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이 뭔가요?” “자유로운 거지요.” “어떨 때 자유를 느낍니까?” “혼자 있을 때요.” “그럼 언제든지 행복할 수 있겠네요. 혼자만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자식이 있는데 어떻게 그래요. 일해서 먹여 살려야지요.”
- “그렇다면 일이 없고 가족이 없어지면 자유롭고 행복해질까요? 노숙인과 직장인 가운데 누가 더 자유로울까요?”
이날 강의 주제는 ‘행복론’. 이야기는 “행복이란 무엇인가”에서 출발해 “자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과연 헌법상 보장된 직업 선택의 자유·거주이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원치 않은 일을 해야 하고, 원하는 집에 살 수 없는 현실에서 헌법 조문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까지 거침없이 이어졌다. 계속되는 질문과 대답을 통해 교수와 학생은 함께 ‘행복’의 의미와 방법을 찾아가고 있었다.
‘성동자활 인문대학’ 학생들은 낮 동안 ‘자활근로’에 참여하는 기초생활수급자 혹은 차상위계층 사람들. 간신히 중학교를 마친 이부터 대학을 졸업한 이까지 학력 스펙트럼은 넓다. 하지만 모두 저소득층으로 그동안 생계에 매달리느라 ‘공부’에서는 멀리 떨어진 채 살아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고된 일과가 끝나자마자 저녁도 거른 채 이곳으로 달려오는 것은 이례적으로 보인다.
자활사업을 통해 특수학급 보조교사로 일하는 학생 강미자(47)씨도 “내가 이곳에서 이런 수업을 받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고 했다. 그는 이날 저녁으로 김밥 한 줄을 먹었다. 일주일에 두 번 ‘대학’ 강의가 있는 날 저녁 메뉴는 언제나 김밥이다. 하지만 지난 5월 강의가 시작된 뒤부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결코 수업을 빠지지 않았다.
“처음엔 호기심에 왔어요. 대학교수님들이 역사, 철학, 문학, 예술을 가르쳐준다니까 궁금하더라고요. 막상 강의를 듣고는 생각보다 훨씬 좋아서 계속 나와요. 교수님 말씀이 우리 수업이 대학교 1학년 학생 수준이래요. 하지만 어려운지는 모르겠어요. 수업을 통해 뭘 배운다기보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세상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우 교수는 2005년부터 노숙자, 빈민, 재소자 등을 대상으로 인문학을 강의해온 철학자다. 단발성 특강이 아니라 보통 12주짜리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강의 주제는 정체성, 삶과 자유, 자아실현, 욕망, 개인과 사회 등. 그동안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경제적 지원이 급한 사람들한테 인문학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였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똑같은 얘기를 듣겠지요. 제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그분들의 인격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인문학은 삶의 조건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인간의 품격과 관련된 것이에요. 경제적 성과 이전의 문제지요. 한 사람이 가난하다고 해서 인문학을 공부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를 ‘비인간’으로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우 교수가 소외계층을 위한 인문학 강의를 시작한 것은 미국의 ‘클레멘트 코스(Clemente Course)’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작가 겸 사회평론가 얼 쇼리스는 1995년 뉴욕 남동부에 노숙인, 마약중독자, 재소자, 전과자 등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교육과정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었다. 교육과 인문학에서 소외된 채 살아온 이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철학과 문학을 배웠고, 이것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가난한 이들의 인간성을 가장 적절하게 존중하는 방식은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시민으로 대우하는 것”이라는 얼 쇼리스의 주장이 널리 알려지면서 2005년 우리나라에도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교육과정 ‘성프란시스 대학’이 문을 열었다. 우 교수는 이곳에서 노숙인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며 처음 ‘거리의 인문학’에 뛰어들었다.
“저는 철학자로서 늘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한 사상이며, 이념이다. 우리 삶에서는 우리 자신이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기반 위에서 다른 사람의 삶도 똑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나인 우리, 우리인 나’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는 게 인문학의 출발점이라고 믿어왔지요.”
노숙인에게 철학을 가르치던 첫 학기에 그는 학생들에게 평소 생각을 말했다. “인문 정신의 요체는 내 삶의 존엄을 아는 거고, 나만큼 존엄하고 동등한 가치를 가진 타자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그때 자신의 강의를 귀 기울여 듣던 한 학생의 대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저를 바라보면서 ‘세상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어요’라고 하더군요. 그때 왜 이 수업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게 하는 것, 오랫동안 사회에서 외면받아온 이들에게 자신과 공동체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 인문학의 사명이라는 걸 알았지요.”
