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호

희대의 독학자들, 길 위에 방을 만들다

버지니아 울프와 황진이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10-01-08 17: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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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또 남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리고 영원히 나 자신의 주인이다.
    • -버지니아 울프, ‘어느 작가의 일기’ 중에서
    희대의 독학자들, 길 위에 방을 만들다

    영화‘황진이’

    고등학교 시절 몹시 따분한 시간 중 하나가 고전문학 시간이었다. 텍스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거의 모든 시조의 주제를 ‘군주에 대한 충성’ 혹은 ‘자연합일’로 단순화하는 놀라운 교육 프로그램의 결과였다. 이제 와 다시 보면 윤선도의 시조가 얼마나 흥미진진하며, 바리데기 신화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교육지침 없이 자유롭게 요모조모 뜯어보는 고전 읽기가 얼마나 매력적인 지적 모험인지 알 수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재미없는 고전문학 시간에도, 정말 눈이 번쩍 뜨였던 때가 있었으니 바로 황진이의 시조를 배울 때였다. 황진이에 대해선 정확한 생몰연도조차 알 수 없다지만, 그런 자료의 빈곤함이 별로 아쉽지 않았다. 황진이의 시조는 400여 년의 시차를 가뿐히 뛰어넘어 철없는 여고생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冬至ㅅ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철부지 여고생의 눈에 비친 남성들의 시조는 하나같이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다. 그들의 시조는 부귀영화나 임금의 총애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속내를 감추기 위한 우아한 연기력으로 보였다. 말하자면 그 시조 자체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짐작하기는 좀 어려운, 매우 의뭉스러운 시조투성이였다. 안빈낙도(安貧樂道), 군주에 대한 충성, 자연합일(自然合一)… 아, 이런 따분한 주제들을 외우느라 졸음이 쏟아지던 고전문학 시간에 황진이의 시조는 얼마나 상큼했던지 가뭄의 단비 같았다. 그녀는 단 석 줄의 시로 자신의 아름다운 삶의 누드를 기탄없이 펼쳐 보였다. 숨기지도 꾸미지도 새침 떨지도 않으면서. 나는 이 한 작품으로 ‘시조의 힘’ 뿐 아니라 문학의 힘을 확인했고, 더불어 사랑과 예술의 힘에 대한 최고의 강의를 선물 받은 듯 오랫동안 뿌듯했다.



    한자어 없이는 ‘시공’ 자체가 불가능한 남성들의 시조와 달리 황진이는 아롱다롱한 우리말의 어감을 최대치로 길어올렸다. 시간과 공간의 벽을 뛰어넘어 현대 독자의 심장을 향해 곧바로 메다꽂는 엄청난 모던함으로 여고생들의 심금을 울렸다. 학생들뿐 아니라 시조시인들 사이에서도 곧잘 애송시 1위로 뽑히는 황진이의 이 시조로 인해 ‘고전문학사에는 왜 이렇게 여성 작가가 없나?’ 하는 불만이 일거에 날아갔다. 여성 작가가 거의 없다고 해도 전혀 기죽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황진이 덕분이었다. 황진이라면 교과서에 등장하는 작가들이 한꺼번에 덤벼들어 ‘시조 배틀’을 벌여도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욱이 남자는 이런 시를 쓸 수 없다는 본능적 확신이 들었다. 그건 내 안의 ‘여성성’을 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황진이는 학문과 예술과 사랑의 삼위일체를 실천하는 전방위적 자기계발의 여왕이었다. 유서 깊은 가문에서 나고 자란 남성 문인들처럼 어엿한 문집 하나 남기지 않았고, 그녀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한 일대기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영향력이 곳곳에 살아남아 현대인에게 강력한 문화적 파장을 뿜어내고 있다. 드라마와 소설과 영화로 끊임없이 리메이크되는 것만 봐도 황진이의 문화적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지식인 황진이

    그런데 혹시 황진이가 ‘우리 시대의 입맛’에 맞게 변형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화한 황진이의 텍스트들은 황진이의 ‘로맨스’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황진이를 일편단심 순정파로 그리는가 하면 팜파탈의 흥취가 물씬 풍기는 요부로 단순화하기도 한다. 철저히 시각예술 중심적인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황진이의 ‘문학’을, 그녀의 ‘소리’와 ‘글씨’를, 그리고 내면 풍경을 그려내기가 어려운 탓도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경향은 황진이의 ‘신분’에 초점을 맞추거나 그녀의 ‘불행’을 부각시키는 방식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탐구한 학문 세계나 예술 세계에 대한 조명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 극복의 스토리로 황진이의 삶을 이해하다보면 그녀의 작품에 대한 해석 또한 영웅 신화적 틀로 재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 예술가로서의 황진이, 지식인으로서의 황진이는 더 많은 조명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희대의 독학자들, 길 위에 방을 만들다

    지적 공동체 ‘블룸즈베리’를 통해 명망있는 문학가로 성장한 버지니아 울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여성 아티스트 중에 황진이와 ‘맞장’을 뜰 수 있을 것 같은 내공과 매력을 지닌 여성은 단연 버지니아 울프다. 버지니아 울프와 황진이. 이 두 사람은 당대에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들을 만들어낸 것은 ‘제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물론 끝없이 학문과 예술의 신기원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경전’이나 ‘권위’에서 우러나오는 지식에 기댄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탐구열과 끈질긴 독학의 힘이었다.

