인에서 개발한 사람용 디자인을 강아지에게 적용시키는 일이었거든요. 처음엔 실망스러웠지만, 세계 최대 규모의 기업인 그곳에서 일하며 많은 걸 배운 것 같아요. 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디자인 산업이란 무엇인지 알게 됐으니까요.”
이씨는 자신이 로드 아일랜드 디자인 스쿨뿐 아니라 ‘갭 대학’도 졸업했다고 말한다. 파리의 입생 로랑이나 샤넬에서 디자인을 시작한 ‘트루 디자이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경영마인드를 갖춘 디자이너가 됐다는 뜻이다. 2년여 동안 ‘강아지 라인’을 디자인하며 능력을 인정받은 뒤엔 ‘사람의 영역’인 속옷 디자인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속옷과 더불어 홈웨어, 아이마스크 등을 디자인하며 잡화의 매력에 눈을 떴다. 그의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다. 이씨는 이 무렵을 “내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때”라고 회상했다.
직접 디자인한 이카트리나뉴욕 브랜드 가방 앞에 앉은 이 캐시 연주씨.
그의 디자인은 금세 입소문을 탔고, 오래지 않아 미국 의류 브랜드 ‘리즈클레이본’의 잡화 분야를 총괄하는 디자인실장이 됐다. 다음 자리는 캐주얼 럭셔리 브랜드 ‘앤 테일러’의 디자인 이사직이었다. 2003년, 그는 서른 살 임원이 되어 앤 테일러의 핸드백 등 가죽제품과 패션액세서리 디자인 및 생산을 총괄하는 책임을 맡았다. 먼 길을 돌아 마침내 디자이너로서 성공 가도에 오른 셈이다.
‘앤 테일러’에서 3년을 일한 뒤인 2006년 2월에는 자신만의 브랜드 ‘이카트리나뉴욕’을 론칭하며 독립했다. 브랜드 이름은 러시아 사상 최고의 여성 정치인으로 꼽히는 예카테리나 대제에게서 따온 것. 이 브랜드를 구입하는 여성들이 예카테리나 못지않은 자신감과 힘을 느끼게 하고 싶다는 뜻에서다.
현재 ‘이카트리나뉴욕’은 세계 98개 매장에서 판매되는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미국 유수의 백화점에 입점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롯데백화점 명품관 애비뉴엘, 부산 센텀시티 롯데백화점 등의 편집매장에서 판매한다. 미국의 패셔니스타 니콜 리치가 이 브랜드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파파라치 사진을 통해 여러 잡지에 소개되면서 ‘스타가 사랑하는 가방’으로 유명세도 탔다. 그러나 이씨는 이카트리나뉴욕을 소개할 때 늘 “이제 막 시작한 구멍가게”라고 말한다. 앞으로 뻗어나가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꿈은 이카트리나뉴욕을 명실상부한 글로벌 명품 브랜드로 키우는 것. 이씨는 “파리는 코코 샤넬이나 입생 로랑 같은 유명 디자이너 덕분에 ‘명품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다. 나도 이카트리나를 통해 미국의 품격을 한 단계 높이는, 미국 패션업계의 자존심이 되고 싶다”고 했다. “내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만큼 이카트리나를 성장시켜 한국의 디자인 역량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씨는 사업 시작과 동시에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다. 철든 이후 미국을 떠난 적이 없는 그가 한국행을 택한 것은 2005년 ‘앤 테일러’ 이사직에 있을 때 만난 한국인 사업가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 뉴욕과 한국에서 두 번의 웨딩마치를 울린 그는 이제 서울에서 ‘이카트리나뉴욕’의 미국 사업을 총괄 지휘하면서, 디자이너 교수 작가인 동시에 주부이자 18개월 된 딸의 엄마로 바쁜 삶을 살고 있다.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하느냐고 묻자 이씨는 “필요하면 밤을 새운다”며 웃었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를 보면 ‘1만시간의 법칙’에 대한 얘기가 나오잖아요. 한 분야에서 프로페셔널이 되려면 1만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고요. 저는 지금 그 ‘1만시간’을 쌓고 있어요. 제가 마흔이 되고 쉰이 될 때까지 지금과 같이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분명히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