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대표, 대선에 꼭 나오면 좋겠어요”
- “좋은 인간이 좋은 배우”
- 늘 일탈 충동 느껴… 2002년 크리스마스 추돌사고도 그 때문
- 다시 사랑이 찾아온다면? “바로 확! 그럼요”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건물 4층에 위치한 고현정 소속사 아이오케이(IOK)컴퍼니 사무실. 동생 병철씨가 회사 대표다. 1월12일 오후 3시 고현정은 환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았다.
“지난번엔 정말 죄송했어요.”
당초 고현정과의 인터뷰는 1주일쯤 전인 4일로 예정돼 있었다. 정치드라마 ‘대물’로 12월31일 열린 S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은 터라 시기도 적절했다. 그런데 수상소감 논란이 불거졌다. 일부 네티즌들이 “시청자에게 훈계조였다” “겸손하지 못했다”“오만했다”고 비판하면서 논란이 불거진 것. 인터넷 언론들이 이를 실시간으로 보도했고, 파문이 커져갔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고현정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곧바로 사과했지만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소나기는 피하는 게 상책. 결국 인터뷰는 1주일 연기됐다.
수상소감 중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부분은 “배우들의 연기를 시청률로 평가하지 말라”는 대목. 촬영 기간 감독과 작가 등 제작진과의 불편했던 관계를 해명하려고 꺼낸 이야기가 오해를 산 것이다.
당시 동영상을 찾아 다시 봤다. 수상소감을 말하는 고현정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고현정은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입술을 깨물며 애써 참는 듯했다.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기라도 하려는 듯 비장감이 잠시 흘렀다.
‘대물’촬영 기간은 약 4개월. 그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담당 작가가 황은경씨에서 유도윤씨로 바뀌고, 감독도 오종록 PD에서 김철규·조현탁 PD로 교체됐다. 고현정의 수상소감도 결국 이런 내부사정을 반영한 것일 터.
‘칭찬받고 싶었다’
꽤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기자와 마주앉은 고현정은 수상소감으로 논란을 빚은 데 대한 부담감이 남아 있는 듯했다.
“제가 잘못한 거 같아요…. 사실 저도 ‘대물’의 피해자라고 생각했거든요. 드라마를 촬영할 때 정말 패닉 같은 상황이 많았어요. 감독과 작가가 바뀌면서 6편 정도를 생방송처럼 찍었어요. 현장에서 대본을 받아 A4용지 2장짜리 연설문을 10분 만에 그냥 소화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고요. 다른 문제로 스태프가 와해될 분위기까지 갔었어요. 저도 사실은‘이러다 다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순간까지 갔었어요. 그러나 초기에 시청자들이 많이 사랑해줬기 때문에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스태프를 다독였지요. 사실 여배우가 할 몫은 아닌데, 제가 돼지고기를 못 먹는데도 불구하고 스태프를 삼겹살집에 데려가서 설득하기도 했죠. 막상 대상 수상자로 제가 호명되니까 상을 받아 기분은 좋았지만 이것저것 할 말도 많았고, 시간은 새벽 2시를 넘겼고….”
▼ 시청률 이야기는 왜 꺼낸 건가요.
(고현정은 시청률이 낮아도 배우의 연기가 좋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런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25%의 시청률이 계속 나왔기에 정말 칭찬받고 싶었어요. 배우는 물론 카메라·조명 감독님, 막내들까지 정말 고생 많이 했거든요.”
▼ 제작 초기 담당 감독과 작가가 바뀐 이유가 무엇인가요. 방송사와 제작사 간 마찰 때문이었나요.
“중간에 제작 환경이 와해되는 상황을 보면서 그 이유를 굳이 알고 싶지 않더라고요.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일이고, 그럼에도 방송은 바로바로 숨 가쁘게 이어졌죠. 거의 3, 4일 만에 120~130분 분량을 찍어야 했어요. 정말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초(超) 순수한 작품이 나온 거죠(웃음). 제가 시상식 때 연꽃 이야기도 했어요. 재방송에는 편집돼서 안 나갔는데, 저는 정말 연꽃이 피는 것을 봤어요. 말도 안되는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스태프가 연꽃을 피워낸 거예요.”
고현정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드라마를 제작하려는 배우와 제작진의 순수한 마음을 ‘연꽃’에 비유한 것 같다.
▼ 드라마를 끝내고 난 지금 심경은 어떤가요.