    그녀들이 ‘남성들의 엘리트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 특히 버지니아 울프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오빠들에게는 얼마든지 허락된 대학교육과 각종 엘리트 교육의 혜택이 자신에게는 돌아오지 않는 상황을 힘들게 견뎌내야 했다. 그 결과는 어떤가? 그녀들은 어떤 남성도 해내지 못한 독특한 문학세계를 일구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스승을 찾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제도와 정전(canon)의 시스템을 뛰어넘는 지식과 예술을 추구했다. 더욱이 두 사람 모두 ‘여성의 말하기와 글쓰기’가 철저히 억압되었던 상황에서 창작 활동을 해야 했다.

    현대시조의 대가 이병기 선생이 황진이에게 보낸 찬사를 보면 황진이를 향한 ‘팬덤(fandom·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또는 그러한 문화현상)’은 비단 여고생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병기 선생은 황진이를 통해 시조의 예술적 가능성과 시조의 현대적 부활 가능성까지 내다보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본 시조 중에는 이만큼 형식으로나 기교로나 구성으로나 잘 짜인 것을 못 보았습니다. 황진이의 시조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이 오륙 수에 불과해도 그 오륙 수가 정말 주옥같은 것입니다. 고금을 통해서 이만큼 완성된 작품이 없지요. 그 기교란 무서우니까. 흔히 보면 공연히 글자 수와 형식에 사로잡혀서 꼭 판에 박아낸 것만 같아서 염증을 내게 합디다. 그러나 400년 전의 황진이의 시조는 실로 완벽을 이룬 것이지요. 이 정도에만 이른다면 시조로서 표현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병기, ‘나의 스승을 말함’, 동아일보 1931년 1월29일자

    황진이의 몇 편 안 되는 시조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이토록 사랑받는 ‘공감의 원천’은 무엇일까? 황진이의 천재적 재능 덕이 크겠지만 그녀의 창작 환경에서도 뭔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황진이의 작품은 창작하자마자 바로 ‘청중’에게(혼자 ‘묵독’으로 책을 읽는 독자가 아니라 여럿이서 술을 마시며 시조창을 ‘듣는’ 무리) 실시간으로 감상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가 경험했을 창작의 공동체는 창작과 동시에 감상자의 반응을 곧바로 확인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감각적(황진이의 목소리와 시각적 이미지, 심지어 체취까지 공유하고, 더불어 술맛과 주변 사물의 촉각까지 함께 하는 총체적 감각의 축제를 만드는) 교감의 공동체였다.

    동시에 그녀는 이 책이 얼마나 팔릴까 하는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비상업적 텍스트를 자유자재로 창조했기에 어쩌면 독자와 출판사의 시선에 시달리고 흔들리는 현대의 작가들보다 훨씬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청자(聽者)의 반응이 곧바로 몸으로 느껴지니 창작과정이 더욱 혹독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녀의 글쓰기는 골방에 틀어박혀 자신의 내면을 토해내는 근대적 글쓰기와 근본적으로 다른 ‘소리의 글쓰기’였다. 고립된 근대인의 창작과 달리 ‘소통 지향적인’ (그래서 소수의 스타 지향적인 창작 환경과 구분되는 작가 지향적) 창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독자에게만 열린 ‘자기만의 방’

    황진이의 지적·예술적 공감의 공동체는 그녀가 만나온 수많은 남성 지식인이었다. 반면 버지니아 울프의 지적 공동체는 영국 지식인들의 사교 모임 ‘블룸즈베리’였다. 블룸즈베리는 1899년 가을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출발한 젊은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다. 블룸즈베리에서는 연애 관계를 시작하고 끝내는 기술, 아주 싫어하는 친구의 책을 거짓말하지 않고 칭찬하는 기술, 연루된 세 사람 모두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 삼각관계를 유지하는 기술 등 그야말로 ‘모두가 궁금해 하지만 누구도 감히 발설하지 않는 인생의 기술’을 자유롭게 토론하고 제안할 수 있는 느슨한 학술 공동체였다.

    희대의 독학자들, 길 위에 방을 만들다

    황진이의 뛰어난 예술적 성취는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황진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국악밴드 공연.

    아버지의 생일. 그는 오늘로 96세, 그렇지, 96세가 되셨을 것이다. … 그가 살아계셨더라면 나의 삶은 완전히 끝났을 것이다.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 글쓰기도, 어떤 책도… 상상할 수도 없다.

