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호

“선비의 마음으로 자연과 벗하니 행복이 끝없네”

안동 도산의 농암 종손 이성원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입력2011-01-21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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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강호시인 농암 이현보의 17세 종손인 이성원씨는 현대의 처사다.
    •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종가를 복원하고, 자신이 사는 땅을 궁구하고 탐색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색하고 독서하고 씨 뿌려 거두는 귀거래의 삶을 실천하며, 인생의 참 즐거움을 발견한 이다. 비결은 마음가짐이란다.
    “선비의 마음으로 자연과 벗하니 행복이 끝없네”
    그저 강가에 놓인 바위와 수백 년 전부터 고유한 이름을 지녔던 바위는 가치에서 천양지차다. 아무렇지도 않은 물굽이에 ‘미천장담(彌川長潭)’이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기 시작하면 물 아래 잠기는 고요의 켜가 아연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말의 주술이고 시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게다가 그 바위와 물굽이의 이름을 옛사람의 시 속에서 발견해내고 500년 전 그들의 발자취를 오늘 아침 내가 걷는 길 위에서 찾아낸다면 일상은 그대로 소스라치는 깨달음이 된다.

    이 칼럼의 타이틀을 ‘여기 사는 즐거움’으로 정할 때 나는 내심 안동의 이성원 선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 터전을 스스로 찾아냈고 그 터전을 가히 왕국이라 할 만하게 일궈냈다. 그뿐 아니라 제가 발 디딘 땅의 드높은 뜻을 발굴해낼 줄 아는 사람이다.

    제가 깃들어 사는 땅을 이성원 선생만큼 ‘궁구’하고 ‘탐색’하는 이를 나는 이전 어디서도 만나본 적이 없다. 궁구(窮究)의 사전적 의미는 ‘속속들이 파고들어 깊게 연구함’이고, 탐색 (探索)은 ‘드러나지 않은 사물이나 현상을 찾아내거나 밝힘’이다. 이성원은 사전의 풀이 그대로 도산을 ‘속속들이 연구하고 밝혀내고 찾아내기’를 계속해왔다. 궁구와 탐색은 필연적으로 애정을 낳는다. 안동의 도산 땅을 이성원만큼 사랑하는 이가 또 있을까.

    선비의 땅 도산

    도산은 절묘한 땅이다. 낙동강이 산을 안고 휘도는 골짜기마다 대학자가 있고 그를 키운 종가가 있고 강학하던 서원이 있고 독서하고 노닐던 정자가 있다. 물론 압도적인 퇴계(退溪)가 있어 도산 하면 누구나 도산서원을 떠올리지만 도산에 오직 도산서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천에 광산 김씨 설월당과 후조당이 있고 부포에 역동서원이 있으며 월천에 월천서원이 있다. 또 분천에 영천 이씨 농암이 있고 그 다음 골짜기쯤에 이르러야 퇴계가 나온다. 산의 발치를 씩씩하게 훑어내는 낙동강이 만들어준 모래톱과 골짜기를 흐르는 계곡이 자양이 되어 사람들은 이곳에서 글 읽고 밭 갈고 고기 잡으며 자그만 이상향을 이루고 살았다.



    이성원은 그런 골짜기 중의 하나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20대에 고향을 잃었다. 알다시피 한국사는 숱한 실향민을 양산해냈다. 나라를 찾겠다고 만주로 떠난 치열한 실향도 있고 분단으로 돌연 길이 끊겨버린 뼈아픈 실향도 있지만 마구잡이 댐 건설로 제 집, 제 땅을 눈 번히 뜨고 수장당한 어이없는 실향도 있었다. 그는 나중의 어이없는 수몰민에 속했다. 600년 넘게 연면히 이어오던 ‘파라다이스’, 아니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곳이 파라다이스임을 알았다.

    그가 물속에 묻어버린 집은 그냥 집이 아니었다. 600년 넘게 한자리를 지켜온 농암종가였다. 조선의 빼어난 강호시인 농암(聾巖·1467~1557)이 태어나 공부하고 시를 쓰고 몸을 묻은 역사와 문학의 본거지였다. 종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하여 묻혀버렸고, 긍구당, 애일당, 사당, 서원 같은 부속건물들은 행정의 편리대로 여기저기 흩어져버렸다.

    그는 종손이었다. 그래서 개인이 아니라 공인이었다. 종손이 공인이 되는 세계를 안동 바깥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종가가 어엿하고 당당하게 지손들에게 영향력과 위엄을 행세하는 곳은 이제 안동말고는 찾기 어렵기 때문이고, 산업화를 향해 급박하게 달리는 사회는 그런 가치를 케케묵은 것으로 배척했기 때문이다.