실천하는 인문학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복지 정책도 언제나 배고픈 이들에게 빵과 일자리를 주는 방향으로 흘러왔다. 하지만 우 교수는 “가난한 이들을 살게 하는 것은 먹을거리가 아니라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얼 쇼리스에 따르면 빈곤의 두 가지 특징은 결여와 억압이다. 돈의 결핍과 교육의 결핍은 필연적으로 일생 동안, 그리고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는 영속적인 패배를 낳는다. 위압에 대한 복종, 힘 있는 사람에게 받는 멸시도 가난한 이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그 과정에서 억압된 분노는 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하게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의든 아니든 체념에 가까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면서 주체의식을 상실하게 돼요. 이건 노숙인이나 재소자도 마찬가지예요.”
그가 소외된 이들에게 인문학 교육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난 자체는 경제적인 문제일지 몰라도 그것을 겪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 교수는 “가난한 사람들이 폭력과 온갖 적대적인 사회 조건에 포위된 채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소통하는 방식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타자와 소통하고 삶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자존감을 확보해야 한다. 인문학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고 했다.
인문학 강의가 현실과 동떨어진 지적 문화적 허영으로 흐르게 되지는 않을까. 그는 강의 내내 학생들과 함께 ‘문답’하는 방식을 통해 이런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수업을 듣는 분들은 삶의 연륜이 남다릅니다. 굉장히 깊고 철학적인 주제도 우리 삶의 문제로 바꿔놓지요. 살아온 역정을 어렵사리 한 쪽 정도 써 와서 부끄럽게 읽어 내려가는 순박함, 시 몇 줄 써 놓고 즐거워하는 천진함, ‘교수님, 철학 주제를 가지고 우리 이야기를 하고 그걸 교수님과 함께 정리하니까 결국 우리가 살아온 삶이 철학이네요’라고 하는 당당함을 보며 인문학 수업의 힘과 희망을 느꼈어요.”
그는 노숙인 강의를 거쳐 서울 노원구 상계동 임대아파트 주민, 관악구 난곡지역 주민 등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의를 계속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좀 더 체계적이고 지속가능한 프로그램을 짜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경희대 총장도 대학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그의 의견에 공감했다. 이 덕분에 2007년 경희대에는 문과대 교수를 중심으로 구성된 ‘실천인문학추진위원회’가 생겼고, 서울 및 수도권 3개 지역(노원, 관악, 수원)에서 ‘경희대 시민 인문학 강좌’를 열 수 있었다.
“경희대 교수를 비롯한 여러 인문학자가 강의를 맡아 문학, 역사, 철학, 예술을 가르쳤지요. 대학에서 연구와 교육 활동에만 전념해온 학자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제 경험에 비춰볼 때 이것이 연구와 교육 활동을 제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오히려 인문학의 연구 주제를 다양화하고 교육 활동을 풍성하게 해주지요. 가령 인문학과 민주주의, 인문학과 문화, 인문학과 시민사회의 윤리의식 등에 관한 연구 주제가 자연스럽게 개발될 수 있거든요.”
지속가능한 실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의가 사회 전반에 인문학적인 가치를 부활시키는 구실을 할 것이라는 점도 교수로서 의미 있는 부분이었다. 우 교수와 더불어 성프란시스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한 박남희씨는 인문대학 강사들이 공동 저술한 책 ‘행복한 인문학’에서 “(이 수업을 통해) 구제받은 것은 수강생들이 아니라 인문학 자체”라고 고백했다. 성프란시스대와 관악인문대학에서 글쓰기와 문학을 강의한 최준영씨도 “인문학 강좌의 가장 큰 수혜자는 인문학 그 자체인 셈이고 (우리 인문학자들은) 노숙인을 비롯한 시민인문학 수강생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됐다”고 했다. 우 교수 역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대학은 인문학자들이 교수, 연구원이 아닌 또 다른 자리에서 인문학의 가치를 펼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경희대의 첫해 프로그램이 끝난 뒤 이 성과를 바탕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에 지원을 요청했고, 2008년 강의 주체를 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로 확대 개편할 수 있었다. 우 교수는 이 센터의 상임위원을 맡아 커리큘럼 구성과 강의 등을 총괄 진행하고 있다.