“너무 미진해서 속상하고 아쉬움도 많이 남아요. 제 가슴을 때리고 싶다니까요. 권상우도 아무 사심 없이 진짜 열심히 연기했고, 차인표 선배같이 마음이 깨끗한 배우가 함께 했다는 게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데 구슬이 서 말이면 뭐합니까. 꿰어야 했는데 줄이 확 끊어져서 쟁반에 흩어져버린 셈이지요.”
미실보다 서혜림에 애착
고현정에게는 MBC 역사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 캐릭터가 아주 강하게 각인돼 있다. 고현정은 2009년 MBC 연기대상에서 미실로 연기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두 인물을 연기하면서 어떤 차이점을 느꼈을까.
“미실은 거의 전사에 가깝게 길러진 여자죠. 목적의식이 아주 충만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의심이 없었죠. 귀족이고. 미실 연기를 해보니 작가가 미실을 그릴 때 굉장히 자유로웠을 것 같아요. 미실은 복장만 하고 있어도 충분히 설명되는 캐릭터였고, 서혜림은 거의 알몸으로 만나야 하는 캐릭터였어요. 그래서 애착은 서혜림에게 더 가요.”
▼ 두 인물의 공통점은 없나요.
“자기가 하는 게 옳은 줄 아는 거?(웃음). 그리고 자기가 제일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게 좀 비슷한 점인 것 같아요.”
드라마 ‘대물’은 방송 시작과 동시에 여야 정치권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극중 국내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여야 대권후보군 중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선덕여왕’ 미실 역도 박 전 대표와 비교되곤 했다. 또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을 합쳐놓은 듯한 ‘민우당’이라는 드라마 속 집권여당의 당명도 논란의 대상이 됐다.
▼ 정치 경험이 전혀 없을 텐데, 정치인 연기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게 있나요.
“(웃음) 없어요. 결혼생활을 할 때였는데, 모 스포츠지에 ‘대물’만화가 연재된 것을 재밌게 봤던 게 전부예요. 그게 인연이 됐나 봐요.”
▼ 드라마 속 서혜림이 준 교훈은 뭔가요.
“정치를 나 몰라라 하지 말라는 거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대통령선거에는 그나마 관심이 있는데, 정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구청장 같은 지방자치단체장선거가 아닌가 싶어요. 정치는 나와 내 아이들과 가정, 사회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걸 서혜림이 보여줬던 것 같아요.”
‘대물’속 서혜림은 아나운서다. 방송사 카메라기자인 남편이 내전 지역인 아프가니스탄 취재 중 반군에 인질로 잡혀 죽임을 당한다. 억울한 죽음에 항의하다 방송사에서 쫓겨난 서혜림은 답답한 가슴을 달래려 국회 앞을 찾는다. 마침 국회 앞엔 시위대가 시위 중이다. 시위대 속에서 서혜림은 국회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우린 대체 누굴 믿고 살아야 합니까. 내 아이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이 나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나라 없는 백성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죕니까.’
고현정은 이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처음엔 대사가 마음에 와 닿지 않았어요. 남편이 아프간에 가서 죽어 돌아왔다고 진짜 국회 앞에서 이렇게 할까 싶었죠. 그것도 낯선 데모대열에 들어가서. 그런데 오 감독이 자꾸 본인 일이라고 생각하라는 거예요. 자꾸, 그럴 수 있다면서. 그때 뭔가 스윽~ 어떤 느낌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힘껏 소리를 질렀죠. 내가 언제 국회 앞에서 소리를 질러보겠느냐 싶기도 하고. 그거 찍고 사흘간 목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요.(웃음)”
‘정치, 감독·스타일리스트·작가 있으면 하죠’
▼ 미실과 서혜림, 두 캐릭터가 공통적으로 지향한 게 권력입니다. 연기를 하면서 권력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이번 연기대상 수상소감 논란을 통해 느낀 건데, 사람들이 내게 권력이 있다고 보는 것 같아요. 아, 권력은 이래서 ‘한번 잡으면 안 놓으려고 한다’는 어른들 말씀이 뭔지 살짝 알겠더라고요. 제가 진짜 권력을 잡아본 사람도 아닌데, 그런 유의 역할을 했다고 해서 벌써 나를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생각해도 그건 저 혼자의 생각인 거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달라진 거죠. ‘미실’을 하기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수직이든, 앞으로나 뒤로든 이미 자리가 옮겨져 있잖아요. 30%든 60%든 저를 그렇게 보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거더라고요. 그걸 몰라라 하면 잘못하는 거더군요.”