    남이야 뭐라든 그는 ‘농암 17손 종손’이라는 타이틀을 거부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절로 내면화된 역할이었다. 농암종가가 있던 ‘부내’는 지금은 도산서원 진입로가 돼버린 산자락 아래의 강마을이었다. 한자로 ‘분천(汾川)’이라 쓰고 100여 호에 달하는 큰 마을로 70여만 평 문전옥답을 지닌 비옥한 터전이었다. 부내에 들렀던 김안국이 “마치 도원경에 들어온 것 같다”고 했고 농암은 “정승 벼슬도 이 강산과는 바꿀 수 없다”고 노래했던 곳이다.

    “안동댐이 낙동강 상류의 그런 마을 수십 개를 한꺼번에 묻어버렸지. 도산의 골짜기마다 하회마을 하나씩이 숨어 있었거든! 만약 지금 안동댐을 건설하려면 동강댐 건설 반대보다 100배 이상 강한 저항을 받을 걸. 하하. 가정이지만 안동댐의 수위를 불과 몇 미터만 낮추었어도 도산은 하회마을 수십 배의 문화·경제적 가치를 보존했을 것을!”

    ▼ 왜 그때 저항하지 않았어요.

    “정부 정책은 대의(大義)이고 가문을 지키는 것은 소리(小利)라고 공론이 모아졌으니까! 하하.”

    안동댐에 묻힌 종가

    댐 건설 당시 그의 선친이 분주히 움직여 일을 수습했지만 20대의 끓는 피였던 그였기에 절망의 깊이는 더욱 컸다. 그 뒤 20년을 허전하게 떠돈 삶이었다. 겉으로는 정착했지만 마음은 헤매어 돎을 멈출 수가 없었다. 20대가 지나고 30대가 지나고 40대에 이르렀다. 그 어느 날 잃어버린 땅 주변을 맴돌던 발걸음이 무인지경의 협곡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사람이 다닌 흔적은 없었지만 걷지 못할 길도 아니었다.

    “깨끗하고 예쁘게 흐르는 강물의 굽이, 물결에 다듬어진 강돌맹이, 야생화와 잡초, 키 큰 포플러나무가 자라는 강변 언덕, 그 사이를 비집고 절묘하게 조성된 은빛 모래사장. 그리고 이런 수평적 아름다움을 수직적 아름다움으로 감싸 안은 병풍 같은 단애. 정신을 차려보니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라는 땅이었어. 잃어버린 부내에서 불과 이십여 리 떨어진 곳이었지.”

    그는 모래사장 가운데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머니 품안 같은 안온함과 우주로 통하는 열린 감각’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는 외쳤다. 여기다. 바로 여기다! 이튿날 아내와 함께 다시 오고 우여곡절 끝에 그 땅들을 사들였다. 파라다이스 재건이 시작된 것이다.

    간단히 한 문장으로 ‘그 땅들을 사들였다’라고 말하지만 거기에는 별의별 이야기가 숨어있다. 지금 농암종택이 들어선 땅은 모두 2만여 평(6만6000여m2)에 달한다. 그걸 다 사들이기까지 일개 서생이었던 그가 바친 시간과 노력은 하늘에 닿을 정도다.

    그날 무인지경을 걷던 종손의 눈앞엔 신선이 사는 듯한 흙집이 몇 채 발견된다. 그는 그 흙집에 사는 노인에게 아무개라고 인사하며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 깃들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탄식했다. 당시 그는 안동 길원여고에서 한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후로도 자주 들러 강변을 걷고 바위를 쓰다듬고 물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봤다.

    “어느 날 흙집 노인에게서 연락이 왔어. ‘정 탐이 나면 내 땅을 팔겠소’ 하는 거야. 당장 달려갔지 뭐. 거 희한하데. 무슨 운명 같더라고.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어른이 중병이 났지 뭐야. 땅을 처분할 필요가 생겼던 거지. 내가 일 년만 늦게 왔어도 그 땅은 못 샀을 거야. 어른이 돌아가신 다음에는 나에게 올 수가 없는 땅이었거든.”

    그렇게 청량산이 발치를 담그고 있는 가송의 강변은 한 자락씩 종손의 소유가 돼갔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슬쩍슬쩍 등을 밀어주는 듯했다고 한다. 그는 낙관과 기개로 우쭐우쭐 앞으로 나갔다. 그즈음 그는 학교를 그만뒀다. ‘낙원회복’을 위해 에너지를 한군데로 모을 필요가 절실했다.

    퇴계가 걸어 다니던 길

    가송에 들어간 뒤 그의 공부는 한마디로, 자신보다 더 그 땅을 사랑했던 이들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이곳을 노래한 숱한 시와 산문을 탐색했다. 거기다 그가 발견해낸 것이 ‘예던길’이다. 예던길은 청량산을 유난히 사랑했던 퇴계가 집에서 청량산으로 걸어 다니던 길이다. 그게 500년이 흐르도록 나무꾼들의 발길로 다져져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퇴계 시에 나오는 그 길가의 바위 이름, 소의 이름, 강줄기의 이름을 그는 강변을 수백 번 오르내리며 하나씩 짚어냈다. 7~8년 전 내가 처음 그곳에 갔을 때 흐르는 물굽이를 가리키던 그의 격앙된 손짓을 잊을 수가 없다.