    -아버지의 생일,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 중에서

    딸들에게 정규교육 기회를 주지 않은 보수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버지니아 울프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고든 스퀘어로 이사를 가고 거기서 블룸즈베리의 지식인들을 만난다. 그녀는 블룸즈베리의 자유롭고 활달한 분위기에 매혹됐으며, 이 모임을 통해 화려한 지적 성장의 계기를 마련한다. 지독한 애증의 뿌리였던 아버지의 죽음 이후, 평생의 지적 자양분을 얻은 셈이다. 울프는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떤 글도 출판하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가 ‘공적인’ 글쓰기를 시작한 출발점이 됐다. 아버지의 죽음과 고든 스퀘어로의 이사, 블룸즈베리 활동은 울프에게 ‘나만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서곡이 되었다. 황진이의 창작 에너지가 ‘교과서 없이, 스승 없이, 친구들과 함께 놀기’였다면 울프의 창작 에너지는 ‘아버지의 통제 없이, 남자 눈치 보지 않고, 오직 자기만의 방 갖기’에서 나온 셈이다.

    그녀들의 고독은 ‘사람을 밀어내는’ 고독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 마음에 맞는 친구나 스승을 찾기 위한’ 고독이었다. 대중에게 알려진 버지니아 울프의 전형적 이미지는 ‘자폐와 우울과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 아티스트’지만 그녀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오히려 평생 동안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나고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아다니는 열정적 측면이 많이 발견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지음(知音)’의 벗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와 인연을 맺었다. 말년에는 프로이트와도 만났다. 그녀는 누구보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더불어 숨 쉬고 자 한 예술가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평범한 독자’의 창조적 읽기와 쓰기 능력에 대해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시각으로 분석했다. “나는 평범한 독자와 의견이 같을 때 즐겁다. 왜냐하면 난해함을 단련하고 학문을 교리화한 끝에 지니게 되는 문학적 편견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독자의 상식에 의해서 시적 영예에 대한 권리가 마침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울프는 지식을 대중에게 나누어주거나 타인의 의견을 정정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독서하는 사람, 즉 ‘평범한 독자’야말로 자신이 가장 교감하고 싶은 독자라고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의 눈은 감옥

    버지니아 울프는 단지 예술과 대중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대중 그 자체에서 예술성의 근원적 추진력을 찾아내려 했다. 대중의 공감이라는 개념은 그녀에게 상업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술의 동력’이자 보편적이고 예술적인 공감의 원천이었다. 여기에 독자를 향한 아첨이나 미디어에 대한 눈치작전은 낄 틈이 없다. 권위나 전문성에 호소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열망과 열정으로 글을 읽는 독자들, 그들의 아마추어리즘이 지닌 순정한 열정이야말로 전문가나 권위자가 흉내 내기 어려운 집단적 재능임을 버지니아 울프는 일찍이 감지했다. 그녀는 선구적인 ‘독자반응비평’의 대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어떤 보상이나 인정도 바라지 않고 그저 독서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버지니아 울프의 창작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할 제 쉬어감이 어떠하리.

    황진이가 평생 찾아 헤맸던 것도 단지 사랑을 나눌 연인이 아니라 서로에게 스승이자 친구가 될 수 있는 사우(師友)적 관계였다. 이사종과의 6년 계약 동거로 알려진 사랑의 도피도, 화담과의 절제된 우정도, 지족선사와의 원 나이트 스탠드도, 모두 그녀가 지음의 벗을, 친구이자 스승을 찾는 여정의 일부였다. 한편 버지니아 울프의 그 유명한 ‘자기만의 방’은 아버지의 엄격한 통제를 벗어나 창조한 ‘나만의 세계’였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의 꿈은 ‘고립된 내면’을 추구하는 1인칭 중심의 글쓰기가 아니라 독자-비평가-작가라는 삼중의 역할을 다중적으로 실현하는, 창조적 다중 인격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세계였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듯, 문학은 사유지가 아니라 국경과 전쟁이 없는 공유지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커다란 방, 책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 나 자신을 가두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독서의 평화에 몰두하기를 갈망한다. 고든 스퀘어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여성에게 ‘자기 세계’가 허락되지 않았던 시대에 태어난 버지니아 울프와 황진이. 그녀들에게는 끊임없이 ‘더욱 편안한 삶’에 대한 유혹이 있었다. 한번도 대학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버지니아 울프에게 영국의 명문 대학들이 ‘명예박사학위’를 제시하며 강의를 요청했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매번 거절했다. 황진이 또한 천하의 명기(名妓)였고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였으니 고관대작들의 러브콜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지상의 단단한 집’을 짓기보다 ‘길 위의 아티스트’가 되기를 갈망했다. 그녀들은 지상에 집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들이 가는 곳마다 예술과 학문이 살아 숨 쉬는 축제와 향연이 펼쳐질 수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의 눈은 우리의 감옥이에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우리의 새장이에요.

    -버지니아 울프, ‘쓰지 않은 소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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