▼ 직무유기 같은 것?
“그렇죠. 권력을 잡은 사람들도 누군가 잡았다고 이야기해주는 걸요? 본인이 그 권력의 맛을 느껴서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권력은 내가 느끼기 전에 주위에서 먼저 느껴서 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권력의 피해자가 되는, 그러면 피해를 복원하고 싶어서 계속 가게 되는 것인 것 같아요.”
▼ 연예인 출신 정치인이 적지 않은데, 실제로 정치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든 적은 없나요.
“그러기엔 너무 예쁘지 않나요(웃음). 이건 정말 농담이에요, 또 오해받을라. 정치…(웃음) 내가 이런 단어를 쓰다니. 정치는 드라마 촬영장에서도 많이 해요. 필요해요 거기도.”
▼ 만약 선배 연예인이나 누군가가 선거 때 유세를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번 작품을 할 때 실제로 그런 이야기 들은 적도 있어요. 그때 3년 웃을 걸 다 웃었는데…. 저는 일단 작가가 필요하고, 감독·스타일리스트·협찬사 다 필요해요. 그러니까 정치를 못해요.”
우리나라 정치인 매력 없다
▼ 정치하면 다 붙습니다.
“아 정말요? 그러니까 혹하네(웃음). 저는 촬영이 아니면 집에서 잘 못 나오거든요. 제 개인 성향이기도 한데, 또 오전 9시 이전엔 절대 못 나가요. 그리고 제가 나가고 싶을 때 나가요. ‘대물’ 덕에 선거에 좀 관심을 갖게 될 것 같은데 주변인 정도죠. 감히 정치인의 대열에 끼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약간은 대인기피증도 있어요. 안 믿기죠? 그러니까 제가 미실하고 서혜림 연기로 대상 받을 만하죠?”
▼ 평소 선후배나 대인관계 원만하지 않나요.
“별로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까 원만할 수밖에 없죠. 저는 제가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요. 그게 배우로서의 특권 아닌가요. 저는 정치를 하면 정말 위험한 사람이에요.”
▼ 미실이나 서혜림처럼만 한다면 잘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게 감독이 계시고, 카메라 앞에서 큐 사인이 나야지(웃음).”
▼ 미실이나 서혜림이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연결 짓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요, 여성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 질문 자체가 굉장히 가부장적인 것 아닌가요? 지금 너무 늦었죠. 우리나라같이 역동적인 나라에 여성인물이 너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경쟁력도 없는 것일 수 있죠. 더 다양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체적으로 정치인들의 경쟁력이 너무 없어요.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군(집단)이 더 만들어져서, 더 치열해야죠. 박근혜 전 대표 같은 정치인이 한 명이라서 아쉬워요. 그런 여성 정치인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지도자로 거론되는 남성 정치인도 더 많아지고, 더 매력적이었으면 좋겠어요. 진짜 좋아할 만한 정치인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아직은) 그렇게 매력적인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 어떤 정치인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나요.
“(우리나라 정치인은) 일단 유머가 없잖아요. 정치 이야기는 너무 재미가 없어서 못 듣겠어요. 말이 다 관계자용이에요. 그러니 겉모습만 보죠. 정치인들이 정말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어요. 외모까지는 바라지 않아요. 뭔가 주의를 환기시켜줘야 그 안에 것도 들여다볼 것 같은데, 너무 안전하게만 가는 것 같아요. 그러니 관심이 없고 지루하고 그렇죠. 그런 면에서라도 박 전 대표는 (다음 대선에) 꼭 나오면 좋겠어요. 최소한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술 4잔의 기분 즐겨
1989년 제33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미스 선’으로 뽑힌 고현정은 1990년 KBS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이후 ‘여명의 눈동자’ ‘여자의 방’ ‘엄마의 바다’ ‘모래시계’ 등에 출연하면서 톱스타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다 1995년 삼성가(家)정용진 신세계백화점 부회장과 결혼하면서 브라운관을 떠났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2003년 이혼한 그는 2005년 드라마 ‘봄날’을 통해 복귀해 ‘여우야 뭐하니’ ‘히트’ ‘선덕여왕’ 등에 출연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또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배우들’ 등 영화로도 활동영역을 넓혔다.