    “여긴 학소대, 저게 벽력암, 그 아래 잔잔한 물이 한속담, 이 고요한 물굽이는 미천장담, 저기 넓적한 돌은 경암!”

    하도 아름다운 풍광에 난 말을 잊고 서 있었다.

    “저걸 좀 보라고! 강의 일생도 사람의 일생과 흡사해. 여긴 청년기의 낙동강이야. 힘차고 빛나고 거칠 것이 없지. 낙동강은 청량산에서 유년기를 마감하고 가송에 오면 청년이 되는 거야. 하회쯤만 내려가도 벌써 물줄기에 힘이 빠지면서 심심하게 사행(蛇行)하잖아? 그런데 여긴 달라. 청년기에 뭘 못하겠어? 굽이와 들과 못과 내와 협곡을 만들어. 보라구, 강의 모습이 얼마나 다채로운지. 저 힘찬 강이 도산 일대에 단천, 낙천, 분천, 월천, 오천 같은 마을들을 빚어내게 된 거야.”

    ▼ 굉장하군요. 굉장해.

    “낙동강 1300리 중에서 청년기의 강은 여기 도산 근처 30~40리뿐이거든. 상류에는 협과 굽이는 있으나 소와 들이 없고 하류에는 들은 있어도 소, 내, 곡, 협이 없어! 상류는 조급하고 하류는 밋밋해. 강이 틀어지는 곳이 곡(曲)이지. 곡은 굽이거든. 굽이에는 여울이 있고 여울 가에는 마을이 생겼지. 도산 9곡은 굽이이며 여울이며 마을이라고. 1곡에서 6곡까지는 모조리 물에 잠겨버리고 남은 건 7, 8, 9곡뿐이지. 가송곡은 그 중에서 8곡에 해당해. 7곡은 단사곡, 9곡이 청량산이지.”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단사곡에서 가송곡으로 이어지는 예던길의 길이는 4㎞. 걷는 데 1시간쯤 걸린다. 지금 안동시가 이 길을 여러 사람이 걷도록 조성 중이라 한다. ‘예다’는 ‘가다’의 고어이니 ‘예던’은 ‘가던’이다. 퇴계의 ‘도산 12곡’중 9곡에 나오는 시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뵈도 예던길 앞에 있네./ 예던길 앞에 있으니 아니 녀고 어쩔고’에서 따온 이름이다. 눈앞의 길이기도 하지만 성인의 행적이기도 하다. 퇴계는 ‘명명(命名)’의 대가였지만 이 길의 ‘명명’은 이성원 선생이 했다. 아니 퇴계와 그가 함께 했다고 할까.

    “선비의 마음으로 자연과 벗하니 행복이 끝없네”


    신귀거래사

    “선비의 마음으로 자연과 벗하니 행복이 끝없네”

    농암 이현보가 태어난 집인 긍구당. 현재의 집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몰려 이건됐다. 현판 ‘긍구당’의 글씨는 조선 중기 화가 신잠의 솜씨다.

    지금 농암종가 서재에는 종손이 붓으로 쓴 ‘신귀거래사’가 붙어 있다. 정확히 500년 전(1510년) 44세의 농암은 고향에 명롱당을 짓고 벽 위에 귀거래도를 그려 붙였다. 종손이 이 땅을 발견한 것과 비슷한 나이다. 역사는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은근히 휘돌고 슬쩍 겹쳐져 문득 우리를 아연하게 만든다.

    ‘귀거래(歸去來)한다는 것! 그건 자연 속으로 녹아들겠다는 결의다. 세상의 공명 따위 외면하고 사색하고 독서하고 씨 뿌려 거두는 삶을 선택하겠다는 철학이다. 책권이나 읽은 조선의 벼슬아치들은 대개 이 ‘귀거래’를 입에 달고 살았고 재미있게도 21세기 문명인도 대개 전원 속에 집을 짓고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실천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귀거래 귀거래 말뿐이오 갈 이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고/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명들명 기드리느니’