경희대 시민인문학 강좌는 2008년 서울 및 수도권 15개 지역에서 열렸고, 올해는 서울 및 수도권 15개 지역과 더불어 서울지방교정청 산하 교도소에서도 진행 중이다. 이전에도 교도소 내에 인문학 강의가 마련된 적은 있지만, 대학이 참여하는 정규 과정이 생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상반기에 열린 1학기 과정과 9~12월에 열리는 2학기 과정을 모두 들은 재소자들에게는 경희대 총장 명의의 수료증을 준다.
우 교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당의 교육방식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고, 1970~80년대 야학과 노동자 대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긴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인문학 강의가 빨리 제자리를 잡는 것 같다. 경희대뿐 아니라 수도권 여러 대학과 전북대, 울산대, 제주대 등에서도 소외계층과 일반 시민을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걸 보면, 이제 우리의 인문대학은 초기에 벤치마킹했던 클레멘트 코스와 다른 우리만의 형태로 토착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특히 수강 대상이 노숙인, 빈민 등을 넘어서 일반 주민에게까지 확대된 것은 우리나라만의 특징이라고 한다.
우 교수는 “자신의 자녀가 임대아파트 주민 자녀와 같은 학교에 다니게 할 수 없다며 다른 학교로 배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사회,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작은 평수주택은 한구석에 몰아 짓고 담장을 치는 사회, 일용직 근로자의 쉼터가 들어서면 우범지역이 된다고 쉼터 건축을 반대하는 사회에서 인문학은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필요한 것 아닌가 ”라고 말한다. “겉으로는 물질만능주의와 배금주의를 경멸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앞 다투어 물질적 가치와 돈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인문학은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
“우리 대학의 인문학 프로그램이 널리 알려지면서 요새는 강남구 수서임대아파트 단지, 경동시장 상인회 등 다양한 곳에서 자기 지역에도 강의를 개설해달라고 요구해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점점 의미를 갖게 되는구나 생각하면 보람이 크지요.”
그가 이제 가장 고민하는 것은 이 프로그램을 어떻게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유지·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지난 4월 시작된 교도소 강의는 이런 고민을 더 깊게 하는 계기가 됐다. 우 교수는 프로그램이 열린 수도권 소재 4개 교도소(영등포, 안양, 의정부, 여주) 가운데 안양에서 재소자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학기 내내 학생들의 자세가 아주 진지했고, 수업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1학기 종강날 뒤풀이 자리에서 한 재소자가 ‘교수님 부탁이 있습니다’ 하더군요.”
“출소하면 만날 수 있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고 한다.“철학을 배우며 많은 것을 깨달았고 새롭게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얻었지만, 막상 사회에 나가면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게 될 것 같다”는 얘기였다.
교도소 강의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 한 교정위원은 그에게 “당장 변화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지금 교수님이 가르치는 재소자 25명 가운에 한 명이라도 재범이 2~3년 늦춰진다면 이 프로그램은 성공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두 이야기가 섞이면서 인문학이 과연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수업이 끝나면 다시 사회로 돌아갈 이들에게 철학 강의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됐다.
인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공동체
우 교수가 대안적 가능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관악인문대학 졸업생들이 뜻을 모아 운영하는 꽃가게 ‘꽃뜰-꽃피는 뜰’, 노원성프란시스대학 졸업생들이 함께 만든 천연비누 생산·판매업체 ‘자향-자연의 향기 : 건강지킴이와 들꽃지기’ 등의 공동체다. 이들은 인문학 교육과정이 끝난 뒤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모임을 만들어 인문학적인 가치와 삶을 연계할 수 있는 공동의 일자리를 만들었고 그것을 사회적 기업으로 키워가고 있다. 우 교수는 “이 모습에서 인문대학 프로그램의 나아갈 방향을 본다”고 했다. 인문학 강의가 끝날 때마다 졸업생들이 꾸준히 모이도록 동창회를 만들어주고, 그들의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대학에서 배운 인문학이 이들의 일상 속에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얼 쇼리스는 인문학 코스의 궁극적인 목적을 “가난한 사람들이 인문학을 통해 자존과 정치적 삶을 회복해 ‘위험한 시민’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목표는 빈곤을 종식시키고 가난의 서러움을 역사와 낭만의 영역으로 넘겨주고 빈민들을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다. 만약 이런 목표가 달성된다면 위험에 대한 질문은 바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시민이 위험하다는 의미와 똑같은 차원에서 빈민들이 위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참으로 힘 있는 시민이 될 것이다.”
우 교수의 꿈도 이와 같다. 그는 또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에 정직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정직하고, 세상일에 정직한 세상”을 꿈꾼다. 그 유토피아를 인문대학을 통해 실현하고 있는 그는 ‘행복한 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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