▼ 작품을 선택할 때 기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음… 있죠. 일단 영화는 감독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봐요. 저처럼 감독들도 필모(필모그래피·작품목록)가 있잖아요. 드라마는 이게 얼마만큼 위안이 될 것인가, 이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기에 이걸 보는 분들이 얼마만큼 이 드라마를 ‘소비’할 수 있을까를 나름 봐요. 조금 위험한 표현이긴 한데, 그 다음은 내가 얼마나 잘 속일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요. 드라마라는 게 처음에는 소라도 잡을 듯이 시작하지만 미미하게 끝나잖아요.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캐릭터든 작품이든 저 자신을 설득할 명분이 있어야 하거든요.”
‘여배우들’에는 20대부터 6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6명의 여배우가 출연했다. 윤여정, 이미숙,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 그리고 고현정이 참여했다. 영화 속에서 고현정은 시종일관 와인을 한 손에 쥐고 살짝 취한 상태에서 선후배들과 마찰을 일으킨다.
▼ 평소 와인 좋아하세요?
“사실 전 술을 별로 안 좋아해요.”
▼ 그 영화를 보면 주량이 꽤 될 것 같던데요. 평소 선후배들과 술자리를 자주 갖는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술이든 4잔 정도 마시면 기분이 업 돼요. 그런 기분을 오래 즐기는 편이죠. 회식이나 모임에서 ‘오늘은 안 마시겠다’면서 빼지는 않아요. 저희 아버지가 술을 잘 마셔서 저도 기본적으로 간은 좋은 것 같아요. 그렇다고 집에 혼자 있을 때 술 생각이 난다거나 그런 편은 아니에요.”
▼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어떤 건가요?
“글쎄요, 음(한참 고민)… 은근히 히트작이 많아요(웃음). ‘모래시계’를 빠트릴 수는 없을 것 같고요. ‘나 이러면서 쌀 샀다’ 하는 장면을 찍을 때는 속에서 진짜 뭔가가 올라왔거든요. 그리고 선덕여왕의 ‘미실’이었던 것 같아요. 어? 그럼 서혜림이 불쌍한데? ‘모래시계’때는 어리면서 그냥 울었던 것 같고요, 미실은 울어야 하는 것을 알면서 울었던, 그래서 조금 더 욕심이 난 캐릭터였던 것 같아요.”
▼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좋은 인간이어야 좋은 배우가 되는 것 같아요. 항상 자기 검증을 해야 하고, 내가 지금 좌표상에 어느 지점에 있는지, 떨어져 있는지 올라가 있는지 아주 잔인하게 평가해야 해요. 그래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따분한 건 싫다
▼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국대 안민수 교수에게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 상태를 만들려면 육체도 그렇지만 정신도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어떤 것을 직접 경험해보고, 그 경험을 토대로 연기하는 건 나태한 거예요. 그건 평상시 몸과 마음을 닫아놓는 거와 같아요. 배우는 척추 뼈를 다 확장시켜서라도 상상력으로라도 우주와 대화하고, 역할을 맡으면 남김없이 그 사람으로 훅훅 갔다와야 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선입관이 전혀 없이 열려있는 상태, 그러니까 말로 딱히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말랑말랑한 상태가 돼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좋은 배우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없어야 해요. 배우가 어떤 직업을 연기할 때 실제 그런 직업을 가진 이에게도 모르는 것을 알려줄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궁극적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요?
“그냥 괜찮은 인간으로 멋있게 늙어가는 배우로 꼽히고 싶어요.”
고현정은 재미있는 인생을 추구한다. 따분한 건 싫다. 가끔 사람을 시험하기도 하고, 몰래카메라(몰카)로 선후배들을 놀리는 것을 즐긴다.
“저는 사람들 깜짝 놀래주는 것을 좋아해요. 몰카를 수시로 해요. 단 몇 초를 위해 몇 시간씩 숨어 있었던 적도 있어요. 다들 깜빡 속아요. 아쉬운 건 그때 연기가 최고인 것 같다는 거죠. 몰카 찍을 때가 바로 제 연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에요.”
▼ 가끔 틀을 깨고 싶은 충동도 느끼나요.
“네. 저도 제가 그런 사람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그걸 다른 사람과 같이 하기에는 얼굴이 많이 알려져 힘들잖아요. 그래서 그걸 제 자신을 통해서 해요. 아무래도 위험수위에 달한 것 같아요. 한번은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속력이 확 붙는데 ‘이걸 놓으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살짝 놨다가 사고를 내서 물어준 적이 있어요.(고현정은 2002년 12월 크리스마스 새벽 한남동에서 3중 추돌사고를 낸 적이 있다) 그 때문에 많이 혼났죠. 진짜 궁금해서 그랬던 건데, 뭐 결혼생활이 힘들어서 그랬다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그(전 남편) 댁에 너무 미안했어요. 제가 철이 아직 안 든 것 같아요. 그냥 한번 해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뿐인데, 한때는 과대망상증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죠.”