    벼슬길을 물러나면서 농암은 이렇게 ‘효빈가’를 지었다. 21세기를 사는 종손은 16세기에 지어진 선조의 글을 따라 실행했다. 그리고 똑같이 글을 써서 벽에다 딱 붙였다. 1994년 9월이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강변 자갈밭을 걷는 것말고는 길도 없던 가송리엔 고래등 같은 기와집 스무나믄 채가 들어섰다. 강변을 따라 배롱나무 가로수가 늘어선 찻길도 생겼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헐렸던 디귿자 종택이 복원되었으며 긍구당, 애일당, 명롱당 같은 흩어진 정자가 모였으며 분강서원과 사당과 신도비가 이건(移建)되었다. 옛 그림과 시에만 나오던 ‘ 강각’이란 정자도 새롭게 들어섰다. 옛 부내 앞 강기슭에 놓였던, 한 글자의 크기가 무려 75㎡나 되는 ‘농암(聾巖)’이라 각자한 거대한 바윗돌도 기중기에 실려서 옮겨졌다. 늦었지만 나라에서 30년 전 잘못을 사죄하듯 ‘농암선생유적복원사업’을 지원했던 것이다. 미리 이 땅을 마련해두지 않았다면 어림없을 일이었다.

    어느 날 종손과 종택 오른편에 있는 바위벼랑 학소대에 올랐다. 물이 ‘큐(Q)’자로 휘도는 들판에 수십 채의 기와집이 늘어선 장관이 발아래 깔려 있었다. “위대하군요” 하고 내가 탄복했더니 그가 “장엄하지, 하하” 하고 받았다. 사람의 한 생애란 짧을 수도 무상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럴 때 나는 새삼 실감했다.

    농암종가는 지금 전국에 흩어져 있다는 2만여 영천 이씨 사람들을 위한 집이 아니다. 농암이 영천 이씨만의 조상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시인이듯 새로 지은 이 집도 그 가문만의 것일 수는 없다.

    항산이 필요하니…

    사실 문을 닫아걸고 배타적으로 굴었다면 이성원 선생이 벌인 일은 한 가문의 자랑은 되었을지언정 함께 박수치기는 쑥쓰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은 담장을 활짝 열었다. 아무나 안방에 들어와 밥을 먹을 수 있고 긍구당, 강각, 명롱당에서 잠을 자고 갈 수 있다. 심지어 드넓은 대청을 가진 사랑채도 공개했다. 물론 잠자고 밥 먹는 게 무료는 아니다. 도시든 산촌이든, 종가든 여염집이든 먹고사는 일엔 ‘항산(恒産)’이 필요하니 방값과 밥값을 적절히 책정해서 받기는 한다. 그 옛날에도 종가에 갈 때 빈손으로 쑥 들어가진 않았으니 같은 비용이랄까. 마루가 딸린 정자들은 10만원, 작은 방은 그보다 좀 작게 받는 숙박비가 지금 종손의 수입원이다. 종가 살림을 지손에게 의지하던 시절은 지났다. 종가도 어떻게든 독립적으로 먹고살아야만 하는데 위토(조상을 받들라고 마련한 토지)에서 수입이 생기는 시절이 아니니 그 길은 아득하기만 하다. 안동의 숱한 종가가 속수무책 낡고 헐어가는 이유가 거기 있다. 종손이 밥벌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종가를 떠나야 하는 시절이 한 세대 이상 계속돼 온 것이다.

    “하하. 우리 집이 작년에 숙박업소 콘테스트에서 랭킹 1위를 했어. 내가 놀고먹는 건달이 아니라 숙박업자야, 숙박업자! 하하.”

    저 유쾌한 웃음 안에는 종가가 경제적 독립을 이루는 모델을 보여주고 싶은 눈물겨운 모색이 있다. 나름대로 성공 모델을 만든 듯해 듣는 나도 유쾌하다.

    “선비의 마음으로 자연과 벗하니 행복이 끝없네”

    농암 종손 이성원씨와 종부 이원정씨의 웃음이 닮았다.

    “대신 종가가 돈을 벌면 안 돼. 그러면 냄새가 나서 못쓰거든. 홍보하지 말자, 돈 벌지 말자가 내 모토야.”

    소나무로 지은 한옥은 사람의 숨결을 받아먹어야 숨을 쉰다. 숨 쉬지 않으면 목조주택은 쉽게 윤기를 잃고 바스러진다. 단순히 집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집엔 사람이 들락거려야 한다.

    “우리 집은 영천 이가만의 종가가 아니야. 한국인의 큰집이지. 종가란 괜히 집만 큰 게 아니라 함께 모여서 공동체의식을 확인하라는 공간이거든. 그걸 복원하는 것이 21세기 종손이 해야 할 책무라고 봐. 누구나 찾아와서 강변을 걷고 하늘을 보고 나무열매를 따먹고 고요하게 차를 마시고 옛사람의 시를 읽는 집이 되기를 원해. 밥상머리에서 이야기 마당을 펼쳐놓으면 더더욱 좋고!”

    충고가 마음을 헤친다

    실제로 농암종가 밥상머리에선 종종 고담준론이 펼쳐진다. 방의 여기저기 가송리의 항공사진이 펼쳐져 있어 이야기는 절로 도산9곡으로 흘러가고 도산9곡에 딸려 나오는 것은 당연히 퇴계와 농암이다. 농암 선생 어부가의 ‘굽어보면 천길 파란 물, 돌아보면 겹겹 푸른 산’이 바로 이곳 풍경이라고 탄복하는 이도 있고 후렴 부분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가 ‘찌그덕 찌그덕 엇~샤’를 한자로 쓴 것이 옳으냐고 확인하는 이들도 있다.

    농암가는 우리말 시가 귀하던 시절에 4대에 걸쳐 국문시를 남긴 집안이다. 농암의 어머니 권씨 부인이 아들의 승지벼슬을 축하하는 ‘선반가’를 남겼고 농암이 어부사를 썼고 농암 아들 이숙량과 종증손 이시(李蒔)도 우리말 시를 썼다. 선반가는 기쁨에 겨운 단순한 시다. 아마 춤을 추며 부르지 않았을까. 이런 기쁨은 휘발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즐거움의 켜가 두꺼워져 가문의 향기가 된다. 사람들은 사랑 대청에 걸린 적선이란 글은 누가 썼냐고 자주 묻고 종손에게 한 말씀 청하기도 한다. 나도 이런 진지한 자리에 끼어든 적이 있는데 그중 인상적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인생을 힘들게 하고 상처받게 하는 큰 요인은 이율배반적이게도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까운 이들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대개 서로 사랑한답시고 마구 툭툭 내뱉는 충고에 있어요.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 ‘형제 사이에 잘못이 있으면 서로 말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어느 제자가 묻자 퇴계는 ‘우선 나의 성의를 다해 상대방이 감동하도록 하라. 그 다음에야 비로소 서로간의 의리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성의 없이 대뜸 나무라기만 한다면 반드시 사이가 소원해질 것이다’라고 답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눈을 빛내며 듣다가 누가 묻는다.

    ▼ 퇴계 선생도 사사로운 편지를 썼나요.

    “퇴계는 제자에게 정 충고할 일이 있으면 편지로 했지요. 지금 남아 있는 퇴계의 시는 2200여 수인데 편지는 3300편이 넘습니다. 퇴계의 가치가 편지에 있다는 학자들도 있어요. 가족 간의 애정을 잘 관리하려면 ‘충고하지 말라’는 충고를 유념해야 합니다. 하하. 이건 제 말이 아니라 퇴계선생의 말씀이에요.”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

    종손은 한국한문학을 전공했다. 어려서부터 영남 유림의 최고 학자라는 평판을 듣던 선친 이용구 선생 앞에 꿇어앉아 어려서부터 천자문과 소학, 자치통감과 논어, 맹자를 읽었다. 그래서 한문 해독이 자유롭고 공부가 활달했다. 학문하고 시 쓰는 이 집안의 유전자가 어련했으랴. 그는 퇴계와 율곡의 이기(理氣) 논쟁 연구로 박사학위도 얻는다. 그러나 그토록 원하던 강단 학자가 되지는 못했다.

    “선비의 마음으로 자연과 벗하니 행복이 끝없네”

    영천 이씨 종가.

    학자가 못된 좌절로 청춘이 아프게 흘러갔다고 말하지만 그는 글을 쓰고 읽는 삶을 멈추지 않는다. 도산9곡에 깃든 가문과 인물과 자연과 시와 철학을 서리서리 읊은 그의 글은 섬세하면서도 호방하고 정보량이 많으면서도 울림이 깊다. 홀로 글 읽고 명상하고 글 쓰는 강호의 학자가 잡것에 휘둘리며 시간을 뺏기는 강단 학자보다 내공이 깊어질 개연성이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홍준이 문화유산답사기를 쓰면서 안동은 워낙 까다로운 동네라 손대기가 겁이 나 3권까지 미뤘다고 고백했듯 여러 문중이 저마다의 자부심을 다락같이 세우고 사는 안동의 속내는 바깥에선 쉬이 알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는 명문가의 종손으로 태어나 자란, 속속들이 안동사람의 입장에서 안동 역사를 뜨겁게 기록했다. 종가의 기능과 불천위(不遷位·학문이 높아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모시는 것이 허락된 신위)의 의미와 선비의 이상과 자연의 조화를 명료하게 짚어낸 그 책의 제목은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이다. 종택을 찾는 이들이 무심코 한두 권씩 사들고 돌아갔다가 정색하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는 독후감을 보내오곤 한다. 여기서 그는 유홍준이 못다 한 종가와 도산과 퇴계와 농암 이야기를 켜켜이 짚어낸다. 그의 글을 슬쩍 맛보자. 1981년 그가 혼인을 앞두고 관례를 치를 때의 얘기다.