▼ 해보고 나면 뭘 얻나요?
“그냥, ‘아 내가 한번 해봤다’는 거죠. 특별히 소감은 없어요. 저지르고 나면 사고 처리하는 데 급급하죠. 가끔 인간관계로도 비슷한 실험을 해보고 싶을 때도 있어요. 이 사람이 어디까지 오해를 안 하는지. 제가 참 속이 없죠. 좋게 말해서 천진난만한 거죠. 예전에는 몰랐는데, 진짜 배우 하기를 잘했다 싶어요. 연기를 통해서 마음껏 그런 일을 해볼 수 있잖아요. 안 그랬으면 왕따나 골목대장 둘 중 하나였을 거예요.”
숨 쉬고 싶어 이별했다
▼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혹시 결혼 전·후 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나요?
“결혼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을 한번 좋아하면 변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이혼하고 나니까, 다양하게 사랑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 같아요. 좋은 사람은 너무 많아요. 남자도 그렇고, 친구도 그렇고. 그런데 사랑은 진짜 밑지는 장사인지 뻔히 알면서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진짜 사랑을 하면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그러면서 굉장히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멀리 떨어져 있거나 오래 못 보더라도 사랑을 양과 질적인 면에서 조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끔 이런 생각도 해요. ‘대화가 안 돼도 외국인하고도 사랑을 하겠다, 느낌만으로도 가능하겠다.’지난해 (한국나이로) 마흔이었어요. 나이 듦이 얼마나 괜찮은 건지도 살짝 알게 된 것 같아요. 남자 배우들을 많이 만나잖아요. 만나면 예전에 없던 여유가 생기면서 다 보게 돼요. 나쁘게 이야기하면 구경하는 거죠. 이 즐거움이 웬만한 사랑보다 훨씬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재미있어요.(웃음)”
새로운 ‘사고’ 칠 준비 중
▼ 만약 사랑이 다시 찾아온다면 어떻게?
“(손으로 가로채는 동작을 하면서) 바로 확! 그럼요.”
▼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은 어떤 식으로든 슬픈 일이죠. 왜 이별을 택할 수밖에 없었나요?
“제가 죽겠으니까, 그것도 하게 되더라고요. 일단 자식도 그 다음이 되던데요. 내가 먼저 살고 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단지 그 이유였어요. 어떤 상황이나, 그(전 남편)쪽에 뭐가 어떻고, 제가 뭐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제가 함량 미달이든 초과든 그냥 죽을 것 같더라고요. 누가 내 숨을 막고 있는데, 산소가 없어서 곧 죽을 것 같은데, 다른 생각이 들겠어요? 지금 산소가 필요하다, 살아야겠다, 그랬죠. 저는 자식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신 죽을 수 있는 그런 위인은 아닌가 봐요. 이유는 간단해요. 그래서 두 번 생각 안하고 아주 간단하게 정리했죠, 미련도 없고….”
비록 지금은 떨어져 살지만, 고현정에게는 아들과 딸, 두 자녀가 있다. 그도 배우이기 전에 엄마다. 보고 싶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 내내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는 최대한 자제했다. 그게 자녀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로 남고 싶은지 물었다.
“산뜻한 엄마로 남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짐이 안 되면 좋겠어요. 욕심이 있다면 내가 잘 살아서, 다른 면은 모르겠지만 사랑이라든지 그런 감정적인 면에서는 성숙한 조언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2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을 물었다. 인터뷰 내내 옆에서 지켜보던 동생 고병철 대표가 “당분간은 좀 쉬었다가 5월쯤 준비하는 영화가 있긴 한데, 아직 확정되지 않아서 말하기에는 조금 이른 것 같다”며 말을 아끼자, 고현정이 대신 시원하게 답한다.
“뭐, 어때.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 대학 다닐 때 친하게 지내던 동기들이 있어요. 나중에 성공하면 같이 영화를 만들기로 했거든요. 제작, 감독, 극본은 다른 친구들이 맡고, 제가 배우를 하기로 했어요. 어떤 작품이 나올지,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고현정은 동국대 연극영화과 90학번이다. 그가 친구들과 어떤 ‘사고’를 칠지, 또 어떤 모습으로 팬과 국민 앞에 나타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