    도포를 입고 사랑방으로 나가니 방안에는 20여 명의 단아한 노인들이 둘러앉아 계셨다. 노인들 사이에서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간 뒤, 이윽고 그 가운데 한 분이 일어나서 나에게 갓을 씌워 주고 갓끈을 묶어 주셨다. 그리고 조금 후, 조그만 쪽지를 나에게 보여 주셨다. 거기에는 한 자 두 자가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계도(繼道).’

    그리고 천천히 한 말씀 하셨다.

    “자네 자를 계도라고 지었네. 이을 계, 법도 도. 도를 이으라고. 지금은 사문(斯文)의 도(道)가 쇠퇴하니 자네는 공부도 그러하고 해서 우리들이 그렇게 지었네.”

    노인은 그때 다짐하듯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계도라고….”

    나는 신음하듯 되뇌었다.

    “계도라…?”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길이 있다. 그 길은 누구도 함께할 수 없다. 나 역시 이런 나의 길이 있어 그 길로 왔고 걸어가고 있으며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 …간절히 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런 길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청춘은 다시 오래도록 아프게 흘러갔다. 마흔세 살까지만 살려고 했으나 그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자식이 막았다. 그렇다면 내가 갈 길은? 은둔(隱遁)! 나는 숙고 끝에 은둔을 택했다. 그로부터 은둔의 터를 물색했고, 그 결과 지금의 청량산 자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강변을 산책하고 책이나 읽으며 한세월 살고자 했다. 은둔이 나의 길이었다. 그렇게 귀거래(歸去來)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었다. 터를 발견하고부터 나의 인생이 아름답게 마감될 수 있음을 한눈에 직감했다. 갈망하던 바로 그런 터였다. 그렇게 은둔한 세월이 벌써 10여 년, 빈둥빈둥 지냈다. ‘빈둥빈둥’이 초심과 부합했다. 빈둥거리며 살아가니 새삼스럽게 인생을 관조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글을 쓰는 여유까지 생겼다. 글은 나를 발견하게 했다.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해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산촌의 고요와 적막을 잔잔한 기쁨으로 변모시키는 구실을 했다. 읽는 즐거움보다 쓰는 즐거움이 더욱 컸다…. 나는 보통사람이 일상에서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구도는 글을 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종류의 글도 좋다. 기도만이 돈오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보통사람에게는 글이 더 효과적이다.

    사문은 유가(儒家)를 말함이다. 그가 받은 ‘계도’라는 자(字)는 유가의 도를 이어달라는 주문이었다. 이 무슨 조선시대 같은 주문인가. 그러나 그에게는 그게 조선이 아니라 21세기의 현실이었다. 이왕 현실일 바에는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로 했다. 그는 경북의 불천위 명문가의 30, 40대 젊은 종손들의 모임인 보인회(輔仁會)를 조직한다.

    “변화하는 시대 종손의 역할을 함께 고민하기로 한 거지.”

    종손의 전통적인 사명은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이다. 제사를 지내고 손을 맞는다는 건 가문의 결속과 질서를 유지하는 일이다. 그는 언젠가 “2만이 넘는 영천 이가 농암 후손들 중에 범법자가 하나도 없어”라고 내게 자랑한 적이 있다. 물론 불의에 맞서는 양심범이 아니라 파렴치범을 말하는 것일 게다. 그 이유를 그는 제사의 기능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제사란 겉으로 조상을 공경하는 형식이지만 안으로는 자신을 반성하면서 조상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다짐이거든. 일 년에 몇 차례 혈연이 모두 모여 그런 각성을 한다고 해 봐. 그게 예삿일이 아니거든.”

    그 각성의 중심에 있는 것이 종손이다. 외지인이 안동에 오면 느낀다는 지적 엄숙성, 공동체의 저력, 전통의 향기 같은 것은 큰 기와집에 산다고 해서 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빈둥거림이 초심과 부합한다고 말한다. ‘사문의 도를 잇기’와 ‘빈둥거리기’는 상충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리 멀지 않다는 게 내 관찰이다. 착목하는 곳이 먼 종손들은 천상 유유자적, 빈둥빈둥 살 수밖에 없다. 빈둥거림이란 한가함이다. 그토록 꿈꾸던 ‘귀거래’의 목적이 바로 이 한가함 아닌가. 자연과 합일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선비의 이상이었고 그것 역시 한가함에서 나왔다.

    때때옷을 입은 선비

    퇴계와 농암이 지향하던 귀거래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중종실록에는 농암 이현보가 이렇게 그려진다. ‘현보의 고향생활은 담박했다. 한가할 때 이웃 사람을 방문할 경우 걸어가서 만났고 스스로 농부로 자임했다. 집 앞에 큰 강이 있어 배를 띄울 만했다. 그래서 때로 손님이 오면 더불어 노를 저었다. 두건을 비스듬이 쓰고 소요하는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신선 같다고 했다.’

    농암의 어부가는 시가 아니라 노래다. 하긴 노래 이상의 시가 어디 있으랴. 퇴계가 쓴 어부가의 발문에도 신선이란 말은 빠지지 않고 나온다. ‘우리 농암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분수가로 염퇴했다. 항상 조각배를 타고 물안개 낀 강 위에서 읊조리거나 물새와 고기를 벗하여 망기지락(忘機知樂)했으니. 강호지락(江湖之樂)의 진(眞)을 터득한 것이다. 그 아름다움이 신선과 같았으니 아, 선생은 이미 진락(眞樂)을 얻었도다!’

    농암은 안동부사로 재직할 때 고향 부내 인근의 80 넘은 노인들을 초대해 경로잔치를 벌인다. 화산양로연이라는 이 잔치는 지금 그림으로 생생하게 남아 있는데 농암은 이 자리에서 노인들을 위해 고을 원의 신분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춘다.(화산은 안동의 옛 이름이다) 얼마나 호방했는지 알 만하다.

    “농암선생은 그 경로잔치에 여자와 천민도 초대했다거든. 당시로선 파격적인 일이지. 자제와 비복들을 편애하지도 않았고 혼인도 굳이 법열가문을 따지지 않고 지냈거든.”

    ▼ 자유인이셨군요.

    “다들 중앙관직을 탐내는데 그토록 외직을 고집한 것도 늙으신 부모님을 가까이 모시려던 이유였어. 집이 협소해 부모님을 편히 모시려고 지은 집이 저기 있는 애일당이야. 명절이면 동생들과 색동옷을 입고 애일당에서 부모님께 술잔을 올렸다고 해. 그래서 문화부가 이달의 문화 인물로 농암 할배를 선정할 때 타이틀이 ‘때때옷을 입은 선비’였지. 하하. 애일은 부모님이 살아계신 날을 사랑한다는 의미거든. 효라는 추상을 눈에 확실히 보이는 구상으로 만들어놓은 집이지.”

    농암의 시호는 효절공(孝節公)이다. 왕이 내리는 시호는 한자 몇 글자로 그 인물의 됨됨이를 선명하게 각인해놓는데 시호를 받은 조상이 있다는 것이 한 가문의 최고의 자랑이다. 조선을 통틀어 효절이란 시호를 얻은 이는 농암이 유일하다.

    초겨울엔 그의 선친인 용헌(庸軒) 이용구 선생의 고유제가 있었다. 생전에 선생에게 글을 배웠던 제자들이 모여 뜻을 모아 빗돌을 세우는 의식이었다. 그는 애정이 가득 담긴 용헌선생 약전(略傳)을 써서 모인 사람들에게 배포했다.

    ‘선친의 생애는 졸(卒)하는 그날까지 사문의 진작과 고가의 보수, 교육과 독서와 저술이 일상의 전부였다. 그리하여 경(敬)을 생활철학으로 삼은 곧고 기품 있는 단아한 학자의 빼어난 생애를 보냈다. 선친의 만년은 경북유림은 물론 전국 유림에 정신적 좌장으로 존재했다. 따라서 장례 때 처사(處士)라고 존칭한 유림의 공론은 선친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으며 병상에서 몇 번이고 여한이 없다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한 유학자의 후회 없는 생애를 그대로 나타낸 것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 앞에 이런 글을 바칠 수 있는 아들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상상초월 장수집안

    용헌선생은 묘비명을 자명(自銘)했다. 나도 그날 종손이 이끄는 대로 비석에 쓰인 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명은 ‘이제 거의 허물을 줄일 수 있으니(庶幾寡過·서기과과) 다시 또 무엇을 구하리요(抑又何求·억우하구)’로 끝이 나는 사언절귀였다. 퇴계의 자명 ‘조화타고 돌아가니(乘化歸盡·승화귀진) 무얼 다시 구하랴(復何求兮·부하구혜)’가 겹쳐지는 구절이었다. 그야말로 ‘장엄’했다. 용헌선생은 91세까지 살았다. ‘다 이루었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노라’는 절대만족의 지경이 산허리를 고요히 감돌고 그 앞에 향불을 피우고 도포를 갖춰 입은 제자와 후손들이 멧새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엎드려 자신을 돌아보는 제사였다.

    농암종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장수 집안이다. 농암 이현보가 89세를 살았고 아버지[欽] 98세, 어머니(안동 권씨) 85세, 숙부[鈞] 99세, 조부[孝孫] 84세, 조모(청주 양씨) 77세, 증조부[坡] 76세, 고조부[軒] 84세이며, 외조부[權謙] 93세, 외숙부 두 분[權受益, 權受福]이 93세, 73세, 외사촌[權矩]이 85세였다. 동생들[賢佑, 賢俊]이 91세, 86세이며, 아들 문량 84세, 희량 65세, 중량 79세, 계량 83세, 윤량 74세, 숙량 74세이고, 조카인 충량과 수량이 각각 71세, 89세다. 1500년대 일반인의 평균연령이 40세쯤에 머물 때 이 가문만은 평균연령 80세를 가볍게 넘어섰다. 그것도 7대 200여 년에 걸쳐서 예외 없이.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 DNA 때문일까요, 생활습관 때문일까요.

    “마음가짐이 더 클 걸?”

    욕심 부리지 않는 마음, 반상의 분별을 지우는 마음, 배 위에 앉아 노래 부르는 마음, 동네 어른들을 모아 경로잔치 하는 마음, 환갑을 넘겼어도 부모 앞에서 색동옷 입고 춤추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심신의 건강을 얻었다는 말일 게다. 이 집 사랑채엔 선조대왕이 직접 써서 내린 ‘적선(積善)’이란 글귀가 붙어 있다.

    “적선을 하자면 할 수 없이 마음을 텅 비워야 해. 욕심으로 꽉 찬 마음에는 선을 쌓을 자리가 없거든!”

    걷고 책 읽고 낮잠!

    “선비의 마음으로 자연과 벗하니 행복이 끝없네”

    선조 임금이 하사한 ‘적선’이라는 현판 글씨가 이집 사랑채에 걸려 있다.

    요즘 종손은 자주 “즐거움이 끝이 없네. 끝이 없어”하고 중얼거린다. ‘밤 고요하고 물결 차가우니 고기 물리지 않아/ 부질없이 온 배 가득 달빛만 싣고 오네/ 닻 디여라 닻 디여라 자그만 다북쑥에 배매여 두자꾸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노래하던 농암처럼! 낙사무궁(樂事無窮)을 읊던 퇴계처럼!

    ▼ 도대체 뭐가 그렇게 즐거워요?

    “아침 일찍 내외가 같이 막대기 하나 들고 산에 오르는 것도 즐겁고 강물을 내려다보는 것도 즐겁고 잡초를 뜯는 것도 즐겁고 샘물을 마시는 것도 즐겁고 새소리를 듣는 것도 즐겁지.”

    양동마을 회재 이언적의 후손인 종부는 언제나 눈웃음을 가득 담고 그의 곁에 서 있다. “이원정씨, 내한테 시집 한번 잘 왔지? 날마다 이밥에 고기 먹고?”

    청량산에서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종택 마당에 가득 차고 벽력암 앞으로 느리게 백로가 날아간다. 그가 쓴 신귀거래사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이제 아무 고민 없이 이 아름답고 순결한 땅-가송 올미재-의 자연 속을 약삭빠른 도회인의 입장에서 찾아와 터 밭을 가꾸고 옛 책을 뒤적이며 조심스럽게 안기고자 한다. 봄이 오면 산야의 꽃을 찾아가고, 여름이면 꾼들 속에 끼어 강변을 거니는 ‘가어옹(假漁翁)’도 되어볼 것이며, 가을이면 이웃 농부들처럼 추수도 해볼 참이다. 그리고 때로, 벗이 찾아오면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고인들의 풍류도 흉내내어 볼 것이다. 그런 세월 속에서 저 고요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의 굽이-‘낭만(浪漫)’-을 배우면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는 종가 문화의 본질이 훌륭한 인물을 기리고 그 인물을 본받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한 적이 있다. 결국 그의 소망은 ‘농암처럼 살기’였고 ‘선친처럼 살기’였다는 고백이다. 효(孝)란 효(效·본받다)다. 가장 큰 효는 자식이 부모님을 닮으려는 노력이다. 물론 더 나아간 효는 ‘천지’라는 부모를 닮아 천인합일하는 것이겠지만!

    “농암종가는 과연 효절공의 집이네요.”

    함께 백로의 날갯짓을 바라보던 종부가 눈을 찡긋하더니 내게 중요한 정보를 준다.

    “이 사람은 나이 들수록 하루하루 생활이 아버님하고 판박이에요.”

    “선비의 마음으로 자연과 벗하니 행복이 끝없네”
    金瑞鈴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대구 중앙중 국어교사, 매일경제신문·샘이 깊은 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저서 : ‘여자전’ ‘김서령의 家’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등


    ▼ 뭐가요? 독서와 저술?

    “집 근처를 한바퀴 빙 둘러보고 누워서 책 읽다가 짧고 달게 낮잠 한숨 자는 것까지!”

    듣고 보니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게 없는 일상이다. 그도 선조들처럼 장수할 게 틀림없다. 그리고 장담컨대 나중 스스로 쓰는 묘비명에 “이제 더 이상 무엇을 구하랴”라고 쓰게 될 게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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